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령칠은 제10강의] 의견(意見, counsel)의 은혜 - Renunciation(포기)
(마르10:28)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10: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마르10: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굳셈의 은혜를 통해서 성령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을 주신다. 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힘인 굳셈의 은혜를 사용하느냐 가 중요하다. 그러려면 착한 의견(意見)의 성령이 필요합니다. 의견의 선물을 통해서 성령은 특별한 마음 자세를 주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 상황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어떤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인지 선택하도록 하신다. 교회 건설을 위해서 주신다. 내가 처해 있는 그대로의 상황하에서 내가 어떻게 잘 섬길 수 있는가를 돕는다.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는가를 돕는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살펴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성녀 데레사의 마음에 힘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소명을 갖도록 해주셨습니다. 성녀는 사제가 되길 원했고 선교사나 순교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고통을 받길 원했습니다. 5대륙에 가길 원했습니다. 모든 세대의 소명을 다 성취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점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가 깨달은 것은 “그가 무슨 임명을 받았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용광로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교회의 심장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교회의 어린아이임을 보여줍니다. 좁은 길을 택함으로서 그렇게 했습니다. 단 하나의 희생도 놓치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표정 하나 시선 하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회에 성녀는 하느님께 충만한 사랑을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성녀는 많은 선택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기 저기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선택해야 하는데, 어떤 것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는지 이해했다.
우리가 읽은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성마르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의견의 은총인 포기하는 것을 밝혀 줍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의 충고를 필요로 한다. 전문가나 상담사가 필요하다. 사회에는 조언 고문단을 둔다. 위원회를 만든다. 충고를 전문적으로 줄 수 있는 기구들이 사회에는 있다. 성공하려면 좋은 충고를 받아 드려야 한다. 성령이 이런 충고를 하는 좋은 친구이다. 충고를 받아들일 때에는 어떤 가장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좋은 충고를 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선택에는 우선 순위가 있다. 좋지 않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포기하는 것을 통해서 좀더 나은 포괄적인 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희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희생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신 이유는 크고 깊은 친교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포기하는 것은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더 깊은 친교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마르꼬 복음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베드로는 말한다. 그것에 앞서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무엇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지”를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마르10:27)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말한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마태오 사가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를 덧붙입니다. 마르꼬와 루가는 단지 “우리는 당신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신뢰는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압니다. 그분의 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좋은 충고자라는 것도 안다. 마침내 예수님이 무언가를 요구할 때에는 그들 마음에 갈망을 아시고 그것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르10: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마르10: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스승의 충고에 따라서 스승께 대한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소중한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면 좀더 소중하고 좀더 사랑스러운 사람을 얻게 된다. 그들을 좀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사랑을 포기하라는 말은 더 많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시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이 12살일 때에 성전에 남겨 두었다. 마리아가 “예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라고 묻는다. (루가2:48)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예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넓히는 대답을 하신다. 마리아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께 관심을 갖게 한다. (루가2:49)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에로 마리아의 마음을 넓히신다. 마리아는 인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고 포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절대적으로 순결한 마음을 가진 마리아까지도 그렇게 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티가 없으셨다. 이런 마음까지도 확장되어야 했다. 이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해야 넓힐 수 있는지”를 가르치신다. 우리 마음은 우리 자신에게 너무 쏠려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쏠려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요구하신 포기를 하게 되면 이런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포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을 더욱더 사랑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무한한 사랑에로까지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이 부모님을 통해서 이것을 체험합니다. 그것은 희생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희생이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차츰 이 희생은 우리가 받은 사명과 연관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쏠려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기입니다. 성부께 우리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고 그분 사랑의 구혼에 우리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하느님은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초대하십니다. 당신 나라의 청지기가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게 당신의 온유하심을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포기한 것을 100배로 보상을 받으리라고 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을 실행하는 것은 구체적인 오늘의 삶속에서 입니다. 