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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말씀/ 요한복음 4:1-26 요절/ 요한복음 4:14 | 2024. 6. 29 | |
주제 1 강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는 살면서 많은 만남을 가집니다. 어떤 만남은 설레며 기대를 갖게 하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떤 만남은 피하고 싶은 만남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개회 말씀을 듣고 인생 그래프를 같이 나누며 은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 나옵니다. 이 만남으로 여인은 목마름을 해결 받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만나 주시고 선물을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는 은혜가 풍성히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는데 세례 요한보다 많아졌습니다. 이에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피하고자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갈릴리로 가는데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여 가면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자 두 배나 되는 먼 길을 돌아갔습니다. 혼혈이 되어 순수 혈통을 잃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로 간다는 것을 들은 베드로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 날씨도 더운데 지중해를 거쳐 갈 때 해변에서 DMT를 열어 수영도 하고 말씀도 듣는 것이 어떠신가요?” 이에 질세라 요한은 “예수님, 지중해보다는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 지역으로 가면서 가나안 정복전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그 동네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뜨거운 태양 빛 아래 걷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중동 사막에서 우물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마실 물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 먹일 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물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야곱과 라헬, 모세와 십보라도 모두 우물가에서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삼국지의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 번이나 그의 초가집에 찾아간 일화는 유명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더 공을 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한 아기로 낮아져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찾지 않는 사마리아 땅을 뜨거운 태양 아래 걸어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겸손과 간절함으로 이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와 만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때가 여섯시였는데 우리나라 시간으로 낮 12시였습니다. 중동에서는 너무 더운 때를 피하여 아침이나 저녁에 물을 길으러 온다고 합니다. 만남의 장소였던 우물에 모여 남편 이야기, 자녀 이야기, 어제 산 원피스 이야기 등을 하며 교제를 갖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아무도 오지 않는 낮 12시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사마리아 연인에게 사연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바뀌었고 현재는 여섯 번째 남성과 살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때에 온 것입니다. 여인은 오늘도 뜨거운 태양 빛을 맞으며 힘들게 우물로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여인은 이런 삶을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생각할 때 한숨이 나왔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우물곁에 앉아 있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모세 목자님은 맨발 걷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맨발 걷기의 유익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술술 나옵니다. 우리는 자신의 관심사에는 귀가 쫑긋해지고 마음이 열리고 대화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 여인의 목마름을 아시고 물과 관련하여 대화를 여셨습니다. “물을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여인은 예수님의 물을 좀 달라는 부탁에 당황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말도 섞지 않고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외간 남자가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에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며 경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경계하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를 줄 수 있음을 이야기 하시며 대화를 이어 가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실 수 있다는 이야기에 관심이 갔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생수를 주지 못하는 예수님과는 다르게 조상 야곱은 이 우물을 주어 후손들과 짐승들이 다 마셨다며 야곱을 칭송하였습니다.
여인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예수님이 주실 수 있다는 생수를 마시는 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생수는 마시는 물이 아닌 살아있는 물 곧 영생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물이었습니다. 오해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생수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3절에서 이 물은 야곱의 우물물을 말합니다. 우리 몸의 70%가 물로 이루어졌기에 계속하여 물을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물을 마심으로 갈증을 해결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목이 마릅니다. 더 나아가 이 물은 세상의 것들을 의미합니다. 저는 아들 지성이가 등에 올라가 발로 안마해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안마해 주면 뭉쳤던 근육이 풀릴 때 ‘아이고 시원하다’ 말하곤 합니다. 2~3분 안마 하다가 내려가면 아쉽습니다. 다음날이면 또 받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맛있는 밥이나 피자나 소고기를 배부르게 먹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배가 고프고 먹고 싶습니다.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서울의 봄’, ‘파묘’와 같은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지만 새로운 것이 나오면 또 보고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재미있게 보기도 하고 게임이나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워라벨을 추구하며, 여행으로 세상의 눈을 넓히기도 합니다. 돈, 사랑, 성공, 명예, 사람들의 인정과 같은 것들을 얻으므로 행복을 얻고자 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우리에게 생활의 윤택함을 주기도 하며, 건강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의 지식을 넓혀 주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우물물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줄지라도 아무리 많이 가졌을지라도 우리에게 참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마시고 소유할 때 잠깐 기쁘고 행복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열심히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부족함을 느끼고 허전함을 느낍니다.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낍니다. 