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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장희
선부군의 휘는 현일(玄逸)이고, 자는 익승(翼昇)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니, 본래는 월성인(月城人)이다. 상조(上祖)인 알평(謁平)은 표암(瓢巖)으로 탄강하여 신라(新羅) 시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으니, 곧 이른바 급량부대인(及梁部大人)이라는 분이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휘 우칭(禹偁)이라는 분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다. 그 때문에 월성과 재령의 구분이 있게 되었는데,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큰 인물이 배출되었다. 사재령(司宰令) 휘 일선(日善)은 부군에게 8세가 되는데 밀양(密陽)의 조음리(召音里)에서 대대로 거주하였다. 휘 오(午)를 낳았는데, 상사생(上舍生)으로 고려의 운세가 다하려는 것을 보고 함안(咸安)의 모곡리(茅谷里)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나오지 않았다. 지금 그 유허(遺墟)에는 아직도 자미화(紫薇花) 군락이 있는데, 그 일이 정 문목공(鄭文穆公 정구(鄭逑))의 함주지(咸州志)에 실려 있다. 그 손자 휘 맹현(孟賢)에 이르러 약관을 갓 넘겨 장원으로 급제하고 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는 등, 경학(經學)과 아망(雅望)으로 혜장(惠莊 세조(世祖)의 시호)ㆍ강정(康靖 성종(成宗)의 시호) 연간에 드러났다. 동제(東第)를 하사받았으며 옥서(玉署)의 관장(館長)이 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졸(卒)하니, 실로 부군에게 5세조가 된다.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휘 애(璦)는 여섯째로서 젊어서 영해(寧海)의 수령이 된 숙부 중현(仲賢)을 따라갔다가 그대로 고을의 대성(大姓)인 진성 백씨(眞城白氏)에게 장가들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마지막 벼슬은 울진 현령(蔚珍縣令)이었으며, 자손들이 마침내 영해 사람이 되었다. 증조(曾祖)의 휘는 은보(殷輔)로 음관(蔭官)으로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에 보임되었으며,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祖)의 휘는 함(涵)으로 두 번 급제하였으며, 중년부터는 병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벼슬은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시명(時明)으로 선교랑(宣敎郞)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지냈으며, 자헌대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김씨와 증 정부인 장씨이다. 3세가 추증된 것은 모두 부군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판서공(判書公)은 호탕하여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세속을 좇아 영합하려 하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있고 난 뒤에는 영원히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뜻을 지녀 능서랑(陵署郞)에 조용(調用)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세상의 추중을 받았다. 처음에 세 번 집을 이주하였는데, 만년에는 복주부(福州府)의 서쪽 두실원(兜率院)에 거주하였다. 부군에 이르러 또 일찍이 임하현(臨河縣)의 금양리(錦陽里)에 우거(寓居)하였다.
부군은 천계(天啓) 7년 정묘년(1627, 인조5) 1월 11일 인시(寅時)에 영해부(寧海府) 서쪽 인량리(仁良里) 자택에서 태어났다. 임신 중에 장 부인이 오색(五色)의 서기(瑞氣)가 집안을 찬란하게 두르고 그 속에서 어떤 대인선생(大人先生)이 문밖에 와서 임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고 나서 부군이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자질이 빼어난 것이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할 때에 부엌종이 판서공의 숟가락을 잃어버려 사방으로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는데, 부군께서 작두간 쪽으로 걸어가더니 뒤져서 찾아 주었다. 이는 전날 저녁에 우연히 풀단 속에 꽂아 둔 것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겨우 6세 때에 판서공의 곁에 있다가 갑자기 사람 눈썹의 가운데가 떨어져 있는 것을 가리키면서 참으로 곤괘(坤卦)의 효상(爻象)과 비슷하다고 말하니 판서공이 기이하게 여겼다. 인하여 다른 괘들의 효상(爻象)은 어떠한지 물으니, 주저함이 없이 묻는 대로 척척 응대하였다. 판서공이 크게 경탄하여 시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도 나무를 이용하여 단(壇)을 쌓고 문선왕(文宣王)의 위호(位號)를 게시(揭示)한 다음 제기를 가지고 읍양(揖讓)하는 예를 행하였다. 7세에 처음으로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총명하여 출중한 재주가 있었으며, 말을 내면 문득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을해년 여름에 화왕시(花王詩)를 짓기를,
하니, 사람들은 이미 그가 훗날 왕을 보도(輔導)할 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씨(仲氏) 존재 선생이 일찍이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원수(元帥)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수복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이는 그 당시에 오랑캐가 막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선생이 매우 탄복하여 기이하게 여겼다.
병자년 겨울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납매시(臘梅詩)를 읊기를,
하니, 이는 종국(宗國)의 비상한 변고를 너무도 가슴 아파한 것이다.
일찍이 방원도(方圓圖)를 만들어 천지(天地)를 형상하였는데, 선천(先天) 팔괘(八卦)를 나열해 적어서 동서남북의 방위를 정하였다. 또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8괘, 16괘, 32괘, 64괘가 생겨나는 차례를 배열하여 도(圖)를 만들었다. 또 1원(元)ㆍ12회(會)ㆍ12만 9600년의 수를 추연(推衍)하여 설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모두 13세 이전의 일이다. 이를 본 당시의 장로(長老)들은 모두 칭탄(稱嘆)하면서 “훗날에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다.” 하였다.
경진년 봄에 판서공을 따라 부(府)의 서쪽 석보촌(石保村)으로 이거하였다. 집 가에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숭봉(崇奉)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리고 한아름이 넘는 큰 나무가 있어서 감히 범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부군께서 일소(一掃)하여 제거해 버리니 사람들이 어렵게 여겼다. 이때부터 날마다 정업(正業)을 두었는데, 간간이 혼자 공부할 때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들을 많이 탐독하였다. 특히 《손오병법(孫吳兵法)》과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즐겨 보면서, 고인들의 임기응변(臨機應變)의 뜻을 고구(考究)하였다.
갑신년 18세 때에 스스로 외면으로만 헛되이 내달리는 것의 잘못을 깨닫고 더욱 내면 성찰(省察)의 공부에 뜻을 두었다. 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는데, ‘게으름을 경계함〔戒怠惰〕’, ‘장난이나 완물을 경계함〔戒戲玩〕’, ‘전일하지 못함을 경계함〔戒不專〕’, ‘언동을 경계함〔戒言動〕’, ‘잘난 체하는 것을 경계함〔戒矜大〕’ 등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조존(操存)하고 성찰하는 것이 진실로 이미 실제로 일삼는 바가 있었고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해에 숭정황제(崇禎皇帝 명나라 의종(懿宗))가 사직(社稷)과 함께 순국(殉國)하고 중원(中原)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침식을 편안히 하지 못하였다. 몇 년 뒤에 강씨(姜氏) 성을 가진 자가 산동(山東)에서 창의(倡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임의로 조정을 대신하여 〈산동의 사민들에게 보내는 격문〔檄山東士民書〕〉을 지어봄으로써 그 어쩌지 못하는 울분의 뜻을 부치기도 하였다.
일찍이 어버이의 명으로 두 번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그때마다 합격하였으나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성시(省試)에서 파방(罷榜)되자 마침내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또 판서공을 따라 영양현(英陽縣) 수비(首比)의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 거처를 ‘갈암(葛庵)’이라고 편액(扁額)하고 기문(記文)을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한결같이 독서하면서 뜻을 구하는 것을 일삼고 담담히 세상에 뜻이 없는 사람처럼 하였으나, 때로 무릎을 감싸고 길게 읊조리면서 시속(時俗)을 근심하는 뜻을 하루도 마음에서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앞서 효종대왕(孝宗大王)의 국상(國喪) 때 송시열(宋時烈)이 사종복제(四種服制)에 있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설을 제창하고 단정하여 국시(國是)로 삼아 버렸다. 병오년 봄에 영남(嶺南)의 유생(儒生)들이 일제히 성토(聲討)하여 장차 소(疏)를 올리는 거사(擧事)를 행하려 하면서 부군에게 소문(疏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부군은 이에 예(禮)의 뜻을 추원(推原)하여 일일이 그 설을 공파(攻破)하였는데, 소가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목재(木齋) 홍공 여하(洪公汝河)가 문학(文學)으로 일세의 논의를 압도하여 남을 인정하는 경우가 적었는데, 이 소를 보고서는 옷깃을 여미고 탄복하여 이르기를, “문장이 아건(雅健)하고 증거가 정박(精博)하여 기왕의 잘못을 바로잡고 후세의 의혹을 씻어 주기에 충분하다.” 하고는, 마침내 마음으로 인정하여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정미년 겨울에 절강(浙江) 사람 진득(陳得)ㆍ증승(曾勝)ㆍ임인관(林寅觀) 등 근 100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탐라(耽羅)의 경계에 정박하였는데, 의관(衣冠)의 문아(文雅)함이 성대하였다. 목사(牧使)가 장계로 아뢰니, 조정에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장차 연경(燕京)으로 압송하려고 하였다. 부군은 이 소식을 듣고서 상심하여 마지않았다. 창의(倡義)하여 대궐 문 앞에서 그들을 고향 땅으로 돌려보낼 것을 청하고자 하여 한두 동지들에게 알리고, 또 도내(道內)에 이문(移文)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 글 첫머리에서 의리란 사람마다 똑같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다음으로는 황조(皇朝 명(明)나라)의 망극한 은혜를 말하였다. 그리고 끝에는 “이것은 바로 수십 년 이래로 소망하였으나 얻지 못했던 것으로서, 참으로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울면서 죄과(罪科)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여 충성을 바쳐야 할 때입니다. 관원을 보내서 위문하고 인도하여 서울로 들어오게 하여 명나라가 남쪽으로 옮긴 뒤로 황제의 기거 상황이 어떤지를 알아보고 또 그들의 갈 길을 터 주고 부족한 것을 도와주어, 우리가 원통함을 참으면서 형세상 어쩔 수 없었다는 뜻과 조금도 전진하고 퇴각하는 것을 지체하는 태도가 없었다는 것을 전달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신인(神人)의 바람에 부응하고 천하의 의심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며, 예의와 염치의 풍속이 영원히 땅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일이 이미 어쩔 수 없게 된 것을 알고는 마침내 그만두었다.
부군은 임천(林泉)에서 40여 년간을 은거하셨다. 안으로는 금옥(金玉) 같은 형제들과 서로 탁마(琢磨)하는 유익함이 있고 밖으로는 일시의 명류(名流)들과 서로 그 의심나는 바를 질정하고 날마다 듣지 못했던 바를 들으니, 벗들과의 교유(交遊)가 더욱 넓어지고 성대한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그러나 부군은 스스로를 팔아 현달(顯達)을 구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 때문에 가난과 질병, 우환 중에서도 시골 바닷가 어촌(漁村)에서 자잘하고 비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니, 이미 다시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것이다.
금상(今上 숙종(肅宗))께서 즉위하신 뒤, 재관(齋官 영릉 참봉(寧陵參奉))에 임명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보다 한 달 전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였다. 2년 뒤 병진년 여름에 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는데, 그때까지도 아직 상기를 마치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 복을 벗자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영해부의 서쪽 남악(南嶽)에 있는 우사(寓舍)로 돌아왔다. 다음 해 여름에 천거해 주는 자가 있어서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초수(超授)되었는데, 비로소 나와 명에 응하였다. 곧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겨져 한 달여 동안 봉직하다가 정고(呈告)하고 고향에 내려왔는데, 대부인의 춘추(春秋)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상이 바야흐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는데, 미수(眉叟) 허 문정공 목(許文正公穆)이 일찍이 상에게 아뢰기를, “근래에 이모(李某)를 보니, 참으로 유자(儒者)였습니다. 듣기로 그는 역학(易學)에 특히 조예가 있다고 하니, 장래에 경연에서 권강(勸講)하는 데 있어서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고 한다. 그해 겨울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유지(有旨)를 내려 소명(召命)에 응하기를 재촉하였다. 도중에서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마침내 직임에 나아갔다. 경연의 신하들이 건의하여 경연에 입시하게 하도록 청하여 두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유지를 내려 포유(褒諭)하였다. 마침 상이 병환이 있어서 오래도록 경연을 열지 못하였는데, 어떤 일로 인하여 체직되어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옮겨졌다가 곧 다시 지평에 임명되었다.
부군은 지난날 분에 넘치게 시용(試用)되었다가 조금도 걸맞은 보답을 한 것이 없었는데 다시 은총을 입는 것은 의리상 근거가 없다고 여겨 글을 올려 고사(固辭)하였다. 그리고 소회(所懷)를 조목조목 아뢰었으니, 그것은 정학(正學)을 밝혀서 대본(大本)을 세우고, 기강(紀綱)을 진작시켜 풍속을 면려(勉勵)하고, 공도(公道)를 넓혀 왕법(王法)을 바루고, 충간(忠諫)을 받아들여 옹폐(壅蔽)를 제거하고, 민정(民情)을 살펴 실혜(實惠)를 행하는 등의 다섯 가지였다. 그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학을 밝혀 대본을 세운다’는 대목에서는,
하였다.
‘기강을 진작시켜 풍속을 면려한다’는 대목에서는,
하였다.
‘공도를 넓혀 왕법을 바르게 한다’는 대목에서는,
하였다.
‘충간을 받아들여 옹폐를 제거한다’는 대목에서는,
하였다.
‘민정을 살펴 실혜를 행한다’는 대목에서는,
하였다.
당시에 상이 새로 큰 병에 걸려서 아직 조섭(調攝) 중에 있었으므로, 또 고인(古人)들이 몸을 보전하던 방도를 가지고 말미에서 거듭 고하기를,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정(中正)한 기운을 받아 생겨난 것이어서 동작(動作)과 위의(威儀), 거처(居處)와 음식(飮食)에 준칙이 없는 것이 없으니, 그 절도를 조금이라도 어기면 반드시 우환을 불러옵니다. 필부에게 있어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임금은 지위가 이미 극도로 높아서 일욕(逸欲)이 쉬이 생겨나고 봉양(奉養)이 완비되어 방범(防範)이 더욱 어려운 경우이겠습니까. 자산(子産)이 말한 ‘한 가지만 하면 환난이 생겨난다.’라는 것을 참으로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성상께서 편찮으시어 신료와 백성들이 근심하며 애를 태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종조(祖宗朝)께서 보위를 물려준 막중한 뜻을 유념하시고 두 분 자전(慈殿)께서 전하의 체후(體候)를 근심하시는 뜻을 생각하소서. 허물과 화란의 싹이 위태하고 어려울 때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연안(宴安)을 즐길 때라든지 정욕(情欲)이 움직일 때에 싹튼다는 것을 아시고, 이에 기거(起居)의 절도를 알맞게 하여 아직 싹트지 않은 욕구를 막도록 하소서. 천명(天明)을 우습게 여기지 마시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도 하늘이 임한 듯이 하소서. 그렇게 하면 근골(筋骨)이 견고해져서 혈기(血氣)가 안정되며 지려(志慮)가 전일해지고 청명(淸明)함이 회복될 것이니, 수명(壽命)이 어찌 상종(商宗)만 못하겠으며, 치적(治績)이 어찌 성강(成康)만 못하겠습니까. 신의 간절한 우충(愚衷)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절실해집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상이 답하기를, “아뢴 다섯 조목은 절실하지 않은 말이 없으니, 좌우에 놓아두고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어서 마장(馬粧) 1부를 하사하여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였다. 부군께서는 즉시 소를 올려 사사(辭謝)하고 이어서 경연관(經筵官)의 직책을 해면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조정의 중신(重臣)들 중에 말다툼으로 인해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상대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추어내어 논쟁하기까지 하였다. 부군은 그들이 명절(名節)을 무너뜨려 조정을 욕되게 한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고 하여, 한(漢)나라 때 어사(御史)가 공승(龔勝)과 하후상(夏侯常)을 탄핵했던 일과 송(宋)나라 때 팽 중승(彭中丞)이 구양수(歐陽脩)를 논박했던 사실을 인용하여, 장차 사판(仕版)에서 삭출(削黜)하는 죄로 논하려고 하였는데, 동료 관원들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인혐(引嫌)하여 체직되었다. 규례에 따라 부사직에 제수되었는데, 아직도 경연관의 직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감히 떠난다는 말을 하지는 못하였다.
