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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지중해와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들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다양한 물품들이 이동하는 해로들이 발전해 있었다. 밀로스(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밀로의 비너스'가 발견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섬의 흑요석(obsidian)이 이런 사실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섬에서 산출되는 흑요석은 1만 5,000년 전부터 광범위한 지역으로 유통되었다. 이 돌로 아주 날카로운 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지역에서 이 재료를 원했다. 워낙 광범위한 지역으로 수출되어 "중동의 농경 마을 중 흑요석이 없는 곳은 없다"고 할 정도다(Renfrew). 이 사례는 문명 성립 이전 시대에도 지중해의 해상 소통이 매우 발전해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로 들어가면서 밀로스 네트워크는 쇠퇴햇다. 무기와 의례용 도구의 원재료가 청동으로 바뀌면서 흑요석 수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우불라피아, 78). 그 대신 지중해 지역 내에 다른 연결 네트워크들이 크게 발전했고, 외부 지역으로도 멀리 확장되어 발트해에서 홍해까지,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포괄했다. (Antonaccio, 217-218) 예컨대 목재, 상아, 금속, 동식물 등이 유럽대륙 북부 지역과 아프리카에서 들어왔다. 이처럼 초기 지중해 문명은 내부와 외부의 네트워크들이 교류하며 성장해갔다.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일찍 꽃핀 문명권은 이집트다. 이집트는 통상 자기 내부에 집중한 내향적 문명권인 듯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외부 세계와 소통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생각할 때 사막 이미지만 떠올리면 안 된다. 모래보다는 오히려 물이 이집트 문명을 잘 설명하는 요소다. 강과 바다를 통한 수송이 이 문명권의 생존에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나일강을 이용한 교역이 활발했을뿐 아니라 역사 초기부터 지중해 각 지역과 해상 교역을 수행하여, 기원전 3000년대부터는 비블로스(Byblos)를 비롯한 레반트(Levant, 원래 '해가 뜨는' 동쪽 지방을 의미하는 말로 지중해 동부 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앞 장에서 이야기한 대로 홍해를 통해 푼트 지방과 교역을 했다.
헤로도토스가 이야기하듯 고대 이집트 왕국은 '나일강의 선물'이다. 나일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여 실어오는 토사로 인해 풍요로운 농업 생산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 강을 통한 수송으로 이집트 지역 전체가 연결되었다. 예컨대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수천 톤의 돌을 운반하려면 나일강을 통한 운송이 필수 불가결했다. 육로 건설은 로마 시대에 가서야 활서오하되므로 이집트를 통합시킨 주요 동맥은 다름 아닌 나일강이었다. 이때 남쪽 상류에서 북쪽 하류 방향으로 물길을 따라가는 운송은 당연히 수월하지만, 반대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노 젓기만으로는 힘에 부친다. 다행히 지중해에서 남쪽 방향으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돛을 이용해 상류 쪽으로 올라갈 수 있다. 기원전 3500년 도자기에 돛이 그려진 사례가 있으니, 적어도 이 시기이ㅔ는 돛이 사용되었던 게 분명하다(Gardiner, 38). 이집트어에서 '돛을 사용하다'는 곧 '강을 거슬러 남쪽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돛의 사용은 이집트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노를 이용해 북쪽으로 내려가고 돛을 이용해 남쪽으로 올라가는 게 가능하니,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 간 연결이 원활해져서 왕국 통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Paine, L., 40-41).