거기에는 참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우물물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인공지능 챗봇인 챗GTP로 빠르게 답변을 받고 원하는 ppt를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숏폼 컨텐츠와 유튜브를 보면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에 자신의 목마름의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마름의 문제를 내가 남들보다 덜 가졌고 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마름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많이 못 가져서도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영생을 누리며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영생을 잃고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고 참 만족과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잃어버린 인간은 세상의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느끼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는 물은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물이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에서는 이런 물이 없습니다. 이 물은 세상의 물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영생이요 성령이며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 밖에서 물을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내 안에 영생이 존재하며, 성령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계속하여 물을 공급받으므로 언제나 푸르릅니다.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이처럼 영생과 성령이 내 안에 항상 거하므로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물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의 원인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직후 구원자를 허락하시겠다고 말입니다. 약속하신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하게 됩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의미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심으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내 안에 흐를 때 우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임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만족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므로 참 만족과 생명을 누리게 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과 성령을 선물 받아 목마름을 근본적으로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죄가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의 샘물을 막습니다. 또 세상의 것이 좋아 보여 세상의 물을 마시고 구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다시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신앙생활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율법주의와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버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날마다 마셔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한 말씀을 붙들고 체험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삶과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심으로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생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인은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여인은 그런 물을 나아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목마름의 문제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 발견은 중요합니다. 자기 발견을 해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현재 어느 것에 목말라 있는 삶을 사는지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인의 목마름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식고 단점들이 보였습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았습니다. 새로운 사랑을 하고 남편을 바꾸면 삶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환경과 조건을 바꾸면 삶이 변화되고 갈증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선물 받을 때 해결됩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시자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현재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것 같았습니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이 상황을 넘어가고자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다그치지 않으시고 네 말이 참되다 하시며 여인을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여인은 자신의 지난 과거를 모두 알고 계신 예수님이 예사 분이 아닌 선지자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긴 여인은 평소 궁금하게 여겼던 예배 장소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로부터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곳에서 예배해야 참되게 예배하는 것입니까?” 여인은 보기에는 부도덕하며 막 사는 것처럼 보여도 예배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질문에 명쾌하게 답해주십니다.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바르게 드리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 주셨습니다. 영은 성령을 말하며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예배,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디ㅏ. 그렇기에 제물과 인간적인 열심이 아닌 성령님이 인도하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며 자신이 여인이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로써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심령에 영생과 성령이 임하여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남으로 감격과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제가 처음 수양회를 참석하여 은혜 받은 말씀입니다. 설곡산 수양관은 좋은 시설과 환경은 아니였지만 그 수양회는 저의 최고의 수양회로 기억됩니다. 저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땅끝 해남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장난감이나 게임기가 없었지만 자연을 벗 삼아 연날리기, 개구리 잡기, 고구마 구워먹기, 낚시 등을 하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만화책과 무협지를 읽으며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려움과 정욕, 목마름으로 고통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발표나 길 물어보는 것도 어려워했고, 정욕으로 정죄감이 들어 자신을 못난 사람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만화책과 무협지를 읽을 때는 즐거웠지만 이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 있었습니다. 이런 삶을 바꾸고 싶었지만 저에게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와 성경공부를 하고 수양회를 참석하여 요한복음 4장 오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내 안에 목마름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참 만족과 생명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기뻤고 그때부터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하는 삶,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에게 찾아오시고 영생수를 선물해 주시고 목자의 삶으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현재적으로 여러 한계가 있지만 저는 다시 한번 목자로서 양을 얻고자 소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캠퍼스에 올라가 전도하고 양을 얻는 것이 쉽지 않음을 봅니다. 세상의 잔재미를 즐기며 그냥 안주하며 살고 싶습니다. 제가 세상의 것에는 유익이 있을지 몰라도 참 생명이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영생을 누리는 가운데 자신을 부인하며 생명을 살리는 복음역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어떤 물도 참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 생명,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만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나를 풍성케 합니다.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믿고 사랑함으로 참 생명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