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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것 / 사 30:18
“그러나 야웨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야웨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여러분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우리 교회 굿피플을 통해서 아이티에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이 땅 끝까지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라는 것은 우리 하나님 믿는 백성들끼리만 모여서 잔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담을 뛰어넘어 우리와 같이 예배 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라도 우리 도움을 베푸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대단히 귀중한 곳입니다. 하늘나라의 중심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마음의 변화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헌신, 더 많은 충성을 원하십니다. 우리 성령께서 도와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서론>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기다리는 것”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자란 우리 집은 시골 산장에 있는 진장이라는 곳입니다. 그 이름을 진장이라고 부른 것은 구한말에 군대가 거기에 주둔했기 때문에 진장이라고 진을 쳤던 장소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한 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가 진장에서 저와 동생들은 진장에 남겨 두고 장보러 갔습니다. 일주일 먹을 식료품을 진장에서 언양 읍내까지 가서 장을 봐서 오시는데 모처럼 장보러 가시니까 아침에 일찍 떠나가셔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데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오는 것이 그렇게 그리워서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멀리 언양천 넘어 집으로 돌아오실 어머니를 목메어 기다립니다. 어머니는 멀리서 보아도 걸음걸이만 보아도 우리 어머니다. 대번에 알아요. 참 지금도 어머니의 걷는 걸음걸이 모습이 눈에 훤합니다. 그 때에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안타까운지 몰라요. 어머니가 하만아 올까 하만아 올까. 파리만 자꾸 날리지 어머니는 오지 아니하시고 그러다가 어머니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던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먼 훗날 내가 목사가 되고 보니 또다시 그 기다림이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사흘도 아니고 매일같이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든지 누구를 기다리든지 기다리다가 이 땅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 삶 전체를 이루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하나님이 따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내가 앞으로 나갈 때 주님께서 따라와 주십시오. 그것은 잘못된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쳐다보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가시는 곳에 우리가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잠잠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 사람들이 해야될 일인 것입니다.
<본론>
1. 환상이나 꿈을 받기 위하여
성경에 보면은 사도바울 선생은 굉장한 신앙인이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굉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기다리는 것이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무엇이든지 치고 나가는 것을 좋아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이 하나님 앞서 나가는 것을 굉장히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못 가게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거나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나님 사역을 할 때 우리 힘으로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언제나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눈에 안보여도 성령을 숫자에 넣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선생이 아시아로 가는 것 자기가 계획해서 아시아로 가려고 하니까 함께 하신 성령이 허리춤을 잡고 안돼, 못가! 그러면 하나님 앞에 기다리는 것이 좋은데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아시아로 못가니 비두니아에 가야 되겠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 못 가게 합니다. 더 강한 의미로 성령을 예수의 영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앞서가지 말라고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선생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올라갈 사람이 내려간다는 것은 힘들거든. 인생 오르막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 내리막길로 가듯이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꾸 가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붙잡지 않았습니까? 성령이 못가게 붙잡고 예수의 영이 가지 못하도록 붙잡으니까 결국에는 올데 갈데 없으니 밤에는 기다리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바울이 드로아에 내려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니까 마음 속에 환상이 떠올랐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환상 중에 나와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 비로서 하나님이 마게도냐 사람을 환상을 통해서 그에게 보여주면서 다른데 가지 말고 아시아로 가지 말고 비두니아로 가지 말고 마게도냐, 구라파로 와서 말씀을 증거해라. 처음 바울선생의 전도는 소아시아에 집중되었는데 이제 구라파에 와서 복음을 증거해라.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같은 일행들이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마게도냐로 우리를 부르신 줄 우리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할지라도 마음을 비워놓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꿈인 청사진을 가지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올데 갈데가 없으니까. 꿈이 있어야 마음에 집중도 생기고 일할 에너지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마음을 집중할 수 없습니다. 산만하고 무엇을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 선생이 꿈이 없이 선교에 나가니까 예수의 영이 막고 성령이 막고 못가게 하고 꿈을 얻을 때까지 드로아에서 기다리게 만든 것입니다. 상당히 조바심이 나고 안타깝지만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게도냐의 환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마게도냐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난 다음에야 마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슴 속에 주시는 크고 작은 꿈을 품고 살 때 우리 삶이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우리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무슨 꿈이 가슴 속에 있습니까? 무슨 꿈이 좌우간 희미한 꿈이라도 내가 장차 가야될 꿈이 가슴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으면 망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리라. 꿈이 있으면 내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향해 가니까. 그러므로 꿈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편 40편 1절에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꿈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이 시작했다가는 인간의 힘으로 어려운 고비에 처해서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의 꿈을 받아서 꿈을 안고 나가면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고 천지가 변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박국 2장 1절로 3절에 보면은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야훼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갈 길을 하나님 앞에 기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지시해 줄 테니까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려서 나가지 하나님 제켜 놓고 정치인들끼리 모여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병준씨의 <따뜻한 슬픔>이란 책에는 “기다려야 할 때”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작가는 “기다림이란 형벌의 시간이며 동시에 축복의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형벌이다. 그러나 또한 축복이다. 맞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얼마나 목마르고 애가 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답답하고 힘이 드는 기다림의 형벌은 결국 꿈이 성취되는 축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상이나 꿈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어떤 일을 소원하고 하나님께 뜻을 묻고 기다리는데 한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굉장히 마음이 답답하고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는가, 버리셨는가 그런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의 뜻이 마음에 알려질 때,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이나 이웃 사람들을 통해서 알려질 때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꿈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10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이 1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할까요? 대학 교수가 유치원 교사보다 성공한 사람입니까? 커다란 외제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티코를 타는 사람보다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단순히 외형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룬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성공한 삶입니다. 아무리 거창스러운 일을 해도 하나님이 원치 않는 삶은 먼지와 티끌 같습니다.