상의 질병이 치유되자 대신들이 종묘(宗廟)에 고하고 진하(陳賀)받기를 청하였는데, 상은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거듭 힘써 청한 뒤에야 마침내 허락하였다. 그리고 종계(宗系)에 관련된 무고(誣告)를 당한 일로 인해 청(淸)나라에 변무사(辨誣使)를 보내려는 논의를 하였다. 부군은 밀소(密疏)를 올렸는데, 대략에,
하였는데,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하였다.
얼마 안 있어 도로 지평에 제수되었다. 학문의 방도를 알지 못하고 실제 사례에 밝지 못하다는 이유로 벼슬을 내렸던 전후의 명을 도로 거두어 달라고 청하고, 이어서 중비(中批)로 관직을 제수하는 잘못에 대해 말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곧 서함(西銜)에 체부(遞付)되었다. 3월에 정고(呈告)하고 돌아와 근친(覲親)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경연을 폐하였기 때문에 한 통의 상소를 지어 바치려고 하였는데, 그 내용에, “성상께서 오래도록 병환을 앓으신 뒤라 기운이 아직 모두 회복되지 않으셨으니 비록 날마다 경연을 열지는 못하더라도, 또한 자주 유신(儒臣)을 접견하여 조석(朝夕)으로 자문을 구하셔서 근원을 맑게 하고 근본을 바르게 하여 총명을 개발하는 도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지인(知人)들이 임금을 번독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충고하여 마침내 중지하고 올리지 않았다.
6월에 또 지평에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령(鳥嶺) 아래에까지 나아갔다가 병으로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다음 해 여름에 조정에서 각 주현(州縣)의 수령들에게 명하여 역학(易學)에 밝은 사람을 뽑아서 보고하라고 하였는데, 본 고을 수령이 부군과 아우 항재공(恒齋公)을 천거하려고 하였다. 부군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전에 외람되이 시용(試用)되어 걸핏하면 낭패를 겪었으니, 이 어찌 《주역》의 진퇴소장(進退消長)의 이치에 밝은 사람의 행위이겠습니까.” 하고는, 고사(固辭)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상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임금이 배라면 백성은 물이다.〔舟水君民〕”라는 비유를 그림으로 그려 족자를 만들게 하고, 또 직접 그에 대한 설을 지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논하였다. 그 내용은, ‘학문을 좋아한다’, ‘어진 인재를 등용한다’, ‘충성스러운 간언을 받아들인다’,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즐겨 듣는다’, ‘재물을 천시하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는 다섯 가지 조목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정의 의론이 안정되지 못하고 세도(世道)가 날로 잘못되어 갔으므로, 부군이 탄식하기를, “성상의 총명하심이 역대의 왕들보다 훨씬 뛰어나 유충(幼沖)한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고서도 발분(發奮)하여 치적을 이루기를 도모하셨으니, 이를 미루어 나갔다면 거의 성대(聖代)의 치적을 다시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없이 세월만 보내면서 날로 그 기회를 잃어, 끝내는 위로 성상의 뜻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이는 대소 신료(臣僚)들이 잘된 일은 그 뜻을 받들어 성취시켜 주고 잘못된 일은 저지하여 바로잡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물러나 초야(草野)에서 은거하고 있지만 일찍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한마디 말로써 근폭(芹曝)의 정성이나마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주수도설(舟水圖說)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을 경전(經傳)에서 가려 뽑아 정리하여 6편을 만들고 《어제주수도설발휘(御製舟水圖說發揮)》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수천 자의 상소를 기초(起草)하여 반복해서 그 뜻을 밝힌 것이 완곡하고 간절하였는데, 궁극적인 귀결처는 학문을 좋아하라는 데에 있었다. 또 그 차집(次輯)한 뜻을 서술하기를,
하였다. 상이 읽고서 가탄(嘉歎)하여 호피(虎皮) 1령(令)을 하사하였다.
경신년 7월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다. 계해년 2월에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일이 있어 유지를 내려 직언(直言)을 구하였는데, 부군은 즉시 유지에 응하여 소(疏)를 기초하였다. 대략에,
하였다. 끝에서 다시 ‘천명(天命)에 응할 때는 진실로써 하고 형식적으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거듭 말하였다. 친구와 자제들이 다시 만류하여 그만두기를 청하면서, 화만 초래할 뿐 득이 될 것이 없음을 말하였는데, 부군은 개연히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일신(一身)의 화복(禍福)에 대해서는 내 이미 잊어버렸다.” 하였다. 그 글이 올라가자, 상이 비답하기를,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말해 준 성의는 내 가상하게 여긴다. 다만 그런 말들이 모두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영상(領相) 김수항(金壽恒)이 역적을 두둔한 죄로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마침 ‘직언을 구하는 명을 내려 놓고서 그 말한 자를 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는 이가 있어 무사하였다.
이때부터 향촌(鄕村)에서 한가롭게 지낸 것이 장차 6, 7년이었다. 기사년 4월에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상이 유지를 내려 돈독히 유시하기를, “내가 요즘 경학(經學)에 뜻을 두어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지만, 박학하고 아정(雅正)한 유학자를 얻어 곁에 두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이제 대신(大臣)의 말을 들으니, 그대가 독서하여 옛일에 해박하고 특히 경학에 정밀하다고 한다. 만약 연석(筵席)에 출입하여 경의(經義)를 토론한다면 반드시 보도(輔導)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이미 그대를 성균관 사업으로 삼았으니, 나의 뜻을 헤아려서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부군이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번연(幡然)히 생각을 바꾸기를 내 날마다 고대한다.”라고 유시를 내리기까지 하였는데, 또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곧 별도로 따뜻한 유시를 내리고 본도(本道)의 관찰사로 하여금 출사(出仕)하기를 권하게 하는 등, 각별한 은수(恩數)가 차례로 거듭해서 답지하였다. 부군은 시종 집안에 있으면서 해면되기를 청하는 것은 의리상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마침내 길을 떠나 광주(廣州)의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아직 도성(都城)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 사헌부 장령으로 옮겨졌다.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상이 전교하기를, “나를 멀리 버려두지 않고 경기(京畿)에까지 이르렀으니, 기쁘고 위로됨이 참으로 크다.” 하고는, 특별히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하였다.
마침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어 사저(私邸)로 나가 살았는데, 대신(大臣) 이하가 대궐에 엎드려 호소하고 조정에서 다투어 간언(諫言)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감히 그에 대해 말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는 하교가 있었다. 부군은 ‘물러나기를 청했다가 승진하게 되었으니 결단코 염치없이 받을 수 없다. 또 초야(草野)의 보잘것없는 신하가 남다른 대우를 지나치게 받았으니 어찌 엄한 명이 내렸다고 해서 나라에 변고가 있는 때에 끝내 한마디 말도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즉시 글을 올려 고사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조정의 기강을 다시 엄숙히 하시고 모든 정사를 일신하시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강학(講學)에 전념하시니, 이는 장차 예법(禮法)을 따르고 이치를 따라서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근본으로 삼고, 눈과 귀를 총명하게 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허물을 보충하는 바탕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나라 안에서 장차 이남(二南)의 교화가 행해지고 조정에서 군신(君臣)이 화합하는 성대한 정치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이 방금 경기 고을에 도착하여 삼가 저보(邸報)를 보니, 마침 주상(主上)의 마음이 편치 않으셔서 중궁(中宮)을 동요케 하시니, 참으로 어리석은 신이 평소에 전하께 바라던 바가 전혀 아닙니다. 신은 듣건대, 배필(配匹)의 관계는 인륜(人倫)의 시작이며 풍화(風化)의 근원이라 하니, 처음을 신중히 하고 마침을 공경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혹시라도 불행히 인륜의 변고에 처하게 되더라도 도리(道理)를 힘써 다하고 은의(恩義)를 곡진하게 다해야 하는 것이고, 갑자기 엄한 결단을 내려 거조(擧措)가 합당함을 잃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앞에서 행하였다가 어진 황제의 허물이 됨을 면치 못하였고, 송나라 인종(仁宗)이 뒤에서 행하였다가 끝내 백옥(白玉)의 티가 되었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고 경계하십시오. 신이 또 근일(近日)의 하교를 들으니, 기휘(忌諱)하는 바에 저촉되는 말을 하면 곧바로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옛날 현철(賢哲)한 임금이 비방목(誹謗木)을 세우고 감간고(敢諫鼓)를 설치하여 뭇사람의 의견을 듣고 천근한 말까지 살펴서 선(善)은 드러내고 악(惡)은 감춘 뜻이 아닌 듯합니다. 내리신 명령을 속히 도로 거두시어 언로(言路)를 넓혀 주소서.” 하고는, 현(縣)과 도(道)를 통해 올렸으나 금례(禁例)에 걸려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송나라 정협(鄭俠)이 금법(禁法)을 어기고 체마(遞馬)를 이용하여 상소를 올렸던 일을 본떠서 조리(曹吏)를 시켜 승정원에 바로 올렸으나, 또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군은 진언한 것이 바쳐지지 않고 떠나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 진퇴에 근거할 바가 없다는 이유로, 두 번, 세 번 사양하여 반드시 체직되기를 기약하였으나 상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5월에 이조 참의로 옮겨졌다. 간절히 사양하였는데, 대략에, “신이 바야흐로 전에 내리신 명을 취소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도리어 새로운 직명에 제수되고 보니, 마치 신으로 하여금 염치를 무릅쓰고 자리를 훔치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농단(壟斷)하여 이익을 그물질하는 자의 소행이니, 전하께서는 이 염치없는 사람을 얻어서 장차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속히 파면을 명하시어 관방(官防)을 중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차 사직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예기(禮記)》에 ‘골육의 친척은 끊지 않는다.’ 하였고,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공족(公族)은 공실(公室)의 지엽(枝葉)이다. 만약 그들을 제거한다면 뿌리가 비호받을 곳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난번 허견(許堅)과 이남(李枏)이 화란(禍亂)을 기도한 반역죄는 참으로 하늘의 주벌(誅伐)을 피할 수 없으나, 이연(李㮒), 이환(李煥), 이혁(李爀)의 경우는 왕손(王孫)과 왕증손(王曾孫)인 지친(至親)입니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의 네 아들을 후(侯)에 봉하였고, 송나라 태종(太宗)은 진왕(秦王) 정미(廷美)의 아들들의 관작을 회복하여 황질(皇姪)로 삼은 뜻으로 보건대, 임금이 죄가 있는 공족을 처리하는 도리는 참으로 일반 사람과는 다르니, 굳이 연좌(緣坐)의 형률(刑律)을 가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성상께서는 경신년 옥사가 무고(誣告)라는 실상을 통촉하시고 측연히 상심하시어 하늘에 밝히고 지하(地下)에 고하는 은택을 베푸려고 하셨으니, 이는 요순(堯舜)의 마음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자세히 따져서 살펴 처리하지 않고 상법(常法)만을 고수해서야 되겠습니까. 아, 세 사람이 혹은 외딴섬에 있고 혹은 바닷가에 옮겨져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지낸 지 이미 10년이 지났습니다. 만약 이 세 사람이 안개와 이슬과 이내와 장독(瘴毒)에 해를 입어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전하께서 어찌 척포두속(尺布斗粟)의 노래를 괴로워하시지 않겠으며, 사변(事變)에 처하여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한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두인(吳斗寅) 등이 비록 망언(妄言)의 형률(刑律)을 범하기는 하였지만 그 자식과 사위와 형제와 숙질(叔姪)까지 금고(禁錮)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상진(李尙眞)이 금령(禁令)을 무릅쓰고 소(疏)를 올렸는데, 일찍이 대신(大臣)의 반열에 있었고 나이도 많으니 또한 궁벽한 변방에 찬배(竄配)시켜 죽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체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연, 이환, 이혁, 오두인에 대한 것은 특별히 청한 것을 윤허하고 경신년의 추안(推案)에 대해서도 상세히 고열(考閱)하여 처분하도록 허락하였다. 다만 이상진의 일은 윤허를 얻지 못하였는데, 후에 입대하여 어전(御前)에서 청한 것으로 인해 위리(圍籬)에서 풀려 부처(付處)되었다. 곧 유지를 내려 시탄(柴炭)과 미육(米肉)을 넉넉히 공급하도록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게 하였으니, 모두 각별한 은수(恩數)였다.
세 번째 사직하면서 원래 내려졌던 명에 따라 예궐(詣闕)하여 등대(登對)하고 처분을 기다리겠다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재촉하는 명이 더욱 다급해졌으므로 마침내 명을 받들었다. 이어서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다. 당시에 바야흐로 《주역》을 진강(進講)하고 있었는데, 본문을 인하여 경계할 바를 진술하니 상이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이어서 진언하기를, “조종(祖宗)께서 보우(保佑)하시어 원량(元良)께서 탄생하셨으니, 하늘의 해가 거듭 밝아지고 조정의 기강이 다시 엄숙해졌습니다. 성상께서는 덕을 진보시키고 학업을 닦아 후세를 위한 계획을 마련하시는 것을 참으로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커다란 옥사(獄事)가 여러 차례 일어나 손상된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서둘러 원기를 끌어 올려야 할 것이니, 원기를 끌어 올리는 방도는 조정의 거조(擧措)가 타당성을 얻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상하의 인심이 한결같이 조정에 모이게 한 뒤에야 고무시키고 진작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부군이 늦게 벼슬길에 나가 처음 임금을 뵐 적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법도가 있고 아뢰는 바가 분명하고 시원하여 온 조정이 사람을 얻었다고 서로 기뻐하였으며, 상도 멀리까지 눈길로 전송하였다. 양사(兩司)가 한창 이연, 이환, 이혁을 방귀(放歸)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있었는데, 부군의 소가 나오자 양사가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부군은 즉시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는데, 상이 후한 비답을 내렸다. 연이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로 옮겨 임명되었다. 부군은 사유(師儒)의 중임(重任)은 더욱더 감당할 바가 아니라고 재차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유지를 내려 시탄과 미육을 계속해서 공급하게 하였다. 부군은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아뢰기를, “지난번에도 외람되이 이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천리 먼 길을 소명(召命)을 받고 달려와 오래도록 교외(郊外)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전하께서 그 굶주림과 추위를 염려하여 특별히 그 군색함을 구호하게 하셨는지라 의리상 참으로 감히 끝내 사양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월름(月廩)이 이미 넉넉하여 모든 쓰임이 다 여기에서 나오니, 어찌 감히 다시 격외(格外)의 각별한 은전(恩典)을 받아 녹봉(祿俸)을 훔치는 죄를 거듭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에 규례에 따라 복더위로 인해 강(講)을 파하다 보니, 유신(儒臣)을 접하지 않은 지가 이미 한 달 남짓이 되었다. 부군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을 통한 규잠(規箴)과 경외(敬畏)의 유익함이 전혀 없고 오직 친애(親愛)하고 친압(親押)하는 사사로움만 있으면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지려(志慮)가 변하게 되어 천리(天理)는 점점 소멸되고 인욕(人欲)은 점점 자라나지 않겠습니까. 정자(程子)는 강관(講官)으로 있을 때 여름 동안 강을 파하여 유신들을 접견하지 않은 것을 크게 근심하여, 내전(內殿)이나 후원(後園)의 서늘한 곳에서 강관들을 불러들여 도의(道義)를 진달하게 하도록 청했으며, 진덕수(眞德秀)는 자기 임금에게 고하기를, ‘한낮의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엄숙히 도열하여 훌륭한 말과 바른 의론이 안전(案前)에 폭주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전하고 지키기가 쉽지만 깊은 궁궐의 한밤에는 접하는 사람이 환관이나 빈첩(嬪妾)에 불과하기 때문에 심성(心性)을 지키고 기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대(夜對)가 낮에 자문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이유입니다.’ 하였으니, 지극히 훌륭한 말입니다. 옛날 우리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 양암(諒闇) 중에 있으면서도 주강과 야대를 하여 경서(經書)를 상고하고 사서(史書)를 질정하는 규칙을 두었으니, 조종조(祖宗朝)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이 참으로 후왕(後王)의 본보기가 될 만합니다. 참으로 마땅히 멀리는 옛 훈계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선왕의 모범을 따라서 점차 서늘해지는 이 가을에 명유(名儒)를 초빙하고 선발하여 권강(勸講)의 인원을 채워서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윤번(輪番)하게 하고, 낮에는 자문을 구하고 밤에는 소대(召對)하여 개발(開發)ㆍ훈도(薰陶)의 유익함이 있게 하신다면 덕을 증진시키고 학업을 닦는 공부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전에 태상시(太常寺)에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김 문충공(金文忠公)의 시호를 ‘도덕박문왈문(道德博聞曰文)’으로 의정(議定)하였는데, 김수항과 이이명(李頤命) 등이 김모(金某)는 절의(節義)가 있는 선비에 불과하다고 하여 ‘근학호문(勤學好問)’으로 주(註)를 고쳤다. 이때에 이르러 부군이 일찍이 강(講)이 끝난 뒤에 문충공의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에 대해 극진하게 아뢰어 이전의 주를 그대로 쓸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공론이 그 일을 훌륭하게 여겼다.
