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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1 (화) 이번엔 '문재인 내려와'… 분노한 '실검 챌린지'
최근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대책에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7월 20일에도 ‘문재인 내려와’를 키워드로 ‘실검 챌린지’에 나섰다. ‘6·17 규제 소급적용 피해자 구제를 위한 시민모임’, ‘7·10 취득세 소급적용 피해자 모임’ 등은 7월 20일 부동산 대책 피해자들과 함께 이 같은 키워드를 네이버 포털 실시간 검색어 리스트에 올렸다. 이들은 이달 7월 1일부터 실검 챌린지를 자발적으로 시작해 이날까지 △김현미 장관 거짓말 △헌법13조2항 △6.17위헌 서민피눈물 △문재인 지지철회 △소급위헌 적폐정부 △국토부 감사청구 △조세저항 국민운동 △임대차3법 소급반대 △중도금잔금 소급반대 △못살겠다 세금폭탄 △3040 문재인에 속았다 등을 차례로 실검 순위에 올렸다.
이들은 인터넷뿐만 아니라 중구 을지로, 구로구 신도림역 등에서 실제 집회를 갖고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규탄하기도 했다. 지난 7월 18일 이들은 서울 종로구 예금보험공사 앞에서 정부의 부동산 규제에 항의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규제 소급적용은 명백한 위헌”이라며 “일반 서민인 임대사업자와 다주택자를 정부가 범죄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현장 발언대에서 현재 무주택자로 2개 분양권을 가지고 있다는 한 시민은 “비규제지역 LTV 70% 대출을 믿고 계약했는데 규제책 발표로 한순간에 다주택자, 투기꾼이 됐다”며 “3년 전매 제한 때문에 (분양권을) 팔지도 못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앞서 ‘6·17 규제 소급적용 피해자 구제를 위한 모임’ 구성원 100여명은 지난 7월 4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역 1번 출구에서도 집회를 가진 바 있다. 이들은 “집값을 잡고 서민 주거를 안정시킨다는 문재인 정부의 목적은 21번의 정책 남발로 완성되었는가 되묻고 싶다”면서 “오늘 이 순간에도 서울 집값은 매일 수 천만원씩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실수요자들의 좌절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며 정부를 규탄했다. 한편 주말에도 실검 챌린지는 계속 됐다. 이번에는 실시간 검색어에 ‘총선소급 민주당아웃’이 올라왔다.
이재명… "민주, 서울·부산시장 공천 말아야"
이재명 경기지사가 7월 20일 내년 4월 치러질 예정인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이)공천하지 않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재명 지사는 이날 오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장사꾼도 신뢰를 유지하려고 손실을 감수한다”며 이 같은 견해를 밝혔다. 앞서 서울시장은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뒤 박원순 전 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부산시장은 오거돈 전 시장이 지난 4월 강제추행 혐의를 인정하고 사퇴하면서 공석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당헌 96조 2항에는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하는 경우 보궐선거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이와 관련, 이재명 지사는 “말도 아니고 규정으로, 무슨 중대한 비리 혐의로 이렇게 될 경우에는 공천하지 않겠다고 써놨지 않았느냐”며 “이걸 중대 비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러면 정말 아프고 손실이 크더라도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규정을 바꾼다면, 당이 국민에게 석고대죄하는 정도의 사죄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견해는 “무공천이 원칙이지만, 당원이 원하면 국민에 양해를 구하고 당헌을 개정해 후보를 내야 한다”는 민주당 당 대표 후보 김부겸 전 의원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이 지사는 ‘무공천’에 더 방점을 찍었다. 또 다른 당 대표 후보인 이낙연 의원은 4월 보선 공천 여부와 관련해 아직 뚜렷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이재명 지사는 여러 차기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이낙연 민주당 의원에 대해서는 “훌륭한 분”이라며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동진(東進)을 못 하지 않았나. 지금이 지역색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이재명 지사의 발언을 두고는 “호남 지지 기반이 뚜렷한 이낙연 의원을 은근히 견제한 것” “영남권의 지지를 받는 호남 대통령이 탄생할 기회란 뜻” 등 해석이 갈렸지만, 그는 “자꾸 오해를 낳는다”며 구체적인 답변은 피했다.