강철 왕 카네기(Andrew Carnegie) 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방직공장에서 일할 때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방직공장 최고의 직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직공장을 그만두고 내가 우체부로 취직했을 때, 나는 최고의 우체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강철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내 꿈은 강철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꿈을 이루어 정말로 ‘강철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기다리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크고 작은 꿈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꿈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지고 삶의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자기의 삶을 정비하기 위하여
또 꿈을 얻을 뿐 아니라 우리 삶을 정비하기 위하여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가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차에 부실한 것이 있어서 리콜을 해서 미국이나 구라파 온 세계 자동차가 공장으로 도로 리콜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동차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주식 값이 떨어지고 절단입니다. 일본이라면 도요타가 상징적인데... 그것 왜 그러느냐. 너무 자신만만해서 자동차 정비를 잘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도요타가 멈칫하는데 그 멈칫하는 이유는 회개하므로 자기를 깨끗하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됐으면 우리는 당장 리콜해서 회개하고 정비해서 새로 출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회개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같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우리가 손발을 씻어야 되는 것처럼 매일같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100%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잠언서 28장 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얻으리라”
죄지어 놓고도 죄를 감추면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지만 죄지어 놓고 죄지었다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나는 요사이 신문을 보고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 사장이 국내외 회개하고 미국의 청문회에 서겠다고 겸손히 나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그분은 일본의 수상과 같은 정도로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회개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존경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내가 무엇 때문에 회개해? 내가 무엇 때문에 청문회에 서? 그렇게 버티면 버틸 수 있지요. 그러나 그 결과는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기다리는 삶을 사느냐. 나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 닦는데 시간 필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무엇이든지 일사천리로 한다고 잘하는 것 아닙니다. 가다가는 기다리면서 자기를 되돌아보고 자기를 정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먼 길을 가려고 할 때는 자동차를 굉장히 정비해서 부품을 다 갈아 끼우고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정비하는 시간이 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굉장히 중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 와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것 낭비가 아닙니다. 와서 기다리는 것은 우리를 정비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회개하고 씻어내는 준비하는 시간이 바로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 기도원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 시간 낭비같이 보이지만 아닙니다. 자기를 정비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다리고 정비하는 것은 십자가의 오중복음, 삼중축복을 마음 속에 확인해 보고 가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내 마음 속에 내가 누구라는 그 진실을 확실히 알고 어떠한 모습으로 가야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진을 쳐다보고 이렇게 생겼구나. 내가 이러므로 이 길로 가야되겠다. 확실히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이 누군지 자기 존재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체성이 확실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믿고 교회 왔다 갔다 하면서 당신 누구요? 예수 믿어요. 예수를 어떻게 믿어요? 우리 목사님이 알아요. 확실한 정체성이 없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주여 주여 부르지만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어떠한 사람이 되는지 모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와서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를 쳐다보고 기다렸다면 성령께서 그 마음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가 새 것이 된 것을 알아야지요. 옛날 내 모습대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새것이 된 것을 다시 한번 알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비춰 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고 의로움을 얻은 사람이다. 성결하고 성령충만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치료와 건강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부활과 영생천국을 얻은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것이 나의 올바른 정체성이다.