간간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제생(諸生)들을 불러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고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강론하면서 궁리, 수신하여 사업에 적용하는 뜻을 미루어 말하였다. 또 옛날의 설학교인(設學敎人)과 명체적용(明體適用)의 요체에 대해 글을 지어 관학(館學)의 제생들을 통유(通諭)하기도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예조 참판으로 승진하고,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을 겸하였는데, 조의(朝衣) 1습(襲)이 하사되었다. 부군은 관례에 맞지 않게 특진(特進)하거나 각별한 은수(恩數)가 거듭 내리는 것은 모두 분수상 편안히 여길 바가 아니며, 또 구례(舊例)에 춘관(春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대소 관원은 모두 문신(文臣)을 차출하여 충원하였고 다른 방법으로 주의(注擬)된 자는 절대 없었으므로 더욱더 무릅쓰고 나아갈 수 없다고 여겨 두 번이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8월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겨졌다. 잇달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마침 상이 병환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직책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곧 부군의 병이 점차 깊어졌다. 승정원에서 아뢰니,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고 약을 내려 구완하게 하고 어주(御廚)의 진미를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부군은 은총이 분수에 넘친다고 하여 연달아 글을 올려 사사(辭謝)하고 이어서 본직(本職)과 겸직(兼職)의 여러 직임들을 해면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고 위로하는 유시(諭示)가 더욱 융숭해졌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자 또 두 번 사직하여 비로소 대사헌에서 체직되었다. 마침 9월에 천둥 번개가 치는 이변이 있었으므로 부군은 《서경》 〈홍범(洪範)〉의 ‘게으르면 항상 더운 날씨가 뒤따른다.〔豫恒燠〕’라는 내용과 《주역》 고괘(蠱卦)의 ‘고는 원하여 형통하다.〔蠱 元亨〕’라는 뜻을 추론(推論)하여, 기강을 진작시키고 정사를 닦으며 국전(國典)을 엄숙하게 하며 하늘의 경계에 답해야 한다는 설을 반복해서 아뢰었다.
그리고 인현왕후가 사제(私第)에 거처한 지도 여러 달이 되어 가는데, 엄한 유지(有旨)가 내렸으므로 조정에서는 아무도 감히 다시 언급하지 못하였다. 이에 부군이 항소(抗疏)하여 아뢰기를, “폐비(廢妃) 민씨(閔氏)는 중궁(中宮)의 법도를 지키지 않아 스스로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전하께서 처우하는 방도는 또한 마땅히 도리를 힘써 다하여 은의(恩義)를 두루 온전히 한 뒤에야 여망(輿望)을 위로하고 뭇사람의 마음에 부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개 육례(六禮)를 갖추어 맞이하여 중궁으로 정해져 지존(至尊)을 받든 지 거의 10년이 되는데, 지금 비록 폐출(廢黜)되기는 했지만 여항(閭巷)의 사가(私家)에 두고서 그 늠료(廩料)를 끊어 버리고 조금도 관대하게 돌봐 주는 뜻이 없다면 마땅함을 지나쳐 중도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신은 청컨대, 한나라 광무제와 송나라 인종이 진 황후(陳皇后)와 곽 황후(郭皇后)를 대우한 고사를 따라 이궁(離宮)에 거처하게 하고 방위(防衛)를 설치하여 규금(糾禁)을 근엄하게 하고 늠료를 헤아려 대 주어서 의지할 바가 있게 한다면 전하께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 거의 곡진하여 여한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후하게 비답하고 이르기를, “사체(事體)가 고금(古今)이 다르니, 결코 가볍게 논의하기 어렵다.” 하였다.
부군은 처음에 은수(恩數)가 빈번하게 내렸기 때문에 일어나 소명(召命)에 응하기는 하였으나, 조정에 오래 있는 것은 본뜻이 아니었다. 큰 병을 앓고 난 이후로는 더욱 물러나기를 구하는 뜻이 있어서 두 번이나 병으로 사직하고 인하여 은퇴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 남은 생을 다할 수 있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후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에 또 대사헌에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연달아 강석(講席)에 입시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인하여 경계를 아뢰었는데, 적절하고 핍진(逼眞)한 말이 많았으니, 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강(講)이 끝날 때마다 문득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인현(仁賢)을 본받으며 억울함을 해소해 주라는 것을 아뢰었다.
부군은 품계(品階)가 올라 추은(推恩)하게 되었으므로 분황(焚黃)하고 개장(改葬)하기 위해 휴가를 청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두 번이나 소를 올려 진정(陳情)하여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유지를 내려 말을 지급하고 관청에서 제수를 공급하게 하니, 부군은 소를 올려 사사(辭謝)하고 이어서 고인(古人)들이 간언(諫言)으로 임금을 섬기던 의리를 아뢰었다.
그 첫 번째에 이르기를,
하였다.
그 두 번째에 이르기를,
하였다.
그 세 번째에 이르기를,
하였다. 상이 매우 깊이 가납(嘉納)하시고 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商議)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게 되어 인견(引見)할 때는 아뢰기를, “근래에 감사와 수령 중에 이수언(李秀彦), 이지걸(李志傑) 같은 무리들은 제멋대로 살인을 하고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만약 통렬하게 징벌(懲罰)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목숨을 보존할 수 없고 왕법(王法)이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 마땅히 유념하여 깊이 강구해 보겠다.” 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고 나자 태학생(太學生) 이협(李浹) 등이 소를 올려 휴가를 주라는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다. 도중에 연달아 해면해 줄 것을 청하고 아울러 학문에 힘쓰고 자신의 사욕을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체직되어야 하는 이유가 네 가지 있으니, 즉시 윤허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조목별로 분별하여 네 가지 ‘체직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하고 이르기를, “천기(天氣)가 얼어붙어 추위가 점점 혹심해진다. 여정(旅程)을 생각하니 참으로 매우 염려스럽다.” 하였다. 또 별도의 유시를 추가로 내리기를,
하였다. 상이 부군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이와 같으니, 부군의 감격스럽고 우애(憂愛)하는 심정은 서울을 떠나는 날 더욱 절실하였을 것이다.
경오년 봄에 효묘(孝廟)ㆍ현묘(顯廟) 두 임금과 명성왕후(明聖王后 현종의 비 김씨)ㆍ인경왕후(仁敬王后 숙종(肅宗)의 비 김씨)의 지문(誌文)을 일번인(一番人)이 무필(誣筆)하였으므로 즉시 고쳐 써야 한다는 의론을 낸 자가 있었다. 조정의 의견이 결정되지 않아 예관(禮官)을 보내 수의(收議)하게 하였는데, 부군이 헌의(獻議)하기를, “송나라 철종(哲宗)과 휘종(徽宗) 때 사당(邪黨)이 국정(國政)을 농단할 적에 선인황후(宣仁皇后)를 무함(誣陷)하여 비방하면서 못 하는 짓이 없었는데, 훗날에 고종(高宗)이 사관(史官) 범충(范沖)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중수(重修)하게 하고 그 오류를 깎아 내어 바로잡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문을 고쳐 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주염계(周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사적(事蹟)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주자(朱子)가 반청일(潘淸逸)이 지은 지문과 포종맹(蒲宗孟)이 지은 갈문(碣文)을 가지고 산삭(刪削)하고 취사(取捨)하여 합하여 사장(事狀)을 만들었으나, 지문과 갈문을 고치지 않은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또 위염지(魏掞之)에게 추증하게 되어, 지명(誌銘)에 빠진 부분을 묘표의 뒤에 써넣었으나 또한 지문을 고쳐 짓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묘도(墓道)를 뚫고서 지문을 바꾸어 넣는 것이 참으로 편치 못한 바가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사대부가의 일을 국가의 전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하는 것은 또한 옛날 천자와 제후의 상례(喪禮)가 전해지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상례(士喪禮)를 본떠서 행했던 뜻과 같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儒臣)의 헌의가 참으로 나의 뜻에 부합된다.” 하였다.
부군이 고향으로 돌아와 막 분황(焚黃)하고 아직 개장(改葬)을 하지 않았는데, 마침 상화(喪禍)를 당하였다. 슬픔으로 병이 더욱 깊어져 서울로 올라갈 길이 없었는데, 마침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한 이변이 있어 상이 직접 수찰(手札)을 내려 직언을 구하였다. 즉시 해면을 청하는 글에 《춘추》의 재이(災異)와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을 인용하여 옛날 성군(聖君)들이 공구수성(恐懼修省)하여 재변(災變)을 길상(吉祥)으로 바꾼 뜻을 극진히 말하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과 상벌(賞罰)과 출척(黜陟)의 분별에 대하여 특히 정성을 기울였다.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으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고 함께 돌아오게 하였다. 부군은 의리상 감히 무릅쓰고 받을 수 없고 병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상이 억지로 나오기 어려운 것을 살피고 우선 봄날까지 머물 것을 허락하였다.
곧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두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관이 또 이르고, 은혜로운 유지가 연달아 내려졌다. 이때부터 매번 한 번 물러나 돌아올 때마다 사관이 반드시 한두 번씩 이르러 몇 달을 머무르니, 부군의 출처가 더욱 난처하게 되었다. 4월에 영양현(英陽縣)에까지 나아가 병을 고하고 돌아왔는데, 또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받들었다. 이때 예조와 홍문관에서 대사성(大司成) 이봉징(李鳳徵)이 소를 올려 문묘(文廟)의 악장(樂章)이 빠진 것이 있고 종사(從祀)한 분들의 위호(位號)가 잘못되어 있다고 논한 것 때문에 성지(聖旨)를 받들어 예관(禮官)을 보내 문의하였다. 이에 예조와 홍문관에 답하는 차기(箚記)를 지었다.
6월에 상이 원자(元子)를 책봉(冊封)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는데, 부군은 맡고 있던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의 직책에서 아직 개차(改差)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또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에 임명되었다. 성 밖에 도착한 뒤에 소를 올려 전후(前後)의 직명에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고, 이어서 대본(大本)과 급무(急務)에 대해 아뢰었다. 이른바 ‘중대하다〔大〕’는 것은 심학(心學)을 강명(講明)하여 대본(大本)을 세우는 것이고, 이른바 ‘급하다〔急〕’는 것은 세자를 보필하게 하되 그 관속(官屬)을 가려 뽑는 것, 대신을 예우하면서 그 책임을 무겁게 하는 것, 상벌을 분명하고 믿음직하게 하여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 백성들의 마음을 맑게 하여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 비용을 줄이고 조세를 감면하여 민력(民力)을 아끼고 길러 주는 것, 장수를 가려 뽑아서 군정(軍政)을 밝게 정비하는 것 등이다.
부군이 처음 벼슬한 이래로 상소(上疏)하고 면대(面對)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학문을 진보시키고 이치를 밝히는 것을 다스림의 근원이라고 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학문하는 방도를 논함에 있어서는 바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과 천리와 인욕의 근저(根底)를 지적하고, 이를 미루어 언어ㆍ동작ㆍ희로(喜怒)ㆍ상벌ㆍ여탈(與奪)의 경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욕을 잘 다스리는 공부를 엄격히 하고 감히 조금도 자신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 아래 잘잘못을 지적하여 말하고 폐단의 근원을 조목조목 열거한 6가지도 모두 명백하고 통쾌하여 당시의 병통에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귀결은 또 모두 임금의 일심(一心)에 근본하는 것이었으니, 소가 무려 만여 자나 되었다. 상이 비답을 내려 후하게 격려하고 6가지 사항 중에서 의론해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책봉례가 행해지고 나서 예조가 진하(陳賀)할 때의 의주(儀註)를 반포하였는데, 당시에는 효사전(孝思殿)의 궤연(几筵)이 아직도 모셔져 있었다. 부군은 또 소를 올려 아뢰기를, “세자를 책봉하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그 일을 중요하게 여겨서입니다. 어전에서 하례(賀禮)를 받는 경우는 결코 ‘3년의 상기(喪期) 내에는 하례하는 일을 위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연달아 글을 올려 체직을 청한 것이 다섯 번이었는데,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오랜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영남과 호남이 특히 심하였다. 감사가 장계(狀啓)로 아뢰니, 대신들은 별도로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그 허실(虛實)을 살피기를 청하였다. 하루는 부군이 입대(入對)하는 것을 인하여 아뢰기를, “조정에서 감사와 수령을 믿지 못하여 호조(戶曹)의 낭관(郞官)을 각 도로 파견하여 실정을 조사하게 한다면 조정의 체모를 잃고 또 궁핍한 백성들을 실망시키게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모두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모(某)의 말이 참으로 충후(忠厚)합니다. 그러나 경상 감사가 장황하게 장계(狀啓)를 올리고, 심지어는 ‘적지(赤地)가 천 리나 된다.’라고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반드시 그 허실을 살피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하니, 부군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경(詩經)》 〈운한(雲漢)〉에서, 주(周)나라의 남은 백성이 씨도 남지 않겠다〔周餘黎民 靡有孑遺〕고 하였으니, 이 말을 믿는다면 이것은 주나라의 백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라고 맹자(孟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충후한 당시의 시인으로서도 오히려 그렇게 말하였으니, ‘적지가 천 리나 된다.’라는 장계를 어찌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부군의 의론을 옳게 여겼으나, 상이 대신의 뜻을 어기는 것을 어렵게 여겨 끝내 파견하였다.
당시에 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아 오래도록 경연을 열지 않았는데, 부군은 주자서(朱子書) 중에서 《대학강의(大學講義)》 한 편을 뽑아내어 소(疏)와 함께 바치면서 아뢰기를, “그 말이 자세하고 적절하여, 선(善)을 진설(陳說)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지극한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만약 세 번 반복하여 읽고 뜻을 다해 생각하여 척연(惕然)히 두려워할 줄 안다면, 비록 은밀하고 외져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에 있더라도 훌륭한 스승이 좌우에서 권강(勸講)할 때의 유익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며, 장차 천하 후세로 하여금 주자(朱子)의 말이 당대에 행해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8월에 연달아서 시강(侍講)을 하였는데, 《주역》에 대한 강(講)을 다 마치고 나서 진언(進言)하기를, “64괘(卦) 384효(爻)가 우려하고 조심하라는 뜻이 아님이 없으니, 이 모두가 임금으로서 마땅히 유념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건괘(乾卦)의 ‘쉼 없이 노력하라〔自强不息〕’는 것이나 곤괘(坤卦)의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厚德載物〕’는 것, 비괘(否卦)와 태괘(泰卦)의 군자와 소인의 소장(消長)의 비유 같은 것은 더더욱 중요하고 절실한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둔괘(屯卦)는 경륜(經綸)하는 것을 말하였고 고괘(蠱卦)는 원형(元亨)을 말하였으니, 대개 막히고 어지러울 때는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으며, 무너지고 낭패된 뒤에는 진작(振作)하여 흥기(興起)하는 방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모두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다.
