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7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신의와 예지다.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신의와 예지가 없으면 소용없다. 신의와 예지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지이다(제1독서). 바리사이는 자기 행실에 대해 교만한 나머지 세리를 무시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죄를 알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한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고, 세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겼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서 의인과 죄인의 구분점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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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톨스토이가 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돌”이라는 짧은 단편 소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여인이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은 자신을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한 여인은 한평생 율법을 지키며 이렇다 할 죄를 짓지 않고 살아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현자는 먼저 첫 번째 여인에게 “울타리 밖에 나가 당신이 들 수 있는 큰 돌을 하나 찾아 가지고 오시오.” 하고, 또 다른 여인에게는 “그대는 가능한 한 많은 돌을 가져오되 작은 돌만 가져오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들에게 가지고 온 돌을 다시 가지고 가서 제자리에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돌이 있었던 곳을 금방 찾아내어 그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어디서 어떤 돌을 주웠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현자에게 돌아왔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저 여인은 자신이 어디서 그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크고 무거운 돌을 쉽게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고, 그대는 어디서 그 많은 작은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거요. 죄도 마찬가지라오.”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이 자유로워지고,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데 필요한 것은 양심 성찰입니다. 양심 성찰은 우리의 결점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언제, 어떻게 우리가 잘못했는지를 의식하고 잘못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양심 성찰은 또한 하느님의 치유 능력에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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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기도 내용처럼 나무랄 데 없는 신앙인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의 단식과 소득의 십일조에 충실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보다 세리를 더 칭찬하십니다. 바리사이가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감사의 기도가 되었더라면 그 역시 칭찬받았을 것입니다. 많이 가지면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재능이 많으면 드러내고 싶고, 자리가 높으면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본능’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본능에 시비를 거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랑에 앞서 먼저 ‘감사’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불쌍한 세리와 비교해 자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리사이의 좁은 소견이었습니다. 세리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죄와 ‘연관된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기도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한마디’뿐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깨달음을 안고 돌아갑니다. ‘자신을 낮추었기에’ 은총이 함께했던 것입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나무는 온몸으로 낙엽을 떨어뜨립니다. 그래야 새싹을 틔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떨어지지 않은 낙엽’은 봄이 되면 오히려 구차해 보입니다. 새싹이 돋는 것을 방해합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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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의 감곡성당은 ‘매괴 성모 순례지 성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충주 목사(牧使)였던 ‘민응식’의 집터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해 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이곳이 성당으로 바뀐 데에는 한 선교사의 간절한 기도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장호원을 지나면서 동쪽 언덕 아래 커다란 기와집 한 채를 봅니다. 순간 그는 이끌리듯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저 대궐 같은 집을 주신다면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는 성전’을 짓고 평생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이 일은 ‘일 년 뒤’에 현실이 됩니다. 1895년 10월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민응식의 집에 불을 질러 버린 것입니다. 이듬해 부이용 신부는 잿더미가 되어 버린 그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고는 한식과 양식을 절충하여 80평의 성당을 지었습니다. 오늘날의 감곡성당입니다. 애절한 기도는 주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잊더라도 ‘때가 되면’ 들어주십니다. 세리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한마디 말만 되풀이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기도가 아니라 자랑을 드러냅니다. 그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그러기에 어린아이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른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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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한문 교양서인 『명심보감』을 보면 ‘음덕’(陰德)과 ‘여경’(餘慶)이란 말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음덕은 선행을 베풀되 남모르게 해서 덕이 되는 것을 말하고, 여경은 부모가 음덕을 쌓으면 그 복이 자식에게 미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선현들은 이처럼 부모가 음덕을 많이 하여야 자식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통하여 선행의 덕을 장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은 무엇보다도 남모르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양덕’(陽德)이 아니라 음덕이란 말을 쓴 것은 선행에 대한 보상이, 드러난 것만을 인정하는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숨은 것도 알아보시는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전에 올라간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인지를 자랑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행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를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바리사이는 자신보다 선행과 덕을 쌓지 못하고 죄인으로 살지만 겸손하게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세리를, 하느님께서 훨씬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실천한 선행과 덕을 자랑하려는 의인보다는,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는 죄인을 더 기쁘게 받아 주신다는 진리를 가슴 깊이 간직하여야겠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양승국신부-
<딱 한 가지 부족한 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사이, 스스로 소개한 바대로라면 그는 참으로 대단한 신앙인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수없이 많은 율법 조항을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지켰습니다.
단식을 실천하는데 있어 일주일에 두 번을 단식했습니다. 그 어려운 십일조를 꼬박꼬박 이행했습니다. 결혼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곳에 눈을 돌린 적이 없었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불의한 일을 저지른 적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열심했고, 그토록 성실했기에, 그 바리사이는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당당함을 바탕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기도 바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리사이에게 딱 한 가지 결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함의 결여였습니다. 부족한 겸손으로 인해 그가 그토록 목숨 걸고 쌓아올린 열심한 신앙생활의 점수를 완전히 다 깎아먹었습니다.
겸손이란 것은 신앙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필수적인 덕행입니다. 성인들, 복자들 가운데 겸손하지 못했던 분들은 단 한분도 없습니다.
겸손의 덕이란 어떤 덕이겠습니까? 겸손이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정녕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티끌 같은 존재이며,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라면 무에서 왔다가 무로 돌아가는 가련한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이란 내가 이렇게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반면 하느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시며,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시여,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아껴주시는 분이란 것을 아는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자비와 인내가 아니라면 단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존재라 나란 사실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의 덕행은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도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하느님 이것 해 주십시오. 저것 꼭 좀 들어주십시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이번만큼은 원대로 좀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하느님을 압박하고 강요하는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겸손한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먼저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그분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찬미를 드려야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느님 아버지! 부족하지만 제가 최선을 다해 한번 노력해보겠습니다.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주십시오. 잘되건 못되건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 아버지 뜻에 맡겨드립니다.