주여 나는 알고 깨닫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출발합니다. 마음 속에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는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면 담대할 수가 없지요. 자기가 누군줄 알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여러분 평신도라도 내가 십자가 앞에서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정비해서 알고 있으면 어느 곳에 가서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해도 할 수 있고 부흥회를 해달라고 해도 할 수 있고 가르치라고 해도 할 수가 있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예수 믿고 난 다음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지 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몰라요. 성경 전체에 있어요.
성경 보세요. 물론 여기 다 있지요. 그러나 급한 사람이 지금 숨이 넘어가는데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고 묻는데 성경읽으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마음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 정체성을 가지고서 나가면 하나님의 은총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삶을 정비하기 위해서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차원의 영성을 살펴보아야 해요. 내가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새로워지느냐. 내가 교회 와서 내 생각이 새로워지느냐. 옛날 생각 그대로 가지고 있느냐. 성경을 읽고 오늘은 어제보다 생각이 달라지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지고 그러한 생각이 달라지느냐. 내 마음 속에 꿈이 새로워지느냐. 내 마음에 믿음이 자라고 있느냐. 내가 말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하는가. 자기를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바쁘게 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내서 자기 정체성도 알아보고 사차원의 영성도 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아도 그 말씀이 자기 생애 속에 이루어지지 않고 관계가 안 되는 것은 사차원의 영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교제하는지 모르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입술의 말을 통해서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사람하고 교통을 하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 일본사람하고 이야기 하려면 일본어를 해야 돼요. 외국 사람이 한국 사람하고 이야기하려면 한국말을 해야 돼요. 요사이 텔레비젼에 나와서 말을 하는 한국말하는 외국 사람들 보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어떤 말은 나보다 더 잘 알아요. 문자를 쓰는데 깜짝 놀라요. 그러면 서로 말을 하기 때문에 교통이 있는데 하늘나라 말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알아도 하나님 나라 말을 못하기 때문에 대화가 안되서 얻지를 못해요. 하늘나라 말은 생각이 하늘나라 말입니다. 꿈이 하늘나라 말입니다. 믿음이 하늘나라 말입니다. 입술의 고백이 하늘나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는 생각을 바꾸고 꿈과 환상을 바꾸고 내 믿음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변화에 변화가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6절에 “사람이 야훼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시간을 갖고 마음을 정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사람들이 너무 바빠요. 밥도 바쁘게 먹고 일도 바쁘게 하고 잠도 바쁘게 자고 대화도 바쁘게 하고 죽기도 바쁘게 죽습니다. 좀 슬로우해야 돼요.
시편 123편 1절로 2절에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야훼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것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것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조금 기도하고 난 다음 아휴 너무 급한데 하나님이 안돌봐 주시니까 내가 하나님 앞서 해야지. 그러다가 버림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서 일을 해야지요.
다윗은 시편 40편 1절에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조금 기다렸다고 기다린 것 아닙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게리 토마스(Gary Thomas)는 초대교회에서는 ‘인내와 기다림’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명이 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기다리라고 명령 받은 것과 같은 의미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과 이콜(=)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는 움직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요사이는 전부 주인이 되어서 기다리지 않고 지 마음대로 행합니다. 그것이 큰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또다시 마음이 깨어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우리는 너무 하나님 늦게 대답한다. 너무 늦게 응답한다지만 하나님 계획이 다 계세요. 우리는 잠잠히 기다리며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의 사차원의 영성으로 우리 삶을 정비하고 하나님이 언제 찾아오실지라도 그것을 모셔드릴 준비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복하기 위하여
그 다음 또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복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계급이 낮은 사람이 계급 높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계급이 낮은 사람이 계급 높은 사람보다 앞서서 나가고 마음대로 행하면 계급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 혹은 앞서 가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기다리지 않고 나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가 탑을 쌓아 하늘 꼭대기에 닿게 하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탑을 세우고 흩어짐을 면하자. 하나님이 지상에 흩어져서라도 우리 그것을 면하자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괘씸이 여겨서 내려와 보시고 언어를 혼잡게 하매 그들은 바벨탑을 짓다가 못 짓고 만 것입니다.
