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9,토요漫筆/ 꾀병 /김용원
수평선 너머에서는 벌써부터 숯불이 벌겋게 달구어지고 있다. 꼬부라진 소나무 꽂힌 섬 하나 저만치 있고, 그 옆에 실루엣으로 검게 드러난 배 한 척도 있다. 비늘 세운 바다 표면은 핏빛으로 사뭇 붉고, 내 앞의 갈대가 콧등을 간지럽힌다. 나는 언젠가처럼 차렷 자세로 반나마 가라앉은 해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말한다. 종일 수고했어 해야. 그리고 갈대숲 언저리에 눕는다. 아, 참으로 편하다. 나 죽을 때 이처럼 편안했으면!
“여보, 청소 안 할 거야?”
짝꿍의 말에, “매일 그놈의 청소!” 외치려던 입을 꾹 닫아건다. 그리고 될수록 안쓰럽게 느껴지게끔 목청을 얇게 꾸며 대꾸한다.
“찌뿌두한 게 영 몸이 안 좋아.”
“몸살인가?”
“그런가 봐.”
“다행이네 토요일이라.”
짝꿍이 돌아서는 소리.
방문 닫히는 소리.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잠깐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아예 흐물흐물 녹여 버린다. 오늘 하루 이 꾀병을 그대로 유지해야지. 난 오늘 아픈 거야. 하루종일!
보다 젊었던 그날, 나는 그랬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꾀병부릴 필요가 없어졌다. 하루종일 누워있대서 짝꿍에게 미안할 일도 없다. 토요일, 일요일이 아니라도 내가 눕고 싶으면 언제든 누우면 된다. 까짓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 해도 되고 한 달에 한 번 해도 된다. 그래도 잔소릴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짝꿍 눈치보며 꾀병부릴 때는 나름 그때대로의 의미가 있고 그렇지 않은 지금은 지금대로의 의미가 있다.
이게 삶이구나, 깨닫는다.
/어슬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