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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진리 주장에 대한 붓다의 검증 가능한 "열 가지 기준": 탈진실의 정체를 밝히는 기준의 비판적인 검토 (1) |
본문 번역:
허락을 얻어 본지 편집위원인 송광섭 박사가 미주현대불교 독자를 위하여 번역한 것이다. 본지에 두번에 걸쳐 소개한다.
이 글을 싣을 수 있도록 협조해주신 저자와 번역을 해준송박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원제목과 저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각주와 참고 문헌은 지면 관계로 생략하니 필요한 분은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The Buddha’s Empirically Testable “Ten Criteria” Challenges the Authenticity of Truth Claims: A Critical Review and Its Potential
Applicability to Debunking the Various Post-Truths
Jay J. Choi, doctorjaychoi@yahoo.com and
B. Hyun Choo, bhyun.choo@stonybrook.edu
Religions 2019, 10(12), 645; https://www.mdpi.com/2077-1444/10/12/645/htm
초록:
종교 이론과 수행을 연구하는 현대의 독자들은 실증되지 않은 다양한 진리 주장과 세계관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주장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독자를 갖가지 오해와 잘못된 기준으로 이끌게 된다. 불교에서는 붓다가 존재의 본질에 관한 진리를 깨달았으며 삶의 고통으로부터 궁극의 자유, 즉 “무상 정등각”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붓다는 어떻게 제자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확신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한 붓다의 논거는, 좋은 교육은 받았지만 끊임없는 디지털 정보의 확산으로 과부하가 걸린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붓다는 특히 깔라마 경에서 경험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열 가지 기준”의 지침을 제시하는데, 이 지침서는 이성적인 논리와 도덕성이 결합한 통합적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붓다가 제시한 방법이 본질적으로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속성을 가지며 또한 현대 과학의 기본 원리를 수용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붓다의 방법론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교육학적인 접근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종의 도덕적인 수련법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 독자들에게 하나의 판단기준점으로, 감정과 개인적인 신념에 주로 의존하는 편향된 탈진실로부터 올바른 진실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키워드: 붓다의 열 가지 기준, 깔라마 경; 에-히빠시꼬 Ehipassiko; 경험주의; 실용주의; 사의(四依Four Reliances), 네 가지 위안(Four Assurances),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 탈진실(post-truth)
1. 머리말
최근에 미디어에 의한 과다한 노출과 검증할 수 없는 잘못된 정보의 확산은 지식인 사회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그러한 잘못된 정보를 식별해 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파장을 억제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이 된다. 신경과학자인 대니얼 레비틴이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우리 이전의 모든 인류 역사에서보다 더 많은 정보를 만들었다"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O’Kelly 2015). 레비틴은 주로 최고의 성과에 관심이 있으며, 우리가 낮잠, 달력, 그리고 인터넷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기간 등이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는 문제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최고 성과를 지향하는 자체가 진실에서 벗어나는 "탈진실"로부터 의미 있는 진리를 가려내는 데 얼마나 효과적일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탈진실이란 여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감정과 개인적 신념에 호소하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 영향력을 끼치는 관계이거나 그것을 나타내는 상황"으로 정의된다 (Oxford Dictionaries). 그러면 현대 독자들은, 시험할 수 있고 논리적인 명제를 거쳐야 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의 맥락 안에서 어떻게 이러한 난제에 접근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어느 종교 단체나 지도자가 종교 이론과 수행을 탐구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예견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역사상 많은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붓다는 어떻게 진실 주장을 증명할 것인가라는 도전적인 문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존재의 본질을 깨우치고 염처(念處Satipaṭṭhāna 사띠빠따나, 통찰) 수행을 통하여, 삶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 즉 “무상 정등각”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붓다가 자신의 깨우침에 대한 진위성을 제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어떠한 주장을 제시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으로부터 일련의 질문들이 뒤따를 수 있다. 