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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媒體 로 보는 韓國人
국어국문학과
030940 최선빈
서론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직접 보고 체험하듯이 사회전반에 걸쳐서 어느 한 분야의 예외도 없이 다양한 대중매체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과연 대중매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 순간을 하루를 기준으로 하여 재어 본다면 어느 정도가 될까 생각해 보니 잠자는 순간을 빼고는 거의 없다고 말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는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대중매체와 공유하는 생활을 선호하는 것이 현대인들인 것 같다. 이렇게 밥을 먹듯 아니 어쩌면 밥 먹는 시간까지도 아껴가며 접속하고 있는 대중매체들, 쉽게 말해서 TV, 신문, 잡지, 인터넷, 도서 등 심지어는 만화책까지도 이제는 어엿한 대중매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데 과연 대중매체를 창조하고 누리며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이 이런 것들의 내용과 수준에 대하여 얼마나 신중히 고려하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쯤 돌아보는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대중매체가 보여주고 있는 우리 한국인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눈만 뜨면 대하는 대중매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짚어보고 단순한 수용자의 입장이 아닌 쌍방향 communication의 주체로서 볼 때, 이렇게나마 작은 부분에 걸쳐서라도 대중의 한 구성원인 사람으로서 사회의 심각해져만 가는 상황들을 하나하나 재고해보고 타당성 있는 비판을 펼칠 수 있다면 우리사회의 대중매체의 수준도 한 단계 높아지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면서 이 논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그러면 대중매체에서 보여 지는 한국인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Materialism. 물질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물질에 지배받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을 가리켜 물질주의(materialism)라고 하는데, 대중매체에서 보여 지는 한국인은 바로 이러한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물질주의가 발전하면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가 되고, 돈을 섬기는 배금주의까지 형성된다.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눌 때 가장 흔한 주제는 돈 벌고 돈 쓰는 일 등 돈에 관한 것이고,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이제는 그의 인격이나 성품에 근거하지 않고, 그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의 수준이나 그가 벌어들이는 돈의 정도에 근거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인간가치는 물질가치로, 인격가치는 상품가치로 대체되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한다. 도덕도 윤리도 신앙도 다 버리고 남을 속이고 강제로 빼앗는 것이 한국인이라고. 기업은 불량품을 속여서 팔고, 오폐수를 무단 방류하며, 사기꾼은 중국에까지 원정 가 가난한 중국동포를 울린다. 물질만능주의에서 유래한 요령주의와 편법주의는 오늘날 더욱 거대화, 조직화, 지능화되었고,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당당하게 행사되고 있다. 물질이 지배하는 풍토는 또한 생명경시 풍조를 만들어내어 남의 생명까지도 물질 획득의 수단이 된다면 마음대로 해쳐도 괜찮은 것으로 발전했고, 물질만능주의는 사치와 낭비풍조와 향락주의마저 조장했다. 즉, 물질에 예속된 현대인들은 정신이 퇴조하고 성격이 급해지면서 물질을 힘 들이지 않고 한꺼번에 벌 수 있는 한탕주의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는데, 주식이나 복권, 경마 등이 이를 더욱 부추겼다. 직장인들의 ‘한탕주의’가 위험수위에 달해 회사 공금을 빼돌리거나, 고객 돈에 손을 대는 은행원도 나타나고 있으며, 최근의 한탕주의는 IMF 사태 이후 평생직장 개념이 바뀐데 따른 불안감과 벤처기업 열풍 등 가치체계의 급격한 변동에 따른 것이어서 심각성이 크다.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사치와 명품. 과도하게 옷·장신구·자동차·거처 따위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호사스럽게 소비하는 경향은 일부 부유층이 불경기에도 백화점에서 값비싼 명품과 수백만원짜리 양주를 구입해 위화감을 조성하고, 서민층을 허탈하게 한다는 뉴스보도는 만무하다. 그리고 루이비통, 구찌, 프라다, 페라가모, 에트로, 샤넬, 티파니, 아르마니, 버버리, 샤넬, 폴로, Ralph Lauren, 키플링, 닥터마틴.. 등은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명품 브랜드의 네임이다. 수입 의류, 신발, 바지, 액세서리, 가방, 벨트, 선글라스 등 취급하는 종류도 다양하며 최근에는 아동복에도 명품이 나오고, 프랑스 직수입의 향수, 화장품, 미용비누, 아로마 목욕용품까지 명품이 취급되고 있다. 