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7일 화요시 “보리밭”
보리밭
박경효
끝없이 푸르게 펼처진
보리밭
새벽이 오면
보리는 파릇한 눈을 뜨고
밤새 머금은 이슬과 향기를
고스란히 품은 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네요
은빛 이슬은
보리 이삭마다 알알이 맺히고,
작은 생명은 스스로 몸을 불려
빽빽한 들판을 가득 채우지요
무더운 여름을 견뎌내면
보리는 초록빛 옷을 벗고
황금빛 물결로 출렁이네요
알찬 이삭이 통통해질수록
대지의 숨결도 더욱 향기로워지고
한 톨 한 톨은
우리의 밥이 될 준비를 하지요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지어주시던 보리밥은
구수한 김을 피워 올리며
온 집안에 따스한 향기를 번지게 했지요
이제 보리밭을 바라보면
한 톨의 보리에도
수많은 계절과 기다림을 묵묵히 견디어 낸 삶이 있음을,
대지와 사람, 자연이 빚어낸 고마움이 있음을,
나 또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며
언제나 풍성히 익어가길 바랍니다
황금빛 보리 이삭처럼
보리밭
김하일
사노라면 가끔은,
돌아가는 삶의 길목에서
허기진 마음 달래려
출렁이는 보리 이삭 물결이
문득 그리워진다
풋보리 서리하던 어린 시절
보리밭에 무성하던 깜부기는
깔깔거리며 숨바꼭질하던
코흘리개 개구쟁이들의 얼굴에
숯검정 웃음을 그려 주었지
아무리 둘러보아도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저녁놀조차 사라진 텅 빈 하늘에
노오란 보리 이삭만
말없이 출렁인다
2026.7.2
보리밭
조현주
보리밭이 사라졌다
강에 가려면
자갈길을 밟고, 얕은 도랑 하나 훌쩍 뛰어넘어, 토란밭을 지나, 보리밭 사잇길을 따라, 큰 바위가 보이는 곳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강물은 맑은 소리를 내며
햇살과 함께 놀고 있었고,
싱싱한 보리잎은 강바람에 몸을 맡긴 채
푸른 물결을 이루곤 했는데
큰 바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계단 여섯 층이 놓였고
게다가
보리밭이 있던 자리에는
붉은 껍질의 적송이
꼿꼿하게 줄지어 서 있다니
강가에서
가곡을 연습하던 큰집 손자는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었고
,
연애편지를 대신 써 달라던
청년 성악가의 꿈도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보리밭〉을 부르던 청년도,
그 노래를 수줍게 듣던 소녀도
세월 속으로 멀어졌다.
보리밭이 사라지듯
하천을 살린다며 시작한 정비는
강의 숨결을 바꾸었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품어 온
오랜 풍경마저 지워 버렸다.
내 마음에는 아직도
강바람 따라 일렁이는
푸른 보리 물결이 살아 있는데
보리밭이 사라졌다
영희네 쌈밥
한명옥
늘보리, 겉보리, 찰보리
이름도 다정한 보리 식구들
내가 살던 고향은
추운 곳이라
황금빛 보리밭보다
벼가 더 익숙했다
요즘은
늘보리 한 줌을
현미와 함께 물에 불려
천천히 밥을 짓는다.
입안에서 또르르 구르는
보리 한 알을
혀끝으로 어금니에 살며시 옮겨
오래오래 씹는다.
씹을수록 퍼지는 구수함은
몸을 위한 밥이면서
마음을 다독이는
느린 위로가 된다.
수유리 4·19묘지 입구
영희네 쌈밥집.
소쿠리 가득 담긴 보리밥과
싱싱한 쌈 채소,
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을 앞에 두면
오랜 친구들의 웃음도
함께 차려진다.
