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鳥嶺)와 관문(關門)
5천만의 고개, 고갯길의 대명사 문경새재를 다녀가신 분들께서 여행기를 쓸 때‘새재’를 ‘세제’로 표기하여 하이타이 세제를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른 뜻은 하늘을 나는 ‘새’와 고개를 말하는 ‘재’를 말하는 것이고 한문 표기는 조령(鳥嶺)이다.
문경새재 유래를 말하기 전에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이라는 구슬픈 가락의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노랫말에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으악새’가 과연 무엇일까? 새일까? 억새일까? 많은 사람이 ‘으악새’는 ‘억새풀'이고 ‘으악새가 슬피 운다'는 것은 ‘새가 구슬프게 우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억새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를 말한다. 라고 알고 있으나, 이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가 ‘으악’하고 우는 새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하니 논란의 여지가 없다. ‘으악’하고 우는 새는 ‘왜가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으악새’를 아직도 ‘억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 떠도는 유머 중에 5대 어거지(억지)가 있다. 위에서 말한 ‘으악새’를 억새라고 우기는 것과 청남대를 대학교 이름이라고, 구제역을 전철역 이름이라고, 복상사를 절 이름이라고, 몽고반점을 중국집 상호라고 우기는 것 다섯 가지인데 필자가 2개를 추가하여 7대 어거지가 되었다. 추가한 두 가지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 또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는 것이다. 앞에 다섯 가지 어거지는 웃고 넘기시고 뒤의 두 가지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서 힘을 합쳐 막아주셔야 하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새재’의 유래는 무엇일까? 첫째는 ‘초점’(풀 草자, 고개 岾자)이라 해서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으로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이 남아 있는 새재의 옛 지명이다. 둘째는 조령(鳥嶺)으로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 새도 쉬어 넘는 고개라는 의미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셋째는 새로운 재라는 의미로 옛길 하늘재에서 새로 개척된 길인 조령으로 이동로가 바뀐 것에 유래되었고, 넷째는 사이에 있는 재라고 해서 하늘재와 이우릿재(이화령) 중간에 있다는 것으로 4가지의 설이 있으며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남 지역에서 옛날 한양가는 큰일이 세 곳이 있었다. 속설에 의하면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죽령으로 가면 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하여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의 문경(聞慶)새재를 즐겨 넘었다고 한다. 즉 영광스러운 과거급제 소식을 전하고 전해 듣는 기쁨의 고개, 경사의 고개라고 하는 그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다.
문경새재에는 사적 147호로 지정된 3개의 조령 관문(鳥嶺 關門)이 있다. 관문은 국경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설치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검문하고 물품을 조사하던 곳이다. 문경새재 초입에 있는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은 조선조 숙종 34년(1708)에 축성되었으며 초곡성이라고도 한다. 영남은 조선 시대 때 경제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영남으로 통하는 문경새재 고갯길은 일본과 조선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정치 및 통상로이고 특히 군사적으로 중요하여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관하고 축조한 관문 및 산성이 있는 곳이다.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은 3개의 관문 중 제일 먼저 설관, 축성된 관문이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당시 영의정인 서애 류성룡이 간하고 수문장인 충주 사람 신충원이 축성하였다 한다. 문경이 무너지면 충주가 무너지고 충주가 무너지면 도성(한양)을 지킬 수 없다는 군사 전략적인 이유로 급히 세운 곳이다. 원래 이름은 중성, 조동문, 주서문이라 하였다가 후에 조곡관이라 하였으며 주흘관과는 114년의 시차가 있다.
여기에는 ‘신립과 새재 여귀’라는 전설이 있는데. 신립 장군이 임진왜란 시 새재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할 때 백전노장 김여물 부장 등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건의했으나 갑자기 모병한 훈련 받지 못한 병사들이 대다수라 사지(死地)에 갖다 놓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고심하는 중에 신립 장군을 사모하다가 원을 품고 자결한 처녀 원귀가 나타나 “장군은 대명을 받아 왜적을 격멸하는데 어찌 대장부답지 않게 이처럼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하고는 충청도 달천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크게 대승하리라. 말하니
그만 요사스러운 원귀의 말을 믿고 그곳에서 싸우다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대패하여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되었다. 뒷날 사람들은 천혜의 요새인 새재에서 석공, 수공, 화공을 이용한 산악전을 폈더라면 승전할 수 있었을 것을 하고 안타까워하였고 역사는 가정할 수 없고 지나간 일이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그때 만약 신립이 조령을 사수하였더라면 임금이 의주로 파천하는 치욕을 피할 수 있었고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은 주흘관과 같은 시기에 축성된 관문으로 경상도와 충청도, 영남지방과 기호지방,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경계 지점이며 영남지방이 조령의 남쪽이란 뜻이니 여기서부터 영남지방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1, 2관문은 남쪽 적을 방어하기 위해 남쪽으로, 3관문은 북쪽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해 북쪽으로 세워져 있다. 그래서 문경새재 관문과 조령산성 안은 하나의 요새로서 안전지대가 되는 곳이며 여차하여 나라에 환란이 있을 시 임금이 몽진하거나 파천할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다.
