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벌였고
그곳의 물자를 신라로 실어 왔다.
이런 무역활동은 우리나라 지리상의 이점을 활용한 것이었고
국가의 지원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매물사(買物使),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를 정기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것은 사무역에 속했지만
나라에서는 이들과 함께 교관선(交關船)을 딸려 보냈다.
이처럼 큰 무역활동을 벌인 탓에
당나라에는 신라방 외에 전용숙소인 신라관이 있었고,
신라 사람들이 전용하는 사찰과 장원(莊園) 등이 있기도 했다.
장보고는 18년 동안이나 이 일을 벌였다.
그의 세력은 나날이 커져 갔지만
그에 대한 모략과 시기도 덩달아 커졌다.
당시 신라 왕실은 말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왕위계승권을 놓고 왕족들은 싸움을 벌였고,
귀족들은 사치와 안일로 심각한 타락상을 보였다.
837년(희강왕 2),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金祐徵)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청해진으로 장보고를 찾아왔다.
장보고는 별생각 없이 그를 받아들였지만
뒤에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그가 해상활동을 중지하고
정치권력에 휘말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장보고는 김우징의 꼬드김에 넘어갔고,
김우징은 장보고의 군사와 그의 인기를 업고 반란을 꾀했다.
839년(민애왕 2)에
장보고의 지시를 받고 출동한 군사가 조정을 덮쳤다.
정년이 일선 행동대장으로 경주에 쳐들어간 것이다.
힘이 없는 조정은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장보고는 김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김우징이 바로 신무왕(神武王)이다.
장보고는
신무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어
해상권과 함께 군사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청해진의 실무는
정년이 대신 맡았고,
이때부터 장보고는 정치권력에 깊이 빨려들어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하지만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었고,
결국 장보고는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산둥성 스다오진(石島鎭)의 츠산(赤山) 법화원(法華院)에 가면
장보고(張保皐, 785~846)를 만날 수 있다.
복원해 놓은 절에는
장보고기념관을 세워
장보고 초상화를 두었고,
입구에는 장보고를 기리는 돌비와 옆 언덕에는
장보고의 사적을 적은 거대한 석탑과 동상을 세웠다.
귀족에 꺾인 평민의 상징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文聖王)이 왕위에 오르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임명해서
해군력을 더욱 키우게 했다.
이에 힘입어 문성왕은
당나라와 일본에 정식 무역사절단을 보내 교역의 길을 넓혔다.
그러는 사이 장보고는
중앙귀족을 정치권력에서 밀어냈다.
중앙정부는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소란스러웠고
반역 사건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845년에
장보고는 딸을 왕의 둘째 왕비로 삼으려는 공작을 벌였다.
원래 김우징은 거사가 성공하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지만,
장보고를 미워하던 중앙의 귀족들이 한사코 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부의 길은 사람의 큰 윤리입니다. 예전 나쁜 왕비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경우가 허다했으니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사람입니다.
그의 딸이 어찌 왕의 배필이 될 수 있겠습니까?
- 김부식 《삼국사기》 문성왕조
곧 귀족의 혈통이 아니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장보고는 중앙귀족들에게 큰 불만을 느끼고,
불온한 말과 행동을 일삼다가 끝내 반역을 꾀했다.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큰 세력을 보고 칠 수도 없고 방치할 수도 없는
궁지에 빠졌다.
그렇다고 수수방관할 수도 없었다.
이때 염장(閻長)이라는 사람이
꾀를 써서 장보고의 머리를 바치겠다고 나섰다.
염장은 청해진으로 달려가서
장보고에게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왔다면서
거짓으로 투항했다.
평소에 장사를 아끼던 장보고는
의심 없이 그를 받아들여 지위 높은 손님으로 대접했다.
어느 날 장보고와 염장은 술을 마셨다.
장보고가 아무 의심 없이 취해 있자,
염장은 장보고가 찬 칼을 빼앗아 그를 내리쳤다.
이렇게 장보고는 뜻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장보고가 죽자,
귀족들은 철저하게 그의 세력을 꺾었다.
그리고 청해진도 폐쇄하고 해상활동도 중지시켰다.
청해진에 있던 사람들은
벽골군(오늘날의 김제 일대)으로 옮겨 농사를 짓게 했다.
장보고의 죽음은
바로 중앙귀족과 해양 · 상인 세력과의 대결에서
후자의 패배를 의미한 것이다.
그가 비록 중앙권력에 맛을 들여
제 마음대로 권세를 휘둘렀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평민세력의 중앙 진출을 의미한 것이다.
신라는 귀족사회였다.
이들 귀족은 경주를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잡고 호
사스런 생활을 하면서
평민세력 위에 군림했다.
장보고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내건 명분도
섬사람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비록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그의 해상활동은 우리 역사에 찬란하게 빛났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를 이순신에 앞선 해양활동의 선구자로 꼽고 있다.
또한 동양 삼국의 국제무역을 지배한 인물로 평가하며
“우리 겨레가 낳은 세계사 속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는 찬사를 하기도 한다.
완도 앞바다 장도에는
청해진의 내성과 외성 그리고 목책 등의 유물 흔적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장보고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