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도십칠년을 돌아 보며
바다가 없는 내륙의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 있어 바다는 신기하고 마음을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바다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모르기에 단지 낭만처럼 보이고 수채화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부교역자의 사역을 도중에 마무리 하고 내려간 곳이 목포였습니다. 당시 서해안고속도로는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그런 도로였습니다. 한참을 달려도 차를 보기가 어려워서 잠이 오기도 하는 그런 도로였습니다.
목포에 도착하여 목포중앙교회에서 분립되어 나온 연동중앙교회 부교역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전에 여수성결교회에서 부교역자생활을 한 적이 있어서 전라도의 삶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목포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는 여수사람들의 사투리보다 더 굵고 강렬한 사투리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화도로 인도하셨습니다. 섬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도 가 본적 없고 그런 삶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지도솔섬에서 증도로 가는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 데 코와 목구멍을 자극하는 바닷내음은 결단을 요구하는 주님의 음성같았습니다. 주춤하는데 배가 와서 증도버지에서 내렸습니다. 선착장에 오니 화도교회성도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화도교회 차를 타고 화도로 들어갔습니다. 삭막한 섬의 풍광이 영화화면처럼 지나갔습니다. 얼핏 바닷가운데 난 길을 지나 버려진 땅같은 길을 지나 한참을 가니 교회가 보였습니다. 당시 화도는 포장이 거의 되어지지 않는 황무자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섬사람들과 살을 맞대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섬사람들의 거칠고 딱딱한 말투는 그곳이 복음의 최전선임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문준경전도사님의 순교지라고 해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종종 의료선이 와서 의료선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외딴섬마다 다니면서 진료를 하고 약을 나누어 주던 선교팀이었습니다.
화도를 처음 찾는 사람들은 시가 저절로 나오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그 만큼 낙도라는 말이 되었던 곳입니다. 화도는 증도와 바닷가운데 난 길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들면 완전히 섬이 됩니다. 의료사각지역이 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치유를 위한 기도가 필요한 지역입니다. 종종 헬기가 날라와서 환자를 목포로 이송하는 그런 곳입니다.
처음에는 강렬한 소금내음으로 섬에 사는 것이 무척힘들게 느껴졌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성도들을 돌아보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옥도 지신개에서 배를 타고 증도로 가다가 증도와 사옥도가 연결되어 배를 타는데서 해방되었습니다. 사옥도에서 배를 타고 증도 버지로 다닐 때는 배가 가득찰 만큼 사람들과 차들의 방문이 많았습니다. 당시 증도는 문준경전도사님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는 때여서 인산인해를 이룰만큼 많은 사람들이 증도를 찾았고 화도를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후 증도대교가 개통되고 화도도 외딴섬의 이미지를 벗어갔습니다. 도로가 포장되고 화도교회도 여러 번 수리를 하였습니다. 화도는 섬이라 날이 따뜻해지면 지네들의 활동이 아주 극심합니다. 잠을 자다가 보면 지네들이 기어다니고 때로는 얼굴에 붙어 있기도 합니다. 지네에 물리면 벼락을 맞은 듯 합니다.
화도에서의 목회가 십여년이 넘어 가면서 이제는 화도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드려졌습니다. 화도는 문준경전도사님의 영향으로 대부분이 교회를 다니거나 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증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유입되고 불신자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따스함으로 다가가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쉼을 위해 섬을 찾아 온 사람들은 반갑게 맞아들여도 복음을 전하면 외면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방문을 합니다.
화도는 입구에 대규모 새우양식장이 있습니다. 새우양식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사업입니다. 그러기에 새우양식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한번 병이 오면 그해 새우농사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도지역은 마늘과 양파농사를 많이 합니다. 마늘을 거두는 때는 섬이 분주해 집니다. 그리고 화도가 제일 바빠지는 때는 겨울입니다. 화도는 물살이 빨라서 김양식에 최적지입니다. 다른 지역이 김양식에 어려움을 당해도 화도성도들의 김양식은 그럭저럭 되었습니다. 이 김양식은 새우양식과 같이 위험성이 강합니다. 한번 잘되면 대박이 나지만 어려움을 만나면 들어간 비용조차 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포자를 넣거나 김을 거둘 때 작업장을 방문하는 것이 목회자의 중요일과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십칠년이 지나갔습니다. 화도교회의 역사 중 절반을 차지하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 십칠년 동안 화도는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지독하게 어렵게 살던 성도들이 살림이 나아져서 펜션을 하고 살림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어떤 성도의 아들은 인터넷게임을 통해 국가대표로 선발되고 속한 팀이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화도의 인물이자 신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화도교회 십칠년의 사역이 섬사람들을 이해하며 그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는 사역이었습니다. 섬 사역의 어려움도 많습니다. 새로 유입되는 인구가 적기 때문에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조정자의 역할을 목회자가 해야 합니다. 돌아보면 배를 타고 가야만 화도에 갔었던 때가 어쩌면 제일 그립고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배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친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다리가 개통되면서 그런 교제의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고 멀게 만들었습니다. 다리의 개통으로 섬의 도시화가 이루어 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섬에 다리가 놓여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화도에서 십칠년의 사역을 마치고 화도를 떠났습니다. 화도노두 공사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처럼 화도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 가려고 변신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옛날의 섬 고유의 삶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도시의 삶이 유입되고 있습니다. 화도가 문준경전도사님의 순교신앙을 이어받은 지역으로서 말세지말의 한국교회에게 본이 되는 신앙의 섬이 되길 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