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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진출을 놓고 한판 승부를 겨룬 한국과 포르투갈전이 벌어진 6월 14일, 이날만큼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즐거워한 날이 우리 역사에 있었을까?
우승후보로까지 거론되던 포르투갈을 점수면에서나 경기내용면에서나 모두 압도한 한국의 승리는 정말 통쾌함 그 자체였다.
아울러 그것은 IMF구제금융이나 진절머리나는 정치사회현실로 인해 우리의 의식속에 소리없이 커져가던 실패감정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성공체험」이기도 했다.
이 엄청난 일을 누가 해냈는가? 온몸을 던져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선수들, 뜨겁다 못해 데일 정도이지만 그러면서도 경기후 쓰레기까지 치우는 질서있는 응원을 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붉은 악마들, 그리고 업무를 중단하면서까지 축구를 보느라 전력사용량까지 크게 떨어질 정도였다는 우리 국민들의 열성이 바로 이 성공체험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원동력을 끌어낸 사람은 또 누구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한국축구팀의 명장 거스 히딩크이다. 그가 없었으면 이런 성공체험, 이런 기적이 가능했겠는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주고 변화의 방향을 일깨워주고 우리 국민 모두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한 사람, 히딩크야말로 진정한 성공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렇게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히딩크에 대해 그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의미에서 그의 성공스토리를 소개하고 성공요인을 분석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근세들어 전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해양국가 네덜란드 출신의 히딩크는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네덜란드 왕립축구협회가 축구 강국 건설의 깃발을 내걸고 의욕적으로 펼쳤던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에 의해 축구를 시작한 네덜란드 축구의 1세대다.
축구선수가 된 그는 1960년대 말 네덜란드의 1부 프로구단인 데 그라프샤프, 1970년대 PSV 아인트호벤, 미국의 워싱턴 디플로매츠 등에서 뛰면서 비교적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했지만 세계적 선수로까지 성장하진 못했다.
그의 성공은 1982년에 선수생활을 접고 감독의 길을 걸으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선수생활을 했던 PVS 아인트호벤의 감독이 되어 1985년 시즌부터 1988∼89시즌까지 팀의 프로리그 4연패라는 신화를 창조하면서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1988년에는 네덜란드리그와 축구협회(FA)컵, 유럽 챔피언스리그 등 3개 타이틀을 모조리 석권하며 명감독으로서의 성가를 높였다.
그가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95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이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98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팀을 4강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올렸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은 네덜란드에 5 대 0으로 대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 수모는 한국팀이 히딩크를 만나게 되는 운명적 계기로 작용한다.
2002년 월드컵에 대비하여 세계적 명성을 갖는 감독을 찾고 있었던 한국축구협회가 한국을 초토화시킨 히딩크감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축구협회로부터 감독직 제의를 받은 히딩크는 처음에는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한국이라는 만년 축구변방국을 잘 알지도 못했음은 물론 자신이 5 : 0으로 패배를 안겨준 팀에 감독으로 간다는 것이 아무래도 찜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한국팀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월드컵 16강 진출을 역사적 사명처럼 생각하는 한국선수들의 순수한 열정이 그의 감독직 수락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000년 12월에 감독직을 수락하고 나서 그가 맨처음 한 일은 한국팀의 특성과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체력도 정신력도 팀웍도 모두 세계수준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월드컵대회까지 1년 6개월밖에 남지 않은 기간동안 한국팀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단계별 대책수립에 들어갔다.
그는 한국축구가 세계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전원공격, 전원수비를 통해 쉴새없이 강팀을 몰아붙이는 「토탈축구」, 「파워축구」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축구에는 이미 누구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과 관행이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술이 모자라는 것이지 체력과 정신력은 결코 축구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 각자에게는 고유의 포지션이 있어 공격하는 사람은 공격만 수비하는 사람은 수비만 잘 하면 된다는 배타적 의식, 외국인 감독은 우리 현실을 잘 모르고 자기식대로 하다가 결국 좌초하고 말 것이라는 냉소의식 등등.
히딩크는 이 만만찮은 난관에 뚝심과 배짱으로 대응해나갔다. 그는 먼저 멀티플레이어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선수기용에서 배제했다. 또 팀웍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스타의식에 안주해 있는 선수들도 철저히 배제했다. 개인기의 부족을 메꿀 수 있는 것은 조직력의 강화밖에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겨줄 수 있는 미완의 대기들을 발굴하여 훈련에 참가시켰다.