든든히 한 끼를 비우고
4·19묘지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면
푸른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마음까지 가볍게 씻어 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마음 속 소쿠리에는
따뜻한 보리밥처럼
사람 냄새 나는 하루가
맴맴 거린다
보리밭
유병택
한겨울
매서운 칼바람을 품어 낸 보리에는
오뉴월 삼복더위를 견디게 하는
냉기가 숨어 있고
삼복더위
폭염을 온몸으로 견디어 낸 벼이삭에는
한겨울 혹독한 추위를 버티게 하는
열기가 스며 있는 것처럼
자연은 늘
부족한 것을 채워 주며
계절을 다음 계절 속에 숨겨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혹독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았고,
이글거리는 햇살 아래서도
삶을 이어 올 수 있었다.
나도
그 이치를 따라
여름에는 겨울을 품은 보리밥을 먹고,
겨울에는 한여름의 햇살을 머금은 쌀밥을 먹으며
자연의 순리 속에서 살아가고 싶었는데
한때는 가난한 이들의 양식이던 보리밥이
이제는 건강을 담은 귀한 밥상이 되었고,
쌀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될 줄이야
생각해 보면
값이 달라진 것은 보리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었는지도 모른다
보리는 예나 지금이나
묵묵히 바람을 견디며
한 톨의 생명을 길러 왔을 뿐
오늘도 나는
보리 한 술을 입에 넣으며
값보다 귀한 것은
자연의 이치와
그 속에서 살아온 삶의 지혜임을
조용히 되새긴다.
보리밭
김신애
파릇파릇
온 들녘이 푸른 물감으로 물들던 날.
바람이 스치면
노오란 보리 이삭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맑은 웃음소리가
지금도 내 가슴에서 출렁인다
친구들과 보릿대를 꺾어
삐이익, 삐삑
서툰 피리를 불고,
풋보리 민댕이를 구워
손바닥으로 비벼 먹으면
입술은 숯빛으로 물들고,
볼에는 검댕이 꽃이 피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배를 움켜쥐고 웃던
그날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저녁이면 굴뚝마다 피어오르던
보리밥의 구수한 냄새는
배고픔마저 사랑으로 채워 주던
어머니의 품이었다.
지게를 벗 삼아
평생 등을 펴지 못하시고
거북등처럼 딱딱하고 갈라진 손으로
묵묵히 보리밭을 일구시던
아버지의 땀방울이 애달프다
세월은 흘러
푸르던 보리밭도,
함께 뛰놀던 친구들도
모두 추억 속으로 걸어갔지만
바람에 부딪치던
보리 이삭의 속삭임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아직도 내 마음 한편에서
푸르게 익어 간다.
손바닥으로 비벼 먹던
민댕이의 달큰한 맛,
숯빛 입술과 검댕이 꽃,
보릿대 피리 소리,
어머니의 밥 냄새,
아버지의 땀 냄새….
오늘도 마음속 보리밭에서는
노오란 이삭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게 살아갈 힘을 건네고 있다.
2026.7.4.
보리밭
김의연
장다리꽃 피어나는 들녘에
노랑나비 흰나비
꽃잎 사이를 날아오르고
냇가에 물고기들
아이들 피리 소리에 맞추어
은빛 물결 그리며 춤추면
옥수수 감자는
햇살을 머금고 영글어 가고,
청보리밭은 물결을 이루며
두둑 따라, 고랑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바람 한 줄기 지나갈 때마다
들판 가득 초록 노래를 부른
푸른 이삭들은
뜨거운 여름 햇볕을 견딘 끝에
마침내 황금빛으로 익어 간다.
그 빛을 바라보면
배고픈 자식들 입에
따뜻한 밥 한술 먹이려
긴 계절을 견디셨던
어머니의 기다림이 떠오른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한 이삭 한 이삭에 스며들어
마침내 우리 식탁의
따뜻한 밥이 되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오늘도 금빛 보리 이삭은
바람 따라 고개를 숙이며
삶은 기다림 끝에 익는다고
조용히 일러 준다.
청보리 밭
이승열
"칠선아 , 경재야 생각나니"?