매일 다시 살아나는 사람
- 황인수 신부-
수도원에 들어와 지내던 첫 해에 받은 카드를 잊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제가 의인이라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은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보다야 의인이 백배 낫지요. 죄인이라면 왠지 떳떳하지 못하고 한쪽에 쭈그린 채 숨어 있는 사람 생각이 나니까요. 기왕이면 얼굴 들고 다니고 싶지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처럼 살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사실 고개를 숙이고 조심조심 걸어 다니는 사람 생각하면 마음부터 답답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 하느님을 참으로 신뢰한다는 내적인 모습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내놓는 것은 사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심리적 죽음 말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순간, 마치 내가 없어져 버리는 것 같아서 어떻게 되든지 절대로 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절대로 사과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내 안에 있음을 봅니다. 때로는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때로는 회피하기도 하고 이렇게 함께 사는 형제들과 우리 주님과 씨름을 하고 술래잡기를 하며 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온갖 어려움에도 그것을 내놓는 것, 이것이 정말 말 그대로 죽음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라거나 우리가 유달리 윤리적인 사람이거나 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내가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분께 돌아가기만 하면 그분은 온전히 받아들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살아서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는 말도 있지만 나도 날마다 죽음을 살 수 있기를, 그래서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사람이기를 빌어봅니다. 아멘.
완덕의 여정
-김성웅신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광주-나주 간 국도 한 구역에 있는 어떤 하얀 집 주위로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오릅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봄의 생명력에 압도당한 듯 숨 막힐 정도로 봄의 찬란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평소 그렇게 하얗고 깨끗하게 보이던 그 집이 매화의 찬란함에 비교되어 오히려 칙칙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은 사람들끼리 서로 잘났느니 못났느니 비교하면서 우쭐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잘났다고 우쭐대더라도 하느님의 완전함 앞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유약한 존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우정의 요소>라는 책에서 저자 알랜 로이 맥기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혁명가를 바라볼 때는 불신의 눈으로, 그러나 성인을 바라볼 때는 사랑의 눈으로 대합니다. 양편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혁명가는 다른 이들의 흠집이나 죄스러움을 밝히는 데 시선을 두고, 성인은 자기 자신의 한계와 죄스러움에 시선을 둡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부족함이 당신 사랑으로 메워주실 은총의 자리임을 알려주시며, 우리를 그 은총에 초대하십니다.
사랑만이 남는다
-김찬선신부-
그저께는 회의를 위해 산청을 다녀왔습니다. 새벽에 출발하여 내려갈 때는 전 날 내린 눈이 축복처럼 쌓여 아름다움이 마음을 씻어주듯 눈처럼 마음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회의를 마치고 오후에 돌아올 때는 거짓말처럼 축복이 사라지고 아름다음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햇볕에 눈이 다 녹아 버린 것입니다. 거짓이요 사기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사기다.” 이것이 그 때 느낀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사기고, 사랑이 없으면 축복도 사기고, 사랑이 없으면 찬사도 사기고, 사랑이 없으면 즐거운 대화도 사기고, 사랑이 없으면 그 무엇도 거짓이요 사기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남는 것이 없는 법. 추억이라도 남으려면 사랑이 있어야 하지요. 사랑이 없으면 조금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나무에 얹힌 눈 잠깐 머물다 한 순간에 사라지듯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하고 표피에 머물다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호세아서는 표현들이 참 간절하고 호소력이 있습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는 이 표현부터 “찢으셨지만 고쳐주시고, 치셨지만 싸매주시리라.”는 표현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는 표현까지 참으로 간절하고 마음까지 파고듭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이 이렇게 간절함으로 우리를 파고드는 것은 우리의 무심함에 대한 아픔 때문입니다. 호세아의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찌릅니다.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하느님은 우리를 찌르며 들어오시고 치고 들어오시는데 우리는 태평하고 하느님은 찌르고 아프게 한 것이 괴로워 우리를 고치고 싸매시는데 우리는 무심합니다.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는 참 信義가 없습니다.
복음으로 가면 더 기가 막힙니다. 하느님은 우리 영혼 상태 때문에 아파하시고 걱정하시는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자랑이나 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이들은 스스로 義롭지만 信義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하느님 앞에 서고 하느님께 기도 드리지만 사실 주님 말씀대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는 전혀 메아리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의에 도취하는 Narcissist일 뿐입니다.
반면 세리는 하느님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멀찍이 서 있지만 오히려 이 세리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자비가 스며듭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바리사이한테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 없으셨지만 세리한테는 사랑이 주특기이신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수 있으셨기에 신이 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세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죄의 유용성
-전삼용신부-
처음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꼭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성인처럼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 4시간 자고 하루 한 끼만 먹고 그것도 고기는 먹지 않고 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만 앉아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지금보다 20킬로 가량이 적게 나갔습니다. 이런 극기의 모습이 성인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에게 미움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웃는 모습만을 보여주었으며, 나중에 죽고 나서 교황청에서 하게 될 성인조사 작업에서 흠이 발견되지 않도록 남겨질 수 있는 오점들은 하나도 남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도 나를 완벽한 사람으로 착각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사니 칭찬해 주는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 스스로 참 잘 산다는 착각에도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성인이 정말 될 것만 같았습니다. 또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잘 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신학생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철들게 해 준 것은 제가 일상적으로 짓는 죄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남에게 잘못하는 것이 없더라도 말과 행위와 궐함으로 짓는 일상적인 작은 죄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죄는 다음에는 꼭 고쳐야지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어느 새 계속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며 결국 겉은 거룩해도 속은 썩어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잘 보여 성인이 되려는 이런 모습이 마치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는 것과 같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질이 변해야 하는데 겉만 잘 보이려 했던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 눈엔 죄인이어도, 하느님 보시기에 성인이면 그 사람이 성인입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잊혀진 참다운 성인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들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겉으로는 다른 잘못을 거의 하고 있지 않게 보여도 실제 그 사람의 본질적인 모습은 사람 흉내를 내는 원숭이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죽어서 자신의 모습이 원숭이였다면 그만한 충격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본질을 살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성전에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당당하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말 안에는 자신이 하는 일들로 당연하게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교만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리만큼 깨끗할 수 없고 또 절대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닌 주님의 은총에 의해 옵니다.