기다리지 않았었어요. 노아 홍수 후에 그들이 나아갈 때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지구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흩어져 살아야 되겠는데 흩어져 살지 않고 님으로 생각하더니 영웅이 생겨나자 그를 중심으로 해서 나라를 세우고 탑을 지어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가게 하고 홍수가 다시와도 꿈적도 안하고 우리 사람 중심으로 살자. 그와 같은 계획을 세웠다가 망하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 웃시아 왕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웃시아 왕은 대단한 왕입니다. 외국과 싸워 이기고 나라를 부강케 한 나라로써 금, 은이 풍부하고 아주 부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에 교만함이 들어왔습니다. 아이 내가 임금 노릇만 할 것 무엇이냐 내가 제사장 노릇도 하지. 내가 임금 노릇도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재물 드리는 제사장 노릇도 다 내가 하지 뭐 다른 사람 시킬 것이 있느냐. 교만해졌습니다. 기다려서 하나님이 정하신 직분을 다해야지 하나님 원치 않는 직분을 자기가 행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상 내놓고 하나님께 향을 피워 드리는데 제사장이 놀래서 젊은 제사장들과 함께 들어와서 임금님을 붙잡아 끄집어냈습니다. 이것은 왕이 할 일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할 일입니다. 큰 일 납니다. 그러니까 웃시아가 돌아서서 화를 확 내니까 즉시로 이마에 문둥병이 생겼습니다. 나병이 생기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 못서요. 그 길로 그는 성전에서 나와서 평생 나병환자로써 별궁에 살고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고 물리치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가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4장 29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전도서 5장 2절에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낮아지고 잠잠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은 미국의 유명한 복음 가수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마리안 앤더슨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지요? 나는 들어봤는데 장로님은요? 들어보셨어요? 장로님이나 나같이 노털이나 들어봤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못 들어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찬양을 하면 상처받은 영혼들이 위로를 받고 많은 불신자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곤 합니다. 그녀가 오늘날 이처럼 은혜로운 복음 가수가 된 데에는 작은 일화가 있습니다.
마리안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녀의 노래 실력이 뛰어나서 몇 년 동안 개인 교습을 받은 후 뉴욕에 있는 홀에서 독창회를 했는데 독창회가 대단히 비극적인 평가를 받고 그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실의에 찬 마리안이 집에 들어오니깐 그녀의 어머니가 이렇게 위로 했습니다. “얘야,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있어야 된다. 네가 음악가로써 위대한 사람이 되기 전에 하나님 은혜부터 먼저 받아야 된다.” 그 어머니는 무식하지만 올바르게 판단했습니다.
주를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성령충만부터 먼저 받아야 되요. 사업을 성공하려고 하든지, 체육에 성공하려고 하든지, 정치에 성공하려고 하든지 그 무엇 전에 하나님 앞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부터 받으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자기 힘으로 살아야 되니까 안 돼지요.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것이지요. 이 어머니 말 한 마디에 그는 변화 되었어요. 그 후에 그는 정말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니까 일약에 미국과 세계를 감동시키는 가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복하기 위하여 잠잠히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힘을 믿고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잠잠히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절대주권적인 뜻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뜻을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복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복되게 만들어주는 근본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갈 때까지 잠잠하게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날뛰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 목사님은 어느 날 교인 중에 한 사람이 양조장을 크게 지었어요. 술 만드는 큰 공장을 지어서 그것을 하나님께 헌당하겠다고 그 많은 주변의 목사들을 부르고 장로들을 부르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불러서 납성식을 했습니다. 그 마지막 축도 시간에 디엘 무디 목사, 자기 교회 본교회 목사에게 축도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마다 양조장에 와서 축복을 했습니다. 훌륭한 양조장을 경영해서 돈을 많이 벌라고.. 그리고 무디 목사가 축도할 시간이 왔는데 무디 목사가 기도를 하기를 “하나님 이 양조장이 오늘 예배를 드리고 내일부터 문을 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양조장 문이 열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기가 막히지.. “이 문을 열면 엄청난 술이 생산되어 수많은 청소년들이 술을 마시고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또 수많은 어른들도 술을 마시고 취하여 제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오늘 밤 이 양조장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내일 아침 이 양조장이 문을 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축도를 하자 사람들은 예배 후 축하 파티를 하려다가 모두 당황하여 뿔뿔이 헤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잔치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습니다. 사람들마다 고개를 숙이고 에이 괜히 왔다. 그리고 떠났습니다. 그날 밤, 양조장 주인은 밤새 고민하느라 한잠도 못 잤습니다. 그는 새벽에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기다렸습니다. 양조장을 짓기 전에 기다리지 않고 지어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잘했다.
양조장을 열라고 하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감동이 그에게 물결치듯이 다가옵니다. 그는 양조장 문을 열지 말라. 양조장을 하지 마라.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튿날 그 건물을 무디 목사님에게 바쳤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십시오.