깨달음 체험은 어느 종교 수행자에게도 독특하고 개인적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자신의 진실 경험의 주장이 어떻게 "올바른 깨달음"에 부합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까? “올바른 깨달음”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러한 깨달음이나 소위 “한 소식”을 얻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그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을까? 이성적으로 교육받고 지식이 넘치는 현대 똑똑한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진리를 올바로 분별하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붓다가 직접 설하신 것으로 알려진 앙굿따라 니까야에 포함된 깔라마 경에 언급된 바와 같이, 붓다의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 "열 가지 기준"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실재의 본질을 조사하기 위해 이성적인 논리와 도덕성이 결합된 통합적 일체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학자는 일반적으로 깔라마경 (혹은 께사무따(Kesamutta)설법)은 붓다의 주요 핵심 경전 중의 하나라는 데에 동의한다. 이 경은 궁극의 진리와 지혜를 추구하는 의제와 관련하여 깊은 논리적 추론과 변증법적 원리의 사용을 옹호한다. 여기서는 담마(법)이나 진실의 경험주의적 검증에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현대 과학의 기본 원리, 즉 보편적 적용 가능성, 방법론적 타당성, 검증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붓다의 '열 가지 기준'은 일종의 기준점 역할을 하면서 길을 밝혀주는 동시에 자율적 추리력을 충분히 확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전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경우, 이성적 추론과 도덕적 실천의 융합을 보여주는 불교적 개념을 채택하는 것은 데카르트와 뉴턴 고전 물리학의 이원론적 틀 안에서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글은 붓다의 가르침을 단순히 정당화하거나 인증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깔라마 경에 밝혀진 붓다의 가르침의 방법론을 고전 과학을 넘어선 현대 과학 원리와 비교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글의 근거가 되는 가정은 붓다의 접근 방법이 현대 과학뿐만 아니라 급진적 경험주의/실용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하나의 의미 있는 인식체계임을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고전과 현대 과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본문 주제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간략한 설명으로 충분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들은 도덕적인 요소와 깊은 논리적 추론의 결합을 지지하는 붓다의 전략을 검토하고, 그가 제안한 방법이 도덕적 원리의 기초로서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고 단언한다. 붓다가 제안한 방법론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역학 관계에 관한 경험주의적 탐구를 제공하고, 설득력 있고 타당한 방식으로 일종의 기준점 역할을 하면서 사실상의 지침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 접근법이 현대의 다양하게 주장되는 편향된 탈진실과 올바른 진리를 구별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을지를 조사할 것이다.
2. 깔라마 경에 제시된 붓다의 “열 가지 기준”은 현대 독자들에게 얼마나 유효한가?
비구 보디 존자는 현대 불교계에서 깔라마 경은 사성제에 대한 담론과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필수 불교 교재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이 경전은 마치 붓다가 자유로운 탐구와 과학적 원리에 근거한 서양의 경험론을 예견한 것 같다고 하면서, 진리에 대한 효과적인 개인적 탐구를 지지하였다. 또한 20세기 초부터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불교 교본 중 하나로, 현대적인 기치를 가진 사람들에게 붓다는 그들의 선구자라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제공되었다고 피력한다 (Bodhi 2012, p. 73).
깔라마 경에서 붓다는 깔라마 사람들에게 특정 열 개 항목에 현혹되지 말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붓다도 제자들도 이 경에 대한 구체적인 제목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붓다의 열 가지 기준"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깔라마 경은 붓다가 많은 유행승들과 함께 꼬살란 지역인 께사뿟따를 방문했을 때 이 담화가 시작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깔라마라고 불리는 주민들이 붓다를 맞이하고 난 후, 그들은 붓다의 조언을 구한다:
세존이시여, 께사뿟따에 오는 많은 브라만과 명상수련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교리를 설명하고 칭찬하고, 타인의 교리를 부정하고, 매도하고, 경멸하면서, 깎아내립니다. 그 후에 다른 브라만들과 명상수련자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도 역시 자신의 교리를 설명하고 미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교리에 대해서는 똑같이 깎아내립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불확실한 의심의 눈초리를 남깁니다: 이 존경받는 명상 수련자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그리고 어느 쪽이 허위를 말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 (Thanissaro 2015)