또 남을 판단하는 모습에서 교만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자는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이 더 크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교만하게 기도하는 것 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주님 앞에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당연히 오늘 주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돌아간 사람은 세리입니다. 세리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그 잘못들로 인하여 눈초리를 받았지만 그 겸손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세리를 겸손하게 만든 것은 그가 지은 죄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마리아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와 같이 자신이 죄인이었던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큰 죄를 안 짓고 교만하게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하느님께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짓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더 겸손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인간을 보시면서도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더 큰 목표는 그 죄를 씻어주는 당신의 사랑을 알고 당신을 더 사랑해주기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참된 관계의 회복은 죄, 즉 교만을 씻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교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무 죄를 안 짓더라도 교만하면 죄인이고 다른 죄를 지었더라도 겸손해 졌으면 이미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해성사 때 사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해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만으로 죄가 사해지기 시작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는 당연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도 합니다. 죄는 본질상 나쁜 것이지만 나의 나약함을 깨닫게 만들어 나를 더 겸손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죄도 싫지만 교만해지는 인간의 모습이 더 싫어서 죄를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 교만해지기보다는 짓고 겸손해지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정말 겸손하다면 죄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위는 존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란 죄를 짓고 안 짓고가 아니라, 얼마나 겸손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
-양승국신부-
<독한 술과 적금통장>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당시 세리들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아갔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눈만 뜨면 삶의 일부처럼 따라다니던 깊은 죄책감과 그로 인한 심리적 불안, 강도 높은 스트레스 등등이 세리들 하루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리는 한때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려고 어금니를 꼭 다물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지만, 그럴수록 살길은 더욱 막막해져만 갔습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제비새끼들처럼 입을 벌리고 먹을 것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전혀 마음에도 없던 세리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힐 때까지만"하고 마음먹었지만 어언 세월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숱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한 바도 있고 해서 돈도 꽤 모았습니다. 집안도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직업에 발을 너무 깊숙이 들여놓은 나머지 이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 그는 거의 매일 취하도록 독한 양주를 마셔 보아도, 적금이 차곡차곡 쌓여 가는 통장을 보아도 이젠 별 재미가 없습니다.
매일 비수처럼 가슴에 와 박히는 동족들로부터의 손가락질과 저주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철저한 소외, 철저한 죄인취급을 당했기에 그가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은 동료 세리들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이유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하느님 앞에 언제나 우리는 죄인)을 토대로 한 겸손한 자기 낮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절대 놓지 않았던 하느님과의 자신 사이의 가느다란 한 가닥 끈 때문이었습니다.
조소와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그는 마음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를 갈망했습니다. 동족에게 크나큰 죄를 짓고 있다는 죄책감에 싸여있으면서도 그는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러 성전에 갈 때도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러 오는 시간을 피해서 몰래 왔습니다. 혹시라도 성전에 누군가가 있으면 그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성전 기둥 뒤로 숨는다든지, 가장 으슥한 곳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아주 간단한 한 마디 말이지만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해야할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바로 이 말 안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평생, 우리의 매순간 언제나 되풀이되어야 할 가장 훌륭한 화살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주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어떤 형제님께서 인도 마술사의 주문이 붙어 있는 `원숭이의 손'을 손에 넣었습니다. 글쎄 이 원숭이의 손에 손을 얹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소원하는 일 세 가지를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렇게 멋있는 것을 손에 넣은 노동자는 집에서 원숭이의 손에 손을 얹고 첫 번째 소원을 심각하게 말했지요.
“돈 500만원 생겨라!” 그랬더니, 곧바로 어떤 신사가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돈 500만원 있습니다. 선생님의 아들이 공장에서 뜻밖의 사고로 사망하셨기에 조의금을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지요. 더군다나 자기의 소원인 500만원을 위해서 아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욱더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원숭이의 손에 손을 얹고 “내 아들이 돌아오게 해 달라.”는 두 번째 소원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아들이 아니라, 죽은 아들의 영혼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다시 이 세상에 온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도 괴로워하였습니다.
기가 막힌 이 형제님께서는 허탈감에 빠져 마지막 소원을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아들이 편안히 잠들게 하라.”
많은 사람들이 이 형제님처럼 헛된 것을 추구하며 기도합니다. 특히 단번에 부자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이 부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주님께 설명하는데 바쁩니다. 하지만 그러한 허망한 기도는 이루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이루어져도 그로 인해 불행해질 수밖에 없음을 앞선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해주십니다. 즉, 바리사이의 기도는 자기를 내세우고 높이는 기도이며, 세리의 기도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기도로써 의롭게 된 사람은 세리라는 것이지요.
