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53)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以災異策免
재이로 면직시켰다.
바지사장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적 주인나 상사가 있는데, 이 사람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정면에 나설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을 사장으로 시켜 놓고 사업을 경영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명목상의 사장인 이 바지사장이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이는 정상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찌 보면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하니 이러한 바지사장이 많을수록 그런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업을 하면서도 그렇지만 공직사회에도 그러한 일이 있는 것 같다. 후한 안제(安帝) 영초 원년(107년)에 태위(太尉)인 서방(徐防)을 책서(策書)로 면직시켰다. 그러고 나서 며칠 있지 아니하여 다시 사공(司空)인 윤근(尹勤)을 면직시켰다. 태위나 사공은 삼공(三公)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인데, 이들을 면직시킨 이유는 바로 재이(災異)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또 도적이 들끓었는데 이를 안정시킬 책임을 진 태위(太尉)에게 책임을 지웠다는 것이다. 그 맡은 직책으로 보아서 이들을 면직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또 수재가 여러 곳에서 일어나니 수리(水利)를 책임진 책임자인 사공을 면직시키는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로부터 100년쯤 뒤에 철학자인 중장통(仲長統, 180~220)은 그의 글 《창언(昌言)》에서 이 사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재이는 모두 외척과 환관으로서 신하가 된 자가 가져온 것인데 도리어 태위와 사공 등 삼공(三公)을 나무라며 죽이거나 면직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푸른 하늘에 대고 절규하고 부르짖으면서 피눈물을 흘리기에 충분하다.’라고 하며 이들이 억울하게 면직되었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나라에 어려움이 다가온 것은 외척과 환관들이 잘못했기 때문이고, 서방이나 윤근 같은 사람이야 명색만 그럴듯하게 삼공(三公)이라는 높은 자리를 가졌을 뿐이고 실제로 독자적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구조였으므로 이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말이었다.
중장통은 끝으로 ‘과거에는 맡은 일은 무거웠으나 책임은 가벼웠지만, 지금에는 맡은 일을 가벼운데 책임은 무겁다.’라고 비판하였다. 즉 과거에는 직책이 주어지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었고 그 일의 성패에 따른 책임은 크지 아니하여 재량껏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안제 때에는 직책은 높은 것을 주면서 실제로는 외척이나 환관들이 모든 권한을 쥐고 흔들다가 문제가 터져서 누군가 책임을 지게 하여야 일이 마무리될 즈음에 가면 아무 권한도 없었던 높은 관료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제 시대의 이 기록을 읽노라면 바로 바지사장이 생각났다.
사실 이 시기에 안제는 황제이긴 하지만 겨우 13살이어서 실제 정치는 황태후인 등수(鄧綏)가 하고 있었다. 등수는 화제(和帝)의 황후로 화제가 죽자 황태후가 된 사람이다. 그녀는 당시 화제의 황후로 음씨(陰氏)가 있을 때 후궁으로 들어갔다.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던 시대였기에 등수는 그 행동거지가 딱 유교적 덕목에 맞도록 행동하였다. 그런 까닭에 상대적으로 그러하지 못한 음황후는 결국에 질투가 심하여 부덕(婦德)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죄목으로 폐위되었고 등수가 황후로 올라갔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희생하는 척하였던 그녀의 행동은 실제로 황후를 내쫓고 자기가 황후로 올라가려는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화제가 죽고 황실의 최고 권위자가 된 다음부터의 행동 때문이다. 그녀는 후사가 없이 죽은 화제의 후사를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26살 된 황태후가 선택한 다음 황제는 탄생한 지 겨우 100일 되는 유륭(劉隆, 105~106)이었다. 100일밖에 안 된 사람을 후계자로 선택하여 황제로 세운 것부터 정치는 자기가 하겠다는 뜻이다. 유륭에게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형 유승(劉勝)이 있었지만,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유륭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유륭은 등극하고 1년도 안 되어 죽어 상제(殤帝)로 불리니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오히려 유륭이었고, 그때까지도 유승은 살아 있었으니, 등태후가 유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선뜻 납득(納得)할 수 없다.
하여간 상제가 죽은 다음에 다시 황제를 선택해야 하는 등수는 다시 13살밖에 안 되는 유호(劉祜)를 골랐다. 이 역시 그녀가 권력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의중이 충분히 반영된 조치였다. 이렇게 권력을 휘두르는 등수는 자기 친정 오빠 등에게 권력을 행사하도록 맡겨 두어 외척 등씨 집안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그러니 설사 태위나 사공 같은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제대로 자기 의지를 갖추고 정치를 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 직위 때문에 면직된 것이다. 바지사장이 책임을 지고 뒤에 있는 진짜 권력자는 멀쩡하게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민주화가 되었다는 우리 사회도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바지사장에게 권한도 주어지지 않은 자리에 왜 갔느냐고 나무랄 형편은 아니다. 오죽해야 그러한 자리인 걸 알면서 간 것을 보면 그저 딱할 뿐이다. 다만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였던 사람에게 책임을 묻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등태후는 수많은 바지사장을 임명하면서 그 죽기까지 권력을 행사하였지만, 그가 죽자 많은 사람이 등씨들이 권력은 행사하면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기에 등씨(鄧氏)들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거의 멸문(滅門)의 상태까지 갔으니 등태후는 결과적으로 자기 친정 집안을 위하여 권력을 그들에게 준 것이 단견(短見)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이렇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의 말로(末路)이다.
요즈음 거의 반년 가까이 중요한 뉴스거리로 우리들의 귀를 아프게 하는 것이 이른바 대장동 사태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냥 사건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과 관련되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벌써 다섯 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報道)다. 나는 그 실체를 알 길 없는 사람이지만 이들이 실제 사건의 주모는 아니면서 그 사건에서 문제가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혹 바지사장 같은 위치에 있기에 원래의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결국 책임을 지게 된 부담감 때문에 이리하였다면 이는 호소할 곳 없는 억울함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는 그 일의 원래 책임자가 누구인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 혹 다음에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바지사장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책임을 면해보려는 얄팍한 잔꾀를 부리는 사람이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자기가 한 일에는 자기가 책임지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빌어 본다.
첫댓글 좋은 평론 잘 읽었습니다. 진짜 책임자를 모른다거나 묵비권을 행사하는데 자살한 5명은 억울하겠지요. 우리는 자살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너무나 쉽게 하는 것이 하나의 풍조가 된 듯합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인명경시 경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국의 최고 지위에 오른 자도 자살을 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