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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3월 29일]
♣1807년 - 하인리히 올베르스가 소행성 4 베스타를 발견.
♣1867년 - 미국의 야구 선수 사이 영 출생
♣1919년 - 일본 군인이 의주의 시위 군중을 학살한 의주 학살 사건 발생 . 1919년 오늘 일본군은 의주군 고령삭면 (古寧朔面) 영산시장(永山市場)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습격, 그 중 6명을 사살. 이때 친척들은 시체를 운반하여 헌병 주재소에 옮겨 통곡하면서 독립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매장하지 않겠다고 항의, 다시 충돌이 생겨 수많은 사람이 사상.[1]
[1] http://ko.wikipedia.org/wiki/%EC%9D%98%EC%A3%BC_%ED%95%99%EC%82%B4_%EC%82%AC%EA%B1%B4
[2] 일제의 조선인 학살 사건 모음. http://www.mule.co.kr/community/bbscontent.aspx?idx=2434053&sort=55
♣1924년 - 독립운동가 김복한 사망.
♣1927년 - 독립운동가 이상재 사망 . 李商在(1850년 10월 26일 ~ 1927년 3월 29일)는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개화파운동가, 일제 강점기 한국의 교육자·청년운동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언론인. 과거에 낙방한 후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진출. 1881년 일본을 시찰하고 개화사상을 접함.
귀국 이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한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이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899년 11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으며, 1919년의 3·1 만세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 교육과 청년의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 활동하였다. 개인적으로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전셋방을 전전하였다. 그는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 중의 한사람이었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고려의 학자 이색의 후손이다. 자는 계호(季皓), 아호는 월남(月南)이다. 본관은 한산.[1]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시절인 1956년 공보처에 '월남 이상재 선생 약전(略典)' 이라는 책을 발간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개화파에 속했던 박정양과 가장 유대가 깊었던 사이였다. 고종이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 숙청에 나선 이후 학문의 우수함을 인정받아 관직에 기용되기도 하였으나, 박정양이 유배되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가 박정양의 추천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당대 최고의 독설가라 할 만한 인물이자 언어유희에도 뛰어났다. 개나리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하다.[2]
친일파 인사들을 보고는 "이제 그만 일본 동경(도쿄)에나 가서 사시지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어째서냐고 묻자, "대감이 조선에 살아서 조선이 망했으니 일본에 가서 살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니오?"라고 일침을 날렸다. 또 언젠가 이상재가 연설을 하러 갔는데 일본 순사들과 친일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개나리들이 만발하였구나!"라고 하여 군중들이 폭소를 하게 만들었다. 당시 민중들은 거들먹거리는 순사들이 개새끼나 다름없다고 개나리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상재가 이를 이용하여 조롱한 것.[2]
[1]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3%81%EC%9E%AC
[2] https://mirror.enha.kr/wiki/%EC%9D%B4%EC%83%81%EC%9E%AC
♣1937년 - 소설가 김유정 사망 . 金裕貞(1908년 2월 12일 ~ 1937년 3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강원도 춘천 출생이며 1937년 3월 29일 폐결핵으로 29세에 요절. 7살에 어머니를,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의지하고 자란 부모 복이 없는 소년은 목숨도 짧아.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속에 나타난다.
[출처]오늘의 역사, 3월 29일 |작성자 산의로
금주의 역사 스페셜
3월 29일 1944년(73년전)
마지막 광복군 김준엽, 일본군 학도병 탈출
독립운동가,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 아세아문제연구소장
헌법 전문 개정 공헌, 중국 대학 한국연구소 설립지원
임시정부-윤봉길기념관-고려사관 등 역사유적 복원 공헌
김준엽 총장 좌우명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진리와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김준엽(金俊燁 1920. 8. 26~ 2011. 6. 7): 영원한 광복군-독립운동가-교육자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 출생. 일본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 유학 중 1944년 2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강제징집. 중국 산동에 있는 일본군 쓰카다부대 배치.
1944년 3월 29일 새벽, 중국 산동성 일본부대 탈출(학도병 탈출 1호), 중국 대륙 6,000리를 걷는 ‘대장정’ 끝에 1944년 9월 10일 대한광복군 합류, 충칭임시정부 도착.
1945년 4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 휘하, 미군전략첩보대OSS(미 CIA 전신) 훈련 수료, 대한민국 독립 위한 본국진공작전 대원 선발 및 특수훈련 수료.
1945년 8월 15일 일본 태평양전쟁 항복 선언으로 본국 진공작전 무산
1945년 8월 18일 김준엽은 광복군 선발대로 서울 여의도 비행장 도착했으나 일본군이 그때까지 한반도를 경찰병력으로 통제하고 있었으며, 일본군은 광복군 선발대의 본국 진입을 허가하지 않아 김준엽 등 광복군 선발대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감.
해방 이후: 역사학자, 명예박사(건국대, 연세대, 아주대), 교환교수(하버드대, 프린스턴대), 중국학회 회장, 고려대 아세야문제연구소 소장, 공산권연구협의회 명예회장, 제9대 고려대학교 총장,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 장준하 선생 추모비건립위원회 위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자문위원회 명예위원장, 명예교수(중국 북경대-항주대-요령대-복단대-연변대-산동대-남경대-북경언어대),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동백장, 독립운동유공표창,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주요저서: 중국최근세사, 중국공산당사, 중공권의 장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중공과 아시아, 장정 등.
정부 고위직 임명 고사: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40여 년간 총리직 2회 등 12번의 입각 제의 거절
한국 중국학회 설립: 1957년 아세아문제연구소 설립, 중국학회 조직하여 중국과 학문교류 및 독립운동사 연구, 중국공산당사-한국공산주의운동사 발표
고려대 총장 재직(1982~1985.2): 민주화운동 참여 학생 제적 압력 거절, 해직교수 복직, 직선제 총학생회 부활, 고려대 재학생의 총장 퇴진을 반대하는 시위 발생.
강만길 명예교수 회고: “김 전 총장이 박정희 정권 때 통일부 장관직 제안을 거절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용기와 자존심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와 군사정권 시대라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더 나은 역사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김 전 총장은 진보적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 개정: 1987년 제9차 개헌 당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 포함에 공헌.
중국 대학 한국연구소: 북경대-복단대-연변대-산동대-길림대-흑롱강대-절강대-남경대 등 한국학연구소 설립 지원.
임시정부-윤봉길기념관 유적지 복원: 상해-충칭-항조우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 복원, 닝보 고려사관 복원, 상해 루쉰공원(홍구공원) 매헌 윤봉길의사 의거현장 기념비석 및 기념 정자 복원, 강소성 양주시 최치원 기념관 복원 등에 공헌.
향년 91세 별세(2011년 6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