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묵황도 墨荒刀
정오 正午,
박지형이 완성된 커다란 묵도 墨刀를 들고와 이중부에게 전해준다.
나흘 동안 담금질로 이리저리 두들겨 철 속의 불순물을 제거시키고,
형태를 잡은 기다란 도 刀를 네 명의 병사가 밤낮으로 번갈아 가며,
묵도의 큰 날을 넓은 커다란 숫돌에 사흘을 갈았다고 한다.
칼이나 낫을 숫돌에 갈면, 칼날을 날카롭게 벼리는 목적이 주된 것이지만,
부수적 附隨的으로 담금질 효과를 볼 수 있다.
즉, 날이 단단해지고 인장력이 높아지는 이점도 크다.
절차탁마 切磋琢磨다.
숫돌에 쇠를 갈게되면 돌과 쇠가 부딪치며, 그 마찰로 인하여 쇠 날에 열이 난다.
그때 물을 뿌리면 쇠가 식는다. 쇠는 급격히 빨리 식을수록 단단하게 변한다.
그렇게, 계속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면 할수록 칼날은 단단하게 더 야물어진다.
사흘 동안 여러 명이 공들인 만큼 과연 칼날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다.
허공에 몇 번 휘둘려보니 묵직한 도가 마음에 든다.
혈창루 사부가 길고 큼직한 묵도 墨刀를 보고는 도명 刀銘을 ‘묵황도’ 墨荒刀라 지어주었다.
등이 검고 거친 큰 칼이라는 뜻이다.
칼도 이름도 마음에 든다.
이중부는 혈창루 사부 앞에서 묵황도를 들고 조선세법 7식을 펼쳐 보였다.
이중부가 조선세법을 시전 示展하자,
그 위맹스러운 도법에 따라 바람이 일고 구름이 흐트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엄청난 도법의 위력에 혈창루 모용척과 박지형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게 무슨 도법이냐?”
“조선세법이라고 비급에 적혀 있었습니다”
“응? 조선세법이라고?”
혈창루의 눈이 또다시 더 크게 휘둥그레진다.
“네, 오래된 낡은 죽간이지만 갑골문의 서체 書體는 겨우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흠, 기연 奇緣을 만났구나”
“예?”
“조선세법이 실전 失傳된 지 벌써 이백여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그토록 대단한 도법입니까”
“그럼, 동이족 단군 세가의 비술 祕術 중에서도 최고라 자랑할 수 있는 고난도 무술이다”
“...”
“네가 복 福이 있어, 역대 歷代 최고의 도법 刀法을 연마하였구나, 축하한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제 너의 적수를 찾기 힘들 것 같구나”
“과찬 過讚이십니다”
“아니다. 빈말이 아니다. 지금 당장 선봉장을 맡아라”
“네, 알겠습니다”
3천의 선봉대를
이끌고 이중부가 앞서고,
천강선 우문청아 천부장과 고발후가 좌, 우장을 맡는다.
설태누차가 박지형과 함께 중군 中軍으로 2천 병력을 이끌고 선봉대 뒤에 진을 치고 가세 加勢한다.
그런데 중군의 진 형태 陣 形態가 일반적인 일자형(一)이
아니라, 쇄기형으로 포진
布陣하고 있다.
앞이 뾰족한 쇄기형의 진형은 전형적인 典型的인 공격 위주의 진 형태다.
이중부가 묵황도를 비켜차고 결투장 중앙으로 갈색 말을 타고 나아간다.
상대 진영에서도 한준이 백 말을 타고 양날 창을 들고 마중 나온다.
하갈도호와 보육고가 좌, 우장을 맡아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있다.
이중부를 바라보는 한준의 눈이 크게 떠진다.
중부가 주로 장창을 사용하였지, 도를 사용하는 것은 여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부가 커다란 도 刀를 들고, 하늘로 치켜세우자 한 번 더 놀란다.
저렇게 크고 기다란 도는 처음 보는 것이다.
그래도 한준은 자신만만하다.
일촌일강 一寸一强이 무기의 강약 强弱을 좌우한다.
한치가 길면, 그 긴 길이 만큼 위력이 강력해짐을 강조하는 말인데,
묵도의 길이는 고작 여섯 자를 넘지 못하니, 장창의 반 길이에 불과하다.
그러면 더구나, 달리는 마상 馬上에서는 거리상 상대에게 큰 위협이 되질 못 한다.
한준의 양날 창이 중부의 가슴을 향해 날카롭게 찌른다.