당시의 의론 중에는 더러 많은 이들이 “유자(儒者)의 사업은 단지 경서(經書)의 뜻을 강구하여 강설(講說)의 바탕으로 삼는 데에 있으며 굳이 일마다 따져서 논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군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간언의 책임을 맡은 자는 그 간하는 말을 다하여야 하며 행정 실무를 담당한 자는 그 직무를 다해야 하니, 어찌 호광(胡廣)ㆍ조계(趙戒)처럼 말투와 안색을 공손히 하여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겠는가.” 하였다.
무릇 조정의 잘잘못 중에 국가의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 극진하게 말하고 다 논하였으며, 자신의 화복(禍福)이나 이해(利害) 때문에 피하거나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에 다투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비로소 마음이 편치 못하게 되었으며, 간혹 유언비어를 퍼뜨려 헐뜯고 비방하거나 실정과 다른 비방을 가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부군은 상(象)을 살펴 점(占)을 쳐 보고는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았고, 개장(改葬)하는 일로 휴가를 청한 것이 두 번이었으나 상이 오히려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부군은 염치를 훼손시켜서 거듭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물정(物情)에 어두운 간언(諫言)을 하다가 상에게 죄를 얻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래서 즉시 소(疏)를 갖추어 떠나야 하는 네 가지 이유를 아뢰고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나와 지름길로 하향(下鄕)하였다. 상이 사관(史官)을 뒤쫓아 보내었는데, “함께 큰일을 하기에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라는 하교가 있었다. 여러 번의 소를 올려 간청하였으므로 우선 봄날이 될 때까지 머무르라고 허락하였는데, 부군이 오래도록 관직을 비워 둘 수 없다고 사직하니, 비로소 본직(本職)에서 체직되었다. 이어서 유지를 내려 “사관을 보낼 때마다 번번이 지나치게 융숭하다고 사양하니, 우선 한(漢)나라의 고사를 따라 본도(本道)로 하여금 출사(出仕)를 권하게 하겠다.” 하였다.
11월에 대사헌으로 옮겨졌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음 해 1월에 또 글을 올려 힘껏 사직하였다. 당시에 남쪽 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경상도 관찰사 이담명(李聃命)이 구휼(救恤)하는 데 급급하여 한두 가지 편의(便宜)대로 경감(輕減)하여 준 일이 있었다. 또 각 고을의 수령들이 남은 쌀을 빌려 주고 미처 수봉(收捧)하지 못하니, 목상(睦相)이 그가 자기 마음대로 감면해 준 것에 노하여 경중(輕重)에 따라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부군은 《서경》의 ‘옛날의 치적을 이룬 자와 도를 함께하면 흥하지 않을 수 없고, 어지러웠던 자와 일을 같게 하면 망하지 않을 수 없다.〔與治同道罔不興 與亂同事罔不亡〕’라는 뜻을 사직 상소의 끝에서 반복해서 추론하고 아뢰기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덕원(金德遠)이 말 한마디 때문에 성상의 뜻을 거슬러 이례적으로 파척(罷斥)되었습니다. 이는 결코 대성인(大聖人)이 대신을 후하게 예우하고 직언(直言)을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소를 아직 올리기 전에 영상(領相) 권대운(權大運)이 사관을 보내어 소명(召命)에 응하도록 재촉할 것을 청하고, 도신(道臣)이 또 전에 받은 명에 따라 장리(長吏)에게 신칙(申飭)하여 출사(出仕)를 권하도록 하였다. 부군은 지난번에 물러나 돌아온 뒤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였으나, 은수(恩數)가 비상(非常)한지라 걱정과 군색함이 바야흐로 깊었다. 소가 들어가자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정성이 글에 넘쳐 나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다만 이번에 상신(相臣)이 진달(陳達)한 것은 망발 정도가 아니니, 어찌 직언을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도리에 견주어서 논할 수 있겠는가. 이담명이 조정에 품의하지 않은 것은 매우 마땅하지 않으니, 대신이 추국(推鞫)할 것을 청한 것은 사체(事體)를 보존하고자 하는 데 불과하다. 대동수미(大同收米)를 봉납(捧納)하지 않고 대여해 주기를 허락한 것은 극히 한심스러우니, 죄를 매기고 상환을 독촉하는 일은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하다.” 하고는, 여전히 체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목상(睦相)이 그 소를 보고 크게 노하여 성 밖으로 나가 스스로 논열(論列)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는데, 그 사의(辭意)에 자못 듣기에 미안한 점이 있었다. 부군이 즉시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기를, “신이 삼가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동포(同胞)들의 곤궁한 참상을 목격하고는 슬프고 쓰린 마음에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러한 때에 사체(事體)를 보존하기에 힘써 임금의 명을 왜곡한 잘못을 책하고 분수(分數)를 무너뜨린 죄를 다스린다면 아마도 구휼해 주기를 바라는 궁민(窮民)들의 여망을 달래 주지도 못하고 속리(俗吏)들이 죄를 두려워하여 각박하게 재촉하는 소란만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즉시 그런 뜻을 반복해서 추명(推明)하였던 것인데, 그 언사(言辭)가 거칠고 직설적이며 끌어다 비유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 보니 성상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고 정승이 자리를 떠나게 만들어, 보필하는 유익함은 없이 일만 망치는 잘못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성찰해 보건대,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속히 파면하여 주시고 이어 사적(仕籍)에서 이름을 깎아 내어 주소서.”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상이 부군을 위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이모(李某)는 세상일을 완전히 잊어버릴 사람은 아닙니다. 직책상 간언(諫言)의 책임이 있어 소회(所懷)가 있을 때면 반드시 아뢰었던 것이니, 평소에 예우하던 신하를 하루아침에 꺾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후한 비답을 내려 달래 주었으며, 그 속에는 “경의 심사(心事)는 오로지 충심(忠心)이요, 다른 뜻이 없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3월에 안동(安東)까지 나아가 병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였는데, 마침 어떤 일 때문에 체직되었다. 5월에 도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연달아 글을 올려 고사(固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뜻한 유시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곧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으며, 두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윽고 목공(睦公)이 상에게 소환하기를 청하고 영상이 계속해서 진언하니, 상이 또 사관을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하였다. 두 번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관이 그대로 머물러 있은 것이 또 몇 개월이 되었다. 부군은 시종 고집을 부리면서 버티는 것은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여겨, 9월에 병을 무릅쓰고 소명에 응하였다.
한 달 전에 상이 선대(先代)의 능(陵)에 배알하러 가던 길에 행차가 사육신(死六臣)의 묘를 지나게 되었는데,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이어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결정되지 못하였으므로 예관이 와서 수의(收議)하였다. 부군이 도중에서 헌의하였는데, 대략에,
하였다.
교외(郊外)에 도착하고 나자 연일 소명(召命)에 응하기를 재촉하고, 또 월봉(月俸) 외에 시탄(柴炭)과 미육(米肉)을 계속해서 공급하게 했다. 부군은 글을 올려 사사(辭謝)하고 찬선(贊善)의 직명으로 때로 권강(勸講)하는 말석에 참여하여 조금이나마 보잘것없는 보답을 바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은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인견(引見)하겠다는 명이 내리자 마침내 흥정전(興政殿)에서 입대(入對)하였는데, 상이 매우 후하게 위로하였다. 이어서 영남의 기근 이후로 민정(民情)이 어떠한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해의 기근은 참으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이제 비록 논의 벼가 조금 여물기는 했으나 밭농사는 피해가 더욱 심합니다. 그런데도 감면해 주는 혜택을 전혀 입지 못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은 틀림없이 버림을 받았다는 탄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인하여 재난에 처하여서는 수양하고 반성하며 과한 직언이라도 좋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아뢰었다. 당시에 경연(經筵)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고 있었는데, 강을 인하여 아뢰기를, “고인들이 이 책을 치평(治平)의 요체라고 한 것은 참으로 빈말이 아닙니다. 진덕수가 수십 년을 공들여 이 책을 찬집(纂集)하였는데, 송나라 이종황제(理宗皇帝)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경연에서 진강하게 했습니다. 또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을 높이 포장하고 주자(朱子)와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으니, 그 학문을 즐기고 현자를 좋아하는 마음은 후세의 임금들이 결코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치적을 가지고 논해 본다면 지리멸렬하여 도리어 한(漢)ㆍ당(唐) 때의 중간 정도 수준의 임금보다도 못하였으니, 한갓 형식만을 숭상하고 실제로 체득한 것은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부디 전하께서는 이것을 거울삼아 경계하소서.” 하니, 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부군이 인하여 아뢰기를, “옛날 선묘(宣廟) 때에 김성일(金誠一)이 간관이 되어 대신(大臣)이 뇌물을 받은 일을 논척(論斥)하였는데, 영상 노수신(盧守愼)이 이를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선묘께서는 그 둘이 다 훌륭하다고 하셨으니, 그 역량과 기풍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랬기에 중간에 변고를 겪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웠어도 끝내는 옛 강토를 회복하여 오래도록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선조(宣祖)를 본받아 노상(盧相)의 사례로써 대신들을 책려(責勵)하신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한 대관(臺官)이 상신(相臣)을 언급한 일로 성상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연달아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루는 야대(夜對)를 인하여 조용히 고금의 사변(事變)을 아뢰었는데, 상이 문득 개연히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중조(中朝)의 문물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시어 하마터면 서울로 돌아오지 못할 뻔했는데,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재조(再造)해 주신 덕분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으니,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또 숭정황제(崇禎皇帝 명나라 의종(毅宗)) 때에 조선에 죄를 묻자고 청한 이가 있었는데, 황제께서 이르시기를, ‘그것은 형세가 급박해서였을 뿐이니, 죄를 묻지 말라.’ 하였다. 작은 나라를 품어 주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을 생각할 때면 감읍(感泣)을 금할 수 없다.” 하였다. 부군이 인하여 진언하기를,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사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초야의 미천한 신으로서도 비분한 마음에 가슴이 메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성상의 하교를 받드니 신은 실로 감격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비록 종묘사직(宗廟社稷)과 백성을 위해 잠시 굴복하였으나 매월 초하루와 보름의 망궐례(望闕禮) 때면 반드시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셨습니다.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에 이르러서는 온갖 역량을 길러 큰일을 한번 해 보려 하셨습니다만, 불행히도 중도에 승하하시어 지금까지 후세의 무궁한 한이 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선대왕(先大王)의 뜻을 추모하여 인재를 거두어 길러 가르치고 천하에 변고가 생기기를 기다려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바를 하신다면 어찌 하늘과 사람이 함께 돕지 않겠습니까. 지금 민심(民心)이 동요되고 군정(軍政)이 소루(疏漏)하여 믿을 만한 형세라곤 하나도 없으니, 모름지기 민생을 풍요롭게 하고 군정을 닦는 것을 근본적인 계책으로 삼은 뒤라야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계속해서 서관(西關)에 인물이 매우 많고 강변(江邊)의 건아(健兒)들도 정예롭고 용맹스러워 쓸 만하다는 것을 아뢰었다. 서쪽 변방의 성(城)과 해자(垓字)를 조사하여 수리하는 일에 미쳐서는, “옛날 주(周)나라 세종(世宗)은 강남(江南)을 굴복시키고 나서 그들에게 성을 수축하고 병졸들을 훈련시키도록 권하여 각기 영토를 보존하게 하였고, 고려(高麗)는 금(金)나라에 굴복하여 섬겼으나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이 구성(龜城)을 온전하게 보전하여 몽고인(蒙古人)들을 막아 냈습니다. 저들이 만약 의심하고 노여워한다면 이런 사실로 증명한다면 또한 크게 비위를 건드리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일은 모름지기 인재를 얻어 맡긴 뒤에야 성과를 거두도록 요구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였다. 상이 한참을 감탄하다가 이르기를, “참으로 옳다. 경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듣겠는가.” 하고는, 이어서 술을 하사하여 네댓 순배 돌고 나서야 물렸다. 앞으로 나아가 거듭 고하기를, “영특하고 용맹한 자질을 지니신 전하께서 만약 큰일을 하실 뜻이 있으시다면, 신이 비록 노둔하지만 감히 능력과 충심을 다 바치고 이어 죽음까지 바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때부터 더욱더 감격하고 경도되어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상이 자주 경연에 나아가고 간혹 연일 소대(召對)를 하였으므로, 부군은 성의(誠意)를 쌓아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기를 더욱 힘썼다.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추론하는 것 외에도 민정(民情), 시무(時務), 억울한 일들로서 변통하여 해소해 줄 만한 것들은 그 근원을 끝까지 밝혀 반복해서 논열(論列)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지어 바쳤던 어병(御屛) 16폭의 찬(贊)과 같은 것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성취시켜 주는〔將順〕’ 뜻을 다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유 문충공(柳文忠公)을 위하여 무고(誣告)를 당한 연유를 자세히 밝힌 것, 영남(嶺南)에서 동전(銅錢)을 통용시켜 면포(綿布)를 대신하게 하기를 청한 것, 경계를 구획하고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며 부세(賦稅)를 바로잡는 일을 미루어 시행할 것을 청한 것, 변방의 방비를 정비하고 병거(兵車)를 제조하여 불의의 환란에 대비하기를 청한 것 등이 모두 이때 주대(奏對)한 내용이다.
당시에 영남의 목화(木花)가 크게 흉작이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으레 면포를 징세하였고, 또 장단(長短)과 정추(精粗)를 가지고 퇴짜를 놓아 다시 마련하게 하는 폐단이 있었다. 백성들은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는데, 심지어 저잣거리에서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부군은 《주례(周禮)》의 ‘흉년엔 돈을 주조한다’는 내용과 정주(程朱)가 논한 전화설(錢貨說)을 인용하여 동전을 유통시키는 일을 서둘러 청하여 시행하게 되니, 백성들이 자못 편하게 여겼다.
곧 두 번째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소를 올려 여섯 가지 일을 논하였는데, 덕을 증진시킴〔進德〕, 뜻을 세움〔立志〕, 상황에 맞게 대처함〔通變〕, 인재를 가려 임용함〔擇任〕, 인재를 육성함〔育材〕, 시간을 아낌〔惜時〕이다. 덕을 닦아 정사를 이루는 것과 인재를 성취시키는 도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극진하게 하여 남김이 없었다. 특히 관방(官防)의 어지러움, 전정(田政)의 문란, 형법(刑法)의 해이, 장법(贓法)의 느슨함, 혼인상제(婚姻喪祭) 때에 상하(上下)의 구별이 없는 것 등을 변통(變通)하여 개혁해야 할 급무로 삼았다. 그리고 이른바 ‘시간을 아낄 것〔惜時〕’에서는 또 재삼 뜻을 다하였으니, “신은 매번 주자(朱子)가 ‘신이 창안백발(蒼顔白髮)로 이미 늘그막에 다다랐을 뿐만 아니라, 삼가 우러러보건대 용안(龍顔)도 옛날의 모습이 아님을 알겠습니다.’라고 한 것을 읽을 때마다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군부(君父)에게 바라는 바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말이 절절하기가 이와 같았다. 상이 깊이 칭찬하여 받아들이고 이르기를, “소(疏)에서 곡진하게 아뢴 것들이 분명하고 절실하니, 내가 매우 감탄하여 펼쳐 보면서 지루함을 잊었다. 그 가운데서 의처(議處)할 만한 일은 또한 묘당(廟堂)과 상의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하루는 전석(前席)에서 물러 나오는데, 상이 손수 담비 갖옷을 집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하사하게 하니, 또한 각별한 은수(恩數)였다. 즉시 소를 올려 사사(辭謝)하고 아뢰기를, “신은 공경히 고인(古人)의 ‘의인사인(衣人死人)’이라는 말을 외우며 가슴에 새기고 뼈에 새겨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늘 송나라 신하인 왕조(王朝)가, 한 말〔斗〕의 명주(明珠)를 하사해 준 것에 감동하여 천서(天書)와 관련된 요망한 일을 중지하도록 간언(諫言)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개탄하였습니다. 만약 신이 은혜를 생각하고 의리를 잊어 몸을 용납하고 자리나 보존할 생각을 하게 된다면 속히 파척(罷斥)하시어 여러 신하들을 책려(責勵)하소서.” 하니, 상이 또 《시경》의 ‘내게 아름다운 손님이 있어 진심에서 우러나 선물을 주고자 하는지라〔我有嘉賓 中心貺之〕’는 말을 인용하여 답하였다.