한편, YTN이 리얼미터에 의뢰해 지난 7월 17일 실시한 여야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95% 신뢰수준, ±3.1%포인트) 결과 이재명 지사는 18.7%(2위)로 이낙연 의원(23.3%)과의 차이가 4.6%포인트였다.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 의뢰로 지난 7월 4, 6, 7일 실시한 범여권 대선주자 선호도에서 이재명 지사(20.0%)가 이낙연 의원(28.8%)과 격차를 한 자릿수(8.8%포인트)로 좁힌 적은 있지만, 오차범위 내로 조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재명 지사는 최근 각종 차기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이낙연 의원과의 격차를 점점 좁히면서 ‘투톱 구도’를 구축하고 있다.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가 4·15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4월 이후 리얼미터·오마이뉴스 조사에서 이낙연 의원은 40.2%(4월)→34.3%(5월)→30.8%(6월)로 하락세지만, 이재명 지사는 14.4%→14.2%→15.6%로 완만한 상승세다. 한국갤럽 조사도 비슷한 양상이다. 7월 7~9일 자체실시한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이낙연 의원 24%, 이재명 지사 13%였는데, 이는 전월 대비 이낙연 의원은 4%포인트 하락, 이재명 지사는 1%포인트 상승한 결과다.
조선 왕 27명도 못본 조선왕조실록… 당신은 볼 수 있다
“이제 《태종실록(太宗實錄)》을 춘추관(春秋館)에서 이미 그 편찬을 마쳤으니, 내가 이를 한번 보려고 하는데 어떤가." 하니,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제학 윤회(尹淮)·동지총제 신장(申檣) 등이 아뢰기를, "(전략)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럴 것이다." 하였다.〈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1431년) 3월 20일〉
조선조 500년간 임금도 들춰보지 못했던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국보·보물 83건 196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상 최대 규모다.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 공동 주최로 20일 언론에 공개한 특별전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이다. 2017~2019년 3년 간 새로 지정된 157건 중 이동이 어려운 건축물·석불을 뺀 나머지의 ‘전입 신고’ 격이다(국보 12건 27점, 보물 71건 169점). 기관·개인·사찰 등 대여한 곳만 총 34곳에 이른다.
하나같이 귀한 유물들이지만 특히 눈여겨 볼 게 광해군일기·정조실록 등이 포함된 『조선왕조실록』 9점이다. 1973년 국보 151호로 첫 지정될 당시 누락됐던 판본이 지난해 추가로 지정되면서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특히 어람용(御覽用)이었던 ‘봉모당본’은 이번에 처음으로 일반 공개된다. 봉모당본은 선대 왕이나 왕비의 행장(죽은 이의 간략한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부록이었다. 일반 실록이 치자색을 물들인 일반 한지 표지라면 임금만 볼 수 있던 봉모당본은 푸른 비단을 둘러 자태부터 귀하다.
♣ 임금만 볼 수 있던… '봉모당본' 첫선
문화재청 황정연 학예연구사는 “실록이나 사초는 사관 외에는 볼 수 없다는 원칙이 조선 내내 지켜졌지만 18세기 들어 임금이 볼 수 있게 공식 행장만 별도 편찬한 게 봉모당본”이라고 설명했다. 영조, 정조, 철종, 헌종, 순조실록에 한해 전해지는데 이번 전시엔 정조실록 부록이 선보인다. 실록 편찬 당시 세초(洗草, 초고를 물에 씻어 없앰) 과정을 상상할 수 있게 한 ‘미디어테이블’을 곁들여 이해를 돕는다.