재산을 관리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몸과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억누르지 않는다. 우리는 한 남자 여자로서 사랑해야 한다. 열정과 느낌을 평화롭게 통합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나라에서 섬기라고 우리의 모든 능력과 인간성을 조화롭게 통합시키려 하신다. 우리 존재가 하느님의 사랑의 초대나 형제 자매에 대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려면, 우리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서 어떤 것을 떼어 내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 안에 세상적인 것을 정화시키려는 것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욕망들을 정화시키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감각이나 감성등 우리의 모든 존재를 영적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빠스카의 신비에 들어가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마리아처럼 순결하지 못하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할 때에 특별히 여인들과 관계에서 그들을 100% 취하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 안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본능이고 이것이 죄의 표지이다. 이런 우리 모습에 놀라지 말자. 이런 우리 자신에게서 실망하지 말자. 하느님께 충실하자.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바라보도록 기도하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내 마음을 계속 봉헌해야 한다. “여러분은 100배로 받겠지만 박해도 받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상황을 말한다. 우리 자신을 그렇게 완전히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에만 향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읽은 포기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첫 수난 예고와 성변용 사이에 있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변모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즉시 영적이 될 수 없다. 시간이 요한다. 어려움이나 유혹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말자. 성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런 유혹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변모시키는데 동의하십니까? ‘나와 함께 선택하십시오’라고 초대한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에로 계속 향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포기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도 100배 받겠지만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때에는 충만히 받겠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할 때에 어떤 함정을 파 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도록 이끄신다. 우리 중심주의를 포기함으로서 하느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에 더 충만하게 참여하라고 하신다.
본당에서 형성하고 있는 영적 가족이나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가족을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 모든 천사들을 모으십니다. 영원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불렸다. 특별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 포기를 해야 할 때나,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서 우리를 봉헌하게 될 때에 우리가 그럴 필요가 있는지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마련해 두셨다는 볼 수 있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 예수님은 현재 여러분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싶으시다. 영원한 생명을 기대하는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깨닫게 하고 싶으시다. 이것이 의견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를 교육을 하실 것인지 우리가 체험하시기를 바라신다. 우리 마음을 바치도록 하신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아주 풍성한 것이다. 때로는 우리는 우리가 희생하고 있다고 느낀다.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은 얼마나 많은 형제 자매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사랑하도록 하시는가? 사랑과 온유로 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배려하시는지? 아름다운 장소도 주시고 좋은 목자가 되도록 하신다. 이런 좋은 것을 체험하고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말자. 기도 중에 이것을 음미하고, 우리가 이것을 음미하고 체험하고 감사드리지 않는 한 다른 세상 것에서 심리적인 보상을 바랄 것이다. 우리는 유혹과 어려움을 느낄 때에 기도하자. 우리 마음을 비추고 이끌어 주시어 그 의미를 맛보도록 성령께 기도하자.
실재적인 적용 방법 제시
1. 첫째로 포기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때에 평화를 느낄 때까지 빛을 구하고 기도하고 복음과 교회 전승 안에서 그것이 무슨 뜻인지 찾자. 하느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찾자. 모든 사람과 더 깊은 친교에로 초대하신다. 이 친교는 십자가 없이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마음을 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예를 들자. 마르타는 예수님께 충고하는 것을 본다. (루가10:40)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루가10:41)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루가10: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성령은 우리가 꼭 필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기를 바란다. 마리아는 귀를 기울이면서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우리 삶에서 더 많은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 마리아가 마르타를 도와서 함께 요리하는 동안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 자신을 가장 필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신다. 에디트 슈타인을 알지요. 그녀는 갈멜 수녀였고 철학교수 였다. 수용소에서 죽었다. 전생애를 자신의 동포인 박해받은 유대인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성취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나 예수님의 수난’을 나누려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이끄셨다. 성령은 우리가 본질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도록 초대한다. 우리가 길을 잃을 때나 애매 모호할 때에 주님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어려울 때에 빛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빛을 구하면 거기서 평화와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성령의 열매는 어렵다. 포기는 항상 힘들다. 빠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항상 힘들다. 그러나 다시 한번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을 바라보자. 더 많은 사랑을 보자. 더 넓고 깊은 일치(communion)를 보자. 예수님의 약속은 진실하다. 여러분은 100배를 받을 것이다. 이 믿음을 갖도록 성모 마리아와 함께 청하자. 이 예수님의 약속을 얻을 수 있도록 청하자. 우리는 십자가 밑에 계신 성모 마리아를 봅니다. 거기 계신 마리아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성령칠은 제11강의] 통달(通達, understanding)의 은혜
통달의 선물을 보자. 하느님의 신비에 관하여 묵상하고 관상하는데 이것이 통달의 은혜이다. 바오로의 본문을 보자. 바오로는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한다. 다음 구절을 천천히 묵상해 보자. 사이사이에 침묵을 가지면서 묵상하자.