무디 목사님은 이 양조장은 무디 신학교가 되게 해서 수많은 교역자와 전도자를 배출시켰고 기독교 부흥에 큰 도움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세상 술을 만들 공장을 하늘나라 술공장으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기다릴 때 그런 큰 다른 점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 9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말씀 듣지 않고 앞서서 하면 큰 상처와 손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급하게 서둘면 안되는 것입니다.
4.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다음 또 왜 우리가 기다려야 되냐 하면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려면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사람은 끝까지 기다려요. 정말 안믿는 사람은 조금 기다리다가 집어치워 버려요. 아브라함이 85세에 아들 얻겠다고 약속하고 난 다음에 무려 15년 동안 기다려요. 95, 100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요. 철저히 믿었으니까. 그렇게 안 믿었으면 중도에 포기했을 것인데 그래서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3절로 15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이 약속했다고 당장 안 일어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래 참는 것을 하나님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무려 13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애굽에 국무총리가 될 것을 하나님이 꿈으로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종살이 13년에 잔뼈가 다 굵었습니다. 그 오랜 기다림 후에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기다린 것이 안타깝고 답답하겠습니까?
시편 105편 17절로 19절에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야훼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을 종살이와 죄수로 13년 동안 기다리게 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연단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타나는 반응은 여섯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첫째, 기피 또는 은둔형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도망치고 회피하려는 태도인 것입니다. 둘째, 절망 또는 자학형인 것입니다. 고난에 처할 때 스스로 절망하여 자살까지 쉽게 해 버리려고 합니다. 셋째는, 책임전가형 입니다. 언제나 잘못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넷째는, 원망 혹은 분노형인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남을 원망하고 마음에 분노가 쌓여 혈기를 부리는 태도인 것입니다.
다섯째는, 전투형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무턱대고 싸우려고 들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성숙형입니다. 고난에 처하면 원망하거나 절망하지도 않고 분노로 공격적이 되지도 않고 고난 중에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고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고난을 만나면 여러 가지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일 고난당했을 때 올바른 반응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나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이 고난을 내게 보낼 때는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니 하나님 뜻을 기다리자. 미리 나가서 하나님 뜻을 헝클어지게 하지 말고 기다리자.”
성 어거스틴은 “고통은 누구나 동일하게 당하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결과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로 온 시련이므로 하나님 뜻을 기다리려고 하는 사람은 차분하게 기다리며 고통을 받아들이고 극복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성급하게 내 힘으로 나가서 대적하다가 싸움을 일으키고 상처를 입고 무서운 파괴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면, 믿음의 사람으로 신앙의 모범을 보인 인물은 공통점이 모두 참고 기다림으로 승리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참된 믿음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면 어떤 상황에 이를지라도 하나님께 우리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나를 연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참고 기다리자. 그게 제일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삶의 모든 면에 기다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따라가는 데는 더욱더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 30장 18절 우리 다같이 한번 따라 읽으십시다. “야훼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야훼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타이밍을 맞추는 거에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려고 기다리시는 것이고 우리를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기다리시는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현대문명은 빠른 속도를 강조만 합니다. 사람들은 더 빠른 기차를 타자, 더 빠른 지하철을, 더 빠른 자동차 그런 것을 선호합니다. 인터넷도 하루가 다르게 연결 속도가 빨라져 속도가 조금이라도 느리면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답답하여 어쩔 줄을 모릅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병도 한 번의 주사나 약으로 신속히 낫기를 바라고, 돈벌이도 일확천금 하여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래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시대에 뒤진 것이 되어 현대인들은 도무지 고난을 참고 오래 기다려서 열매를 맺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워드 위트만(Howard Whitman)은 “인생은 기다리는 시간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전거를 탈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청소년들은 자신이 자동차를 몰 수 있는 면허를 얻을 때를 기다리고 의학도는 의사로서 면허 받을 때를 기다리고, 젊은 부부는 자기들의 새 집을 살 때를 기다리고 이와같은 기다림의 예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번에 안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는 반드시 기다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도 기다리는 기간이고 신앙 생활도 기도하며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데에는 더욱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신앙생활 하면서 여러분 마음에 맞지 않는 괴로운 일을 당할 때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다리는가 안기다리는가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 보혈을 주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귀하고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은 하나님이 아시고 여러분이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아시므로 하나님 뜻이 이루어주시옵소서.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도 몰라주고 나 혼자 망하는 줄로 탄식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알아보시는 것이옵니다.
우리를 기다리게 만드시므로 우리를 장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이 주신 꿈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복종하게 하시고
여러 가지 변화를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 기다림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조급하게 느끼지 말고 기다릴 줄 아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창대순복음교회 담임 사마리아 권성철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