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맹복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돌암스님을 잘 알았다.
아버지에게 안긴 것보다 돌암스님에게 안긴 적이 훨씬 많았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천하의 오입쟁이였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많은 문전옥답 한자락 두자락 팔아서 분을 바른 여자들 치마폭에 다 처박아 넣고,
뭘 잘했다고 툭하면 엄마를 두드려 팼다.
어떤 날 밤은 웬 여자를 데려와 안방 아랫목을 차지해 엄마는 맹복이를 안고 아궁이 앞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엄마는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뒷산 외송암에 올라가 부처님 앞에 꿇어앉았다.
엄마가 천배를 올릴 때면 어린 맹복이는 돌암스님 품에 안겨 잠이 들기 일쑤였다.
맹복이 대여섯살 때 엄마는 산비탈에서 콩밭을 매는데 아버지는 술집 기생을 데려와 안방에 들어갔다.
문틈으로 들여다본 모습에 맹복이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이승을 하직하고 어린 맹복이는 외송암의 사미승이 되었다.
외송암 스님 일곱분 모두가 맹복이를 끔찍이 아꼈다.
때때로 맹복이는 외송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머니 무덤에 가서 눈물을 잔뜩 쏟곤 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딱 한번 외송암에 찾아와 토시와 신발을 맹복이한테 안겨주고,
집을 판 후 입술이 새빨간 여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두번 다시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맹복이는 밤이면 베개를 촉촉하게 적실 때도 있었지만 점점 엄마 생각도 뜸해지고 불자생활은 익숙해져 갔다.
무엇보다 주지스님인 돌암스님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해서 술과 여색에 빠진 아버지와 너무나 달라
맹복이는 믿음직스러웠다.
행자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주지스님과 다른 스님들도 맹복이가 바빠야 엄마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틈만 나면 심부름을 시키고 불경을 가르쳤다.
불경의 깊은 뜻을 어린 맹복이가 어찌 알까마는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을 자꾸 외우며 불심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법당에서 눈을 부비며 예불을 드리고 아침 공양을 하고 밭에서 일하는 스님들에게 새참을 갖다드리고
절간 마당 낙엽도 쓸었다
입동이 지나자 서리가 내리며 아침저녁 날씨가 쌀쌀해졌다. 찌뿌둥하던 하늘에서 기어코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눈이 감기는데도 맹복이는 자지 않았다.
사각사각 눈을 밟으며 장독대를 돌고 탑을 돌았다. 언제였던가?
어머니가 눈사람을 만들고 맹복이는 아장아장 걸어 숯 덩어리로 눈사람에다 눈을 붙이고….
그때, 바로 그때, 장옷을 깊게 눌러쓴 어머니가 절간으로 들어왔다.
“엄마∼” 자칫 소리치고 뛰어나갈 뻔했다. 탑 뒤로 몸을 숨겼다.
어머니도 기웃거리더니 주지스님 방 앞으로 가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불이 켜지고 방문이 열렸다.
장옷으로 온몸을 가린 어머니가 누가 볼세라 얼른 주지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맹복이가 주지스님 방 앞으로 가서 귀를 세웠다.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이 꺼졌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한방을 쓰는 동오스님의 코 고는 소리에 문풍지가 떨려도 맹복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닐 거야. 귀신일까? 귀신이라도 어머니면 좋겠네.’
새벽 예불을 드리며 맹복이는 주지스님을 빤히 쳐다봐도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 옛적 골목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니
주지스님 품에 안겼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주지스님으로부터 떨어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맹복이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주지스님 밥상에 밥그릇이 두개요, 수저도 두개, 겸상 차림이다.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는 목간통을 주지스님 방에 들여놓더니 더운 물로 채웠다.
맹복이 한방을 쓰는 동오스님에게 얘기를 털어놓아도 믿지를 않더니
열흘쯤 지났을 때 동오스님이 주지스님만 빼고 온 스님을 불러놓고 중론을 모았다.
그즈음 주지스님은 새벽 예불에도 나오지 않았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온 스님들이 주지스님 방 앞에 꿇어앉아 읍소를 했다.
“큰스님, 소문이 재가불자들 사이에서도 파다하게 퍼졌습니다요. 어떻게 수습할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모두들 들어오너라.” 주지스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다.
문을 열던 동오스님이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웁” 코를 막았다.
악취에 맹복이는 “우웩∼” 하고 토했다.
장옷을 벗은 젊은 여인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코는 문드러져 구멍만 보이고 온 얼굴에는 피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며 손마디는 다 떨어져 나갔다.
보름 전 추운 겨울날 밤,
갈 데가 없어 장옷을 깊이 눌러쓰고 주지스님을 찾은 젊은 여자 문둥이를 스님이 거둬준 것이었다.
“큰스님∼”
모든 스님이 엎드려 울었다.
주지스님은 목탁을 두드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반야심경 독경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더라.
첫댓글 반야 심경
사바 사바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