12월에 상이 전주(銓注)하는 곳에 친림(親臨)하였다. 일이 끝나자 선온(宣醞)하였는데, 당(堂) 가득히 화목한 분위기가 넘치니 일대(一代)의 성사(盛事)였다. 부군이 〈흥정당친정도기(興政堂親政圖記)〉를 지었다. 두 번 정고(呈告)하고 두 번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임신년 1월에 또 간곡히 사직하니, 비로소 본직(本職)에서 체직되었다. 당시에 저들 청(淸)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올봄에 대신(大臣)에 해당하는 관원 5, 6인을 파견하여 장백산(長白山) 이남 지방의 형세를 순시하여 《일통지(一統志)》를 찬수(撰修)하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은 장차 압록강(鴨綠江) 동쪽에서부터 장백산 남쪽을 거쳐 곧바로 두만강(豆滿江)까지 길을 닦아 그 사행(使行)을 통하게 해 주려고 하였다. 부군이 그 소식을 듣고는 놀라고 탄식하면서 이보다 더 잘못된 계책은 없다고 여겼다. 즉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는 차자(箚子)를 갖추어 나아가 읽었다. 대략에,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였다. 마침 저들이 우리나라에 기근이 심하다는 이유로 마침내 중지시키고 관원을 파견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군이 일찍이 이르기를, “언직(言職)에 있지 않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하루라도 그 자리에 있다면 마땅히 하루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요컨대 마땅히 시비(是非)를 변별하여 조정의 기강을 진작하고 엄숙하게 하여 성주(聖主)가 총애하여 맡긴 뜻을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두 번째 사직하는 글에서 이르기를,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천하의 정리(定理)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동일시하고 흑백(黑白)을 혼동하여 구차히 영합하기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부터 천하의 일을 보면 단지 사람들의 마음을 잃을까 염려하여 늘 좌우로 이끌리어 배나 더 힘을 쓰고서도 천하의 공론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점차로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합니다. 지난번에 성상의 하교에서 ‘곧은 기상이 사라지고 눈치를 보는 것이 상례(常例)가 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대개 이를 염려해서일 것입니다. 게다가 대간(臺諫)은 임금의 이목(耳目)이니, 체례(體例)로써 속박하고 위분(位分)으로 억제해서는 안 됩니다. 안진경(顔眞卿)이 이른바 ‘만약 간관(諫官)이 논사(論事)하면서 먼저 재상에게 고한다면 이는 스스로 그 이목을 가리는 것입니다.’라는 것과 소지충(蕭至忠)이 이른바 ‘만약 먼저 대부(大夫)에게 고해야 탄핵을 허락한다면 대부를 탄핵하는 경우에는 누구에게 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고금의 명언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간관이 논사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재상에게 고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군주가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도 매번 재상에게 자문하여 그의 의견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대의(大義)가 좋기는 하나 논사할 때에는 공평하고 타당하게 되기를 힘써야 하니, 이것이 내가 경에게 바라는 바이다.” 하고, 체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소가 나오자 조정에서는 더러 진노(震怒)로 인해 자못 불안의 단서가 있을까 염려하는 이도 있었다.
상은 매년 봄과 가을에 정례적으로 선릉(先陵)에 배알(拜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광릉(光陵 세조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을 배알하려고 하였다. 서울에서 70리나 되고 전에 없던 장맛비가 내려 길을 닦기가 매우 어려운 데다가 상이 막 뜸을 뜬 상태이고 봄추위가 아직도 심하여 크게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었고 농사에 방해가 될 걱정이 없지 않았다. 부군이 이에 동료들을 이끌고서 임시로 중지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얼마 뒤 면대(面對)하여 아뢰었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선왕의 능에 배알하는 것이 비록 조상을 추모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신들이 아뢴 것은 한편으로는 성상의 옥체를 위해서이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해서이니, 조금이나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언짢아하며 노기 띤 말을 하였다. 부군이 일어나 절하고 다시 아뢰었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였다. 끝에서는 엄한 하교를 듣게 되었다는 이유로 인혐(引嫌)하고 체직되기를 청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하기를 청하였으나, 부군은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상이 온후한 비답을 내렸다. 영상(領相)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능행(陵行)을 중지하라고 청한 것은 그저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걱정하기 때문에 나온 것일 뿐입니다. 갑자기 위엄과 진노를 가하여 아랫사람의 심정이 드러나지 못한다면 이는 아마도 존양(存養)의 공부에 미진한 바가 있어서이니, 장차 ‘처음의 뜻을 잘 이어가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에 통렬히 자책을 하면서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기를, “칠정(七情) 중에서 가장 발하기 쉽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노여움이 가장 심한데, 나의 병통이 참으로 이곳에 있다. 존양의 공부에 유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성급하게 폭발하는 병통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지난번에 나의 어기(語氣)가 화평함이 부족하였는데, 이것은 내 잘못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나의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뜻을 헤아려 마음을 편안히 하고 사직하지 말아서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부군이 글을 올려 이고(移告)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빈청(賓廳)에 입시(入侍)하는 것으로 인하여, 또 아뢰기를, “경신년(1680)과 임술년(1682)의 무옥(誣獄)으로 아직 신원(伸冤)되지 않은 자는 의당 속히 처분하여 신원해 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어서 당나라 태종(太宗)이 방강(房彊)의 옥사를 다스린 일과 최인사(崔仁師)가 ‘연좌율(緣坐律)로는 벌이 가볍다’는 논의를 반박하였던 고사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아 아뢰기를, “옛것을 배워 관직에 들어가 일을 논의하여 제정하되 일에 있어 옛것을 본받지 않는다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다음 날 여러 동료들이 인입(引入)하니, 부군 또한 세 번 고하고 체직을 당하였다. 그날로 성을 나와 협곡(峽谷)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상이 또 사관을 뒤쫓아 보내어 전유하기를, “경은 산림(山林)의 중망(重望)을 받아 우뚝이 당세(當世)의 긍식(矜式)이 되니, 평소에 소자(小子)가 존신(尊信)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경 또한 나를 멀리 버려두지 않아 아는 바를 모두 말해 주었으니, 첫째는 백성을 사랑해서이고 둘째는 나라를 걱정해서였다. 경의 경경(耿耿)한 단심(丹心)은 고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니, 내가 이러한 가르침에 힘입어 참으로 보탬이 많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갑자기 호연(浩然)히 남쪽으로 돌아가려는 작정을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과인이 현인을 대하는 성의가 지극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놀랍고도 부끄러워 마음을 잡을 길이 없다. 모름지기 나의 진심에서 나오는 말을 잘 헤아려서 속히 홀로 결백하고자 하는 뜻을 돌리도록 하라.” 하였다.
사관이 병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고 아뢰자, 또 전교하기를, “유현(儒賢)의 진퇴는 국가의 성쇠와 관계가 된다. 비록 태평성대일지라도 스스로 과감히 세상일을 잊어버린 자가 아니라면 진실로 서둘러 와야 할 것인데, 하물며 지금처럼 어려움이 목전(目前)에 산적해 있어 과인이 의지하고 기대할 자는 오직 경 한 사람뿐인 경우이겠는가. 경은 본래 세록(世祿)을 받아 국가와 고락을 같이해야 하는 신하로서 자신의 지조만을 깨끗이 하려는 고답적(高踏的)인 선비와는 입장이 전혀 다른데도, 속에 온축되어 있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살필 계책’을 펼칠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멀리 떠나가기에 급급하여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 듯하니 참으로 평소에 기대하던 바가 아니며, 또한 ‘군신 간에는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경을 기다리는 마음은 비단 오랜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는 정도만이 아니니,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잘 헤아려서 다시 나를 곤혹스럽게 하지 말고 사관과 함께 속히 돌아와 목마른 듯 기다리는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후(前後)의 윤음(綸音)이 대체로 이와 비슷하였으나 면려(勉勵)하고 숭장(崇奬)하는 뜻은 이때에 이르러 더욱 융숭하였다고 한다. 부군이 소를 올리고 사관이 세 번 계문(啓聞)하여 질병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형세를 극진히 아뢰니, 비로소 우선 서늘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기필코 좌우(左右)에 이르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유지를 내렸다. 7월에 도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다섯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격려하는 유시가 지극하였다. 11월에 대사헌으로 옮겨졌다. 또 정황이나 병세로 보아 억지로 맡기 어렵다고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유년 1월에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하였다.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청한 바는 윤허하지 않았다. 물러나서도 임금을 잊지 않고 마음을 다해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이 시종일관 이처럼 독실하였다.
3월에 안동(安東)까지 나아가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하여 해면되기를 청하였다. 마침 사관이 특별 유시를 받들고 내려왔는데, 사지(辭旨)가 더욱 간절하였다. 그러나 사장(辭狀)이 이미 올라갔고 사관이 또 병으로 인해 나아가기 어렵다는 뜻으로 계문(啓聞)하였는데,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거듭 사관에게 명하여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함께 오라고 하였다.
당시에 상이 또 재이(災異)로 인해 직언을 구하였는데, 즉시 사직하는 글을 통해 덕정(德政)을 닦고 편사(偏私)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남김없이 아뢰니, 상이 또 가납(嘉納)하고 재촉하기를 더욱더 정성스럽게 하였다. 4월에 질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도중에 또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사관이 계속해서 이르고 은혜로운 유지가 거듭 내리므로 마침내 대궐에 나아가 공경히 사은(謝恩)하니, 상이 인견(引見)하고 더욱 후하게 위유(慰諭)하였다. 부군이 사사(辭謝)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옛날의 신하들은 비록 태평한 때에 처해서도 오히려 위난(危難)에 대한 경계를 올렸습니다.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국사(國事)가 다스려졌다고 여기십니까, 어지럽다고 여기십니까? 안정되었다고 여기십니까, 위태롭다고 여기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역》에 이르기를 ‘망하지나 않을까 망하지나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하는 생각이 있어야 무더기로 난 뽕나무에 매어 놓은 것처럼 안정될 것이다.〔其亡其亡 繫于苞桑〕’ 하였다. 하물며 어려움과 우려할 일이 눈에 가득한 오늘날이 어찌 다스려지고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경은 소회(所懷)를 다 진달(陳達)하여 나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라.” 하였다. 부군이 대답하기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다. 내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또 월름(月廩)을 넉넉하게 공급하라는 유지를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일정한 녹으로도 자급(自給)하기에 충분하니, 감히 매번 격외(格外)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선온(宣醞)한 뒤에 파하였다. 며칠 뒤에 또 간절한 내용으로 체직을 청하고 이어서 월름을 도로 거두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다. 강이 끝나자 나아가 짧은 차자(箚子)를 읽었는데, 대략에,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과 같이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이 아니라면 여기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내 마땅히 가슴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부군께서 또 읽기를, “군신은 의리로써 맺어진 사이입니다. 반드시 상하 간에 서로 정의(情義)로써 믿음을 주어 잘못을 서로 구제할 수 있어야만 정대(正大)하고 광명(光明)한 다스림을 함께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여 군신 간에 서로 의심하고 막히게 되면 기휘(忌諱)를 범할까 두려워하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게 되어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답답한 심정으로 겉돌기만 하게 되어 얼마 안 가서 끝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또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이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겁내고 꺼리는 풍조가 생겨나니, 감히 왕실(王室)의 일과 관련되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는데, 부군은 이에 대해 일찍이 깊이 우려하시어 남김없이 다 말하고 기휘하는 바가 없었다. 같은 반열의 신하들 중에는 목을 움츠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임금이 온화한 낯빛으로 겸허히 받아들이자 모두들 서로 칭하(稱賀)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상이 일신헌(日新軒)과 융무당(隆武堂)에 절구(絶句) 네 수를 읊어서 걸었으니, 모두 자신을 살펴서 사욕(私慾)을 이긴다는 것과 전대(前代)의 공렬(功烈)을 크게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 부군은 고인(古人)들이 갱가(賡歌)하던 의리를 본받아서 매 장마다 화운(和韻)하여 바치니, 대개 또한 ‘상황에 따라 뜻을 받들어 성취시켜 주는〔隨事將順〕’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상이 읽어 보고 가탄(嘉歎)하였으며, 또 표피(豹皮)를 하사하는 은총이 있었다.