현재 국보로 지정된 실록은 총 2219책.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식(연월일 순)으로 정리한 실록은 임진왜란 후엔 4대 사고(史庫)인 정족산·오대산·적상산·태백산에 보관돼왔다. 일제강점기 때 적상산 사고본과 오대산 사고본 일부가 창덕궁 장서각으로 이관됐는데,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월북 학자 및 북한군이 장서각 소장본을 다수 반출해갔다. 북한은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리조실록』을 선보였다. 때문에 1973년 국보 지정 땐 정족산(1187책)과 태백산(848책) 사고본이 중심이었고 오대산본은 일부만 포함됐다. 그러다 2017년부터 2년 간 고서 소재지를 샅샅이 조사한 결과 일부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극적으로 발견되면서 현재의 위용을 갖췄다.
또 주목할 것은 간송미술재단 소장유물 22건이다. 특히 보물 제1986호 심사정의 ‘촉잔도권’은 이제껏 간송미술관 외부에서 공개된 적 없는 대작(가로 약 8m)이다. 김홍도와 함께 조선후기 대표화가로 꼽히는 심사정(1707~1769)이 역동적인 필법과 아름다운 채색으로 중국의 관중에서 사천으로 가는 험난한 길인 촉도(蜀道)를 묘사했다. 1936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5000원을 주고 작품을 구입해 일본에서 6000원을 들여 복원했다. 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 할 때다.
이번 전시에선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보물 제2029호)와 나란히 배치됐다. 이인문(1745~1824 이후)이 심사정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가로 폭 8.5m에 이르는 산수화로 460여명에 이르는 인물들까지 담아 일종의 풍속화 역할도 한다. 두 작품이 한 공간에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산무진도’의 세부를 잘 볼 수 있게 가로 35m, 높이 3.5m 대형 벽에 디지털 스캔으로 이를 재현한 것도 볼거리다. 다만 ‘촉잔도권’의 경우 8월12일 이후엔 영인본 전시로 대체될 예정이다.
이밖에도 정선이 금강산 1만2000봉을 그린 ‘풍악내산총람도’(보물 1951호),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보물 제1970호), 신윤복의 ‘미인도’(보물 제1973호, 8월12일부터 전시) 등도 일제히 나들이했다. 새 보물 지정 기념이라곤 하지만 간송 측이 유물을 이 같은 규모로 외부에 내준 것은 처음이다. 간송미술관 관계자는 “현재 수장고 신축공사가 진행 중인데다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올해 정기전시회는 없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가 당분간 간송 유물을 접할 유일한 기회란 얘기다. 다만 유물들이 3주 단위로 번갈아 전시돼 교체 시점(8월 12일, 9월4일)을 체크해서 관람해야 한다.
문화재청이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새 보물 납시었네-新(신)국보보물전 2017~2019'를 오는 7월 22일부터 9월 27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다고 7월 20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새로 지정된 국보와 보물 157건 중 건축 문화재와 중량이 무거운 문화재 등을 제외한 83건 196점(국보 12건 27점, 보물 71건 169점)을 공개하는 자리로, 국보와 보물 공개 전시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문화재 대여 기관만도 총 34곳에 달하며 온라인 전시도 병행한다.
♣ 간송 '미인도' 등 교체 전시… 예약 관람 필수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두 번 연기됐다가 개막을 맞은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017년 새 보물 전시회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인데, 규모로는 역대급”이라고 강조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도 “일부 유물이 교체되므로 두 번은 봐야할 정도로 귀한 기회”라고 말했다. 강경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는 “2018년 ‘대고려전’의 경우 300여건의 유물이 공개됐지만 그 중 국보·보물은 10여건에 불과했다. 이처럼 개인·사찰 소장의 국보·보물까지 한데 모으는 일은 흔치 않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역사를 지키다 ^예술을 펼치다 ^염원을 담다 등 총 3부로 구성됐다. 새 국보로 승격된 『삼국사기』(국보 322-1호) 『삼국유사』권 1~2(국보 306-3호)를 시작으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인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국보 제327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소장), 고려 초기의 청자 제작을 보여주는 ‘청자‘순화4년’명 항아리‘(국보 제326호, 이화여대 소장) 등 다채로운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라인 예약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휴관일 없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2시간 단위로 200명 제한한다. 오는 7월 22일부터 9월27일까지다.