이에 대해 붓다는 아직 납득이 가지 않는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일련의 권고를 조언한다; 그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가르침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는 "열 가지 기준"을 열거한다. 붓다는 그들이 다만 여러 가지 방법이나 기술을 써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적인 가르침은 믿지 말 것을 촉구한다. 오히려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직접적인 앎'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명한 사람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계속해서 그들에게 암묵적인 수용을 채택하지 말고, 직접적 앎으로 질문하고 개인적인 시험을 통해 그 진실을 규명하라고 충고한다. 붓다는 그의 메시지가 인간의 삶에서 피해와 고통을 줄이면서 복리와 행복의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깔라마 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 불확실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깔라마 사람들이여 [1] 확인되지 않은 보고에 의해, 반복된 소문, [2] 전설, 소문, 풍문에 의한, [3] 전통에 의한, [4] 경전에 의한, [5] 논리적 추론, 추측,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6] 유추, 공리에 의한, [7] 비유, 피상적이고 그럴듯한 외관에 대한 성찰, [8]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견해와 추측이 마음에 흡족하여, [9] 개연성에 의하여, 다른 유력한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또는 [10]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 라는 존경심에서. 이러한 법들은 서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러한 법들은 현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이 채택되고 실행될 때, 피해와 고통을 초래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스스로 알게 되면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Thanissaro 2015, Woodward 2006, pp. 170 ̶ 175, Soma Thera 2010, Wallis 2007, pp. 92 ̶ 96)
처음 네 가지 기준은 전통에 따른 제안이고, 다음 네 가지 기준은 다양한 유형의 추론을 나타내고, 마지막 두 가지 조항은 개인적 권위의 두 가지 유형을 가리킨다. 이처럼 붓다는 명확한 판단 기준점을 바탕으로한 자유로운 탐구를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수행자들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업보를 일으키는 세 가지 불건전한 악의 뿌리를 제거할 것을 권장한다. 그 담론은 즉각적인 함축적 의미를 넘어서 곧바로 담마의 핵심, 즉 그와 같은 불건전한 상태에 맞서 종식해야 할 필요성으로 파고든다. 이것들은 잘못된 악행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고통의 기본적인 근원이기도 하다. 담마의 온전한 목적은 각각 관대함과 친절, 지혜(계정혜)의 실천과 양성을 통해 이러한 악한 상태를 근절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가르침이 자신이나 타인을 해치고 고통을 주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제거되어야 하며, 반대로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고, 그들의 복지와 행복으로 이어지게 되면, 받아들여 발전시켜야 한다. 깔라마 경은 그러한 독특한 특성 때문에 불교학자들에 의해 붓다의 “자유 탐구의 헌장” (Charter of Free Inquiry, Soma 2013) 또는 “불교도 대헌장” (Buddhist Magna Carta, Wallis 2007, p. 92)이라고 명명되었다. 그 가르침은 독단주의나 맹신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법령은 강력하게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붓다는 보편적이고 적절하며 즉각적으로 검증할 수 있고 도덕적인 규율을 지키는 삶을 위해 유효한 가르침을 제안한다. 붓다는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도덕적 정화와 자비의 삶은 그 자체의 고유한 보상 즉 행복과 내면적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아직 설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붓다는 그러한 가르침은 현재의 복지는 물론 행복한 환생을 위한 안전한 통로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선언한다. 담론의 시작 당시 깔라마인들은 아직 붓다의 제자로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붓다는 그저 그들의 의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하는 지나가는 현자 중의 한 사람으로만 여겨졌다.
비구 보디는 깔라마인들에 대한 설법은 실행 가능한 구제와 교화의 교리로서, 법에 대한 신뢰성을 얻도록 하는 일종의 시금석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 경이 도덕적으로 온전한 상태에 있는 어느 사람이라도 즉시 검증이 가능한 가르침으로 시작되어 결국 담마를 들어내고 정화하는 힘에 대한, 확고하고 경험에 의한 신뢰를 바탕으로 스승으로서의 붓다에 대한 깊은 믿음을 만들어 낸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이것은 전체 팔정도의 선구자적인 정견이 시작하는 것을 알린다. 비구 보디는 붓다의 가르침을 믿음직스럽게 받아들이는 힘을 갖는 것은, 믿음을 지혜로, 신뢰를 확신으로,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절정에 이르게 되는 여정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Bodhi 1988).
소마 테라는 붓다의 깔라마인들에 대한 설법은 자유로운 탐구를 장려한 것으로 당연히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경전의 정신은 광신주의, 편협성, 독단적 교조주의, 불관용이 없는 메시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Soma 2013). 따라서 깔라마 경은 맹목적인 믿음, 편견, 그리고 그럴듯한 이유에서 생겨나는 믿음을 단념시키고, 여기에 제시된 증거는 독단주의가 궁극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의 수행 여정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과학적인 진리에도 필수적이다. 즉 과학은 경험적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실용적이고, 이미 존재하는 권위적인 믿음과 그 주어진 사회 구조 규범에 근거하기보다는, 자신의 검증 가능한 경험에 근거하여 스스로 결정한다.
