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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1월 20일 목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을 죽인 마타티아스는,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이들을 모아 광야로 내려가 자리를 잡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시며, 도성의 멸망을 예고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5-29
그 무렵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이번 한 주 동안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여정을 복음으로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수난하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예수님의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독백과도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2)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19,42).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도시가 평화를 알지 못하고 평화를 볼 눈이 없음에 깊이 탄식하십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이사 32,17 참조). 그리고 정의는 ‘그의 것을 그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마땅한 흠숭을 드리고, 내 이웃을 그 존엄에 맞갖게 존중해 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을 없애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를 지키려 합니다. 평화와 어울리지 않는 수단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1219년, 십자군 전쟁의 역사 속 가장 치열하였던 시기에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 하나가 이슬람 진영 한복판에 찾아들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그는 이 전쟁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며 하느님의 뜻은 오로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형제적 삶을 사는 데 있음을 선포하고자, 무장하지 않은 ‘평화의 사절’로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오늘날까지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머무르며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있는 성지들을 돌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평화의 발걸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김동희 모세 신부)
하느님께서 나 때문에 우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최근 누군가 때문에 눈물 흘리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그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돌아서서 남몰래 홀로 흐느끼는 그의 모습이 안스러워서, 그가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과 상처가 극심해서...
갈 길 잃고 방황하는 자녀들, 잘못된 길이 분명한데, 끝도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녀들 때문에 밤낮없이 기도하며, 대성통곡 터트리는 부모님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라는 게 뭔지, 자식이라는 게 뭔지...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도 우십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때문입니다.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 때문입니다. 그리로 가면 멸망의 길이 뻔한 데도, 그 어떤 타이름이나 경고의 질책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그 길로 직진함의 끝이 얼마나 참담하고 혹독한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루카 19, 43-44)
사실 루카 복음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는 자비의 책입니다. 인간 말종 자캐오에게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예리코의 눈먼 사람에게 새 삶을 선물하셨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던 나병 환자들에게 보송보송한 피부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당대 유명한 죄 많은 여인의 마음을 받으시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결핍, 우리의 방황, 우리의 죽음을 결코 견딜 수 없었던 주님께서 오늘은 우리 때문에 우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왕의 왕, 삼라만상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가련한 한 인간, 바로 ‘나’ 때문에 우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롭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런저런 고통과 상처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는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또 다시 우실입니다. 또한 끝까지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우리를 보고 우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천년 전 영적인 눈이 먼 동포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도성,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끝끝내 우상숭배에서 돌아서지 않는 유다를 바라보시며 우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를 보시고 또 우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다섯째 날에는 예전에 다니던 '동일 침술원'을 다녀왔습니다. 예전에도 허리가 아프거나, 목이 아프면 찾아가서 치료받았습니다. 원장님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잘 보았습니다. 원장님은 저의 골반이 많이 틀어져서 허리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하셨듯이, 침을 놓았고, 골반을 교정하는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평소에 몸을 자주 풀어주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원장님을 찾아뵙고 치료받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에, 예전에 자주 갔던 '엉클통'이라는 식당에 갔습니다. 식당 사장님은 20년 전에 갔던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세월의 흔적으로 머리는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했지만, 다른 모습은 그대로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동일 침술원 원장님은 늘 같은 자리에서 '와서 보라'고 합니다. 원장님을 만난 사람은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원장님을 만난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원장님에게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저도 몇 년 동안 다녔지만, 나중에야 원장님이 보지 못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엉클통 사장님도 3번이나 식당의 자리를 옮겼지만, 늘 한결같은 맛과 친절로 '와서 보라'고 합니다. 거짓과 위선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늘 한결같은 사람이 주는 믿음과 성실함은 삶을 살아가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춘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켜놓고 됫박으로 가려 놓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작년 12월 3일에 ‘비상계엄’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1년이 되어갑니다.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하였고, 헌법재판소는 그 탄핵을 인용했습니다. 6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한국은 새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비상계엄을 막으려는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에 모였습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려는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 거리에 모인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이 있었습니다.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던 군인이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를 건너온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소금은 물에 녹아듭니다. 그래서 음식에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물은 소금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소금은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물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물과 기름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떠 있는 기름은 물에 녹아들지 않습니다. 물은 기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기름 역시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강에 있으면서도 더 넓은 바다로 가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때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한국에서의 사목 방침을 고수하면 현지에 있는 신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현지에 있는 신자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에게 현지의 상황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한국에서 온 신부님도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현지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사제 모임에도 잘 참석하면서 이해하고 경청하면 조금씩 현지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지에 있는 분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새로운 사목의 방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면 공동체는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물과 소금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어기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는 동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그때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마타티아스는 율법과 계명을 지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에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과 기름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앙이 물과 기름 같은 신앙으로 겉도는지, 물과 소금 같은 신앙으로 풍요로운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2)
감추어진 불신 거슬러 한결같은 믿음
잿빛어린 체념 거슬러 새하얗게 희망
물어뜯는 증오 거슬러 물들이는 사랑
검게물든 저주 거슬러 밝디밝은 축복
게걸스런 홀로 거슬러 신명나는 함께
날카로운 맞섬 거슬러 부드러운 스밈
무자비한 누름 거슬러 곰살맞은 섬김
가차없는 버림 거슬러 따사로운 품음
오만스런 차별 거슬러 살맛나는 평등
나살려는 죽임 거슬러 모두위한 살림
오늘의 성인
성 에드문도(Saint Edmund)
신 분 : 왕, 순교자
활동지역 :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
활동년도 : 841-870년
같은이름 : 에드먼드, 에드몬드, 에드문두스, 에드문드
841년 색슨(Saxon)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적인 가정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성 에드문두스 (Edmundus, 또는 에드문도)는 865년 젊은 나이에 이스트앵글리아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869년에 덴마크의 바이킹족이 노퍽(Norfolk)의 테트포드를 공격하자, 에드문두스는 자기의 군대를 데리고 용감하게 맞섰다. 잉글랜드(England)는 패하고 에드문두스 역시 살해되었는데, 아마도 포로생활 중에 죽은 듯하다.