이집트 문명 초기에는 파피루스로 가벼운 배를 만들었다. 앞서 페르시아만의 사례를 보았지만, 갈대 종류로 배를 만드는 것은 세계 각지의 초기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배는 구조적으로 약하다. 물을 먹으면 점차 갈라지고 모양이 무너져서 1년 정도면 수명이 다한다. 갈대 배 다음으로는 목재 배가 발전했다. 고대 이집트 선박의 대표 유물인 쿠푸(Khufu)의 선박은 실물로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선이다. 1954년 봄, 기자(Giza) 지역에서 연구를 수행하던 고고학자 카말 엘말라크(Kamal elMallakh)가 이 배를 발견했다. 그는 4왕조 2대 파라오인 쿠푸의 피라미드 하단부를 조사하고 있었다. 피라미드 남쪽의 경계석 벽에 테스트용 구멍을 뚫고 그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캄캄한 아래쪽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눈을 감자 돌연 구멍을 통해 냄새가 올라왔다. 그때까지 밀폐되어 있던 피라미드 내부 공간이 처음 외부로 뚫린 순간, 수천년 갇혀 있던 향냄새가 바깥으로 퍼져 나온 것이다. 당시의 감흥을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고양이처럼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향냄새, 신성하고도 신성한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시간의 냄새, 수 세기의 냄새, 역사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 아래 배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Jenkins, 12-17). 발견 당시 4,500년 된 쿠푸의 선박은 1,224점의 나무 조각들로 분해되어 있었다. 이후 30년에 걸친 노력 끝에 44미터 길이의 배를 복원했다. 이 유물은 현재 기자 지역에 위치한 태양의 배 박물관(Giza Solar Boat Museum)에 보존되어 있다.
이 배는 실제 항행에 쓰였을까?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이 배가 파라오가 부활하면 태양신 라(Ra)와 함께 타고 하늘을 건너는 의미의 장례용 선박으로서 상징적인 물품에 불과하며, 따라서 실제 항해와는 무관하다고 보고 있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파라오는 태양신의 배에 올라타면 되므로 개념상 사후에 자기 배가 필요 없으며, 따라서 발견된 유물은 국왕의 시신을 싣고 이동할 때 실제로 사용한 선박이라고 보고 있다. 어떤 주장이 맞는지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어느 경우든 이 귀중한 유물이 그 당시의 선박이ㅔ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안고 있는 큰 문제는 목재 부족이다. 쿠푸 선박을 구성하는 목재의 95퍼센트가 수입산 레바논삼나무(Cedrus libani)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레바논삼나무는 고대사에서 줄곧 핵심 자원이었다. 이집트 내에서 자라는 나무 중 그나마 단단한 재질을 가진 것은 무화과나무와 아카시아밖에 없었다. 무화과나무의 키는 10-12미터, 아카시아 나무는 6미터에 불과하고 그나마 곧게 자라지 않으며, 여기이ㅔ서 얻은 목재는 단단하지만 쉽게 부러진다. 이런 목재로 배를 건조하려면 작은 판재들을 장부이음(mortise and tenon)이나 열장이음(devetail) 방식으로 솜씨 좋게 접합시켜야 한다(Gardiner, 40). 이렇게 만든 평저선으로 피라미드, 사원, 탑, 석비 등의 제작에 필요한 석재를 운반했는데, 채석장에서부터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아 있는 그림 자료를 보면 길이 30미터, 무기ㅔ 330톤에 달하는 오벨리스크를 운반하기 위해 84x28미터 정도 크기의 배를 사용한 것 같다. 참고로, 19세기에 프랑스 정부가 이집트 정부로부터 기증받은 오벨리스크 2개 중 하나를 운반해와서 현재 파리 중심부의 콩코르드 광장을 장식하고 잇다. 당시 이 작업이 너무 힘에 겨워 나머지 한 개의 수송은 아예 포기했다. 이를 보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토록 엄청나게 큰 돌들을 운반한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석재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긴히 필요한 곡물, 가축 등을 운송하는 데에도 나일강은 핵심적인 운송로였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탄생과 성장은 기본적으로 나일강의 이용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흔히 이집트 문명 전체가 내부를 향하고 있고 자기충족적이며 변화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히브리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 문명은 오늘날까지도 핵심 내용이 전해오고 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잇다. 이와 갈리 오시리스나 아누비스(Anubis) 같은 이집트 신들은 그저 먼 과거의 존재에 불과하다. 독일의 이집트 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은 고대 이집트는 역사의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 중심 텍스트를 완벽한 정전(canon)으로 만든 다음 한 치의 변화도 허용하지 않는 '차가운 사회'라고 해석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 문명을 두고 변화 없는 문명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존속한 전 기간 동안 전적으로 문을 닫아걸고 변화를 거부한 것은 분명 아니다. 고대 이집트는 안정적인 시대였지, 변화없는 시대는 아니었다. 흔히 이야기하듯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세 번의 왕조(고왕조, 중왕조, 신왕조) 시기와 두 번의 중간기를 거치는 동안 큰 격변을 경험했고, 주변 지역들과 교류, 교역, 갈등을 겪으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집트는 내부적으로 나일강 운송에만 그친 게 아니라 일찍부터 해상으로 팽창해나갔다. 이집트인들에게 바다는 외래 문화 요소들을 필터링하여 흡수하고 외부의 침략을 막거나 반대로 그들의 힘을 바깥으로 펼치는 공간이었다. 육로뿐 아니라 해로를 통해 이집트는 동부 지중해 지역, 그리스 지역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교류하며 위대한 문명을 꽃피웠다(Sauvage 151-164; Singer 166-169).
