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영릉(寧陵)은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 907-1번지에 있다. 세종의 영릉(英陵)과 발음은 같으나, 한자는 다르다. 국가유산청의 엄격한 규정 적용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지 못했으나, 답사는 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제가 아는 내용들을 적어 볼까 한다. 다소 길지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효종의 능지 후보로 처음 거론된 곳은 지금의 사도세자 묘가 있는 융릉자리이다. 이곳을 적극 추천한 인물이 윤선도이다. 윤선도(남인)는 당시에 풍수가로 유명한 분이었고 능지 선정에 동참하였는데, 반대파인 송시열(서인)의 적극적인 반대로 결국엔 동구릉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에 능을 조성한 이후 능의 석물이 무너지고, 돌틈이 벌어지는 등 끊임없이 하자가 생기자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천장을 결정한다. 그래서 적극 추천된 곳이 여주 홍제동 지금의 영릉이다. 이곳은 당시 왕릉 후보지로 여러번 추천된 곳인데, 효종이 임자가 되었다. 선조의 목릉을 천장할 때도 후보로 추천되었는데, 당시 이곳을 간심한 상지관 박홍중이 일부구간이 해맥(亥脈)에 해당되어 길지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이곳이 다시금 효종의 능지로 추천되었을때, 박홍중의 주장이 문제가 되었는데, 모든 상지관이 나서서 박홍중이 '잘못본것'이라고 하면서 박홍중을 공격하게 된다. 이미 박홍중은 생존에 있지 않은 상지관이었으나, 후배 상지관들이 선배 상지관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현장에서 실제로 해맥에 해당하는 구간이 있는지 살펴보았더니, 3절용이 해맥에 해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박홍중의 주장은 틀린것이 아니고 엄연한 사실인데, 후배 상지관들은 왜 선배를 그렇게 공격한 것일까? 여기에는 당시 상지관들이 처한 상황이 선배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위에서 결정한 것을 상지관들은 그에 합당한 풍수 논리를 제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안그러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상지관은 열심히 합당한 논리를 찾아 제시해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효종의 영릉 입수룡을 보면서 기대 이상으로 생동감 넘치는 생룡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효종의 영릉은 세종대왕릉에 비해 현저히 모자란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렇게 부족하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역시 풍수는 직접 눈으로 살피고, 현장을 확인해야만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효종의 능이 동구릉안에 있었던 자리는 그후 다시금 왕릉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다가, 정조에 의해 할아버지 영조의 원릉이 조성되고 있다. 길하다고 해서 효종을 안장하였으나, 흉하다고 하여 천장한다. 그후 수많은 풍수가들이 다시 이곳이 길지라 주장하여 영조의 원릉을 조성한 것이다. 왜 왔다갔다 하는 것일까??? 같은 곳인데, 그만큼 당시 상지관들은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한마디로 위에서 시키는대로 그때그때 윗사람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도 풍수가들마다 각기 다른 주장을 한다. 현대에는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배운 선생과 수련정도, 실력차이, 안목 등의 여러 이유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사)정통풍수지리학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두에 있는 풍수단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