이를 피하면서 중부는 묵황도를 옆으로 쓸 듯이 한준을 베어간다.
단순한 방어와 공격적인 수법처럼 보이지만, 당사자인 한준은 이상함을 느낀다.
일반적인 도검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중부가 도법을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3, 4차례 창과 도가 엇갈리더니 한준은 중부의 허점을 발견하였는지,
양 두 창을 곧추세우더니 위에서 아래로 힘껏 내려친다.
중부는 가슴을 옆으로 슬쩍 돌리며 묵황도를 위로 휘둘러 창 자루를 쳐낸다.
서로의 기세가 대단하다.
창과 도가 처음으로 맞부딪친다.
그런데,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한준의 창 자루가 옆으로 튕겨 나가는데 소리가 이상하다.
그 일 합에 창 자루에 금이 가버린 것이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박달나무 창 자루가 단 일합 만에 못쓰게 된 것이다.
과연 묵직한 묵황도의 위력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당황한 한준, 도주할 시간을 벌고자, 한 번 더 중부를 찌르는 흉내만 내고는 얼른 말머리를 돌려 도망을 간다.
순간,
천강선 우문청하와 고발후가 삼천 선봉대를 이끌고 이중부를 뒤따라 적진을 향해 돌격한다.
우문청아는 중부의 조선세법이 승리할 것으로 이미 확신을 갖고,
상대의 움직임을 호시탐탐 虎視眈眈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터였다.
두 영웅의 대결 전부터 이미 승부를 예상하고,
그 이후의 사태에 대하여 학수고대 鶴首苦待하고 있었던 바라던 상황이 드디어 온 것이었다.
반면,
당연히 선봉장 한준이 이길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여유를 부리던 일축왕 선봉대는 예상외의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부장 두 명이 이중부를 막고자 나셨으나, 단 이합에 목이 몸에서 분리되고 말았다.
하갈도호가 장창으로 막아서나 단 일 합에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다.
조선세법을 처음 목격한 영광의 상처다.
북 흉노측은 파죽지세 破竹之勢로 적 진영을 돌파하여,
남 흉노 진지 陣地를 무인지경 無人之境으로 짓밟아 버렸다.
묵황도를 휘두르는 중부의 갈색 말이 선두에서 적군을 유린하고 뒤이어,
천강선이 이끄는 청하문도와 담비가 앞장선 사로국 출신의 병사들이
좌우에서 적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초토화 焦土化 시켜버렸다.
적의 선봉대 오천 병사 중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남흉노의 진영에서는 아록한 천부장이 오천 병력의 지원군을 이끌고 나오니,
중군을 맡고 있던 설태누차와 박지형이 기병 이천 명을 이끌고,
아군의 측면을 우회 迂廻하여 적진 敵陣의 옆구리를 끊고 도륙 屠戮하기 시작하였다.
중군 中軍의 쇄기형의 진형도,
천강선 우문청아가 이중부와 한준의 맞대결에서 중부가 승리할 것을 나름 확신하고,
설태누차와 박지형에게 사전에 이야기하여 공격적인 진형으로 미리 변경시켜 둔 것이었다.
그러니 기마병들이 순발력 瞬發力을 발휘하여 적을 재빨리 제압할 수 있었다.
박지형의 측근에는 제자인 걸걸호루가 호위병 역할을 자임 自任하고 있었다.
말갈족장의 아들인 걸걸호루도 이제 헌헌장부 軒軒丈夫로서 전장 터에서 용력을 뽐내고 있었다.
남흉노 측의 진영은 참혹한 아비규환 阿鼻叫喚이 벌어졌다.
오후의 전투에서 일축왕 측은 병사 팔천 명을 잃고, 나머지 이천 명도 부상의 정도가 심각한 상태였다.
선우 측은 삼십여 명이 전사하고, 이백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선우 측의 완승이다.
전마도 삼천 필이나 노획하였다.
선우 진영은 오랜만에 축제를 벌인다.
말을 잡고 양을 요리하고 주위의 분위기가 들뜬다.
그런데 단 사람,
박지형은 을지담열 소왕에게 불려가 문책 問責을 당하였다.
“책사 策士는 싸움터에 직접 가담 加擔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책사도 전장터에 나가야 적의 실력이나 동태를 세밀히 파악할 수 있고 따라서, 전략이나 구체적인 작전을 세울 수 있다”라고 항변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박지형이지만 포상은커녕 오히려 호된 질책 叱責을 받았으니, 그 불만이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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