이집트인들은 동부 지중해 해안을 정기적으로 항해한 첫 번째 민족이다. 이집트에서 시리아-팔레스타인,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육로가 있지만, 이를 통해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하루에 고작 30킬로미터 정도이다. 당나귀와 노새를 이용한 수송은 중량과 부피가 큰 상품을 들여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웃 도시국가 간에 복잡한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목재나 곡물 등 핵심 물자의 운송은 거의 전부 해로를 이용했다(Singer, 166-167). 해로는 위험 요소들이 있긴 하지만 대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서 하루에 200킬로미터까지 항해가 가능했다. 다만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해상 여건이 좋을 때에만 운항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었다.
나일 델타 지역과 시리아 북부를 연결하는 '지중해 해로'(Via Mediterranea)는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제18왕조(기원전 1570-기원전 1293)에 정기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거래 항구로는 가자(Gaza), 자파, 티레(Tyre,티루스), 시돈, 비블로스, 미네트엘베이다 등이 있지만, 시리아의 우가리트(Ugarit)가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곳은 통제하면 사치품, 금속, 목재 등 귀중한 물품을 확보할 수 있다. 삼림 자원이 태부족인 이집트로서는 가장 중요한 교역 물품 중 하나가 배, 쟁기, 도구들을 만들 수 있는 레바논삼나무다. 키 40미터, 줄기 두께는 2.5미터까지 커지는 레바논삼나무는 이 지역의 상징이기 때문에 현재 레바논의 국기와 국장에도 그려져 있다. 피라미드 벽의 그림들을 보면, 이전 시대인 기원전 2450년경부터 이미 목재를 구하기 위해 선박을 이용해서 레반트 지역 항구들로부터 군사들을 실어보낸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대 이집트는 레반트에서 목재를 구해 선박을 짓고, 다시 이 선박을 이용해서 레반트 교역을 했던 것이다.
이집트가 해상 '지배'를 한 건 아니다. 비교적 작은 이집트 선박들은 안전한 해안 노선을 넘어서는 원양항해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대형 화물 운송은 아마도 항해 능력이 출중한 크레타의 선박과 선원에 의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집트가 강력한 해상 팽창을 시도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아불라피아, 83-89). 중왕조 이후 힉소스의 지배를 받다가 이들을 축출하며 새로 신왕조를 열었던 때였다. 이때는 미탄니왕국의 침략이 더해져 레반트 지역의 정세가 혼돈에 빠졌던 시기다. 신왕조는 외부 세력을 축출하고 더 나아가 레반트 지역으로 팽창해서 전투를 벌였다. 투트모스 3세 시대가 이집트 해외 팽창의 정점이었다. 이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어 강력한 힘을 행사했고, 광범위한 지역과 교역을 했다. 이때 크레타 사람들('바다 한가운데 섬의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의 모습이 처음 그림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시기 직후 육상과 해상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를 뒤흔든 대격변이 벌어져서 이 지역의 역사 흐름이 크게 뒤바뀐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설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