자기를 내세우고 높이는 기도는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 수가 없어서 헛된 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는 기도는 결국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어 드리기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진정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의롭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내 자신이 바치고 있는 기도에 대해서 우리 모두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헛된 것을 추구하는 기도인지 아니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실한 기도인지, 또 자기를 내세우고 높이는 기도인지 아니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기도인지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의 거울이다.(캔 키즈 Jr)
주신 그대로의 ‘나’로서 살기
-정명숙 수녀-
자연은 바라볼수록 아름답습니다. 가꾸지 않아 들쑥날쑥 제멋대로인 것 같은데 조화롭습니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편안하기조차 합니다. 평화롭습니다. 무엇일까요?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온순하게 만들고 평화와 기쁨이 차오르게 하는 비결은…. 자연은 자기 자리를 압니다. 저마다 제자리에서 자기 모습대로 피어납니다. 다른 자리를 차지하려 다투지 않습니다. 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꾸밈이 없습니다. 높임도 낮춤도 없습니다. 숲 속 바위틈에 피어난 들꽃의 수줍은 미소도, 교목(喬木)의 웅장한 자태도, 가시나무의 뾰족함도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생명의 꽃을 피울 뿐입니다. 그 모습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자신의 의로움을 다른 이와 비교하며 자기를 과시합니다.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비교는 경쟁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서로를 갈라놓습니다. 기쁨을 앗아갑니다. 내게 주신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 아닌 다른 존재로 살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자기 모습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굳이 나를 높이지 않아도, 애써 자신을 낮추지 않아도, 내가 여러 개의 가면을 벗고, 하느님께서 주신 그대로의 나로서 기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죄는 관계를 단절시킨다
-전삼용신부-
제가 사는 기숙사 정문은 센서로 열리고 닫히게 되어 있습니다. 센서가 문기둥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면서 서로 빔을 쏘며 통행자를 감지합니다. 즉, 서로 간에 오가는 빔이 끊기면 그 앞에 사람이나 차가 있음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문이 작동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비가 오거나 해서 센서에 먼지가 묻어있기 때문에 서로 오가는 빔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작동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센서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면 그만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도 이런 먼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서로 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빔을 막아서 관계가 끊어지게 만듭니다. 물론 사람의 관계보다 먼저 끊어지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유는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교만이 죄이고 관계가 끊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행복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면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그렇게 행복이 사라지고 고통이 시작됩니다. 역시 이것은 사람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미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곧 지옥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은 원죄를 물려받음으로써 그렇게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관계를 다시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의 센서에 낀 때를 닦아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 마음을 닦아서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의 죄를 씻는 능력을 받았고 그래서 베드로, 즉 교황님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성전에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당당하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말 안에는 자신이 하는 일들로 당연하게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교만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이 더 크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교만하게 기도하는 것 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세리는 주님 앞에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느님께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짓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더 겸손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인간을 보시면서도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더 큰 목표는 그 죄를 씻어주는 당신의 사랑을 알고 당신을 더 사랑해주기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참된 관계의 회복은 죄, 즉 교만을 씻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 때 사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해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만으로 죄가 사해지기 시작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는관계를 끊고 그래서 행복을 빼앗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항상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의 센서를 유지할 것을 결심합시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돌아옴
- 김혜경-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등장하는 바리사이와 세리는 사회적·종교적 관점에서 상반된 모습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둘 다 기도하러 갔다고 합니다. 비유에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환경은 그들이 기도하는 성전 안이고, 그들이 하는 기도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오, 하느님!’이라는 호격(呼格)으로 감사기도를 바치지만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에 있다고 밝힙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두 가지를 단식과 십일조에서 찾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이 세 가지 모습은 그가 성전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바리사이의 기도에 비해 매우 짧습니다. 똑같이 ‘오, 하느님!’이라는 호격으로 기도를 시작하지만 청원, 곧 용서를 청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사람의 기도를 듣는 하느님의 입장이 되어 봅니다. 우리가 겸손한 이웃을 좋아하듯이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것도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되돌아봄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만으로 가득 찬 사람은 비전이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비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솔직하고 겸손한 사람을 부족한 사람으로 보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의 이러한 경향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 겸손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게 할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상속자
-허찬란 신부-
루카 복음서는 이방인의 시각에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예수님 이야기가 되다보니 감동적인 내용이 많이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한 바리사이가 기도하러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옆에 죄 많은 세리가 같이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바리사이가 성전 멀찍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청하러 온 세리를 반기며 악수를 하고 기도를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바리사이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진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나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고 비교를 합니다. 여기에 죄가 포함되고 교만과 독설이 자리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비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이를 좋아하십니다. 루카 공동체의 사람들도 처음에는 신앙에 눈을 뜨고 성령의 감도로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며 순수한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며 평가절하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 듯합니다. 비단 루카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도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일을 한 사람이라면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같은 유혹을 많이 받고 있지 않을까요? 그때 어떤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가요?
자기를 비우는 기도
-최성기 신부-
사람한테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자아증진(self―enhancement)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곧 대부분의 사람한테는 자아 존중감을 유지하고 보호하고 증진시키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이고, 나쁜 것은 환경이나 다른 사람 탓으로 생각한다(self serving attribution).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보다 자신을 평가할 때 더 관대하고, 자신과 연관된 장소·물건 사람을 다른 사람이 연관된 것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이 선입관이나 편견에서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갖춘 사람같이 보인다. 하느님께 감사할 줄도 알고, 자기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도 안다. 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어떤 면에서 더 나은지도 안다. 자신이 바리사이파에 속한 게 자랑스럽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되는 규칙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이만하면 자아 존중감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런 자아 존중감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고 충만하게 만들었을까? 예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자아 존중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우리 시대의 인간상에 도전장을 내미신다. 자신감에 가득 찬 사람한테서는 의로움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리사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리고 심리학자들이 묘사하는 인간의 특성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인에 대한 따가운 일침이다. 기도는 왜 하는 것일까? 세리의 기도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아를 덜어내기 위해서다. 적어도 하느님 앞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책략을 포기하고,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선 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하느님 앞에서조차 나를 방어하고 자아를 보호하려는 모든 시도를 중단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기도가 세리의 기도처럼 진솔한 기도가 되기를 청하자. 적어도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를 내세우려는 시도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진솔한 영혼의 기도>
- 김수원 신부 -
오늘 복음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는 세리의 기도하는 태도와 스스로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하는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노골적으로 질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인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매일 세 번씩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한 기도는 특별히 성전에서 드릴 때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여 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 뜰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간 두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먼저 바리사이파 사람이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또 다른 이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은 이 세리에게 내려 졌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는 실제로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자의 모습이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찬사를 하느님 앞에 올리러 간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경건한 자로 남 앞에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그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얼굴을 희게 칠하고 어수선한 옷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다니며 자기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의 경우에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인가를 자랑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나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는 세리는 죄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자세였고, 또 그런 마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리의 겸손한 기도가 하느님 앞에 받아들여져 은혜를 받게 되며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가져야 할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면 교만한 사람이 하는 교만한 기도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하늘나라의 문은 지극히 낮아져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음을 일러 줍니다. 기도는 오늘 비유 속의 바리사이파 사람이 했던 것처럼 머리를 빳빳이 들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자기소개나 자기과시도 아니며, 자랑도 아닌 것입니다. 기도는 비유 속의 세리처럼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자기인식(自己認識)이며, 그래서 처절한 통한(痛恨)이며, 그래서 자비를 구함이다. 기도를 들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 삶의 결과만을 보시지 않으신다.