이는 TV 드라마나 광고, 여성잡지 등이 명품신드롬을 조장하며, 연예인들은 값비싼 명품을 치장하고 출연함으로써 간접광고를 하는데, 서민층은 이를 보고 상대적 박탈을 느끼게 된다. 가짜 명품도 활개를 쳐 백화점에서 500원짜리 중국제 선글라스를 명품이라며 비싸게 팔기도 하였고, 주택가 등에서 가짜 명품을 몰래 파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美人天下. 한국인은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바로 ‘얼짱’과 ‘몸짱’이란 광풍을 일으킨 유행어도 그것이다. 실제로 얼짱신드롬을 만든 것은 네티즌이 아니라, 대중매체와 기성세대들이다. 대중매체와 기성세대는 이 신드롬을 통해 새로운 외모지상주의를 강화하고, 성을 상품화하고, 말초적인 관심사를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상업적 이익을 부풀리고 있다. 청소년이자 네티즌들이 자생적으로 얼짱문화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신드롬으로 확산시킨 일등공신이 대중매체임을 부정할 순 없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여가시간에 신문, TV, 라디오 등 여러 가지 대중매체를 통해 정보를 접한다. 또 기업의 광고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광고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장면들로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시켜 외모가 출중하고 인기가 많은 연예인들을 출현시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중매체 상업적 방송에 의해 모방심리가 작용하여 성형수술 과소비 등 여러 가지 사회의 폐해가 나타난다. 이렇듯 대중매체가 나은 부작용인 외모지상주의. 특히 TV 속에선 여성의 외모를 강조하고, 배우는 물론이고 아나운서 까지도 외모를 강조한다. 그리고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모두 하나같이 예쁘며, 못생긴 여자들은 학대를 받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이 같은 성향은 성인에게도 외모지상주의의 인식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특히나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아주 나쁜 현상을 초래할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나 영화 속에 미모의 여주인공이 남자아이한텐 미래의 여성관이 될 수 있고, 여자한텐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면 못생긴 여성은 남자들에겐 무시의 대상이 되고 여자한텐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개인의 외모에 굉장히 집착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도 있다는 얘기이다. 즉, 단순히 외모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드라마나 영화는 그저 아름다우면 돈 많고 재벌과 결혼하다는 생각을 대중들의 머리에 심어줌으로써 신데렐라식 사고방식을 가지게 만든 것이다.
또한 한국인은 忿怒症候群族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중매체는 ‘홧병’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한국인을 분노증후군으로 설명하며, 이는 분노의 억제로 인해 발생한다고 하며 한국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는 특히 우리나라 주부들에게서 많이 나타나지만 요즈음에는 계속되는 경제 불황까지 몰아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홧병을 앓는 이들이 많다고 보도하고 있다. 가정보다는 직장에 더 충실하기를 강요당하는 가장들, 가부장적 분위기에 짓눌려 사는 주부들,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수험생 등 우리나라에서는 홧병의 사례가 흔하게 발견된다. 이처럼 홧병이 흔하게 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감정표현을 억제당하다보니 그 불만이 한(恨)으로 쌓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민족은 예부터 외세의 침입을 수없이 받아와 외부의 압력은 본능적으로 차단하고 내부적으로 결속하는데 치중해 왔다. 내부결속은 지역과 가정 같은 소규모 집단 안에서 나름대로의 서열을 세우는 결과를 낳았다. 서열이 생기면 '우두머리'를 빼고는 누구도 스트레스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더욱이 그 서열에서 밀려나기라도 하면 더 가혹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홧병이 유달리 한국 여성에게 많은 것도 언제나 남편의 그늘에 묻혀야 했던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 보고 있다. 화가 날 경우 보통 '화가 치민다' 고 표현한다. 마치 뚜껑을 덮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고 끓일 때 압력이 팽창하다 물이 넘치는 것처럼 화도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이 감정을 표현하는 문화인데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 `감정의 절제'를 높이 사는 `억압문화'이다 보니 홧병이 생긴다는 것이 대중매체가 그리는 한국인인 것이다.