연일 강연(講筵)에 입시하여 추론(推論)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였으며, 간사(奸邪)하고 참녕(讒佞)되고 기망(欺罔)하는 자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특히 반복해서 뜻을 다하였다. 병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또 세 번 사양하여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6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되었다. 낮은 자리를 사양했다가 높은 자리로 오르게 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세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더욱 다급하게 소명(召命)을 내렸다. 마침내 명을 받들고 아뢰기를, “출치(出治)의 근본은 인주(人主)의 마음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풍속을 바로잡고 어진 인재를 얻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또 덕을 진보시키고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뜻으로 추론하여 조목조목 나열하고 세 통의 차자(箚子)를 갖추어 올리고 옛날에 선비를 선발하던 법과 주자(朱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이전에도 일찍이 여러 번 이런 내용을 아뢰었으나 그 규모(規模)와 절목(節目)이 이때에 이르러 더욱 자세해졌다. 상이 묘당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영상(領相) 권공(權公)이 예부(禮部)로 하여금 대제학과 함께 유신(儒臣)에게 나아가 충분히 검토한 다음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7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세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곧 면대(面對)하여 사양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이윽고 더위에 손상되어 병이 심해지자 병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였으나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의원을 보내고 약물(藥物)을 하사하는 등 후한 은총을 지극하게 하였다. 부군은 더욱 감격하고 황송하여 편안치 않았으므로 글을 올려 사사(辭謝)하고 진정(陳情)하여 체직되기를 청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게 되자 조강(朝講)에 입시하였다. 강이 끝나고 나서 정황으로나 병세로나 모두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어렵다는 것을 극진하게 아뢰었으나 상은 따뜻하게 유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대사간 강세귀(姜世龜)가 능(陵)에 행차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가 이례적으로 파직되었으며, 대사헌 권해(權瑎)가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갔다가 또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다. 부군은 간쟁(諫爭)하는 신하를 연달아 배척하는 것은 성덕(聖德)에 크게 누가 된다고 여겨 짧은 차자를 올렸다. 대략에,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하니,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곧 두 번째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분황(焚黃)하기 위해 휴가를 청하였으나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윽고 빈청(賓廳)에 입시했을 때를 인하여 ‘창빈(昌嬪)을 국가의 사전(祀典)에 수록하는 것은 예가 아님’을 논하였는데, 그대로 시행이 되었다. 또 2품 이상에게 각각 인재 3인을 천거하게 하되, 혹은 덕행(德行)으로 혹은 문예(文藝)로 혹은 재지(才智)로써 하도록 하고 천주법(薦主法)을 거듭 엄격히 할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윤허하였다. 10월에 천둥 번개가 심하게 치면서 비가 내리자, 대신(大臣) 및 여러 재신(宰臣 정2품 이상의 관원)들과 함께 청대(請對)하였다. 입시하여 ‘자신을 둘러보아 사욕을 극복할 것’, ‘백성들의 고통을 긍휼히 여기고 억울함을 해소시킬 것’,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라는 뜻을 분명히 할 것’,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의 폐단을 재단할 것’ 등을 극진하게 아뢰고, 거듭해서 아뢰기를,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들로 하여금 임금의 인자함 속에 감추어진 위엄을 두려워하게 하고, 외정(外廷)의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사심(私心)을 없애도록 하여, 민심(民心)을 위로(慰勞)하고 하늘에 실사(實事)로 응답하는 방도로 삼도록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일어난 재변(災變)은 천관서(天官書)를 찾아보니 모두가 전쟁의 조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또 화성(火星)이 궤도를 이탈하고 겨울에 우레가 치는 이변이 생겼으니, 미리 예기치 못한 변고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날 송나라 고종(高宗) 때 1월에 우레가 쳤는데, 시어사(侍御史) 진준경(陳俊卿)은 ‘이는 장차 이적(夷狄)이 침략할 조짐이니, 언로(言路)를 열고 인재를 등용하여 하늘에 응답하고 변고를 소멸시키는 방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제 별천(別薦)이 있은 뒤에 군문(軍門)의 대장(大將)들로 하여금 각자 장수가 될 만한 자를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해서 훗날의 소용에 대비하소서.” 하였다. 상이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즉시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논의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부군이 전에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기를 것을 청한 것은 장차 시행되게 되었으나, 유사(有司)가 제때에 조례(條例)를 반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또 “향약을 세수(歲首)를 맞아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시행한다면 실로 옛날에 법을 상위(象魏)에 게시한 뜻에 부합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비를 선발하는 건도 속히 널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유지를 내려 속히 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좌상(左相)이 “인심(人心)이 선(善)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시행되기 어렵다.” 하고, 대종백(大宗伯 예조 판서)도 “선비를 뽑는 법은 절목이 매우 많아 갑작스럽게 정해 시행할 수가 없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일단은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부군은 논열(論列)한 것이 있을 때마다 상이 가납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도 실제로 시행된 것을 보지 못하였고 묘당에서 또 잇따라 저지하는지라, 세상에서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되어 물러나 돌아가기로 이미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대정(大政 12월의 정기적인 인사 행정)이 끝난 뒤에야 진정(陳情)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하였다. 잇달아 일곱 번이나 글을 올려 고사(固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갑술년 2월에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원릉(園陵)에 나아갔다. 청하기를, “환궁(還宮)할 때에 행차를 멈추고 백성들을 불러 모아 괴로운 점을 물어보신다면, 또한 옛날에 춘경(春耕)을 살피고 추수(秋收)를 살피던 유의(遺意)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종묘(宗廟)의 옥책(玉冊)이 병란 중에 산일(散逸)된 것이 많았는데, 유지를 내려 의론을 모으니 모두 추가로 보충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부군은 《춘추(春秋)》의 ‘하오(夏五)’와 〈상송(商頌)〉에 일곱 편이 빠져 있는 뜻을 들면서 아뢰기를, “사책(史策)의 구문(舊文)도 오히려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전하였는데, 하물며 막중한 시책(諡冊)의 내용을 어찌 억측해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 일을 감히 그만둘 수 없다고 한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실록을 고출(考出)하고 다시 옥당(玉堂)에 명하여 역대의 고사를 널리 상고하여 참작해서 처리하게 해야 하며, 경솔하게 대충대충하여 후세의 의혹을 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또 분황(焚黃)하기 위하여 휴가를 청하였는데, 상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세 번 사직하고서야 비로소 허락하고, 처음처럼 말을 지급하고 제수(祭需)를 보태어 주게 하였다.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이 인견하여 선온(宣醞)하면서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을 여러 번 보였다. 부군이 일어나 절하며 사례하고 나서 진언하기를, “임금이 만약 적국(敵國)의 외침(外侵)이 없으면 반드시 토목공사(土木工事)를 일으키고 진기한 동물이나 기화요초(琪花瑤草), 개와 말이나 가무(歌舞)와 여색(女色) 등으로 이목(耳目)을 즐겁게 하고 심지(心志)를 방탕하게 할 것이니, 이는 모두 임금이 지극히 경계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바로잡고 덕을 닦아 기강을 확립하시며, 세세한 오락거리를 멀리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워서 효종대왕의 유의(遺意)를 깊이 계승하소서. 이제 멀리 떠나가게 되매 감히 소회(所懷)를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경이 매번 이런 것을 아뢰는 데 대해 가상(嘉尙)하게 생각한다.” 하고는, 이어서 속히 돌아오라고 재삼 유시하고는 세자를 나오게 하여 보게 하였다. 세자는 당시에 나이 겨우 6세였다. 상이 환관을 돌아보며 세자의 뜻으로 유시하였는데, 또한 속히 조정으로 돌아오도록 하라는 것이었으니, 총애하는 뜻이 전에 비해 더욱 융숭하였다. 도중에서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계축일에 집에 도착하여, 바야흐로 소를 올려 진심으로 간절히 아뢰고 은퇴하여 노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함이완(咸以完)이 변고를 아뢴 일이 있어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국문(鞫問)하게 하니, 옥사(獄事)가 갖추어지매 실정(實情)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때 홀연히 김인(金寅)이라는 자가 차비문(差備門)에서 급변(急變)을 고하니, 상이 노하여 옥사가 마침내 해소되었고 옥사를 맡았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고 영의정과 좌의정 및 지방에 있거나 입직한 승지ㆍ삼사(三司)가 한꺼번에 파출(罷黜)되는 등 조정이 일신되었다.
부군은 처음에는 조정에 돌아오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개차(改差)하라는 유지가 내렸으나, 곧 대간의 의론이 준발(峻發)하여 영북(嶺北)의 홍원현(洪原縣)으로 유배되었다. 당시에 화기(火氣)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눈앞에 가득하였으나 부군은 태연하게 마음을 쓰지 않았고 침식(寢食)이나 언소(言笑)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금오랑(金吾郞)이 도착하자 ‘임금의 명을 받고 집에서 지체해서는 안 된다.’ 하고 그날로 길을 떠났으니, 4월 22일이었다.
5월 임자일에 함흥부(咸興府)에 이르렀다. 홍원현에 도달하기 하루 전에 또 의금부의 관원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장령 안세징(安世徵)이 부군이 지난날 중전(中殿)을 위하여 올린 소에 ‘스스로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自絶于天〕’, ‘폐비(廢妃)를 위하여 방위를 두고 규금을 엄격히 해야 한다〔爲設防衛 謹其糾禁〕’는 등의 말이 있다고 하여 핵문(覈問)하기를 계청(啓請)하면서 심지어 ‘화심(禍心)을 속에 숨기고 드러나지 않게 침핍(侵逼)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서둘러 유배지에 도착하여 대명(待命)하였다가 도로 고산역(高山驛)에 이르렀다.
신유일 밤중에 국문(鞫問)의 명이 또 내려왔는데, 이는 김인의 공초(供招)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서문중(徐文重)은 그것이 전적으로 날조하려는 데서 나왔다고 하여 우선 그대로 두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사랑(問事郞) 김시걸(金時傑) 등이 반드시 법으로 다루려고 하므로, 사태가 급변하여 화(禍)를 장차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들 재(栽)가 수행하여 곁에 있다가 울부짖으며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부군께서는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천천히 이르기를, “화복(禍福)은 하늘에 달린 것이라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러지 말라.” 하고는, 서둘러 행장(行裝)을 꾸려서 심리(審理)하는 곳에 나아가 치대(置對)하였다.
안세징이 처음에는 선생이 올린 원래의 소를 보지 못하고 당시의 의론에 영합하여 앞장서서 홀로 계청하였는데, 원서(爰書)를 보고서는 스스로 무망(誣罔)했음을 알고 마침내 실상을 잘못 말했다고 하여 인피(引避)하였다. 그리고 김인이 자주 말을 바꾸고 말한 것이 모두 증거가 없으므로, 위관(委官) 남구만(南九萬)이 헌의(獻議)하기를, “이 사건은 증거가 없으므로 이것으로 죄가 성립될 수는 없습니다. ‘늠료(廩料)를 계속 지급하고 방위를 두어야 한다’는 청은 그 본심을 살펴보건대, 침핍하고자 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다만 ‘스스로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말은 신하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니, 종성부(鍾城府)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는 것으로 논죄(論罪)합니다.” 하였다.
대개 중전이 출궁(出宮)하던 초기에 부군은 본래 인륜(人倫)과 풍화(風化)의 근원을 가지고 상을 위하여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으나 엄한 명이 이미 내린 뒤라 상께 전해지지는 못하였다. 그 때문에 늘 나라에 큰 변고가 있는데도 한마디 의론을 바치지 못하였다고 한스러워하였다. 별궁(別宮)에 처하게 하기를 청하게 되어서는 출궁(黜宮)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고 임금의 노여움이 아직 걷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무고(無故)하게 폐(廢)하였다고 말했다가는 상의 노여움만 촉발하여 유익할 것이 없는 데다가 또 성상은 곧 중궁(中宮)이 하늘로 여기는 분이므로 말을 만들 적에 완곡하게 하려고 힘썼다. ‘방위(防衛)를 두고 규금을 엄격히 해야 한다〔設衛謹糾〕’는 것도 대개 또한 그 거처가 황량(荒涼)하여 전혀 수위(守衛)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니, 만약 별궁에 옮겨 들인 뒤에 숙위(宿衛)하는 관원을 배치하고 규금하는 명을 내린다면 거의 경비가 대략 갖추어져서 체모(體貌)가 조금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또 옛날 왕궁(王宮)에서 규금하는 법은 《주관경(周官經)》에 자세히 드러나 있으니, 경서(經書)를 인용하고 의리(義理)에 근거하는 것은 본래 일을 논하는 데 있어서의 규례이다. 그리고 ‘위설(爲設)’이라는 두 글자를 보더라도 그 본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더욱 잘 알 수 있으니, ‘화심(禍心)을 속에 숨기고 드러나지 않게 침핍(侵逼)하였다’는 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근사(近似)한 바가 있겠는가.
원서(爰書)가 나오고 나자 당시의 무리들이 비로소 규금하는 일이 경서에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감히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이후로 양사(兩司)에서 무함(誣陷)하여 계청(啓請)할 때면 또 ‘위설(爲設)’ 두 글자를 ‘엄가(嚴加)’라는 글자로 바꾸었다. 그 미혹시키고 꾸며 대는 것이 비단 건서진(蹇序辰)이 문자(文字)를 긁어모은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또한 실상에 어긋나 크게 억울하지 않겠는가.
서울에서 종유(從遊)하던 선비들과 그 풍모를 전해 듣고 의리를 사모하던 자들이 함께 부군을 위해 상서(上書)하여 억울함을 풀려고 하였으나, 그중에 ‘동파의 토설(吐舌)’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어 마침내 중지하고 실행하지는 못했다. 길을 떠나면서 친우(親友) 중에 중간 정도의 거리까지 배웅한 자가 있었는데, 부군은 손을 잡고 이르기를, “고인이 이르기를, ‘손을 잡고 웃으며 이별할 일이오, 아녀자처럼 슬퍼하지 말지니라.〔執手笑相別 無爲兒女悲〕’ 하였으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땅히 이런 면이 있어야 할 것이네. 원컨대 제현(諸賢)들은 더욱 스스로 수립하여 세한(歲寒)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게.” 하고는 기쁘게 길에 올랐으며, 조금도 언표(言表)에 원망하거나 위축되는 기색을 보인 것이 없었다.
옥에 구금되어 괴로움을 겪은 칠순(七旬)의 몸으로 준령(峻嶺)을 다섯 개나 넘고 삼천 리를 거쳐 오면서 재촉하는 것에 시달려 피로와 초췌함이 너무나 심하였으나, 정신과 기력은 갈수록 맑고 강건해졌다. 이 어찌 보우(保佑)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적소(謫所)에 이르자 극변(極邊)의 추위가 괴롭히고 풍토(風土)가 맞지 않았으나, 곤경과 환란 속에서도 닥친 환경을 편안히 받아들였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동파(東坡)의 〈여이공택(與李公擇)〉과 주자(朱子)의 〈답유계장서(答劉季章書)〉를 써 놓고 밤낮으로 관성(觀省)하는 자료로 삼았다. 일찍이 시를 지어 여러 아우들에게 부치면서 이르기를, “만약 천명에 대해서 진실로 의심이 없다면 철륜이 머리 위에서 굴러도 아랑곳하지 않으리.〔若於天命信無疑 任彼鐵輪頂上轉〕” 하였다.
독서와 저술을 부지런히 하면서 중단하지 않아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 《돈전최어(惇典稡語)》 등의 글을 지었다. 또 일찍이 명(明)나라 유학자들이 《주역》을 편찬하면서 《본의(本義)》를 《정전(程傳)》에 합해 놓아 고역(古易)의 편차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겼는데, 손수 한 질을 베껴서 정밀하게 자구(字句)를 다듬어 《본의》의 옛 체제를 드러내었다.
북쪽의 습속이 혼우(昏愚)하여 도덕인의(道德仁義)의 설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나 둘 와서 배우는 자가 있었다. 왕왕 그 재능에 따라 사서(四書)의 장구(章句)와 집주(集註) 및 《주자서(朱子書)》, 《소학(小學)》, 《가례(家禮)》 등의 책을 가르쳐 주니, 수년 사이에 자못 진보하여 성취하는 유익함이 있었다.
정축년 여름에 호남(湖南)의 광양현(光陽縣)으로 양이(量移)되었다. 대간이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5월에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 풀려나 7월에 비로소 배소(配所)에 도착하였는데, 무더위 속에서 뱃길과 육로로 다닌 지가 전후 50여 일이었다. 연도(沿途)의 지인(知人)들이 다투어 와서 보고는 모두들 기력이나 모습이 전보다 낫다고 경하(慶賀)하였다. 백운산(白雲山) 아래 옥룡동(玉龍洞)에 들어가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면서 그곳의 그윽한 정취를 즐겼다. 고을 사람 중에 장서 수백 권을 지닌 자에게서 모두 빌려다가 놓고 밤낮으로 그 속에 빠져들어 다시 세간(世間)의 이해와 영욕이 따로 있음을 의식하지 않게 되니, 경(敬)을 지키고 이치를 살피는 공부가 다시 더욱 정밀해졌다. 《춘추범례(春秋凡例)》 2권을 찬술하였다.
기묘년 1월에 방면(放免)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 대간들이 도로 거둘 것을 굳게 청하였으므로 부군은 진양(晉陽)의 경내에서 또 1년 동안 대명(待命)하였다. 경진년 2월에 비로소 정계(停啓)하였다. 3월에 종인(宗人)들을 모아 함안(咸安)과 밀양(密陽)에서 선조의 묘에 성묘하였다. 제전(祭田)과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마련해 두었다.
일찍이 금양(錦陽)의 산천이 밝고 수려한 것을 사랑하였고 또 선영(先塋)에 성묘하기가 편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그곳으로 돌아가 머무르면서 집을 빌려 살았다. 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터라 생계가 더욱 막막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옛날에 배운 것을 다시 익히기를 날마다 일정하게 하였다. 그다음 해 여름에 비로소 완전히 석방되었다. 대간들이 또 여러 달 동안 쟁집(爭執)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여항(閭巷)에서 두문불출하며 세상사와 접하는 일이 적었다. 때때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입을 굳게 다물고 일이 없을 때는 머리 빗는 일을 배운다.〔逢人深閉口 無事學梳頭〕”라는 고인(古人)의 시구(詩句)를 외우면서 이르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이 말이 맛이 있음을 알겠다.” 하였다.