그는 서퍽(Suffolk) 만의 혹슨(Hoxne)에서 체포되었는데, 그리스도교 왕국을 분할하라는 요구에 대하여 완강히 부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다가 나무에 묶인 채 화살을 맞고 운명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으며, 중세 시대에는 그를 공경하는 지역이 전 유럽으로까지 퍼졌다.
성인의 유해는 헬레스돈(Hellesdon)의 작은 목조 경당 옆에 묻혔다.
915년경 부패되지 않은 채 발견된 에드문두스의 유해는 베드릭스워스(Bedricsworth)로 옮겨졌다.
그 후 이곳은 ‘에드먼드 베리 (Edmund Bury)라고 불렀다.
1020년 덴마크의 크누트 2세 (Knut II)가 에드먼드 베리에 석조 성당을 건축하고 자기 동족들이 저지른 일을 보상함으로써 덴마크인과 앵글로 색슨인들 간의 화해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 일환으로 왕은 베네딕토회에게 그 인근 지방에 대한 관할권을 위임하고 상당한 토지를 하사하여 베네딕토회는 영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성 에드문두스의 문장을 화살이다.
성 펠릭스 (Felix)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발루아(Valois)
활동연도: 1127-1212년
같은이름: 펠리체
세르프로와의 은수자이던 펠릭스와 그의 제자 성 요한 마타는 무어인들로부터 포로들을 대속하기 위하여 성삼회를 세우고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요한은 스페인과 바르바리아에서 활동하고,펠릭스는 70 고령이었으므로 파리에 남아 마투룸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프랑스 지방을 사목하다가, 1212년 11월 4일에 세르프로와에서 운명하였다.
1240년경, 그의 수도회에는 6백명의 수도자들이 있었으니,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회원들은 그와 요한이 교황 우르반 4세에 의하여 1262년에 시성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1666년에 알렉산델 7세가 그들의 공경을 승인하였다.
성 그레고리오 (Gregory)
활동년도 : +9세기
신분 : 증거자
지역 : 데카폴리스(Decapolis)
같은 이름 :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소아시아 지방 테카폴리스에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열성적으로 성상파괴주의자들을 반대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에 의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다.
성 솔루토르 (Solutor)
활동년도 : +297년경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솔루또르, 솔루똘, 솔루톨, 쏠루또르, 쏠루똘
성 아드벤토르 (Adventor)
활동년도 ; +297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아드벤또르, 앗벤또르, 앗벤토르
성 옥타비우스(Octavius)와 성 솔루토르 그리고 아드벤토르(Adventor)는 로마 군인으로 이탈리아 북서부 토리노(Torino)에서 순교하였다. 토리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그들의 원순교록은 전해지지 않고, 후대에 그들의 이야기는 테반 군단 순교자들의 이야기와 연관을 갖게 되었다.
복녀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 (Mary Fortunata Viti)
활동년도 : 1827-1922년
신분 : 수녀
지역 :
같은 이름 : 메리, 미리암, 비띠, 포르뚜나따, 포르투나따
1827년 이탈리아의 베롤리(Veroli)에서 안나 펠리체 비티(Anna Felice Viti)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Maria Fortunata Viti)는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성장한 후 그녀는 베네딕토회의 수녀가 되어, 성체성사에 대한 위대한 애정을 갖고 살았다. 그녀는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