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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너희를 위하여..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 성령을 통해서 비밀을 밝히 알게 되면 제자들은 마땅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능력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실제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로는, 구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14:16이나 17:9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메이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4:16과 17:9에서 예수가 언급하신 기도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의 기도를 의미하므로 본절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혜사가 오신 이후에는 제자들의 기도 능력이 성숙하여져서 중보 기도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오히려 더 큰 모순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보혜사 성령이 오신 후에도 예수가 성부 앞에서 대언자로 성도를 위해 활동하신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8:34과 히 9:24-26 역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가 성령의 오심 이전이나 이후나 계속되고 있음을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모리스는 예수가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전후 문맥에서 이미 강조한 기도의 기본 원칙에 근거하여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성되었으므로 그 희생의 공로는 지속적이다. 무릎을 굻고 아뢰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직무에 의해 성도들의 기도는 보좌 앞에 상달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중보 기도는 부활하신 후에도 지속된다. 그러나 세상에 게신 동안에는 보좌를 향해 예수가 친히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 따라서 본절은 성령이 오신 후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기도하셨던 것과 같은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에 의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27절은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나가서 설명해 준다.
[요 16:27]"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친히...사랑하심이니라 - 본 구절에서 '친히'(아우토스)라는 말이 보통의 경우와 같이 강조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자의적인' 또는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고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인 것을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아버지의 사랑을 보장하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설득에 의하여 사랑을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랑은 오직 당신 스스로의 자의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했다. '없는 자들을 부르셔서 있는 자들로 만드시고, 딱딱한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 16:28]"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아버지께로...왔고...아버지께로 가노라 - 요한은 본서를 시작할 때 아버지로부터 오신 아들의 신성과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비밀과 아들을 통한 구속사역을 설명했다. 이제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이것을 다시 한번 요약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는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는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처럼 본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오고 가심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기원이 결코 세상이 아님을 밝히셨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 속에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야, 곧 세상적 메시야로 생각하며 그러한 메시야로 삼으려는 자들의 의도가 전혀 소용없음도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심은 성령의 오심에 대한 확실한 조건이요 신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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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29]"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아니하시니 -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의 비유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예수 역시 비사로 말쓰마신 후에 그날에 가셔야 제자들이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며 특히 25절과 서로 모순되는 진술로 보인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밝히 드러날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사랑과 올바른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말씀하시는 비사의 의미를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다.
(2) 제자들은 의혹의 안개가 다 걷혀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비사로 말씀하지 않았으며 또한 쉽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어렵게 생각한 것은 예수의 언어적 표현(비유 또는 비사)이 아니라 미래에 되어질 일들 자체에 대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알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그때 당시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3)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도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단지 어떠한 느낌에 의하여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다. 제자들은 어렴풋하게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과장되게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에 대한 아주 미비한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더 큰 확신으로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25절에서 약속한 '그때'가 제자들에게는 성취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으므로 이 당시 제자들은 모든 의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이후에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을 생각하면(마 28:17) 25절에서 약속한 것들이 이 시점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5) 제자들은 과거와 현재 및 미래에 있어서 예수 자신의 실존에 대한 모든 비밀들을 세심하게 들으면서 예기치 못했던 걔달음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자발적이면서도 만장 일치적인 고백이 그들의 입술에서 튀어 나왔다. 그런데 31, 33절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밝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체포되던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모든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감추어진 비밀에 대하여 조금 이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절과 같이 말한 것은 약간의 과장이 포함된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었으므로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다.
[ 요 16:30]"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지금에야...아나이다 - 모든 것을 온전히 아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이시다. 단지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를 안다고 고백한다. 예수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다 아신다(2:24, 25).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아시고 그 의문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제자들은 이같은 예수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 지극히 연약하여 그들이 고난을 극복할 만큼의 믿음은 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본절과 29절에서 언급된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를 위해 자신의목숨도 버리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생각대로 실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마 26:41). 그들은 스승 앞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해는 아직 불완전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32절의 말씀은 예수가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요 16:3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예수는 제자들의 믿는다는 고백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앞뒤 문맥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상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다는 고백과 예수를 떠나게 되는 배신 사이에 본절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본절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의 견해를 제시한다.
(1) 혹자는 의문문이 아니라 서술문으로 이해하여 '이제는 너희가 믿는도다'로 재번역한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가 제자들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탄하는 의미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지금까지 무지했던 그들의 믿음이 이 정도라도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수에게 기특하게 여겨졌다는 뜻이다.
(2) 예수의 말씀을 의문문으로 받아들여 반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본절은 '너희에게 믿음이 굳게 섰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냐 ?'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는 제자들의 연약성을 지적하고 그들의 신앙적 한계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절을 이와 유사한 13:38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3:38에서 예수의 질문은 반어법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없음을 강조한 의미였다.
그리고 본절은 32절에 비춰볼 때 분명히 반어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했으나 아직 자기 목숨을 버릴만큼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나 그들의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반어법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무시했거나
제자들의 믿음을 무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아직까지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불완전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성령 강림 때까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기다리라는 권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요 16:32]"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너희가...흩어지고 - '흩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르피스데테'는 원래 '뿌려 버리다'를 뜻하는데 10:12에서는 이리에 의하여 흩어지는 양떼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개역 성경은 '헤치느니라'로 번역함). 본절에서 예수는 슥 13:7에 언급된 예언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에게 적용시키셨다. 그 흩어짐은 이리떼 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예수의 예언대로 제자들이 흩어진 것은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에 하나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방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그 밤에 모두 예수 곁을 떠나 각각 자기의 길로 도망해 버렸다.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하던 베드로조차도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였다.
그래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홀로 남게 되시는 고독과 더불어 고통의 십자가도 지셔야 했다. 예수는 인간들의 철저한 배신과 사랑하는 자들의 흩어짐 속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르신 후 승리를 얻으셨고 이 승리를 통해 교회가 출발되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연약했던 제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그 출발의 궁극적인 기원이 제자들의 용기와 지혜에 있지 않음을 증거한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이 표현은 고별 설교에서 여러번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표현과 관련된 내용은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다. (1) 예수의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질 때에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함. (2)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15:11). (3) 환난 때에 예수의 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 (4) 본절에서는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칭하는 바를 고별 설교(13-16장)로 국한시키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25절과 16:1 주석을 참조하라.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 이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조차 제다들이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수고하신다. 예수가 주시는 평안은 세상적인 것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것이다..
이 평안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마음으로 누리는 기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열매인 이 평안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얻을 수 있었다. 담대하라 - 제자들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이다. 이 환난은 상반절에서 언급된 평안과 대조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그 둘이 나오게 된 출발점 역시 대조된다. 즉 환난은 세상에서 나오며 평안은 예수 안에서 나온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이기심같이 평안도 환난을 이긴다는 약속이 보장된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에게 예수는 담대하라고 권면하셨던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여기서 세상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세상과 약간 구별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인간들이 생활하는 영역을 지칭하지만 본 구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대적자들과 사단의 무리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
예수가 싸우는 대상은 전자의 의미를 지닌 세상의 통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정치적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이기었노라'란 표현은 본서 외에 요한의 서신서에서도 영적 승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예수는 세상으로부터의 승리를 묘사함에 있어서 동사의 완료형으로 말씀하신다.
이 완료형은 본절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예수는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으므로 아직 부활의 승리 역시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형의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그 승리가 미래의 일이지만 완전히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부활'로써 사망의 왕노릇하는 자들로부터 슬이를 거두셨으며;딤후 1:10) 세상을 정복하셨다.
이러한 승리에 대한 완료 시제는 승리의 영속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와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적용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