문하에서 배우기를 청하는 사방의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 자질의 고하(高下)에 맞게 기꺼이 가르쳐 주니, 거의 흥기되고 진작되는 효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중환(重患)이 계속되어 갑신년 10월 3일에 금양의 우사(寓舍)에서 졸(卒)하였다. 아, 슬프도다.
그다음 해 1월 경술일에 금양의 북쪽 산기슭의 정향(丁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고(訃告)가 이르는 곳마다 탄식하며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서울의 사대부들은 함께 도성(都城) 남쪽의 옛집에 자리를 마련하여 조곡(弔哭)을 하였다. 장사 때에 모인 선비들이 300여 인이나 되었으며, 여러 고을의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에서 글을 지어 치제(致祭)한 이도 많았다. 2년 뒤인 병술년 9월 경오일에 지관(地官)의 말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남쪽 신석동(申石洞) 손향(巽向)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처음에 판서공(判書公)이 두 번 장가들어 일곱 아들을 두었다. 장자(長子)는 장릉 참봉(長陵參奉) 휘 상일(尙逸)로 문학(文學)이 있어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김 부인(金夫人)의 소생이다. 중씨(仲氏) 존재(存齋) 선생 이하는 모두 장 부인(張夫人)의 소생이다. 장 부인은 바로 경당(敬堂) 선생 휘 흥효(興孝)의 따님이다. 경당 선생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독학(篤學)과 역행(力行)으로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판서공은 일찍부터 그 문하에 출입하여 군자의 입신행기(立身行己)하는 요체를 들었으며, 가정에서 가르칠 적에는 모두 고인의 위기면학(爲己勉學)하는 뜻을 가지고 하였다. 존재 선생에 이르러 마침내 그 단서를 반복(反復)하고 궁구(窮究)하여 가학(家學)을 확충하였으니, 장 부인의 아름다운 규범(閨範)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후씨 부인(侯氏夫人)에 비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부군은 자품(資稟)이 특이한 데다가 어려서 배운 것이 또한 엄정하여 어릴 적부터 비속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등, 근본을 배양하여 덕을 진보시키는 바탕으로 삼은 것이 이미 지극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중씨(仲氏) 선생을 따라서 도를 논하고 학업을 닦았는데, 총명(聰明)과 지려(志慮)가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경전(經傳)ㆍ자(子)ㆍ사(史)의 은미한 말이나 깊은 뜻에서부터 율려(律呂)의 청탁(淸濁)과 성력(星曆)의 도수(度數), 대연력(大衍曆), 참동계(參同契), 여러 병법백가(兵法百家)의 글에 이르기까지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리는 것은 모두 분석하여 그 원래의 지취(旨趣)를 궁구해 내었다. 중씨 선생이 매번 ‘형제 중의 지기(知己)’라고 칭찬하면서 이르기를, “다른 사람은 ‘쉬운 책〔易書〕’도 읽기 어려워하는데 내 아우는 ‘어려운 책〔難書〕’도 쉽게 읽는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 아우는 인품(人品)이 매우 높고 재주와 식견을 겸비하였는데, 애석하게도 세상에서 알아주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끝내 진흙 속에 묻혀 있을 사람은 아니다.” 하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기국(器局)이 호탕하고 지절(志節)이 강개하였는데, 동방(東方)의 변고(變故)가 있은 뒤로는 더욱 항분(抗憤)하여 불평(不平)스러운 뜻이 있었다. 병법(兵法)이나 군율(軍律)의 요체, 군영(軍營)을 구축하고 진(陣)을 치는 방법, 금고(金鼓)와 정기(旌旗)의 용법 등 모두 그 운용(運用)의 묘(妙)와 변화(變化)의 기회(機會)를 알았다. 일찍이 세상에서 팔진(八陣)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거짓이라고 여겨 간간이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의 유법(遺法)을 참고하고 주자(朱子)와 채서산(蔡西山 채원정(蔡元定))의 설을 보태는 등, 추연(推衍)하여 〈신편팔진도(新編八陣圖)〉를 만들었다. 또 일찍이 고금(古今)의 치란(治亂)ㆍ흥망(興亡)의 자취와 임기응변(臨機應變)하는 선후ㆍ본말의 순서를 궁구해 내어서 의론(議論)을 내고 사업(事業)으로 시행할 수 있기를 기약하였다. 아래로는 이적(夷狄)의 정상(情狀)과 산천(山川)의 형세, 변방(邊方) 방어의 요점 등에 이르기까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 뜻은 대개 장차 국가를 위해서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어 제갈 충무후(諸葛忠武侯)가 한 것처럼 천하에 대의(大義)를 펴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시세(時勢)를 살펴보고는 그 일이 행해질 수 없음을 알았고, 또 내외(內外)ㆍ경중(輕重)ㆍ선후(先後)ㆍ완급(緩急)의 순서가 있어서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정자와 주자의 설에서 돌이켜 구한 뒤라야 순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그 학문은 경(敬)을 위주로 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그 앎을 다하고 자신에게서 반성하여 실천하는 것을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 것으로 삼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천고(千古)의 성현들이 서로 전하던 심법(心法)은 오직 일관된 길이니, 그 말은 비록 다르지만 그 이치는 한가지이다. 학자들이 서로 그 공력(功力)을 다하지 않아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침잠(沈潛)하고 완색(玩索)하여 또한 여러 해가 지나면 황연(怳然)하게 지(知)와 행(行) 두 가지가 참전의형(參前倚衡)하는 듯하고 첩경(捷徑)ㆍ구간(苟簡)의 설에 유혹되거나 꺾이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며,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학문하는 방도에 대해 강론할 때나 임금을 위하여 학문에 나아가는 차례를 논할 때면 또 일찍이 이로써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에 보존하는 바가 날이 갈수록 완전해지고 아는 바가 날이 갈수록 통달하게 되니, 그 때문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날로 더욱 친절해져 소략(疏略)한 바가 없었다.
그 기르고 쌓은 것이 깊고 두터우며 덕과 행실이 완성되고 높게 되어서는 흉금(胸襟)이 확 트이어 조금도 막힌 곳이 없으며 윤택이 얼굴과 등에 충만하여 금정(金精)이나 옥윤(玉潤)과 같았다.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이 모두 도리에 맞았으며, 변고나 험한 일을 겪으면서도 더욱 조행(操行)에 주의하였다. 겸손하고 신의가 있어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아무리 급박한 일을 당하더라도 조급하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현명한 이든 어리석은 이든 그 안색을 보고 그 언사(言辭)를 접하게 되면 성심(誠心)으로 열복(悅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평소에 서로 어울리지 않던 자라고 하더라도 “군자인(君子人)이다.”라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행사(行事)의 실제(實際)를 살펴볼 것 같으면 그 안색은 온화하면서 평정(平靜)하였고 그 말은 간결하면서 적당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비록 숙수(菽水)의 봉양일지라도 잇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항상 기쁜 안색과 부드러운 모습으로 어버이의 즐거움을 극진히 하였다. 형제들과는 우애와 공경을 다하였으며 안색이 변하거나 말다툼을 한 적이 없었다. 규문(閨門) 안에서는 은혜와 의리가 모두 극진하여 비록 성인(成人)의 경우에도 반드시 남녀(男女)ㆍ내외(內外)의 구별을 근엄하게 하였다. 자제(子弟)에게 과실이 있으면 노기 띤 음성을 내지 않고 순순히 타일러 느끼고 깨닫게 하였으며, 아래로 노복(奴僕)과 비첩(婢妾)에 대해서도 모두 은의(恩義)를 곡진히 하기를 힘써 그들로 하여금 각자 유감이 없게 하였다. 족당(族黨), 인척(姻戚)에 대해서는 비록 이미 촌수(寸數)가 멀어졌더라도 반드시 그 정의(情誼)를 다하였다. 고향의 친구들에게는 비록 매우 미천하더라도 위분(位分)을 내세워 대하지 않았다. 상례(喪禮)에는 법도(法度)와 애통함을 겸하였으며 제사(祭祀)의 예에는 반드시 정성과 공경으로 하였다. 재해를 당한 이를 위문하고 곤궁한 이를 구휼할 때에는 반드시 그 힘이 미치는 바를 다하였다. 거처하는 곳이 비록 매우 좁고 누추하더라도 방을 반드시 깨끗이 청소하고 도서(圖書)와 궤안(几案)은 반드시 정돈하여 일정한 자리에 놓아두었다. 종일토록 고요히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게으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장난스러운 언동(言動)을 한 적도 없었다.
평생토록 절대 생계와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이재(利財)와 득실(得失)에 관련된 경우에는 물러나 피하기를 마치 스스로를 더럽힐 것처럼 하였다. 식량이 누차 떨어지고 거처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나 태연하게 처하였으며, 일찍이 자손의 생계를 위하여 계책을 도모하지 않았다. 만년에 은거할 집을 지을 때에도 집안이 빈한하고 힘이 부족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판서공이 늘 부군의 생계가 빈한하다고 하여 걱정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때로 노비 등의 물품을 과외(科外)로 내려 주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고사(固辭)하여 받지 않고 종가(宗家)로 돌렸다. 이런 일들이 비록 작은 일, 사소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모두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부군은 반평생을 은둔하면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을 때는 자득(自得)하며 생을 마치려고 하였거니와, 좋은 때를 만나 성은(聖恩)과 예우(禮遇)가 융숭할 때는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성의(誠意)와 사려(思慮)를 다하였다. 우리 임금은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궁리(窮理)ㆍ정심(正心)의 논의를 장주(章奏)로써 간절하게 아뢰고,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다고 하면서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설을 면대(面對)할 때마다 아뢰었다. 치도(治道)를 논할 때면 반드시 호오(好惡)를 함께하여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대의(大義)를 밝히고자 할 때는 반드시 장법(章法)을 훈도(訓導)하고 변비(邊備)를 정비하는 것으로 외침(外侵)에 대비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기타 현사(賢邪)ㆍ왕직(枉直)의 구분을 분변하고 공사(公私)ㆍ상벌(賞罰)의 이치를 밝힌 것도 모두 국가의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관계될 만한 것이다.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할 때에는 모두 사정(事情)에 절실하여 인주(人主)에게 귀결되도록 하고자 하였으며, 일찍이 쓸데없이 번다한 말로써 문의(文義)에 얽매인 적이 없었다. 성상이 마음을 비우고 응답하기를 메아리처럼 할 뿐만 아니라 함께 조정에 선 선비들도 마음으로 열복(悅服)하여 이론(異論)이 없었다. 모두들 이르기를, “진정한 강관(講官)이다.”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도(道)를 굽히고 세속을 좇아서 구차히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부군에 대해 모르는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는 사람도 모두 세무(世務)를 담당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아뢴 바가 대부분 시행되지 않고 더러 ‘임금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고하지 말라’고 말하는 자도 있게 되자 부군은 문득 초연(愀燃)히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정 백자(程伯子)가 말하지 않았던가. 군신(君臣)은 부자(父子) 사이와 같다고. 만약 크게 무도(無道)함을 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의리상 끊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이미 출신(出身)하여 임금을 섬겼으니, 구차히 한때의 헛된 명예를 얻는 것을 좋게 여겨 가벼이 떠나가고 싶지는 않다.” 하였다. 그러나 그 사양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도에 있어서는 또 일찍이 추호도 지나친 바가 없었으며, 의리상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면 힘써 사직을 청하여 때로는 예닐곱 번에 이르도록 계속해서 글을 올렸다.
평소에 아무 일 없이 거처할 때에도 마음은 나라에 걸려 있어서 일찍이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내쳐져 유배(流配)되는 가운데에서도 매번 나라의 우환(憂患)이나 백성들의 고통, 천재(天災), 시변(時變)에 대해 들을 때면 문득 깊이 근심하고 크게 탄식하였고 때로는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인륜(人倫)ㆍ풍화(風化)와 관련된 옥사(獄事)나 음사(陰邪)ㆍ기폐(欺弊)의 작태에 대해서는 특히 통렬히 미워하여 간흉(姦凶)은 제거하고 억울함은 해소하여 반드시 청한 바가 이루어진 뒤에야 그만두고자 하였다. 결국에는 이로 인해 유배되고 곤궁하게 되었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대개 조정에 선 이후로 좌우에서 견제하여 마침내 그 뜻을 조금도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아가서는 충언(忠言)을 다하고 물러나서는 보필(輔弼)할 것을 생각하여 신하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자 하였으니, 참으로 귀신에게 물어보고 천하에 드러내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 만하다. 곧은 도를 빌미로 삼아 얽어서 모함하려 하였으나 두려워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이치가 분명하며 말이 곧았으므로, 비록 망극함으로 얽어매려 하여도 끝내 불측(不測)한 죄를 덮어씌우지 못하였다. 치대(置對)하게 되어서는 위관(委官) 이하가 눈길을 모아 주시하면서 그 거동이 느긋하고 사기(辭氣)가 온화한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기이하다고 칭찬하였다. 공초(供招)가 끝나자 탄식하여 이르기를, “이 노인이 오늘 참으로 명예를 실추하지 않았다.” 하였다. 안세징(安世徵)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내가 남의 말을 잘못 듣고 발론(發論)하여 체포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용모와 사기를 보고서는 무망(无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결단코 군자인(君子人)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내가 마침내 실상을 잘못 말했다고 하여 스스로 탄핵하니, 그로 인해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었다. 그러나 화난(禍難)이 앞에 이르렀는데도 자신의 지조(志操)를 변하지 않았으니 도(道)를 지닌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는, 이어서 혀를 차면서 칭탄(稱嘆)하였다. 아, 직접 보고 감동한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가 있겠는가.
부군은 조정에 나아가서 이미 세상에 뜻을 행하지 못하게 되자, 학문이 끊어지고 도가 쇠해져서 사설(邪說)이 횡행하는 것을 자신의 큰 근심으로 삼았다. 물러나 장차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유경(遺經)을 토론하고 고금(古今)을 상략(商略)하면서 전언(前言)의 득실(得失)을 분별하고 이단(異端)의 그릇됨을 물리쳐 이에 인심(人心)을 맑게 하고 세교(世敎)를 부지(扶持)하고자 하였으며, 우환(憂患)이 있거나 늙고 병들었다고 하여 혹여 해이하거나 폐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퇴도(退陶 이황(李滉)) 선생께서 기고봉(奇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주고받은 사단칠정서(四端七情書)는 참으로 백대 이후에도 의혹됨이 없을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율곡(栗谷) 이씨(李氏)는 곧바로 의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배척하고 그 무리들은 전하여 서로 조술(祖述)하였다. 심지어 이기(理氣)는 호발(互發)함이 없다는 설은 전성(前聖)이 미처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으로 문자(文字)가 생긴 이래로 없던 바라고 하면서, 공공연히 기를 이로 인식하고 인욕(人欲)을 천리(天理)로 인식하며 이(理)를 공허(空虛)하고 명적(冥寂)한 물건으로 인식하니, 그 유폐(流弊)가 장차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바가 있게 되었다.” 하고는, 마침내 조목별로 변파(辨破)하니 전후(前後)로 수천 자가 되었다. 붕우 간에 주고받은 편지가 매우 많았는데, 또한 모두 합하기를 즐기고 분리하기를 싫어하여 이기(理氣)를 변별해 내지 못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 때문에 자세하게 분석하여 본원을 제시해 주었던 것인데, 중요한 것은 모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을 조술한 것이고 자신의 견해를 내세운 적이 없었다.