이제 지상(紙上)으로 가 본 문경새재와 관문 여행을 마칠 시간, 조령관 용마루 빗물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고 끝을 맺고자 한다. 문경새재에 비가 내리면 제3관문 조령관 용마루 남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조령천과 영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로 빠지고, 북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남한강 충주댐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서해로 가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 사람이 살면서 어느 길로 가느냐? 어디에 서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여기 이 빗물과 같이 아주 조그마한 차이(선택)가 궁극적으로 천양지차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조령관 용마루 빗물이 주는 교훈을 새기면서 모두 바른 선택으로 좋은 길로 가시고 좋은 자리에 우뚝 서시길 바란다.
신경림 시인이 지은 장시 ‘새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저 고개 넘으면 새 세상 있다는데, 우리끼리 모여 사는 새 세상 있다는데…”
한이 많은 우리 민초들은 수많은 침략과 전쟁 속에 핍박과 수난을 겪으며 가난한 삶을 살아오면서 항상 새 세상을 꿈꾸며 살았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넘어 따뜻한 남쪽 나라 어딘가에 내가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 신천지를 그리워했고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한양이 있는 곳, 넓은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곳 어딘가를 동경하며 복지의 땅, 이상향(유토피아)을 그리워한 것이다. 그래서 문경은 우리 모두에게 경사스러운 소식을 전해 주는 땅이며 문경새재는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우리 모두의 고개이다.
문경새재의 험준함은 예로부터 유명해서, 삼국시대 때는 신라 초기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막는 국경선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충주 탄금대가 아닌 이곳에서 결진하여 매복했다면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더 효과적으로 막았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파견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문경새재의 지형을 보고 "이 험준한 고개를 지킬 생각을 못 하다니 신 총병도 참 지략없는 사람이다."하고 신립을 비웃었다고 한다. 그가 조령에서 적을 막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 추풍령(좌로), 죽령(우로)과 함께 낙동강 유역(영남)과 한강 유역(기호지방)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다. 전근대 시절에는 죽령은 자체가 험한데다 단양의 남한강 협곡때문에 한산했고, 추풍령은 우회길인데다 옥천과 영동사이에 있는 금강의 협곡들 때문에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조령은 고개가 험한 것을 빼면 한성과 영남을 직선거리에 가깝게 이었고 협곡과 같은 방해물이 적었다. 그 덕분에 청주에서 회인과 보은을 거쳐 상주로 가는 고개인 화령과 함께 주요 고개로 자주 이용이 되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영남의 선비들이 화령과 함께 그야말로 사랑해 마지않았는데, 죽령으로 향하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 낙엽처럼 떨어지는 데 반해,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하리라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
후삼국시대 견훤과 왕건의 격돌이 있었던 격전지 가운데 하나이며(929년 가은성 공방)[1]
지금도 복원이 잘 되어있어 꽤 준수한 트레킹 코스로 3개 관문(주흘, 조곡, 조령관)이 있다.
문경새재 / 이만유
높은 산 깊은 계곡
물 따라 길 따라 고갯길 걸으면
까짓것 어디서 누가 뭐하든
몰라도 좋다
산허리 굽잇길
우거진 숲 사이
빠끔히 내민 파란 하늘에
흰 구름 한 점 두둥실 떠가면 까짓것 아랫동네 지지고 볶는 것
그냥 몰라도 좋다
고개 넘어 한줄기
시원한 바람 가슴에 품으면
까짓것 세상사 모든 것
다 잊어도 좋다
굽이치는 폭포수에
온갖 시름 씻어내고
소나무 바람 소리에
마음을 빗질하면
희다 못해 푸른빛 도는
옥양목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된다
신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