(에페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 침묵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8)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9)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서 (10)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 침묵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 침묵
(13)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습니다.(14)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우리 나라의 역사를 배운다. 역사와 문화와 사고방식을 배우면서 우리 나라를 좀더 잘 알게 됩니다. 문화를 배울수록 우리 나라의 풍요로움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서 효율적인 역할을 잘해 낼 수 있다. 문화에 적응해서 그렇게 하게 된다.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박물관을 방문하고 신문 라디오를 듣게 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동료와 함께 교재를 하고 활동도 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주된 행사에도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문화는 우리에게 전해진 유산이다. 이것을 자녀들에게 전수한다.
그리스도의 문화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문화를 잘 알 수 있다. 힌두교인 불교인이나 무신론자까지도 그리스도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신비를 이해하려면 성령의 은총이 필요하다. 성령만이 그것을 알려줄 수 있다. 그리스도교를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특별한 은총과 선물이나 계시가 필요하다. 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인 통달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제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통달의 은혜를 통해서 하느님이 주시려는 전승을 깨닫길 바랍니다. 우리가 묵상했던 에페소서 1장에서 말하는 유산을 깨닫길 바랍니다. 통달의 은혜가 무엇인지 연구합시다. 이 통달의 은혜는 특별한 은총으로 계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하기 전에 광대한 유대 문화를 알고 있었다. 오직 아버지만이 특별한 은총으로 그에게 성자의 신비를 계시해 주었습니다. 그 때야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 신지 구원의 신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갈라1:1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 주셨고(갈라1:16)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꺼이 나타내 보이고 싶었다. 아들과 아들의 신비를 계시하신 것은 아버지의 특별한 은총이었다. 이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바오로는 서간에서 상기시킨다. 이 신비가 수세대 동안 감추어 졌던 것이라고 한다. 이제 당신 성도들에게 이 신비가 계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계속 이 신비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관련된 성서구절을 묵상할 수 있다. 하느님의 계시를 잊지 않도록 하자.
골로 1:15-20 (골로1: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18)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20)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깨닫는 것은 특별한 계시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이 신비가 성령 안에서 계시된다고 한다. 에페소서 처음부터 이 신비를 아름답게 발전시켜 나간다. 이 계시는 인간 지식의 산물이 아니다. 이 구원의 신비를 작은자들에게 계시하시기를 원하셨다.