또 세상의 학자들이 비루(鄙陋)한 데에 빠지지 않으면 고원(高遠)한 데로 내달리면서 이륜(彝倫)과 일용(日用) 사이에서 도(道)를 구할 줄을 모르는 것을 문제라고 여겨 이르기를, “도는 또한 달리 현묘(玄妙)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눈앞에 있을 따름이다. 크게는 군신(君臣), 부자(父子)에서 작게는 이목(耳目)ㆍ구비(口鼻)ㆍ수족(手足)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른바 ‘도’인 것이다. 이는 모두 대체로 평실(平實)한 것이니 어찌 고원하여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는가. 요순(堯舜)의 도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사람들이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제 도를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것이라서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 또한 이상한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과거(科擧)로 사람을 뽑는 법이 생겨나면서 인재와 풍속이 날로 천박해졌으며, 오늘에 이르러 극(極)에 달하였다. 내면적인 것은 구하면 얻고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니, 이는 얻어서 유익한 것을 구하는 것인데도 불가능하다고 둘러댄다. 그러나 저 외부적인 조건들은 요행으로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도리어 성명(性命)을 해쳐 가면서 구하여 되지 않으면 사람의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여긴다. 송나라 주선간(周宣幹)의 ‘만일 중원(中原)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과거 제도를 혁파하고 30년은 지나야 비로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이 주자(朱子)의 칭찬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관학(館學)의 제생(諸生)들에게 통유(通諭)할 때에는 대개 일찍이 부화(浮華)한 것을 억누르고 본실(本實)을 펴서 일용(日用) 사물(事物)의 사이에서 도를 구하라는 뜻에 특히 정성을 쏟았다. 또 풍속을 후하게 하고 인재를 성취시키는 도를 여러 차례 임금을 위해 아뢰었으나, 끝내 그 일이 시행되지 못하니 식자(識者)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전에 존재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구명하던 차에 경세(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어 이르기를,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천지 사이에 가득 찬 사물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니, 실로 성왕(聖王)이 수신(修身)ㆍ천형(踐形)하고 경세(經世)ㆍ재물(宰物)하는 대법(大法)이다. 더구나 부사(父師 기자(箕子))의 팔조(八條)의 가르침은 우리 조선(朝鮮) 만세(萬世)의 표준을 세웠으니, 발휘하고 부연하여 그 전함을 크게 한다면 어찌 전대(前代)에 없던 일대 기사(奇事)가 아니겠는가.” 하고는 바야흐로 장차 수집하고 논저(論著)하여 《홍범연의(洪範衍義)》를 만들었는데, 책이 미처 완성되기 전에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부군은 대개 평일에 이를 반복하여 상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조목을 그대로 따라서 널리 상고하고 채집하여 유별(類別)로 모으고 무리별로 나누니 모두 약간 편이 되었다. 경문(經文)에 근본하여 그 강(綱)을 세우고 전문(傳文)을 참조하여 그 기(紀)를 펼쳤으며, 실제 증거가 될 만한 일을 드러내어 그 실제를 징험(徵驗)하고 의론(議論)을 덧붙여 그 뜻을 밝혔다.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의 성질과 모(貌)ㆍ언(言)ㆍ시(視)ㆍ청(聽)ㆍ사(思)의 법칙에서부터 병농(兵農), 재부(財賦), 제사(祭祀), 치인(治人), 오복(五福)ㆍ육극(六極)으로 권면 징계하는 도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차례를 얻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또 편단(篇端)에 서(敍)를 적어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예처럼 장차 성상께 올려 을람(乙覽)하시게 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중도에 화난(禍難)을 만나 결국 올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훗날의 독자(讀者)들은 그래도 당시 형제분의 성대한 학문이 단지 장구지학(章句之學)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초고(不肖孤)가 동자(童子) 때부터 매번 곁에서 시봉(侍奉)하였는데, 심한 병이 아니고서는 하루도 책을 멀리하고 읽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소한 장구(章句)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마치 크게 유의하지 않는 듯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발명한 바가 있어서 눈앞의 일처럼 분명하였다. 처치(處置)하기 곤란한 일을 만나거나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경우에도 한결같이 모두 지의(指擬)함에 근거하여 행할 만한 바가 있었다. 크게는 조정에서 대사(大事)를 논하고 대의(大疑)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경의(經義)를 근거하고 전기(傳記)를 상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편협한 유생(儒生)이나 곡학(曲學)하는 학자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대개 상황에 따라 이치를 궁구하여 학문에 정견(定見)이 있었으므로 발하여 의론하는 것이 성대하게 여유가 있었다.
평생 주자의 글을 특히 신봉하여 일생의 수용처(受用處)로 삼았으며,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모두 꿰뚫었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의 글은 비록 늙은 뒤에도 오히려 때때로 외울 수가 있었으며, 조정에서의 의론이나 친구들과의 문답은 대체로 이 가운데서 나온 것들이 많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공자께서 시서(詩書)를 산정(刪正)하고 예악(禮樂)을 바로잡고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하셨으며, 《주역(周易)》의 단전(彖傳)ㆍ상전(象傳)ㆍ설괘전(說卦傳)ㆍ문언전(文言傳)을 서술하시어 만세(萬世)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열었다. 진(秦)나라의 분서(焚書)를 겪은 이후로 1500년 동안 오직 주자만이 이 사업을 해내었는데도 마침내 도리어 전무(殿廡)에 배향(配享)되어 한(漢)ㆍ당(唐)의 제유(諸儒)들과 짝을 이루었다. 그러나 역대 왕조에서는 그대로 답습하면서 정리하여 바로잡는 자가 없었으니, 어찌 도를 높이고 덕을 숭상한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공자의 ‘선난후획(先難後獲)’과 맹자의 ‘행법사명(行法俟命)’의 뜻을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로는 오직 무후(武侯)만이 알았으니, 이것이 정자와 주자께서 삼대 때의 인물이라고 허여한 이유이다. 그런데도 후세에서는 악무목(岳武穆) 같은 사람들과 그 우열(優劣)을 비교하니, 어찌 인물을 상론(尙論)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무후의 유문(遺文)과 사적(事蹟), 후대 유현(儒賢)들의 의론을 수집하여 도 정절(陶靖節 도잠(陶潛))의 유사(遺事)와 합하여 《충절록(忠節錄)》 한 편을 만들었다.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또 흥(興)을 읊고 일을 논한 작품들과 군주에게 올린 글들 중에서 황조(皇朝)에 대해 언급한 것들을 편차하여 《존주록(尊周錄)》이라 이름하여 비풍 하천(匪風下泉)의 뜻을 붙였다. 때때로 중국에서 커다란 변고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문득 감개(感慨)하여 마지않았다.
평소에 음주(飮酒)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간혹 붕우들과의 술자리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술이 몇 순배 돈 뒤에 문득 무후의 〈출사표(出師表)〉를 읊고 간간이 두자미(杜子美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柏行)〉 등의 작품을 노래하였다. 음조(音調)가 통창(通暢)하고 의기(意氣)가 격앙(激昂)되니 사람들로 하여금 송연(悚然)히 경청(傾聽)하게 하였다.
성품이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물이나 나무가 조금이라도 청유(淸幽)한 곳을 보게 되면 문득 정신을 모으고 고요히 앉아 밤이 되도록 돌아가기를 잊고 유연(悠然)히 자득(自得)하는 흥취가 있었다.
학자들에게 말해 줄 때는 반드시 사서(四書)를 입두처(入頭處)로 하였고, 특히 《논어》를 요처로 삼았다. 혹 다른 경서부터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꾸짖기를, “어찌하여 엽등(躐等)하여 절차를 무시하려 하는가. 학문을 하면서 사서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어찌 주 부자(朱夫子)가 이른 것처럼 강유(綱維)를 잡아내고 정미함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혹여 의문(儀文), 도수(度數)에 뜻을 쏟는 자가 있으면 이르기를, “우선 《대학》, 《논어》 등의 책부터 익숙하게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며, 힘써 행하여 그것을 지키게 되면 입도(入道)의 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저 이것에만 힘을 쓴다면, 관중(關中)의 학자들처럼 지엽적인 형식에 힘쓰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강론하여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음석(音釋)을 구분하고 구두(句讀)를 바로잡으면서, 반복해서 추론하여 한 글자라도 그냥 지나침이 없었다. 비록 그 자품(資稟)에 고하(高下)가 있고 의문(疑問)에 천심(淺深)이 있더라도 싫증을 내지 않고 자세하게 깨우쳐 주었다. 그 귀결은 참되게 보고 실제로 이행하되 경(敬)으로써 유지하게 하고자 하는 것에서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이르기를, “학자의 공부는 다만 장구를 외우는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응접(應接)할 적에 일마다 정밀하게 살피고 처한 곳마다 체험하여야 한다. 먼저 거처할 적에는 공손히 하며, 일을 집행할 적에는 공경하며, 말은 성실하고 미덥게 하며, 행동은 돈독하고 공경하는 데서부터 한다면 거의 따르고 지키는 바가 있어서 성(性)을 보존하고 인(仁)을 구하여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에 두루 통하는 방도가 될 것이니, 공문(孔門)의 가법(家法)은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무릇 일은 이치를 위주로 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뜻이 공평해질 것이며, 나를 위주로 한다면 마음이 좁아지고 뜻이 사사로워질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런 도리(道理)는 우주(宇宙)에 충만하여 일찍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다만 사람에게 있어서 드러나고 가려짐이 있을 따름이다. 연래(年來)에 이런 의사(意思)를 견득(見得)한 것이 자못 분명하니, 만약 제군(諸君)들과 조석(朝夕)으로 어울려서 이 한 가지 일에 종사(從事)할 수 있다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병이 깊어지자 제생들이 와서 문병(問病)하였는데 부군은 병을 무릅쓰고 거의 감겨진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늘그막에 서로 종유(從遊)하여 거의 상장(相長)의 유익함이 있을 듯하였는데, 이제 병이 여기에 이르렀네. 이제 회복하기 어려울 듯하니, 이 일을 마침내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매우 한스럽네.” 하였다. 하루는 손수 벽에 절구(絶句) 한 수를 제하기를,
하였으니, 대개 절필시(絶筆詩)였던 것이다. 아, 슬프도다.
부군이 젊어서 문사(文詞)를 지을 때는 대개 일찍이 문장(文章)의 전칙(典則)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 문(文)은 간략하여 예스러우면서도 조화롭고 성대하였으며 세속의 진부(陳腐)한 말은 쓰지 않았다. 시(詩) 또한 격조(格調)와 기세(氣勢)가 청건(淸健)하여 자못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기부(夔府) 이전의 체(體)를 배웠다. 그러나 중년(中年) 이후로는 오로지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구명하는 것을 일삼고 문장을 짓는 것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文)의 체(體)는 통창(通暢)한 것으로 바뀌었고 시(詩)는 수식을 일삼지 않아 더욱 한사(閒肆)하였다. 젊을 때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마치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였다.
저서로는 《홍범연의(洪範衍義)》, 《어제주수도설발휘(御製舟水圖說發揮)》, 《돈전최어(惇典稡語)》, 《존주록(尊周錄)》, 《충절록(忠節錄)》, 《영모록(永慕錄)》, 《신편팔진도설(新編八陣圖說)》과 소차(疏箚), 강의(講義), 시문(詩文), 잡저(雜著)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또 일찍이 《퇴도선생언행통록(退陶先生言行通錄)》을 편차하고자 하여 편목(篇目)이 모두 남아 있으나 책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선비(先妣) 증(贈) 정부인(貞夫人) 박씨(朴氏)는 경력(經歷) 휘 륵(玏)의 따님이고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증 호조 판서 의장(毅長)의 손녀이다. 맑은 덕과 곧은 조행(操行)으로 군자의 배필이 되어 뜻을 어김이 없었으며, 궁핍한 중에서도 30년이나 시부모를 섬겼으니, 시부모가 그 어짊을 자주 칭찬하였다. 안팎으로나 상하로나 모두 그 환심(歡心)을 얻었다. 부군보다 32년 먼저 졸(卒)하였다. 영양현(英陽縣) 수비(首比)의 부감(負坎)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넷과 딸 셋을 두었다. 장남은 천(梴)이다. 다음은 의(檥)인데, 중부(仲父) 존재 선생의 후사로 갔다.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다. 그다음은 재(栽)이고, 다음은 심(杺)이다. 장녀는 김이현(金以鉉)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홍억(洪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김대(金岱)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모두 부군보다 먼저 죽었다. 서자가 또 세 명 있었으니, 전(槇), 련(槤), 반(槃)이다. 전은 상(喪)을 감당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천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후(之㷞), 지유(之煣), 지료(之炓)이고, 딸은 금수익(琴壽益)에게 시집갔다. 서자녀가 또 셋이다. 의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익(之熤), 지확(之)이고, 딸은 권구(權榘)에게 시집갔다. 재는 4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훤(之烜), 지번(之燔), 지휘(之煇), 지온(之熅)이며, 큰딸은 이태화(李泰和)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홍정(洪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심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딸은 김광현(金光鉉)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김이현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몽렴(夢濂), 정렴(挺濂), 상렴(象濂)이고, 딸은 채명길(蔡命吉)에게 시집갔다. 홍억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전(景全), 상전(尙全)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김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원(智元)이고 딸은 이수야(李秀埜)에게 시집갔다. 전은 1남 1녀를 두었고, 련은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내외손(內外孫), 증손(曾孫)이 남녀 모두 80여 인이다.
아, 여러 아들들 중에서 불초한 재(栽)는 어리석고 형편없어 이미 후사(後嗣)로서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여 선지(先志)의 만분의 일도 잇지 못하였거니와, 평일(平日)에 담소하던 일을 추억하자니 어제 일 같아 추모(追慕)하며 호곡(號哭)하매 애통함이 가슴을 저민다. 인하여 삼가 생각건대 우리 부군께서는 유선(儒先)이 택참(澤斬)하여 법문(法門)이 쇠퇴한 뒤에 태어나셔서 마침내 고금(古今)을 추명(推明)하여 도(道)의 요체를 훤히 살피셨다. 성신(誠身)이 반드시 명선(明善)에 근본한다는 것을 알아 정추(精粗)와 내외(內外)를 둘로 여기지 않았으며, 수기(修己)가 치인(治人)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 반드시 명체적용(明體適用)을 급선무로 삼았다. 온축(蘊蓄)하면 순수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되고 발하면 고매(高邁)한 의론과 넓은 사업이 되어,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이 이미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게 하고 연원(淵源)과 정법(正法)이 힘입어 민멸되지 않게 하였으니, 덕을 알아 고인을 상론(尙論)하는 선비라면 반드시 그 글을 읽고 그 마음을 얻어서 그 학문의 경지를 알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제 불초고(不肖孤)의 천학(淺學)으로는 참으로 그 만분의 일도 제대로 기술해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종시(終始)를 차례대로 배열하고 본말(本末)을 갖추어 드러내어 행장(行狀), 묘지(墓誌), 비갈(碑碣)을 쓸 때의 자료로 삼는 것으로는 그래도 가첩(家牒)이 없어서는 안 되니, 또한 부득이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있었다. 이에 감히 애통함을 머금고 공경히 세계(世系)와 주리(州里), 출처(出處)ㆍ행업(行業)의 대강을 이와 같이 기술한다. 그러나 일찍이 듣기로 황 문숙공(黃文肅公 황간(黃榦))이 이르기를, “고인(古人)은 훌륭한 임금을 만나 도를 행하여 기릴 만한 업적이 있으면 주소(奏疏)를 서술하지 않아도 되지만, 만약 나아가 세상에서 쓰여지지 못하고 그 볼만한 것이 단지 그 언론(言論)에만 남아 있을 뿐이라면 말과 행동이 어찌 다르겠는가.” 하였으니, 이제 내가 장주(章奏)의 글과 신청(申請)한 일에 대해서 차라리 번다(繁多)할지언정 줄이지 않고 아무리 세세한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대개 또한 근거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오직 입언(立言)하는 군자(君子)의 채택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