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책은 읽었다. 칼 야스퍼스의 ‘실존주의 존재론과 윤리’ 같은 책이다. 야스퍼스의 존재론은 그가 기독교 사회에 살았지만, 다분히 불교적이다. ‘모든 경험적 존재는 부단한 전변무상(轉變無常) 속에 있다. 영구불변한 구조(構造)는 아무 데도 없다. 만물은 결국 파괴된다. 인간이라고 해서 이 일반적 법칙의 예외는 아니다. 인간 속에 있는 모든 건 다 일시적이다. 일정한 본질,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야스퍼스는 불교에서 인간과 부처의 불성(佛性)을 논한 것처럼, 종교와 무신론(無神論) 양자 가운데 선택(選擇)을 말한듯 싶었다.
싸르트르는 <현상학적 존재론에 관한 논문>에서 ‘우리의 세계는 철두철미 우연(偶然)이다. 이 세계는 무슨 존재이유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일체가 부조리다. 이것이 ‘일체의 존재를 정말 지배하는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실존적 구조를 ’인간은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선택하는 것에 의해서 자기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걸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선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대학 들어가서 첫학기에 서양철학 개론 겨우 몇 페이지 배우고 입대했다. 사실 나에겐 야스퍼스나 싸르트르가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무반 불침번 서면서, 까만 헝겊으로 반쯤 소등한 불빛 아래 칼빈총 어깨에 메고 책 읽었다.
9주 교육 끝나는 밤 행사 하나 치륐다. 등치 큰 사람 몇 모아 해병대 위탁교육대 막사 기습했다. 거기 하사관 두 명이 해병대는 임진강에서 영하 20도 얼음물에도 들어간다며, 우리 피교육생을 빤쓰 바람으로 파도가 가슴까지 밀려오는 바다물에 쳐넣었다. 그들을 침상에 엎어놓고 침대마후라로 개구리처럼 두 다리 쭉 뻗게 만들어, 육군 땅개 맛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튿 날 쓰리쿼터에 몸 싣고 항만사령부 229 수자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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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수송자동차 대대
제3항만사령부 229 수자대는 이름만 보면 무슨 수사대처럼 들리지만, 실은 제부지구 운전병들이 죽었다고 복창하는 곳이다. 우리 교육대선 5명 배치되었는데, 229 란 말 듣자, 한 명 제외하고 모두 완전히 겁먹은 토끼가 되었다.
항만사령부에 가서 신고하자, 사령부 인사계는 쓰리커타 하나 배정해 우릴 문현동 고개 넘어 UN묘지 옆 229대대로 보냈다. 따불백 메고 대대 위병소 통과하면서 보니, 첫눈에 아하 여기가 이래서 부산에서 ‘지옥대대’로 불리는구나 싶다. 4개 중대 2백여대 GMC 시다마리가 반질반질하게 광이 나도록 세차되어있다. 이럴려면 졸병들이 한겨울에 바께스에 물 퍼담고 GMC 밑에 들어가 일일이 손세차해야 한다. 얼어붙은 손가락이 눈에 선하다. 차간 간격도 옆차와 주먹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이다. 이렇게 자로 잰 듯 일사분란하게 커다란 GMC를 빠쿠기어로 정밀 주차하는 곳은 부산에서 여기 밖에 없다. 군기사 운전교육대는 여기 비하면 천국이다. 춥다고 물세차 시키지 않았고 바퀴 호루 먼지만 헝겊으로 대충 털었다.
차가 많아 부대 내에 거대한 정비공장과 유류창고도 있다. 생전 보지못한 10Ton 트레일러도 보인다. 운전병과 정비공이 4백명 넘는다. 229대대는 군함이 3부두에 싣고온 군수물자를 기지창에 날라주는 부대다. 302대대는 부두에서 크레인과 지게차로 하역을 전문으로하는 대대다.
여기서 경남고 나온 동명이는 부산 누구와 연락이 되었는지 저 혼자 카츄샤로 가버렸다. 나만 800중대에 떨어졌다.
저녁에 작전 나갔던 고참들이 돌아왔는데, 수송은 사고자가 많아 대개 상병 제대한다더니 과연 병장 보기 힘들다.
‘아이고오 귀여운 것. 신병 집합! 요것들아 부르면 얼릉 와야제? 열중쉬어! 차려! 열중쉬어! 차례! 열차 열차!’ 열중쉬어 차렷을 줄여 ‘열차’로 부르고, ‘너 관등성명. 너 관등성명.’ 손가락으로 배를 쿡쿡 찌른다. ‘지금부터 성냥까치로 16개 동작 우로어깨총 실시한다. 실시!’ 성냥까치로 우로어깨 좌로어깨총 시키기도 한다. 강아지 데리고온듯 좋아 죽는다.
‘이 새끼들! 주차장에 니네 차만 주차하고 내무반에 먼저 기어들어와?’
이때 으르릉 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면서 들어오는 사람 있다. 사고자다. 그들은 800중대 내무반 인원 80명 중 열외로 치는 서너명 이다. 전방에서 운전하다 차를 굴러 남한산성에서 몇 년 벽돌 굽고 온 사람이다. 그들은 병장이나 하사 계급장 제맘대로 달고 있지만, 실은 이등병이다.
‘신병들 왔다꼬? 고향이 워디여? 열외 시켜줄라카는디 전라도 사람 없나? 군번이 뭐야? 5100? 한심하다. 하이고오 고것도 군번이가?
당시 우리 창원군번은 5100. 논산군번은 1123 작대기 두 개, 소위 와리바시 군번이다. 제대병장이 1087, 군번 가운데 동그래미가 하나 들어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신병 갖고 노는데, 오야붕 김대지 병장이 들어왔다. 김대지는 대대 전체 사고자 중 왕초다. 체격도 탄탄하고 대담한 커다란 쌍가풀진 눈이 위협적이다. 남한산성 감방 출신으로, 부산 15P에선 총감방장도 했다. 총감방장은 감방 가본 사람은 안다. 빠삐용 같은 영화를 봐도 알 수 있지만, 감방 내 폭력계의 보스요,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하는 자다. 십년 넘게 감방에서 썩다가 나이 설흔 여섯 넘기고 나온 그를 부산 바닥 사고자 치고 모르는 사람 없다. 그는 내무반에 개인 당번병도 있다. 발 씻을 물 대령하고, 세탁할 양말 걷어간다. 식사 하셨느냐 묻는 건, 당번병이 취사반 가서 800중대 특식 달라면 김대지 특식 준비했다가 주기 때문이다.
그가 매트리스 위에 눕더니, ‘신병 왔는데, 오늘은 일찍 소등하고 재워!’ 한마디 하자, 불침번이 출입구 양쪽 제외한 내무반 전등 전부 소등해버린다. 첫인상 제법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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