3. 붓다의 전략: 양자역학의 틀 안에서 도덕성의 요소
붓다는 어떠한 근거로 우리에게 열 가지 기준에 의존하라고 하는 것일까? 붓다 특유의접근방식은 다음과 같다: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다음을 알 때, 즉 ‘이러한 가르침은 이익이 되지 않으며, 이러한 가르침은 비난받을 만하며, 이러한 가르침은 현자에 의해 검열되고, 또한 수행되고 받아들여질 때 이러한 것들이 상실과 슬픔에 이르게 되면’ 그대들은 이것을 거부해야 할 것이다 (Woodward 2006, p. 172). 그대들이 다음과 같이 알 때: ‘이런 것들은 좋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흠잡을 데가 없다; 이런 것들은 지혜로운 자들에 의해 찬미 되어, 수용되고 목격되며 이런 것들은 유익함과 행복으로 이어지게 되면’ 그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준수하여라 (Soma Thera 2010).
붓다에게 있어서 도덕성이나 자비라는 요소는 진리와 분리될 수 없고 오히려 진리와 합쳐진다. 이것은 데카르트-뉴턴 주의의 이원론적 시각을 가진 고전철학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붓다의 사상에 그토록 중요한 도덕성 문제가 과학 분야로 편입되지 않은 것은 그와 같은 요소들은 비객관적이고 따라서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지식인들은 자비심을 포용하는 붓다의 합리성을 부담 없이 이해할 수 있을까? 최근 고전물리학을 넘어 현대 과학의 틀 안에서 도덕성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수용을 다루는 문제에 대한 개념적인 접근법이 새로 개발되었다. 양자역학에서 새로운 발견은 물리적 실재가 논란의 여지 없이 비국소적(nonlocal)일 수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데, 이는 중간 단계(신호를 사용하지 않는 통신)을 거치지 않고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물리학은 물리적 실재는 국소적이라는 관점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공간상의 한 지점에서의 관측은 상당히 짧은 거리를 넘어서는 다른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까지 이것은 불변의 진리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비국소적(nonloality)으로 알려진 자연의 놀라운 새로운 현상이 1982년에 일어난 일련의 실험에서 밝혀졌다. 이 실험들은 아일랜드의 이론 물리학자 존 벨이,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1936년 제기한 일련의 질문에 대응하여 개발한 정리에서 제안된 가설을 시험한 것이었다 (John S. Bell 1964, pp. 195ㅡ200). 따라서, 비국소성에 관한 새로운 과학적 증거가 “비이중성과 전체성”(nonduality and wholeness)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Choo and Choi 2017, pp. 61 ̶ 62). 저자는 양자 물리학의 합리적인 관점에 따라, 비국소성 개념과 그것의 확장으로 도출된 비국소성-비이중성-전체성(nonlocality-nonduality-wholeness, NNW))의 연속 개념이야말로 붓다의 도덕성을 포용할 수 있게 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특히 아미타불의 지혜와 그것의 보완 개념인 자비심이 현대 양자역학의 구조에 적절히 합치된다는 것이다 (Choo and Choi 2017, p. 68).