오늘 어떤 기도를 바쳐야 할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하루에 50번씩이나 바쳤던 기도를 함께 바쳐봅시다. “하느님, 저는 당신을 만유 위에 흠숭합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지복(至福)안에서 저는 기뻐합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시는 당신을 뵙고 십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을 저는 원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알려주소서. 그대로 하리이다. 저와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처리하소서.” 아멘.
바른 기도
-강영구신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루가 18,13-14)
예수님,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입니까?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입니까?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 주님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예레17,9-10) 쓰레기 더미를 금으로 감싸고 포장한다고 쓰레기가 금이 되지 않습니다. 금으로 감싼 쓰레기는 속에서 계속 썩으면서 악취를 내뿜게 됩니다. 겉모습 밖에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속에 악취 내뿜는 썩은 쓰레기가 들어있는 줄 모르고 그것이 금덩이인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천길 물속 같은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랑만 널어놓던 바리사이파 사람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세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앞에 바른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겉꾸미며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이 바른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사람이 바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말이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한 삶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님, 저희가 진솔한 모습으로 大慈大悲하신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수신修身하고 세심洗心하게 하소서.(一明)
신앙생활과 선행의 기준 - 조욱현 신부-
루가 18,9-14 :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유다인들 중에 열심한 사람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렸다. 그래서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기도를 하였는데, 그것도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가장 효과가 크다고 하여 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 뜰로 갔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도하러 성전으로 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 사람들은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로서 예수님 당시 그 수효가 육 천명 가량 되었다고 한다. 이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러나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즉 독백만 늘어놓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찬사를 하느님 앞에 올리러 간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단식하는 표를 내고, 또한 율법에 명한 모든 것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사람들 앞에 자신이 경건하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다. 이들을 예수께서 책망하신다.
또 한 사람은 세리였다. 세리는 관세를 거두어들이는 사람인데, 세리는 의례 부정축재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그리고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을 하기 때문에 직업상 죄인의 취급을 받았다. 이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느님을 향해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다만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고 있다. 자신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하느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을 제쳐두고 세리를 의인으로 간주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이러한 기도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은혜를 받게 된다고 하시며,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일러주신다.
오늘 복음을 보면 교만한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겸손해야 들어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또,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복음에 나타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참으로 열심한 사람이다. 그는 금식도 했고, 십일조도 잘 바쳤다. 그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 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 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선행의 기준이 이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기준은 바로 완전하신 하느님이시다. 이 사순절의 기간이 이러한 우리의 변화가 나타나는 그래서 진정으로 주님의 빠스카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때가 되도록 한다면 이 사순절은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을 살자.
올바른 사람은 누구?
- 정호 신부-
한 주간 복음의 내용이 하느님이 정말 원하시는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 듯 지켜야 할 계명과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말씀들이 우리의 귀에 울려 퍼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여전히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은 세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되겠구나 생각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생활로 들어서면 으레 그렇듯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이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우리 생활에서 올바른 사람은 여전히 바리사이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잣대로 생각해 봅시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서 진실된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줄도 알고, 그는 욕심도 없고, 부정직하지도, 음탕하지도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세리와 같지도 않답니다. 게다가 그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친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남 앞에서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의 기도는 제쳐놓고라도 우리가 대단하다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할 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이런 신자들을 최고로 꼽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최대한 비굴한 자세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뭐 하나 드릴 것이 없어 한다는 기도가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입니다. 남들이 보아도,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생각해보아도 뭐하나 자랑할 것이 없는 세리입니다. 그런 그의 이런 모습은 그래야 마땅하다고 우리에게 판단 받는 모습입니다.
자랑할 만한 사람의 기도와 자비를 구걸해야 할 사람의 기도. 그런데 복음의 결론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생각해서 우리 역시 세리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살면 안 되는 것입니까?
무엇이 하느님께 올바른 것입니까?
바리사이파와 세리. 이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삶의 모습이 아니라 삶의 자세였을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 나무랄데 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할 거리였다면 그것은 그런 삶의 이유가 자신이 거절한 모든 것을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모범이라 할 만 하지만 그것을 그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위한 자랑으로 드러냈으니 그는 하느님 앞에 감사드린 것이 아니라 자랑한 것이며, 그것은 이미 자신 안에 하느님에 대한 욕심이 가득 차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자랑스러운 기도가 바로 자신을 하느님 앞에 부정직하게, 또 음탕하게 만드는 시도가 되고 있음을 자신은 모릅니다. 더군다나 이런 자신의 모습 속에서 사랑해야 할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하느님 앞에서 짓밟고 있기에 그는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임이 드러납니다.