(루가10:21)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루가10:22)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 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루가10:23)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루가10:24)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아버지만이 아들을 계시할 수 있고, 성자만이 우리를 성부께 이끌 수 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성령은 우리가 영적인 감각으로 구원의 신비를 보고 듣고 체험하도록 은총을 주신다. 성령은 항상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 이 신비를 알려주려고 한다.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은 이 구원의 신비를 갈망한다. 은총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기도 중에 이것을 얻으려고 하자.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려 주신 성령만이 당신의 이름과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상기시켜 주시리라고 하신다. 성령이 주신 이런 기억을 통해서 이 신비가 우리 마음 안에 현존한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억할 때에 그분이 우리 안에 현존하는 것과 같다. 그 신비를 체험하도록 우리 안에 들어온다. 성체성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를 기억해서 성체성사를 거행한다.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비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이 신비가 현존하고 우리가 이 신비에 참여하게 된다. 엠마오의 제자들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항상 우리의 여정을 동반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여시려고 애쓰신다. 성령의 은총을 통해서 그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내시려고 하신다. 그분의 고난과 부활 안에 나타나는 신비를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성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신다. 마음이 불타오른 체험이었다. 마음이 타오르는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너희는 그것을 증거하는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마리아처럼 이 모든 신비를 마음에 품고 마음에서 깊이 묵상한다. 마리아는 계속 마음에 간직하고 묵상하셨다. 교회는 계속해서 충실하게 기념한다. 사랑으로 기념한다. 첫 번째 성령 강림 때에 사도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케리그마(복음선포)로 선포했다. 첫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계속해서 이 구원의 신비를 기억하고 있다. 사랑으로 전수하려고 깊이 묵상한다. 이 신비야말로 교리반에 오는 예비자들에게 주는 첫 신비입니다. 종부성사 때에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마지막 기도로 이것을 전한다. 교회는 전례 주년에 따라서 이 신비를 기억한다. 매년 계속 이 신비를 공부한다. 매번 성체성사 때마다 성령을 부르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기억하고 묵상한다. 이 신비를 기억하라는 초대에 참여하고 있다. 그 신비 속으로 침투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성찬의 기도 때마다 이 신비를 기억합니다. 그 성령을 청하면서 이 신비를 기억하고 이 신비에 의해서 변모되도록 기도한다. 성찬기도 제 4 양식은 이 신비를 아름답게 표현한다.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이 신비를 기억하고 감사드린다.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 “아멘”이라고 이 신비에 응답한다. 내적으로 변모되고 하느님과 가까워진다.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은 이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원초부터 있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때라 계속해서 주신다. 성체성사 때마다 주신다. 성령을 통해서 점점더 깊이 깨닫게 된다. 점점더 확고하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점점더 아멘 이라는 응답을 깊게 드린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신비가 되어 간다.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겸손한 봉사를 통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용서와 화해의 봉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통달 은혜의 열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를 우리의 유산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실재로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1. 개인적으로 이 신비를 계속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다. 아무도 우리를 대신할 수 없다. 내가 기도 중에 계속 받아야 할 은총이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고 성령이 주시고자 하시지만 받아야 할 사람은 내 자신이다.
2. 교리에 필수적인 것인데요. 구원의 신비 전모(全貌)와 그것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은총을 청한다는 것이다. 건물을 지을 때에 콘크리트 시멘트로 골조를 세우고 다른 것을 붙인다. 우리는 구원의 구조(뼈대)를 알 수 있는 은총을 구하고 이어서 구석구석 알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그래야 모든 것에 균형을 잡을 수 있다.
3. 이 구원의 신비를 일련의 교의로 제시하지 않고 이 신비를 진정으로 증거할 수 있는 은총을 기도 중에 청하자. 뜨거운 마음으로 이 신비를 통교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우리 마음에서 당신의 마음에서 이 신비를 곰곰이 생각하시는 마리아 함께 기도하자. 성모송.
[성령칠은 제12강의] 지혜(智慧, wisdom)의 은혜
(요한17:21)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요17: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17:23)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17:24)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지혜의 은혜를 청하면서 피정 강의를 끝냅니다. 이 선물의 2가지 측면만 봅시다. 지혜의 은총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이끌려 갑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끌려 가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교리 시간에 배운 기도에 관한 정의이다. 기도란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리는 것이다.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들어올리는 것이다. 성바오로의 말을 기억하지요. 여러분의 생명은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마음을 들어올릴 수 없다. 성령의 선물이 필요하다. 두 젊은이가 서로 사랑에 빠질 때에 그들 마음은 서로 서로에게 빠지고 고정되어 버린다. 성령은 이런 마음의 자세를 우리에게 주신다. 이런 마음의 자세 때문에, 우리 마음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성자 안에 머물게 되고, 성자는 성부께 고정되어 버리신다. 아버지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당신 안에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것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과 주의와 전존재를 끌어당기신다. 아버지와 아들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사랑의 교환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부활의 로렌조 수사는 “우리의 마음을 들어올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묘사했다. 잘 된 표현이다.
