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탐방 –수필가 박희선
여성들의 현실인식과 정체성 회복을 모색한 작가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박희선 하면 부산에서 80년대 수필로 등단한 몇 안 되는 분 중에 한 분이다. 수필가로 등단하고, 30여 년을 사교육 현장에 몰입했고, 지금껏 수필가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문학을 지향하는 그의 첫 모습은 수필 <할 말이 없다>에 나타난다. 그녀는 중학교 3학년 때 소설을 습작하고 순정소설을 멋지게 써서 그 상금으로 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리겠다고 하였듯이 일찍부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그 후, 1974년 영남여성백일장에서 입선한 소회를 “백일장 말만 나오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고 회상할 만큼 문학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 본인은 “결국 해놓은 것은 이것뿐인데 세월이 이만큼 흘렀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박희선은 우리에게 부산수필문학을 바로 세우고, 특히 여성수필문학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한 분으로 기억된다. 2013년 12월에 학원을 접고 2014년 2월부터 문화원 등에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지도하고 있다. ‘청출어람’을 꿈꾸며 부산수필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펼쳐 나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박희선은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자연 속에 파묻혀 지냈다. 그녀는 어린 날 만졌던 봄흙이 참으로 부드러웠다고 기억하는 작가다. 돌 틈에 겨우 얹힌 흙도 분가루였다. 담 옆 도톰하게 솟은 땅속 지렁이 길은 얼마나 신비로웠는지, 그 속에 새끼가 있을 것 같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회고하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어릴 때부터 그녀는 생태친화적인 마인드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여름날엔 개울에서 찰방대며 놀았고, 맑은 물이 흐르던 도랑에서 손수건을 빨아 머리에 이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 가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말이 없고 철든 아이가 되어 책읽기에 몰입했다. 그것만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깊이 있는 글쓰기가 시작되었으리라. 동아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부경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학을 전공해서 국제지역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술, 막걸리를 무지 사랑한다. 막걸리 한 잔에 수필 이야기면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분이다. 어릴 때 슈바이처 같은 사람되기, 중학교 이후는 작가되기와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지만 어릴 때의 꿈은 꿈으로 남고, 결국 수필가가 되었다.
‘괜찮은 글쟁이를 만나고 또 만나며 신나게 잘 살고 있다’는 자평이 눈길을 끈다. 수필문인문인협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바 크고, 직접 부산여성수필문인협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부산수필문인협회 회장을 맡아 민주적이고도 공평무사한 운영으로 많은 회원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1974년 영남여성백일장에 입선하고, 1988년 <시와 의식>지에 수필로 등단한 후 첫 수필집『흙에 묻어온 휘파람소리』에 이어 『고독으로 가는 길은 어렵다』 『그는 섬이 되어 있었다』 『꽃이 말했다』 『환희로 살다』 『아지트와 막걸리』등 여섯 권의 수필집를 발간하고, 2018년 등단 30년을 기념하는 『박희선 수필선집』을 준비하고 있다. 박희선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의 표정은 역경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인본적 태도를 지향하면서 더불어 사는 자세를 가져왔다. 자신의 대표작 <꽃이 말했다>에서 박희선은 꽃과 사람에게 “작달비를 견뎌낼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꽃과 작달비로 삶과 문학을 말하려는 이유는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라는 명제와 “백일 붉은 꽃은 어디에도 없다.” 는 잠언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박희선의 수필이 표방하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작가로서 박희선은 일상을 기록하기보다는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녀는 30여 년 동안 학원 원장을 하면서, 그 동안 학파라치가 설치는 사교육 현장에서 많은 것을 겪었다. 세상의 교양을 다 갖춘 여학생이 찾아와 함께 올 친구의 이름을 대며 학원비와 시간을 조절했다. 학원비야 교육청에 등록한 대로 문제가 없었지만 시간에 문제가 생겨 웅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수업을 다 마치고 오면 아무래도 늦으니 늦게라도 수업을 듣게 해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긴 시간도 아닌 30분 연장해 학원에서 공부를 하겠다는데 무슨 대수랴. 흔쾌히 허락했다가 발목을 잡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도 오겠다는 학생은 연락이 되지 않고 난데없이 교육청 직원이 경고장을 들고 왔다. 경고조치로 끝나긴 했지만 오랫동안 그 여학생의 순진한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는 색안경을 끼고 학생들을 살피며 규칙의 잣대를 들이대느라 무척 애를 썼던 그녀다. 그럴 때마다 그 동안 키웠던 순정이 한 묶음씩 잘려 나갔다고 하니, 얼마나 교육현장에서 고생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박희선의 문학적 좌표는 무엇일가? 먼저 시골에서 태어난 환경이다. 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그녀에게 주었고, 동아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이력은 감동의 깊이를 타종하기에 충분한 필력을 가지게 하였다. 불심을 실천하려는 영적 좌표는 파편화된 사람들의 정서를 치유해줄 무한한 포용성을 지니게 하였다. 박희선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선생님들을 존경하였고, 학생을 책임지며 교육 자체를 사랑하였다. 작가의 어떤 차원을 살펴보아도 경영자의 자만심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녀는 그들로부터 배운다. ‘진주 안’과 같은 진실한 세상을 꿈꾸는 작가다. 이 세상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그녀의 포용은 수필 속에서 탐미적인 묘사나 서정적 기교보다는 감성을 재구성하는 적절한 요소로 간주된다. 박희선은 문단 활동과 봉사활동에도 매우 헌신적이다. 작품에서는 문학과 죽네 사네 하더라도 문단활동과 창작에 균형 있게 시간과 정열을 바치는 문인은 찾기 힘들다.