심사정의 '촉잔도권'과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국보 320호 월인천강지곡 권상
국보 327호로 지정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신윤복 필 미인도
삼공불환도
'김정희 필 대팽고회'(보물 1978호)
이순신 관노와 동침?… 난중일기 완역자의 답
‘이순신 장군이 관노(官奴)와 동침했다’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이후 한 네티즌이 ‘이순신 장군도 관노와 잠자리를 했다’고 주장한 뒤 ‘시청 공무원을 조선시대 노비에 견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400여년 전 이순신 장군의 사생활이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이순신 관련 기록에서 이순신 장군과 관계를 가진 여성은 공식적인 처·첩 3명 외에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난중일기’를 완역한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7월 20일 “‘난중일기’의 어느 부분에도 관노 또는 노비·기생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노승석 소장은 7월 21일 오후 2시 국회 소통관에서 덕수이씨 대종회와 덕수이씨 충무공파 종회가 성명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관련 자료를 공개할 예정이다. 이순신 장군의 조강지처는 상주 방씨 방진(方震)의 딸이었고, 후처는 해주 오씨였다. 여기에 윤연(尹連)의 누이인 ‘부안댁’ 윤씨가 첩으로 있었다.
노승석 소장은 “이순신 장군의 여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은 이렇게 처 2명과 첩 1명이 전부”라고 했다. 그러면 기록과 달리 ‘이순신 장군이 노비와 동침했다’는 인식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난중일기’에 나오는 기록들 중 이와 관련된 것은 대략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여산의 관노 집에서 잤다는 기록 ②여자종으로 추정되는 개(介), 여진(女眞)과 함께했다는 기록 ③최귀지(崔貴之)라는 여성이 와서 잤다는 기록 ④관기 내산월(莢山月)이 이순신 장군을 찾아왔다는 기록이다.
① 관노의 집에서 잤다?
이것은 ‘난중일기’ 1597년 4월 21자에 나오는 기록이다. “저녁에 여산(지금의 전북 익산시 여산면) 관노의 집에서 잤다.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夕宿于礪山官奴家, 中夜獨坐, 悲慟何堪! 悲慟何堪!).” 문제의 ‘관노’란 말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문장을 잘 들여다보면 ‘관노의 집에서 잤다’는 것일 뿐 ‘관노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구나 ‘노비(奴婢)’의 ‘노(奴)’는 남자 종, ‘비(婢)’는 여자 종을 뜻하기 때문에 이 ‘관노’는 남성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순신 장군 최악의 고난기였다. 모함을 받고 의금부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고 파직된 뒤 모친상을 당했다. 상제의 몸으로 경남 합천까지 백의종군하러 가는 길에 누추한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비통하다’는 말을 거듭 쓴 것이다. 노승석 소장은 “이런 상황에서 여인과 잠자리를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주자가례’ 삼년상(三年喪)조의 ‘남녀가 방을 달리한다(男女異室)’는 내용과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②‘ 개’ ‘여진’과 함께했다?
‘난중일기’ 1596년 3월 9일에는 ‘개여지공(介與之共)’이란 말이 나온다. 여자종의 이름으로 보이는 ‘개’와 함께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같이 잠을 잤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까? 노승석 소장은 “함께 공(共)을 쓴 용례가 ‘난중일기’에 모두 72번 나오는데, 이것은 평소 일상적인 만남을 의미하는 관용적인 표기일 뿐 잠자리의 의미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1595년 9월 6일에는 ‘조방장(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이 와서 함께했다(助防將來共)’고 썼고, 1596년 6월 24일에는 ‘경상수사(원균)도 와서 함께했다(慶尙水使亦來共)’고 기록했다.