나는 때때로 침묵 중에 생각을 모을 때
내 편에서의 어떤 노력도 없이
내 온 마음과 영혼이 들어올려져서
바로 거기에 머무는 것을 체험하는데
마음과 영혼의 중심과 쉼터를 찾았으므로
마치 하느님께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분께 딱 붙어 버림을 체험합니다.
- 부활의 로렌조 수사 -
때때로 침묵 중에 내편에 노력도 없이 생각을 집중하게 될 때에 그것이 선물임을 체험한다. 내가 무언가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의 체험이다. 나의 온 마음과 영혼이 들어 올려짐을 체험한다. 들어 올려져서 거기에 머무는 것을 체험한다. 마치 하느님께 매달려 있듯이 그분께 붙어 버렸다는 것을 체험한다. 이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어떤 소녀가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에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 무어라고 말하지? 즉시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요 내 마음을 주님 마음에 던져 버립니다.” 이것이 사랑의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머무시길 바란다. 예수님 안에 사랑의 욕구가 계시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면 이런 기도가 우리의 일상 생활로부터 유리(遊離)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 기도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에서 차단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올바른 중심에다 놓아준다. 그 안에서만이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중심을 찾게 됨을 알게 된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따라서 모든 것의 선함을 음미하게 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맛을 체험케 한다.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을 맛보게 된다. 기도가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준다. 이냐시오 성인의 좌우명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에 맛들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다.
작은 아이가 엄마 곁에 놀다가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 있지만 항상 엄마 곁에 있다. 놀이를 하다가 게임을 중단하고 갑자기 엄마 무릎 위에로 뛰어 오른다. 무릎에서 놀다가 다시 장난감에로 간다. 이 아이에게는 무언가 타오르는 것이 있다. 엄마의 사랑의 체험이 아이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성령이 이런 선물을 주실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우리를 취하셔서 평화롭게 하느님 안에 쉬게 해준다. 성자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쉬게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 맛들이게 해준다. 그리고 일상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나 기도에서 체험한 뜨거운 것이 남아 있다. 우리 일상 활동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좀더 쉽게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매일 하는 업무에서도 발견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준다. 이것이 선물이므로 기도하여야 하고 기도하려고 시간을 내야 한다. 이냐시오 성인이 말한 것처럼 기도하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을 온전히 열어야 한다. 하느님이 당신 안에 우리를 환영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환영해야 한다. (요한17:21)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우리 삶을 일치시켜 준다. 우리의 삶의 활동과 인간의 모든 능력을 일치시킨다. 그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 안에 기초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마침내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 복음의 한 문장이나 교회 기도문 하나나 누구로부터 들은 기도 하나라도 마치 만트라와 같이 될 수 있다. 만트라는 영감을 받은 문장으로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던져 주는 말이다.
나는 성찬기도 제 2양식의 기도문을 좋아한다.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당신 현존 앞에 서서 당신을 섬기기에 합당하다고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름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과 신뢰와 주님께 내어 맡기는 자세로 주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부르노 성인은 하느님의 풍요로움이여 하고 외치기를 좋아했다. 찻집을 경영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드렸지요. “옴! 옴!”하면서 하느님께 이끌려 간다. 성령은 우리를 여러 가지 다른 길로 이끈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께 중심을 두도록 이끄신다. 하느님 안에 쉬게 하시고 사랑을 받게 하시고 사랑을 주게 하신다.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신다. 우리는 기도 할 때에 시간을 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랑의 욕구입니다.
기도를 왜 해야 하나?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겠다는 욕구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전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순결한 영혼은 聖三(성삼)에 이끌려서 감탄합니다. 성부는 당신의 창조물에 감탄하십니다. “아! 여기 내가 만든 창조물이 있구나!” 성자는 당신 성혈의 대가를 관상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치르는 대가에 의해서 사물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성령은 순결한 영혼을 성전 삼아 머무신다. 순결한 영혼은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와 같다. 아름다운 장미의 향기를 맡기 위해서 몸을 굽히듯이 거룩하신 성삼은 그런 순결한 영혼에게 몸을 굽히신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 안에 당신을 어떻게 주시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예이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욕구이다. 이런 작은 피조물과 하느님이 일치하는 것은 놀랍고 훌륭한 일이다. 우리의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 행복이다. 이것이 지혜 은혜의 첫 번째 측면이다.