1988년에 등단한 후 20년 동안 수필집을 여섯 권이나 연이어 상재한 업적만으로도 그녀의 수필에 대한 애정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문학의 길을 진지하게 나아가고 있다. 박희선의 문학적 입문을 면밀히 검토하면 탈출놀이라는 무의식이 발견된다. 그 무의식의 원천은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없어 가족이 보호해 주어야 했던 피보호자였다. 아버지가 출판 사업에 끝내 실패하면서 한글사전 수백 권이 집으로 운반되었다. 작가는 그 사전을 자신의 방에 빼곡하게 쌓아둔다. 아버지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얇은 종이를 만지는 동안 단어 하나하나는 직감의 대상으로 체화되어졌다. 그녀의 언어학습이 소녀기의 감수성에 힘입어 문학적 자산으로 변용된 것이다. 아버지가 남긴 사전은 수필집 『꽃이 말했다』를 잉태시킨 씨앗으로 작용한다. 자기를 응시하는, 차가운 진실을 사랑하는 작가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어찌 작품뿐이겠는가.
그렇다면, 박희선의 문학적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점에서 <꽃을 만나다>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늘도 땅도 더 깊어진다. 마음도 깊어지는 것을 보면 철이 든다”는 자연과의 교감은 『시와 의식』에서 등단한 후 성숙된 작가의식을 대변하는 담론인 셈이다.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은 소설가의 재능이라기보다는 수필가의 자격에 더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수필을 사랑한다. 아름다운 대지에 꽃을 불러오는 작가다. 문학은 구원활동이다. 그 사실을 깊게 절감하기 때문에 수필을 통하여 이를 재확인하려 노력한다. 이렇게 연결해보면 박희선의 문학적 자각은 성찰을 한 축으로 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수필가들과 동심원을 만들어 간다. 한국문인협회, (사)국제펜한국본부 회원, 부산문인협회 부회장, 제4대 부산수필문인협회, 영남여성문학회, 부산여류문인협회, 부산여성수필문인협회, 부산금정구문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수필부산문학회 회장, 부산불교문인협회 부회장, 부산시 문화예술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여성문학상, 실상문학상, 부산문학상 본상, 부산수필문인협회 제6회 올해의 작품상을 받았다. 금정문화원 설립이사, 부원장을 역임하고, 요산문학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의 수필 강사 이력은 수필이 희망만큼 간절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온도가 느껴지는 언어로 보여지는 세상은 더 아름답다. 슬프고 안타깝고 병들어 있는 세상도 적당한 온도의 언어를 입고 있으면 그런 세상의 의미부여 속에 면책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지금껏 문학인은 언어의 주도자라는 의미에서 이 세상과는 한 발 물러서 세상을 쥐락펴락 했는지 모른다.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과거의 내 세상도 박희선의 잣대로 반추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이쯤에서 내가 만난 박희선의 30년을 떠올려본다. 관절 속의 물기를 걷어낼 구원의 작가로서 정말 가슴 한쪽의 짜릿한 모성을 느끼게 한다. 누구나 은근히 그녀의 모성원리에 반한다. 몇 권 그녀의 수필집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그녀는 사람들을 새롭게 결속시키는 힘을 가진 작가라고 하겠다. 그녀를 다른 한마디로 평가해달라고 하면, 그녀의 심기 속에는 전류처럼 따스한 정이 흐른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저녁 날 금강원 올라가는 입구에 즐비한 막걸리집에서 파전을 안주로 술이나 한 잔 하고 싶은 작가, 박희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