몇 해 전, 고시원 침대에서 굶어 죽은 채 발견된 청년에 대한 뉴스가 전국적으로 보도됐다. 마침 뉴스를 보고 있던 한 신부는 청년들이 따뜻한 밥 한 끼는 먹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2017년 12월, 사제복 위에 앞치마를 두른 신부는 김치찌개를 단일 메뉴로 식당을 열었다.
가톨릭 신부가 식당을 개업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 소식은 미국 LA의 한인교회 목회자에까지 전해졌다. 평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1)’는 말씀을 목회 철학으로 삼아온 목회자는 망설임 없이 한국으로 건너와 ‘2호점’을 열었다. ‘가성비 甲’ 3천원 김치찌개로 청년들을 위한 식당을 운영하는 이문수 신부, 최운형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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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밥 한끼 외에도 오늘날 청년들에게 필요한 사역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는 이문수 신부.ⓒ데일리굿뉴스 |
김치찌개 3천원에 공깃밥 무한리필, 취업 등 청년들 고민 상담도‘김치찌개 3천원. 밥과 샐러드는 무제한입니다.’
밥을 먹기도 전에 벌써 배가 부른 듯한 문구다. 요즘 식당 메뉴를 보면 6~7천원짜리가 태반인데, 이곳에서는 같은 금액으로 2인분을 먹을 수 있는 셈이다. ‘내가 살게’라는 말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나온다.
지난 2017년 겨울, 서울 성북구 정릉시장에 문을 연 ‘청년밥상 문간’은 천주교 글라렛선교수도회 이문수 신부가 운영하는 밥집이다.
칼칼한 빨간 국물에 아낌없이 썰어넣은 김치, 큼지막한 두부에 돼지고기까지 들어있는 김치찌개가 메인 메뉴. 지난 월요일부터는 야채비빔밥과 청국장도 새롭게 메뉴에 추가됐다. 가격은 변함없이 3천원이다.
“사실 먹을 게 없어서 굶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에요. 천 원이라도 있으면 편의점 가서 삼각김밥이나 빵, 컵라면을 사먹을 수 있죠. 그런데 그건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에요. 대충 때우는 거죠. 그마저도 굶는 청년들이 많더라고요.”
처음에는 밥을 무료로 제공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청년이라면 무료급식소에 올까?’ 한 두 번은 오겠지만 계속 오기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청년들도 오히려 얼마간 돈을 내고 먹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며 조언을 곁들었다. 그렇게 이문수 신부는 3천원에 김치찌개와 무한리필 밥을 제공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어느덧 점심시간 무렵이 되자 식당 자리가 꽉 찼다. 대부분 청년들이었지만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문수 신부는 하루 손님이 평균 90명인데 절반은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절반은 일반인들이 온다고 귀띔했다.
이 신부가 직접 김치찌개를 끓이는 건 아니다. 요리는 전문 주방장에게 맡겼다. 이문수 신부는 서빙을 도우면서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다. 개중에는 그가 가톨릭 신부라는 사실을 알고 상담을 청하는 사람들도 꽤 자주 있다. 'N포 세대' 청년들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취업 고민 등을 이 신부에게 털어놓곤 한다.
이문수 신부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청년들 중에도 사실은 형편이 어려운 경우가 많더라”며 “자신의 가난한 상황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사실 막막하다. 이렇게 싸고 푸짐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곳곳에 많이 생기면 청년들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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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자 손님들로 식당이 가득 찼다. '청년밥집 문간'은 어느새 마을 주민들의 단골식당으로 자리잡았다.ⓒ데일리굿뉴스 |
목사님이 직접 끓인 김치찌개…"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 마세요"그 바람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이문수 신부가 청년밥상 문간을 연 지 4개월 만에 한 목회자가 찾아왔다.
미국 LA한인타운의 세계선교교회에서 시무하던 최운형 목사는 지난해 3월 우연히 청년밥상 문간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게 됐다. 평소 목회 철학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1)’였던 최 목사는 가난한 청년들을 위한 밥상 사역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중형교회에서 안정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던 최 목사가 느닷없이 한국에 가서 식당을 개업하겠고 선언하자, 아내와 두 딸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만류했다. 하지만 최 목사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는 한달음에 한국으로 건너가 정릉시장의 이문수 신부를 찾아갔다.
“쉽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어려운 결정도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당장 생계가 걱정되긴 했지만, 항상 강대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했던 것이 결심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이 됐죠.”
그 때부터 몇 달간 최 목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목회 정리와 식당 개업 준비에 분주히 움직였다. 마침내 지난해 10월 연신내역 인근에 두 번째 청년밥상 문간이 문을 열었다.
이곳에선 전직 주방장 출신의 도움을 받아 최운형 목사가 직접 김치찌개를 끓여내고 있다. 초반에는 맛이 없어서 손님들이 안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지금은 제법 맛이 난다고. 17년 전 한국에서 목회를 했던 나성영락교회 교인들이 소식을 듣고 봉사자로 일손을 보태주고 있어 더없이 든든하다고 최 목사는 말했다.
그의 목표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식당 운영을 잘 해서 좋은 밥집이 되는 것, 그래서 청년들과 혼자 사는 분들을 오랫동안 돕는 것이 목표다.
밥상은 사실 배를 채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차려준 밥상에는 사랑과 돌봄이 가득 담겨있고, 맛있는 밥을 함께 먹으면서 사람들 사이엔 정이 쌓인다. 그런 밥상이 바쁘고 각박한 현실 속에서 점차 홀대를 받고 있다. 싸고 푸짐한 밥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하고 따뜻해지는 신부님표, 목사님표 ‘3천원 김치찌개’를 응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최 목사는 주일 아침마다 동네교회로 출석하고 있다. 부목사, 담임목사로 10년 넘게 강대상에서 설교를 전하다가 이제는 평신도로 예배를 드리니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설 터였다. 하지만 최운형 목사는 “강대상이 아닌 현장에서 사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하고 좋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교회 수도, 교인들도 줄어드는데 목회자 수는 계속 증가하는 한국교회 현실을 우려하기도 했다. 최 목사는 “담임목회자 정년이 70세로 보장돼 있는 상황에서 신학생들과 젊은 목회자들은 정말 힘이 들 것”이라며 “담임목사는 일찍 은퇴해 파트타임으로 도움을 주는 등 젊은 목회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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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밥상 문간 앞에는 따뜻한 사랑에 감사를 표하는 청년들이 붙인 포스트잇이 수십 장 붙어있었다.ⓒ데일리굿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