2002월드컵에서 그 성향을 여실히 발휘한 한국인의 냄비근성. 냄비근성이란 한마디로 쉽게 흥분해서 달궈졌다가 쉽게 식는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한 가지 사건이 터지면 그거 하나로 금방 흥분을 해버리지만 그 흥분은 금방 끝나버린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 그 사건들 중 우리나라사람들에게 분노를 주는 것도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노하고 다 같은 한식구인 것처럼 슬퍼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아 그땐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시간간격이 짧으며 또 그 폭이 크다. 빠르게 확 올라갔다 빠르게 확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냄비근성 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미군탱크 압사로 인한 초불시위나 월드컵 축구 후 프로 축구 관전의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언젠가 타임지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을 '빨리 끓어올라서 넘칠 듯하다가, 어느새 식어버리는 냄비와 같다고 비유했었다. 앞서 말했듯이 크게 다뤄지던 이슈도 어느 새면. '아 그런 것도 있었지'가 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의 대중매체 스스로 평하기도 하지만 세계에서도 그런 식의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이는 냄비근성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는 빨리빨리족. 대중매체에서 보면 우리나라 사람만큼 '빨리빨리'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민족도 없는 것 같다. "너 빨리 가서 담배 한 갑 빨리 사가지고 빨리 와라.", "기사 양반, 빨리 좀 갑시다.", "아주머니 자장면 하나 빨리 주시오." 말끝마다 '빨리빨리'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해외에 나가서도 '빨리빨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 한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면세점의 웬만한 점원들은 '빨리빨리'라는 말을 알아들음은 물론, 한국인을 보면 '빨리빨리'라는 농담을 건네는 정도라고 한다.
대중매체는 우리가 이같이 성질이 급한 민족이라 표현하고 있다. 에스컬레이터의 올라가는 속도를 참지 못해 그 위에서 다시 걷는가 하면, 화장실 입구에서부터 지퍼를 내리면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지퍼를 올린다. 엘리베이터의 단추 중에 door close(닫힘)가 제일 많이 닳아 있지 않은가. 서양에서는 얼굴 모양이 같은 동양인들 중에서 걸음이 빠르면 한국인이라고 할 정도이다. 식사 또한 빨리 먹어야 하기 때문에 비빔밥처럼 주부식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을 즐기고, 국물 따로 밥 따로 보다는 밥과 국이 함께 들어 있는 설렁탕 곰탕 추어탕 같은 탕 종류의 음식을 즐기는 민족이 바로 한국인인 것이다.
결론
지금 우리사회의 대다수들은 정보의 홍수에 빠져있다. 이 홍수의 원점에는 대중매체가 존재한다. 대중매체는 우리에게 시각과 청각을 통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최단 시간 내에 최대량의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로서 모든 계층과 남녀노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점으로 인해 지금의 대중매체는 대중들의 사고와 생활 방식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한국인의 성향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먼저 우리는 현 시대의 문화 현상을 공시적으로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각자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그것은 창조적인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한국인은 항상 이렇다 하는 편협된 가치관을 벗어나서, 새롭고도 바람직한 한국인의 전형의 위상을 대중매체를 통해 다시 한 번 확고히 다져야 한다. 오늘날 척박한 한국 대중문화의 토양을 가꾸는 일은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한 반성과 인간과 문화에 대한 기본자세부터 바로잡는 일이 되어야 한다. 문화정책의 의미는 대중의 삶 자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지 문화산업을 키우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산업의 육성은 단지 대중의 문화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며 과정일 뿐 궁극적인 목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대중문화 정책을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