붓다는 현대 양자역학에 대한 일편의 지식이 없었어도 특정한 가르침의 가치를 평가하고 확인하는 데 있어 현저하게 유사한 기본 원리를 제시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누가 시작했든지 가르침이나 진리가 해로움과 고통을 유발할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하라고 충고한다. 만약 그것이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장 난 역기능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붓다는 그러한 가르침이 어떻게 “해로움과 고통”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깔라마인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탐욕이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손해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확실히 해로움과 고통을 일으키게 된다.' 붓다는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한다. '욕심에 사로잡혀 마음의 통제를 잃음으로써, 그는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이지 않는가, 주어지지 않은 것을 빼앗고, 남의 아내에게 접근하고, 거짓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이것은 오랜 세월 그에게 상실을 느끼고 슬프게 하지 않겠는가? (Woodward [1932] 2006, p.172)
붓다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탐욕에 대한 그의 논의와 비슷한 방식으로 성냄과 어리석은 결과에 대한 그의 담론을 확장한다. 이처럼 그는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를 탐욕과 성냄, 망상에 압도되는 불건전하고 해롭고 병든 도덕적인 삶과 연결한다. 상대적으로, 그는 건전한 도덕적 행동이 결국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이익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욕심에 압도되지 않고, 마음을 통제하여서,-- 그는 살생을 멈추지 않는가? 다른 사람을 오도하여 오랫동안 자신의 상실과 슬픔이 될 상태로 이끄는 것을 멈추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Woodward [1932] 2006, p. 173)
따라서 붓다는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진 결과를 건전한 도덕 생활과 연결하고, 왜 이런 잘못된 가르침들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지를 선언한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그대들은 잘못 끌려가지 마세요..: 그대들은 스스로 알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유익한 것이다…그리고 행복으로 이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키라, 그것이 내가 그것들을 말하는 이유이다. (Woodward [1932] 2006, p. 174)
그는 계속해서 사무량심(四無量心, Four Immeasurable Minds, 자비희사)을 상세히 설명한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 깔라마인들이여, ... 탐욕과 악의에서 해방되어, 당황하지 않고, 그러나 선한 의지, 연민, 동정, 평등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기를 통제하고 마음을 챙겨.. 널리 퍼지고, 위대하고 무한하며, 적개심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평정심으로.. 전 세계에 널리 퍼져 머물고.. (Woodward [1932] 2006, pp.. 174-75)
이처럼 붓다는 잘못된 '이른바 주장된 진실'을 피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숭고한 마음가짐을 형성하기 위한 이 네 가지 감정적 자질을 배양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장려한다. 이러한 자질은 사회적 화합과 개인의 안녕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Woodward [1932] 2006, p. 96).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사무량심은 저 너머 해안에 이르는 육바라밀(S.pāramitās)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사무량심과 육바라밀은 비슷해 보이지만, 여러 가지 면의 다른 사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사무량심 에서는 자비심과 이타적인 환희심에 나타나는 비이중적인 의미에서 일체성(wholeness)의 요소가 강조되는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지혜의 실천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정신은 후에 중국 불교에서 지속한다.
4. 붓다의 “네 가지 위안”[Caturassāsa]은 “파스칼의 내기”를 연상케 한다
붓다는 사무량심에 대한 실용주의적 통찰력을 함양시키는데, 수행자가 선한 의지와 연민, 동정적인 기쁨과 평정심 등 사무량심으로 충만한 의식이 온 세상에 팽배하여 친절하고 온화한 심성을 기르면, 뒤따라 일어나는 네 가지 위안(four assurances)을 구현하게 되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네 가지 위안의 덕목은 네 개의 긍정적인 정신 상태, 즉 사무량심의 무량한 실천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된다. 이들은 사방으로 광명을 비추어, 위로와 위안을 함께 주는 보람 있는 품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깔라마인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처럼 마음에 원한이 없고, 마음에 악의가 없고, 마음이 오염되지 않고, 마음이 청정하여 바로 여기에서 지금, 이 삶에서 네 가지 위안을 얻는다 (Woodward 2006, p. 175, Soma Thera 2010).
네 가지 위안은 다음과 같다:
만약 죽음 뒤에 세상이 있다면, 옳고 그른 행위의 결실과 과보가 있다면, 이것이 바로 죽음 뒤에 육체가 해체되면서, 좋은 곳, 즉 천상세계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얻는 첫 번째 위안이다. 그러나 만일 죽음 뒤에 내세가 없다면, 옳고 그른 업들에 대한 결실과 과보도 없다면, 여기 현생에서 원한 없고 악의 없고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이것이 그가 얻는 두 번째 위안이다. 만약 어떤 이가 행하면서 나쁜 행 [결과]가 일어나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악을 저지르도록 하지 않았고 자신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어떻게 괴로움과 마주치겠는가? 이것이 그가 얻는 세 번째 위안이다. 하지만 만약 어떤 이가 행하면서 나쁜 행이 일어나지 않으면, 두 가지 면에서 청정한 나를 볼 것이다. 이것이 그가 얻는 네 번째 위안이다. (Thanissaro 2015)