두 번째로 지혜의 선물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지를 알아보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교환에 어떻게 참여할지 알아보자. 우리 사목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는 사랑의 고리가 있다. 삼위(三位) 사이에는 영원한 움직임이 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위격마다 다른 위격 안에 상호 내재하시는 것을 말한다. 서로 영원한 존재의 사랑을 교환하시면서 내재하신다. 사랑은 불과 같아서 항상 움직인다. 성부 성자 사이에는 이런 움직임인 사랑이 오고 갑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우리는 이런 움직임에 끓임 없이 참여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하느님이 창조물을 주신다. 이런 창조물은 하느님 말씀의 반영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생겨났다. 피조물을 가지고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 태양아 달아 추위와 바람아 냉기야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피조물을 받고 그것으로 찬양하여 그것들을 그분께 들어올립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과 주의를 다 기울여서 받아들인다. 다음에 엘리사벳에게 말씀을 전한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 마리아의 노래로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들어 올려진다.
목동들을 보자. 목동들은 단순한 마음을 갖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사들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지시를 받았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줄 기쁜소식을 받았습니다. 자기들끼리 그 메시지를 나눈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목동들은 자기들이 보고들은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로서 무언가를 체험하고 예수 아기 앞에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느님을 찬양하고 현양 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서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아기 예수를 팔에 앉고 아버지께 봉헌합니다. 나의 눈은 당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루가2: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항상 영원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도직의 움직임입니다.
↗ 루가 5:17 중풍병자 고침
루가 4:18-19 → 루가 7:11 과부의 아들
↘ 루가 18:35 소경
루가 4,18-19 ;(루가4: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5:17)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거기에 갈릴래아와 유다의 여러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앉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기도 하셨는데 (18) 그 때 사람들이 중풍 들린 사람을 침상에 눕혀 가지고 와서 예수 앞에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24)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집으로 돌아 가라“ 하셨다. (25) 그러자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깔고 누웠던 요를 걷어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 갔다.(26) 사람들은 모두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도 마음은 두려움에 싸여 “우리는 오늘 참으로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루가 7:11) 얼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함께 따라 갔다. (12)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14)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 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와 주셨다” 고 말하기도 하였다.
(루가 18:35) 예수께서 예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41)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가 대답하자 (42)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43) 그러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어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의 선교의 시작을 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 속박에서 사람들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치유해 줄 때에 모든 사람은 주님을 찬양했다. 중풍병자를 해방시키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양하면 다시 성부께로 올라간다. 나인의 과부 아들이 소생될 때에 모든 사람이 경외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을 찬양한다. 맹인은 치유된 후에 즉시 예수님을 따르고 그곳에 있던 사람이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계속됩니다. 이 움직임에 참여하도록 불렸다. 특별히 우리 사목을 통해서 참여하도록 불렸다. 성체성사 때마다 축성이나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성사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같은 성령을 통해서 빠스카 신비에 의해서 우리 마음과 신자들의 마음이 변모되고 거룩해집니다. 우리 삶과 신자들의 삶 전체가 거룩하게 해주는 성령에 의해서 하느님께 봉헌된다. 그분 통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봉헌됩니다. 성찬기도 제 3 양식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를 당신께 드리는 영원한 선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들의 일상의 삶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진다. 빠스카의 사건이 이루어진다. 빠스카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삶 전체가 “아빠”를 외친다. 우리 삶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또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분의 모든 축복에 대해서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기도합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시고 그것을 엘리사벳과 다른 사람에 전하고 그런 사실이 마니피캇으로 하느님께 봉헌되는 것처럼 우리도 같은 뜻으로 성모송을 하자.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빌며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