우리 희갑을 맞던
오월의 어느 날,
우리는 함께 떠났었지
고창 청보리밭으로
버스에서 내리자
눈앞에는 초록 파도가 밀려왔고,
바람은 연둣빛 보리 이삭을 흔들며
그 넓은 들판은 순식간에
우리 들 마음까지 푸르게 물들였지
보리밭 사잇길로 들어서니
"환영합니다"
커다란 글씨가 웃고 있었고,
분홍빛 바람개비들은
살랑살랑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운 인사를 건넸지
우리는 어느새
열다섯 살 소녀가 되어
깔깔 웃고,
보리 수염을 쓰다듬으며
사진을 찍고 또 찍고
한때는 가난을 견디게 하던
보리밥 한 그릇이
이제는 추억을 담아내는
따뜻한 밥상이 되어
그날 깡보리밥집에서
함께 비벼 먹던
구수하고 맛깔스러운 한 그릇의 맛은
웃음과 정을 버무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었지
“이곳으로 오길 참 잘했어.”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그 한마디에
오랜 우정이
푸른 보리처럼 출렁이던 그 날
“경재야, 칠선아.”
언젠가 우리
다시 그 길을 걸어 보자.
오늘도 내 마음속 청보리밭에서는
좋은 친구와 함께한 시간이
푸른 이삭들이 바람 따라 일렁이는데
보리밭 연가
김의연
따뜻한 여름날
까만 밤하늘에는
별빛이 소리 없이 내려 앉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휘파람,
임을 부르는 노래 한 자락이
고요한 들녘을 적신다
청보리밭 한두둑
옆에 끼고 걸어가면
발끝마다 바람이 머물고,
말방울 소리는
달빛을 흔들며 멀리 번져 간다
“나, 너 사랑해.”
“너, 나 좋아해”
수줍은 고백 하나에도
보리 이삭은 살랑이며 웃고,
들판에는 사랑이
꽃처럼 피어난다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고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잠이 들 무렵,
둥근 달은
두 사람의 그림자를
은빛으로 감싸 안는다.
오늘도 보리밭은
별빛과 달빛을 품은 채
가장 아름다운 연가를
가만히 불러 주고 있다.
보리밭
최연석
알토란 같은 이삭을
탱글탱글 품어 안고,
황금빛 날개를 펼친 채
온몸을 바람결에 맡긴 채
풋내를 거두고
여름의 향기를 머금으며
계절의 문턱에 서 있는 보리밭,
바람이 스쳐 갈 때마다
이삭들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은은한 노래를 들려준다
외로우면
휘파람 한 자락 불어 보라고,
그리우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고운 노랫가락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지만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저녁노을만
빈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어도
오늘도 보리밭은
황금빛 이삭을 흔들며
외로운 마음 하나쯤은
다정히 품어 주는
그리움의 축제장이 된다.
보리밭
안정선
산등성이 넘어
들판 가득 펼쳐진
고향의 향기 품은
보리밭
추운 날이면
선생님 손을 따라
친구들과 꾹꾹 밟으며 뛰놀던
겨울 들녘의 웃음이
아직도 발끝에 남아 있는
보리밭
엄마 따라 걷던 길.
바람이 스치면
바스락바스락
푸른 물결을 일으키며
말없이 뒤따라오던.
보리밭
한 이삭 한 이삭에는
어머니의 땀방울이 스며있었고,
한 끼의 밥보다 더 따뜻한
삶의 온기가 익어 가던
보리밭
눈 감으면
물밀 듯 밀려오는
엄마를 닮은
소박한 미소
그 미소를 품고 서 있던
보리밭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오늘도 푸른 바람이 되어
어머니처럼 나를 다독여 준다
첫댓글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유선생님 덕분에 잘 봤습니다.^^
박동숙선생님께선 우째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시는 듯합니다.^^
생각하는 의도를 잘 읽어내시곤 첨삭해 주셔서 항상 놀라워요~~ 감사합니다^^
글 올려주신 유병택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