붓다는 왜 “위안(assurance)”의 요소를 자신의 기준과 결부시켰는가? 그는 탐욕, 증오, 망상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얻은 정신적 행복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네 가지 위안에 대해소마 테라는 붓다의 의도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깔라마 경은 담마의 기본 틀을 반영하고 있고, 네 가지 위안의 설명은 일상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문제에 관하여 어느 정도 판단 중지를 옹호하는 범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한 위안은 도덕적으로 고결한 삶을 사는 동기가 반드시 재생이나 응보에 대한 믿음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증오, 망상의 극복을 통해 얻어지는 정신적 행복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Soma 2013). 여기에서 붓다는 단순히 이성적인 관념의 정당화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실제적인 경험과 행동을 강조하는 실용주의 전략을 구사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이 점에 대한 언급은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2천 년 이상 지난 후, 붓다의 “네 가지 위안”은 파스칼의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성향에 특별히 붙여진 이름인, “파스칼의 내기”[도박]을 연상시킨다. 파스칼은 우리가 신을 믿어야 할지 말지를 두고 내기를 할 때 득실을 따져볼 것을 제안한다. 그는 합리적 이성은 신이 존재함에 내기를 거는 쪽으로 설득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다음과 같이 갈파한다: "그렇다면 주저 없이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걸어라." 에드워드 맥클레넨은 파스칼의 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McClennen 1994, pp. 115-137):
신이 존재 비존재
내기 걸기 천상에 나다 현상 유지
걸지 않기 지옥 고통 현상 유지
그러나 그의 결론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확률을 명확한 어귀로 표현하여 공식화한 것과 노름 내기에 대한 고려사항이 그의 주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우리는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낼 능력이 없지만, 우리는 어떤 식이라도 관련 있는 여러 결과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내기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무량심을 배양하는 것은 행동의 결실에 관한 우발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사무량심을 배양할 때 나타나는 최악의 결과는 적어도 원한, 악의, 고통의 지배를 받는 관행에서 나타나는 최상의 결과만큼 될 것이다. 만약 사후 세계가 있고, 자신의 행동이 올바로 그 결실을 본다면, 적극적인 수행의 결과는 좋은 최종 도착지[천상]로 이끌 것이다. 붓다는 여기에서 합리적 이성이 수행자로 하여금 사무량심을 닦아 나가도록 설득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30년대 초부터 일련의 학자들이 개발한 하나의 전형적 인식체계인 “의사결정에 관한 다중기준” (MCDM)은 복잡한 문제를 구조화하고 여러 가지 상충하는 기준을 평가하는 것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더 나은 의사결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Köksalan et al. 2013, p. 87). 이 모델은 다중기준을 활용하여 구조화하고 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용 가능한 일련의 선택사항에서 원하는 대안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MCDM 분야의 관점에서 붓다의 전략은 세 가지 전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특정 결정 기준에 따른 여러 보상의 결정 행렬, 둘째는 사무량심을 함양하는 실행 가능성, 셋째는 이성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금언이다. 특히 합리성은 예측할 수 있는 효용이나 보상을 극대화하는 것을 지향하는데 이것은 실용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다. 붓다는 어떤 결정은 이 기준에 의해 선택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사무량심에 대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두 모델 모두 빈틈없이 분별 있는 이유를 들어서 내기 걸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붓다의 접근방식은 인간의 복지를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고통을 피한다는 점에서 파스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상대적으로 파스칼은 신을 믿어야 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동기부여가 되어 있다. 붓다는 행복하고 도덕적인 삶은 뒤이은 업보나 보상이 없더라도 충분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에서 그 보상이 물질주의적인 종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깔라마 경에서 붓다의 가르침의 독특한 강점은 자신의 메시지를 체계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실용주의와 자유주의의 전략을 채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영원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신념은 자유의지의 문제라는 논제를 활용한다. 따라서,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과학철학에서 말하는 논리적인 이성적 추론과 경험론에 친숙한 지식인들은 거부감 없이 붓다의 제안을 활용하여, 사무량심을 함양하기 위한 합리적 단계를 탐구하도록 설득될 수 있다.