반면 세리는 우리가 뭐 말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부족함을 압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다가가셔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그런 삶에서 구해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하시며 말입니다. 그런 세리였기에 그가 한 일들이 잘한 일이 아니라 그는 언제든 그 삶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었기에 하느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삶의 모습이나 질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남을 판단하려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신 같은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는 하느님 앞에서 같다는 사랑의 평등함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하느님 앞에 정성을 다하는 모든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지켜내고 나누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 바리사이파가 세리의 손을 잡는 마음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일을 하느님 앞에 드러낼 양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자랑하기 전에 하느님이 그 사실을 모르실리 없잖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욕심과 독선으로 남 위에 서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감사한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 잘난 사람이 세리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세리의 손을 잡아주신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려하지 말고 사랑하며 산다면 그것이 곧 올바른 삶입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제 아침 전화 한 통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신부님 혹시 4학년의 ***라고 아세요?”
“글쎄요. 얼굴을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누군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은데요. 왜 그러시죠?”
“신부님, **가 어제 하늘 나라에 갔어요.”
저는 깜작 놀랐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인데……. 그 사연을 들어보니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는데, 그 감기가 폐렴으로 확대되면서 심장마비로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을 잘 따랐기에 기도를 부탁한다면서 전화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지요. 평소 말 수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열심히 성당에 나오면서 어린이 성가대와 전례단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아이였는데……. 그래서 오늘 있을 어린이 미사에 이 아이가 나와서 “신부님~ 사탕 주세요.”라고 말을 할 것 같은데……. 이제는 살아서 다시 들을 수 없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자신이 없으면 어떤 일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병에 걸려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생각했지요.
“큰일 났네. 나 없으면 일이 하나도 진행되지 못 할 텐데……. 집도 회사도 엉망이 될 텐데 어떻게 하지?”
하지만 회사나 가정은 별 무리 없이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자기보다 더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집에서는 가족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생겨서 열심히 일할 때보다 더 자기를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나 없으면 하나도 안 될 것 같지만 안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없음으로 인해서 더 완전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살 것 같지만, 누구나 주님 곁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그 시간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완벽할 것 같고 영원할 것 같은 인간이지만,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라는 증거가 아닐까요?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겸손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러한 겸손의 필요성을 강조하시지요. 즉,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겸손한 세리의 기도가 바로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전광진 신부-
어느 성당이나 제대 뒷편 중심에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나 성당에 가더라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십자가의 주님! 예수님은 언제나 지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마음까지 다 드러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교만했던 내 자신을 반성합니다. 늘 내가 옳다고 생각했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했던 내 교만함을 반성합니다. 내 생각대로 안 되면 섭섭해하고, 원망하고, 미워했던 나의 경솔함을 반성합니다. 나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옹졸하고 속 좁은 나의 모습을 반성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겸손함을 배웁니다. 십자가에 알몸으로 달리신 벌거벗은 우리 주님…. 주님을 한없이 사랑할 것을 결심하면서, 또한 가족과 이웃을 한없이 사랑하리라고 다짐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도 못내고 죄인임을 뉘우쳤던 세리를 보면서, 십자가의 겸허함을 마음에 담아야겠습니다.
백조가 된 미운 오리
-김영수 신부-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합니다. 또 어떤 이는 직분이나 지위를 자신의 존재와 혼동하기도 합니다. 외모를 고치고 학력을 위조하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높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그 캐릭터가 사라지면 상실감과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이의 삶은 혼란스럽고 뒤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에 주인공의 모습이 변화되거나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리들 틈에서 크고 못생겼다고 미움받던 오리가 백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나 미녀의 사랑을 받고 왕자의 본모습을 찾은 야수 이야기는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람 중에 누가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강한 척, 능력 있는 척하지만 쉽게 상처 받고 사랑받기를 갈망하며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나의 진실한 모습이 아닐까요? 겸손은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한 모습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독서강론> :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예언자 호세아는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하느님께서 질책하시고 징벌도 하시지만 감싸주시고 용서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하여 질책하고 징벌하시며,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신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와 제물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의 마음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하느님께 나아가자. 하느님께 돌아가자. 그러나 이러한 예언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귀를 막고 고집을 피운다.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가 고집이다. 고집 없이는 성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성인의 고집과 일반 사람의 고집은 질이 다르다. 성인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고집을 피우는데 반해, 일반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고집을 피운다.
성인은 하느님 앞에서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반면에 일반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고집을 피우고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다. 성인은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다른 이들 앞에서 쉽게 고집을 꺾어버리곤 한다.
성인은 사람을 보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일반 사람은 하느님을 보기보다 사람을 바라본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여기시는가 하는 점이 관심사이지만, 일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점이 관심사이다. 이러한 점들이 성인과 일반 사람의 차이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수차례 계약을 맺으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기로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어기며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질책과 징벌을 하셔도 고집을 피우며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애타게 부르셔도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제사를 봉헌하고 제물을 바친 까닭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을 뿐, 결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느님께 충실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고집을 피우곤 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선조들처럼 고집부리지 말고 야훼께 순종하여라. 영원히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성소에 와서 너희 하느님 야훼를 섬겨라.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리라.”(2역대30,8) 하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들의 조상들도 저희 하느님 야훼를 믿지 않았지만, 그들도 조상 못지않게 고집이 세었다.”(2열왕 17,14)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고집이 세어 조상들보다도 더 못되게 굴었던 것이다.(예레 7,26참조)
사람은 그처럼 영악하다.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배반을 일삼는 존재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고통과 시련에 처해 있을 때에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심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이기에 결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부르시며 당신의 마음을 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하며 당신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예언자들이 있기에 그나마 위로를 받으시며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전하신다.
