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그 심오한 의미
허 열 웅
色은 문화다. 그리고 역사다. 시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화가들에게 색은 중요한 언어다. 감성 그 자체이며 공간이자 빛이고 물질을 물질로 보이게 한다. 초록색은 언제부터 ‘안전’의 상징이 되어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는 신호등 색이 되었을까? 사제들은 왜 검정 옷만을 입고 스님들은 회색 승복을 고집할까? 우리를 백의白衣민족이라 부른 이유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하다. 색채를 노래하는 시인들은 詩語에 어떤 색의 외투를 입힐까? 생각과 감각의 색色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해인 시인은 일곱 무지개색상으로 시를 지어 행운과 평화, 건강을 빌었다.
빛의 삼원색을 합치면 흰빛이 되고, 색의 삼원색을 섞으면 검정색이 된다. 빛은 굴절과 조합에 따라 당장 보고 있는 색이 달라질 수도 있다. 검은 색과 흰색은 그 완성품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색이다. 黑과 白의 아름다움은 상상想像의 사진과 같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여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다녔다. 까맣고 하얀 바둑알처럼 옷도 흑과 백으로 입으면 대비가 강열했다. 중, 고등학교 교복의 여학생은 여름엔 곤색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착용했고 남학생은 검정색이나 곤색 바지에 흰 남방샤쓰였다. ‘처음처럼’이란 낱말 화두로 유명했던 신영복 교수는 흑, 백인종의 화합의 중요성을 피아노 흑백 건반으로 비유해 ‘반半은 절반을 뜻하면서 동시에 동반同伴을 뜻한다.’는 에세이를 썼다. 흑과 백은 무서운 감각이며 무서움은 날카로움이고 날카로움은 멋이다.
검은 색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경찰과 사법기관을 대표하는 색이었다. 그래서 운동경기의 심판들은 검은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그러다가 컬러 TV가 스포츠경기를 중계하면서부터 심판 옷도 바뀌는 동기가 되었다. 기독교에서 검은 색은 악마, 죽음, 죄악의 색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색 이론이 널리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검은 색을 겸손과 절제의 색으로 여기게 되었다. 검은 드레스를 자주 입었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이야기다. 그가 사랑하는 애인 그리스 선박사업의 왕 오나시스를 미국 대통령 부인이었던 재클린에게 빼앗기고 영국의 독창회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와 열창을 하자 모든 관객들이 일어나 20 분간이나 박수를 쳤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색을 단순히 굴절로 보았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색을 우주로 해석하고 그 안에 만물을 담는다. <청, 적, 황, 백, 흑>의 오방색五方色이 그 의미다. ①청(靑)은 오행 가운데 목(木)에 해당하며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색으로 쓰였고 동쪽에 해당된다. ②적(赤)은 화(火)에 해당하며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적극성을 뜻하며 남쪽이다. ③황(黃)은 토(土)에 해당하며 우주의 중심이라 하여 가장 고귀한 색으로 취급되어 임금의 옷을 만들었고 중앙을 의미했다. ④백(白)은 금(金)에 해당하며 결백과 진실, 삶, 순결 등을 뜻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흰 옷을 즐겨 입었고 서쪽이다. ⑤흑(黑)은 오행 가운데 수(水)에 해당하며 인간의 지혜를 관장한다고 생각했고 북쪽을 의미했다.
이처럼 색은 음양오행사상을 기반으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음귀陰鬼를 몰아내기 위해 혼례 때 신부가 연지곤지를 발라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기원해 돌이나 명절에 어린아이에게 색동저고리를 입혔다. 간장 항아리에 붉은 고추를 끼워 금줄을 두르거나 잔칫상의 국수에 오색 고명 올렸다. 붉은 빛이 나는 황토로 집을 짓거나 신년에 붉은 부적을 그려 붙이기도 했다. 궁궐ㆍ사찰의 단청이나 고구려의 고분벽화, 조각보 등의 공예품에서 오방색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권위와 지위를 상징하는 붉은색을 서양에서는 Red 하나로 표현하지만 우리나라는 붉은, 빨간, 새빨간, 시뻘건, 검붉은, 등의 풍요로운 형용사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선조들이 삶을 자연의 이치에 따르며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했다. 이런 생각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만 색을 쓰는 게 아니라 색에도 각각의 의미를 담아 조화롭게 쓰고자 했다. 사람은 모양을 인식하기 이전에 색을 먼저 지각하기 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색에 반응한다. 문화권마다 공통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같은 색을 보더라도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또 한 色은 남녀의 짙은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 ‘색계色戒’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조국까지 배신하는 마타하리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려 많은 관객을 모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흰옷을 사랑한 우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인지 흰색이다. 아버지의 두루마기나 어머니의 삼베치마, 모시저고리는 대부분 하얀색 이었고 신발조차 흰 고무신이었다. 빛의 색인 흰색은 분화되지 않은 상태, 완전함, 단순함, 순진무구함, 정결함을 상징한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태양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태양은 노란색이나 금색, 빨간색으로 상징하는 반면에 흰색은 달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고 여성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노벨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인 맨부커 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은 ‘하얀’이 깨끗함의 느낌만 주는 반면 ‘흰’에는 배내옷과 수의처럼 삶과 죽음이 모두 들어 있다고 표현했다.
결혼식에서의 여성의 흰색드레스는 순결을 상징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윔블던 테니스대회’에 출전한 선수는 오늘 날까지도 흰 제복을 입어야만 입장할 수 있다. 지난해 골프에서 그랜드슬럼을 달성하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박인비 선수는 흰옷을 입은 날 거의 우승을 했다. 나는 오늘도 흰 제복에 흰 운동화를 신고 하얀 줄이 그어져 있는 테니스장을 향한다.
늦은 밤 달빛 아래 펼쳐진 백지 앞에 앉으면 나는 두려움으로 떤다. 영혼의 잉크를 찍어 채워야 할 칸칸이 운동장처럼 넓고 막막하기 때문이다. 까만 밤을 하얗게 새워보지만 갈증뿐 원고지는 텅텅 비어 있다. 절망이 원망으로 변하여 “神은 나에게 갈망만 주시고 재능은 주지 않으셨다.”고 모차르트 천재성을 질투하며 외치던 궁정음악지휘자 ‘살리에리’의 핏빛 절규가 내 입에서도 튀어나오는 하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