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진(文鎭)
임병식
돌밭에서 조그만 돌 하나를 만났다.
둥근 형태였으나 정확히 절반이 갈라져 있었다. 갈라진 면마저 자연스러워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문득 그것을 문진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해서 떠오른 생각은 아니었다. 모양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검은빛은 깊었고, 물에 닳아 매끈해진 표면은 오래 손을 타온 물건처럼 단정했다.
사물은 쓰임을 얻으면서 새로운 이름을 갖는다. 같은 흙으로 빚어졌어도 어떤 것은 항아리가 되고 어떤 것은 요강이 된다. 그러나 사물의 가치는 쓰임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제자리를 얻는 순간, 사물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입는다.
수많은 돌 가운데 왜 하필 이 돌이었을까.
선택이라기보다 호출에 가까웠다. 돌이 나를 부른 것인지, 내가 돌을 알아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눈길이 머물렀고 손이 따라갔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간으로 옮겨갔다.
이 돌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아마 지구가 생겨난 먼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비와 바람을 맞고, 햇빛과 물길을 지나며 인간의 셈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견뎠을 것이다.
돌은 그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야 문진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돌을 조용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문진이라 부르기 전에는 그저 작은 돌이었다. 그러나 이름은 사물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다르게 보이게 한다. 이름을 얻는 순간, 사물은 물질을 넘어 의미가 된다.
옛 문인들이 작은 돌을 곁에 두고 아꼈던 마음도 어쩌면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변하는 세상 곁에 변하지 않는 것을 하나쯤 두고 싶었을 것이다. 말없이 곁을 지키는 존재 하나를 벗 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돌의 표면을 천천히 매만졌다. 처음 무심코 주워 들었을 때와는 달랐다. 손끝에 닿는 것은 매끈한 돌의 감촉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 스며든 긴 시간이 느껴지는 듯했다.
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침묵이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존재하는 것들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할 때가 있다.
돌은 수많은 시간을 지나왔지만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존재만으로 긴 세월을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돌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붙드는 것이 문진의 일이다. 어쩌면 사람에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무게 하나쯤은 필요한지 모른다.
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침묵이 어느 말보다 또렷하게 들려왔다.
(2026)
첫댓글 청석님이 지니신 烏石은 소중한 문진이며 염주가 맞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귀한 수석을 맞나 노후와 동행하니 천하의 石友이지 싶습니다.
눈떠 책상 앞에 앉으면 책이 있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烏石이 지켜주고
지압을 통해 혈액 순환까지 시켜주니 둘도 없는 聽石의 半侶雌 같습니다 ^^
나와 수석과는 때려야뗄수없는 관계이지 싶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촌석을 만지다다 짧은글을 한편 올렸습니다.
선생님과 체온을 나누며 책의 향기를 함께해오는 작은 오석을 언젠가 본 듯하군요 저는 생명이 없는 물상도 지닌 사람 함께하는 사람의 체온과 숨결이 더해져 마침내 생명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맞아요. 생명이 없는 것도 마음을 함께하면 온기가 느껴집니다.
촌석을 평소에는 지압용으로 사용하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때는 문진으로 사용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