회개와 보속의 시기인 사순절에 하느님 앞에서 고집을 피우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언자가 되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앙인이 되자. 욕심과 이기심으로 제물을 봉헌하기보다 하느님께 마음을 봉헌하고, 사랑을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자.............◆
철저한 회개를 통해 기도하는 삶을 살자. -손지호 신부-
이번 주의 독서와 복음은 계속해서 올바른 하느님 따르기에 대해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올바른 믿음에는 올바른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삶의 변화를 통해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통해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 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 주시는 분이라고 호세아는 전합니다. 마치도 수술을 통해서 썩은 부위를 도려내듯이 우리 영혼의 썩은 부분을 잘라내시고 새로운 삶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도움으로 인해 그저 겉으로만 하느님을 따르는 척, 회개한 척 하면서 종교가 정해주는 최소한의 규정만을 지키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집나간 아들을 언제나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을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자신이 하느님께로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 더 욕심이 있기 때문이고, 하느님을 세상의 욕심을 채워줄 도구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어떠한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흔히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알아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가르치고 우리의 생각을 하느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기도를 바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와 세관원이었습니다.
바리사이가 바치는 기도의 자세를 보면 먼저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보라는 듯이 서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벌써 바리사이는 마음은 하느님께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과시하기 위한 전시용 기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말 성서를 보면 바리사이의 자세에 대해서 ‘자신을 향하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것인데 바리사이는 자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자신을 우상화하고 자신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 바리사이는 자신을 절대화시켜서 이웃을 경멸하기만 하고 사랑하고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하느님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물욕을 채워주시고 자신을 높여주는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에게 고통과 희생을 주고 십자가를 지우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렀더라도 회개해서 돌아오면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많은 율법 규정을 잘 지킨 바리사이보다 많은 허물이 있었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린 세관원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전례의 반복과 입으로 의미 없이 흘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우리 삶의 철저한 회개를 통해 삶의 모습을 변화시켜서 하느님께 제대로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지 우리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높이려 하지 말고 어린아이와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길 줄 아는 자녀들이 됩시다........◆
주님의 한없는 은총
-고원일 신부 -
오늘 예수님께서는 파리사이와 세리를 통하여 누가 올바른 사람인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바리사이들은 율법이나 생활적인 면에서 잘 지키고 행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세리들은 같은 민족의 돈을 갈취하고 그 시대의 방탕한 사람으로 불려 질 정도의 계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싶어 합니다. 그러한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살아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박수를 쳐주어야 하고 힘을 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속에 허왕된 꿈이나 자기 과시를 위한 마음이 들어 설 때는 우리 마음은 교만해 지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평화로웠던 마음이 없어지고 실적과 남들에 대한 시선을 의식하여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모습속에 길들여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지금 정치하시는 분들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곳에는 자기 소신 것 노력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에 오래 몸담으면 담을수록 소신은 뒷전이고 자신의 위치와 체면을 위해서 국민은 뒷전에 두고 마는 것입니다.
비단 정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들에서 그러한 사실들은 들어 나게 될 것입니다. 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오래한 선생님의 모습 속에서는 모두를 안아 줄 수 있는 따뜻한 스승의 모습이 배여 나와야 하고, 비록 변변한 가게도 없이 포장마차를 오래하신 분이라도 그분 마음속에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작은 평화를 줄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은 장사를 잘하신 분이라 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발전시키는 그런 모습이 풍겨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무관한 명예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사리사욕만 챙기는 모습이 풍겨날 때 우리는 그들을 올바르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출발은 분명 바리사이들이 좋았습니다. 겸손 되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극기와 희생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을 학자요 스승으로 대우해 주기 시작하니 조금씩 교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졌던 그 첫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 속에서 합리화 된 삶을 살아가고 하느님도 그 틀 속에 합리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처음 시작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어떻게 하면 돈을 모을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나쁜 짓들도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나쁘게 살아왔는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감히 말도 못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솔직히 인정을 하고 눈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이 죄 많은 인생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어쩌면 바리사이는 세리 보다 죄를 작게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교만이라는 더 큰 죄를 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없는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분별없이 받아들일 때 그 은총은 교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도 주십니다. 그것을 잘 참고이기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회개와 함께 은총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바리사이 적인 마음과 세리 적인 마음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기둥 뒤에 숨어 서서>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주일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꼬박꼬박 단식을 계속해왔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지요. 가톨릭교회에서 일 년에 두 번 있는 단식조차 깜박하고 잊어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한 주에 두 번씩이나 단식을 계속했다니 보통 열심한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뿐인가요? 그는 매달 받는 200만원의 월급에서 정확한 10%인 20만원을 교무금으로 바쳤습니다. 우리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도덕적으로 전혀 흠잡을 곳이 없었던 사람, 윤리적으로 아주 건전한 생활을 했던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전혀 꿀릴 일이 없던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기에 행동도 거침이 없습니다. 매사에 자신만만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도 제일 앞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참으로 사람들 눈에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자신만만하고 열렬한 기도보다 한 가엾은 세리의 기도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 세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인 관계로 지금은 비록 동족들의 혈세를 착취하는 세관원으로 살아가지만 한때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생활고에 짓눌려 어쩔 수 없이 세관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언제나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성전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삶에 지쳤던 세리, 너무도 큰 죄책감에 시달리던 세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시간, 조심스럽게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불안했던 세리는 성전 기둥 뒤쪽에 몸을 붙이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서니 눈물부터 앞섭니다. 돌아본 지난 세월이 너무도 하느님 앞에 죄송스러웠기에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합니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깊이 떨구고 가슴을 치며 세리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세리가 바친 이 한 구절의 기도는 아주 간단해 보이는 기도이지만 기도중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리의 기도는 진정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한 가장 간절한 기도가 이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솔직한 인정을 바탕으로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의 모든 삶을 내맡기는 겸손한 기도가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기도야말로 죄 투성이인 우리가 화살기도로 바치기에 가장 적합한 기도입니다.