5. 궁극적 입증, 눈과 귀를 통한 “검증자 경”(Vīmaṁsaka Sutta, M47)
붓다의 네 가지 위안은 다음과 같은 가정법 추정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죽은 뒤에 세상이 있다면, 그리고 옳고 그른 행위의 열매가 있다면: 육체의 소멸과 함께, 죽은 뒤에 세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리고 행위에 대한 열매가 없으면… 그러나 니까야에는 붓다 자신의 수많은 전생에 대한 경험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따르거나 혹은 육체의 소멸에 따른 업보의 결과도 여러 차례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붓다께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알고 계셨다면 왜 네 가지 위안을 묘사하면서 “가정”이라는 표현에 의존하려 했을까? 이 점에서 그는 경험주의자의 합리적인 의심을 만족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분명히 붓다는 제자들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 그의 가르침의 타당성을 입증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열 가지 기준, 심지어 자신의 가르침에도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적용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검증자 경에서 단계별로 정교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깨달음의 상태를 검토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엄격한 조사 형식인 독특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붓다의 마음가짐은 일상적인 인식 수준을 너머 있는 숙명통, 타심통, 누진통 등 “삼명지”(三明知 Three True Knowledges)에 관하여 아직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깨우치지 못한 이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붓다의 설법 당시 깔라마인들은 아직 그의 메시지의 진위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만일 어떤 대화자가 "당신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당신에게는 타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당신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시험하기 위해 당신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도 되겠소?" 이렇게 물었다고 가정해보자. 붓다는 귀납적 경험론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스승을 판단하는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르침은 기록된 역사에서 나타난, 어느 종교적인 혹은 영적인 지도자가 행한 선언 중, 거의 틀림없이 주장하건대, 가장 독특하고 합리적인 선언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 붓다는 검증자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늠할 줄 모르는 검증하는 비구는 여래가 정등각자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여래를 [그가 완전히 깨우쳤는지 여부를] 참고하여 연구해야 한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Ch. 47, Vīmaṁsaka Sutta, pp. 415 - 441)
그는 비구들에게 눈과 귀를 통해 알아볼 수 있는 두 종류의 상태에 대해 여래를 조사하라고 조언한다. 여래에게 눈과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오염된 경계가 있는가, 아니면 여래에게 없는가?" 그는 계속해서 눈이나 귀를 통해 알 수 있는 다양한 상태와 관련된 구체적인 질문을 한다.
눈으로 알 수 있고 귀로 알 수 있는 불순한 섞인 법들이 여래에게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이 존자는 이 유익한 법을 오래전에 증득했는가, 아니면 최근에 증득했는가? .. 이 비구 존자는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었는데 그에게 어떤 허물이 발견되는가? 이 존자는 두려움 없이 절제되고 있는가, 그는 욕망을 부수어 건넜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는가? 존자의 두려움 없이 억제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증거는 무엇인가?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p. 415-416)
이에 대해 붓다는 "눈이나 귀로 알아볼 수 있는 청정한 법들이 여래에게 있다"고 답한다. “그것들은 나의 길이고 나의 영역이지만 나는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 1243). 이러한 모든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제자는 스승에 대한 신뢰를 하게 될 것이다:
‘세존께서는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셨고, 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승가는 도를 잘 닦는다.’ 어떤 사람이든지 이러한 이성과 용어들, 표현을 통해 여래에 믿음을 심고, 뿌리를 내리고, 확고해지면 그런 믿음이야말로 합리적인 비전에 뿌리를 두고 확고하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를 법답게 참구했고, 이처럼 여래는 법(Dhamma)에 따라 참구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 418)
추가해서, 붓다의 마지막 말씀인 "그것들은 나의 길이고 나의 영역이지만 나는 그것들에 집착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이것이 그의 접근법이고, 이러한 정화된 덕목의 상태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는 제삼자 경험주의 관찰자의 객관적 역할을 유지한다. 이러한 붓다의 언급은 예수의 선언과는 현저한 대조를 나타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나는 길이며 진리와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에게 올 수 없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맹목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거나 단순히 붓다로 추앙하고 있어서 받아들이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실제로 붓다는 정말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는지에 대해 제자들이 시험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은 체계적인 조사 방식을 제시한다. 이와 같이 붓다는 어느 수행자가 붓다를 포함한 어떤 유명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타당한 추리와 직접적인 개인적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실규명에 관한 한 이와 같은 방법론은 이전에 인용된 적이 없었다. 이는 심지어 자신의 타당성을 시험할 수 있는 수단을 선언하는 것으로써 전무 후무한 선언으로 보인다. 이 증거는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유무를 증명하는 엄밀한 시험을 통한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러한 붓다가 제시한 방법의 적용은 다음에 이야기하는 궁극적인 진리의 평가에 있어서 설득력 있는 모델을 제시한다: 즉 결과적인 판단은 현대에 확산하는 복잡하게 뒤얽힌 왜곡된 견해와 다양한 탈진실의 정체를 밝혀내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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