그런데 1596년 9월 14일과 15일에 ‘여진(女眞)’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이것을 ‘여진족’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여성의 이름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문제는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이 ‘난중일기’를 번역할 때 ‘여진’의 뒤에 나오는 글자를 각각 20과 30을 뜻하는 ‘입(卄)’과 ‘삽(卅)’으로 봤다. 그래서 이것을 ‘성관계 횟수’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노승석 소장은 “인명 뒤에 숫자가 있다면 의미가 통할 수 없다”며 “이것은 초서의 ‘공(共)’이라는 글자라는 것이 다수의 고전·초서 전문학자들 의견”이라며 “2005년 ‘난중일기’ 번역에서 이를 바로잡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시 ‘여진공(女眞共)’, 즉 ‘여진과 함께했다’는 뜻이 되며, 같이 잠을 잤다는 의미로까지 해석할 수는 없게 된다. 만약 여자와 잤다는 의미였다면 ‘가까이하다’는 뜻으로 ‘근(近)’자를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자 종의 이름이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지방 관리가 근무하는 군(郡) 이하는 노(奴·남자 종) 2명, 비(婢·여자 종) 3명을 둔다”고 했다. 관아에서 뒷바라지하는 노비를 두는 것은 국법에 규정된 것이기 때문에 이상할 것 없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여진’이란 인물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2001)에 등장해 더욱 잘 알려지게 된 인물이다.
‘술상을 들고 들어온 관기(官妓)’로 묘사된 여진과의 잠자리는 소설 속 이순신 장군의 1인칭 서술을 통해 ‘나는 병신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속은 따뜻하고 조붓했다’는 등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여진은 끝내 시체로 발견되고, 이순신 장군은 슬픔을 누른 채 ‘내다 버려라’고 명령한다. 이 소설은 이순신 장군이 노비와 관계를 맺었다는 일반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소설가 김훈은 본지 통화에서 “‘난중일기’의 해당 부분을 보고 소설의 도입부를 쓴 것”이라며 “기록에 여진이란 인물의 신분은 나오지 않지만 아마 사대부집 귀부인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에 상민(常民)으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김훈은 최근 이 문제가 불거진 것에 대해 “논란이 되는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개입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③ ‘귀지’가 와서 잤다?
‘난중일기’ 1596년 8월 19일자엔 ‘광주목사 최철견의 딸 귀지가 와서 잤다(崔女貴之來宿)’는 기록이 있다. 역시 일상적으로 ‘숙박했다’는 의미의 ‘숙(宿)’이란 글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앞서 이순신 장군이 여산 관노의 집에서 묵었다는 기록에서도 역시 숙(宿)자를 썼다.
④ ‘내산월’은 누구인가
먼 길을 걸어 이순신 장군을 찾아온 기생의 존재도 ‘난중일기’에는 보인다. 한양의 관기였다가 전남 영광의 관기로 옮긴 내산월(莢山月)이라는 기생이었다. ‘난중일기’ 1596년 9월 11일자에는 이순신 장군이 내산월과 만난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신 후 헤어졌다’고만 돼 있을 뿐,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 밖에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 은진(恩津) 등 지체 낮은 여인으로 추정되는 이름도 ‘난중일기’에 등장하지만, 그저 이름만 나올 뿐이다.
이순신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평가는 대체로 ‘여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항복은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란 글에서 “이순신이 군영에 있었던 7년 동안 몸과 마음이 곤고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在軍七年, 苦身困心, 未嘗近女色)”고 했다. 윤휴와 최유해도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진영에 있을 때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겨우 4시간 자고서 새벽까지 작전을 모의했다”고 기록했다.
이순신 장군의 가문인 덕수이씨대종회는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은 ‘난중일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말로 충무공의 존엄한 정신과 업적을 크게 훼손시키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일부에선 “설사 이순신 장군이 노비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해도, 당시 기준에 따르면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사실 관계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노비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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