세리의 기도 - 처절한 자기인식과 통한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비유’는 루가복음에만 기록된 특수사료이다. 그런데 비유(比喩), 또는 예화(例話)라고 보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예수께서 가르침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그것이 사람과 관련될 경우, 통상 ’어떤 사람, 어떤 부자, 어떤 재판관, 어떤 과부, 어떤 여인, 한 아버지’ 등의 불특정(不特定)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택하신다. 그러나 오늘 비유의 주인공은 당시 유대사회의 특정 인물,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그 자리에서 듣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라는 점이 특이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는 세리의 기도하는 태도와 스스로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하는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노골적으로 질책하고 있다.
세상에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인도 있다. 그러나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인지 그 판단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신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그 판단을 하느님께 맡겼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a절) 아울러 스스로도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b절) 하느님의 판단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치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는 듯 하다.(창세 4,3-5) 농부인 카인이 땅에서 난 곡식을, 목자였던 아벨이 양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를 각각 예물로 드렸건만, 왜 야훼 하느님의 처사는 불공평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 대목의 성서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창세 4,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이라는 성서구절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야훼께서는 사람이 바치는 예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사람도 함께 받으신다는 점이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오히려 세리를 의인으로 인정한 하느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오늘 비유 속의 바리사이파 사람이 했던 것처럼 머리를 빳빳이 들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자기소개나 자기과시도 아니며, 자랑도 아니다. 타인을 폄하(貶下)하는 고발은 더더욱 아니다. 기도는 비유 속의 세리처럼 멀찍이 서서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자기인식(自己認識)이며, 그래서 처절한 통한(痛恨)이며, 그래서 자비를 구함이다. 기도를 들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 삶의 결과만을 보시지 않으신다. 비록 그 삶의 결과가 부패와 부정 속에 허덕이고 있다하더라도 그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신다. 세리는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이미 의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갖은 업신여김을 받았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업신여김을 참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루가18,9-14)
-유광수 신부-
오, 하느님이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는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앙생활의 두 모델을 본다. 대부분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 두 부류 중에 한 가지 한 부류에 속한다. 즉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은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세리와 같은 모습의 신앙생활이다. 나는 과연 어느 부류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바리사이파의 모습인가? 아니면 세리의 모습인가?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였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자세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나쁘면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오래 몇 년 동안을 지나고 나면 허리에 디스크가 올 수 있듯이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올바르게 발전할 수 없고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럼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들은 똑같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며 또 기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바리사이파의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강도 짓을 하지도 않고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고 간음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즉 나쁜 짓은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뿐인가?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기까지 하니까 신앙생활도 얼마나 열심한 사람인가! 하나도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다.
그의 말만 들으면 모두가 칭찬 받을 일이며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
거기에 비해 세리는 너무나 초라하다.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가 한 일이란 하나도 없다. 그저 죄인이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것밖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좋은 일을 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했다는 내용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죄인이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세리를 칭찬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되는 판결을 내리셨다. 우리가 볼 때에는 분명히 바리사이파가 더 훌륭했고 세리가 못 살은 사람이었다. 아마 우리는 너도 가서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교회에 교무금이나 봉헌금을 많이 내고 교회에서 지키라고 한 것이나 열심히 지키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럼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바리사이파의 기도의 내용을 잘 들어보면 하느님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결국 바리사이파의 기도의 모든 내용은 자신을 드러내는 기도였지 남을 위한 기도라거나 하느님께 감사 드리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바리사이파의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자. 그 사람의 기도의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우선 기도를 시작하는 단어가 "제가"라고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나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 즉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는 것이다. 결국 기도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고 자기는 그들과는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다 들추어내면서까지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는 잘 살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강도짓, 불의를 저지르고 간음을 하는 나쁜 사람들이고 자기 혼자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바쳤다고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늘어놓고 있다. 스스로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의 내용에는 자기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정말로 감사 드린다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한다든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른 사람들은 업신여기고 자기 자신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말하고 있다.
한편 세리는 어떻게 기도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좋은 점을 늘어놓는 기도가 아니라 잘못을 청하고 있다. 그는 다른 이들을 비판한다거나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있다. 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못 살았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세리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그의 관심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한 중앙에는 하느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나가 있고 세리의 한 중앙에는 자기가 아니라 한없이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차이는 자기 자신의 삶의 한 중앙에 "자기"가 있는가? "하느님"이 계신가? 의 차이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무엇을 하든 즉 기도를 하든, 좋은 일을 하든 항상 그것의 한 중앙에는 "자기"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우상 숭배이다. 즉 자기라는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한편 세리는 자기가 아닌 하느님이 한 중앙에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느님 중심으로 한다.
우리가 복음을 알아야 하고 묵상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잘못된 나의 신앙생활이나 생활을 올바로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냥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있고 잘못하고 있는 지를 알 수가 없다.
바리사이파 사람도 자기가 잘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 즉 세리가 잘못생활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앞에 나와서 자기가 무척 잘한 것처럼 떳떳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꼿꼿이 서서"라고 복음은 바리사이파의 자세를 정확하게 적었다. 즉 남이 보라는 뜻이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자기의 잘못을 알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고 그래서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정확하다. 그리고 겉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올바로 판단하신 것이다.
오늘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우리의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복음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고 교정하는 것이다. 즉 오늘 복음을 보면서 나에게 바리사이 사람과 같은 신앙자세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런 잘못된 신앙생활을 올바로 교정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분명히 복음을 보면서 나의 잘못을 알면서도 아무런 뉘우침이나 교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은 발전해야 하고 발전하려면 끊임없이 교정해가야 하며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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