이러한 그의 실험은 사실 상당한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1년 6개월이라는 남은 기간이 그렇게 길다고도 할 수 없는데 새로운 실험을 해서 과연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감독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2001년 1월부터 8월까지의 실적은 형편없다고 할 정도로 부진의 연속이었다.
자신감을 기르기 위해서는 강팀과 맞붙어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소신으로 선진축구팀과 대전한 결과는 5월 프랑스에 5:0 8월 체코에 5:0으로 대패하는 참담한 현실로 드러났다. 오죽하면 히딩크의 한국이름이 오대영이라고 했을까.
9월 이후에는 그동안의 프로그램이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탓인지 강호 나이지리아에 1승 1무, 11월에는 크로아티아에 1승1무의 성적을 올리는 비교적 양호한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다시 2002년 1월의 북중미골드컵에서는 미국에 1무 1패의 전적밖에 올리지 못하는등 히딩크호는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언론과 국민사이에는 히딩크에 대한 불신의 소리가 높아졌고 여기에 여자친구 문제나 선수선발을 둘러싼 기술위원과의 마찰등의 문제가 불거져 자칫하면 도중 하차할 수도 있는 최악의 위기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정몽준 축구협회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히딩크는 일관되게 자신의 플랜을 실천해 나갈 수 있었고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3월 핀란드에 2:0 승, 4월 코스타리카에 2:0승 등의 양호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16일 유럽의 스코틀랜드에 4:1의 대승 5월 21일에는 우승후보 잉글랜드와 1:1 무승부 5월 26일에는 월드컵 전대회 우승국인 프랑스와 3:2의 대등한 경기를 펼치면서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6월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한국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 시작했다.
6월 4일 폴란드에 2:0의 통쾌한 승리, 6월 10일 포르투갈을 꺾은 미국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끝에 1:1 무승부, 6월 14일 FIFA랭킹 5위이자 우승후보 포르투갈을 맞아 1:0의 감격적인 승리.
6월 18일 역대 월드컵 3회 우승전력의 이탈리아에 2:1 승으로 8강 진출, 6월 22일 우승후보 스페인에 0:0 PK 5:3승으로 4강 진출.
준결승전에서는 아깝게 독일에 1 : 0 으로 패배했지만 한국팀은 세계 축구사를 다시 쓴 열정과 패기의 팀으로 찬사를 받으면서 전세계에 한국을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4강진출의 신화를 달성한 히딩크는 한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을 받으면서 한국인의 마음에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간직되는 인물이 되었다.
히딩크의 성공은 한국팀의 성공과 별도로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히딩크의 성공요인 분석도 한국팀의 성공요인 분석과 중첩될 수 밖에 없다.
한국팀의 성공요인에 대한 분석은 매스컴을 통해 이미 넘칠 정도로 많이 나와있고 카페가족 여러분들도 이미 상당부분 숙지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내용들을 열정, 인간관계, 전문지식, 창의성, 리더십이라는 항목으로 다시 한번 정리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히딩크 성공의 핵심요인은 역시 어느 성공에서나 마찬가지로 열정이다. 히딩크의 한국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우리선수들의 열정이 활화산처럼 불타올라 오늘의 성공을 이루어냈다. 감독제의를 받기까지는 거의 잘 모르는 팀이었을 한국팀에 대한 히딩크의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성공스토리에서는 그가 한국선수들의 순수성에 반하여 감독직을 수락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겠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거액에 이르는 연봉도 그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무엇보다 몸값을 철저히 따지는 프로이기 때문이다.
그가 받는 연봉은 월드컵이 끝나는 2002년 6월까지 1년 6개월동안 145만 달러(18억원), 16강 진출시 25만 달러(3억원)를 보너스로 받고 8강전 이후 토너먼트에서 승리를 거둘때마다 거액의 보너스를 추가로 받기로 약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1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팀에 열정을 쏟아부었던 것은 돈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한국선수의 순수성과 열정을 보고 느끼면서 자기가 열정을 쏟아붓기만하면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완의 대기를 갈고 닦아 진정으로 세계가 인정해줄 수 있는 대기로 키워내는 기쁨, 이것은 곧 리더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모국 네덜란드가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탈락하여 자국팀으로는 그런 기쁨을 만족시킬 수 없었을 때 한국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국적이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지난 세월동안 한국팀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게 아닐까?
그런데 그가 쏟는 열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열정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열정하면 모든 것을 희생해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자신의 사생활 마저도 포기해야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자기 일을 즐거워하면서 집중하는 것을 열정의 척도로 생각했다.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수행한다면 사생활은 전혀 문제삼지 않았고 본인 스스로도 연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는등 우리의 상식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또 정신력이라는 정체모를 용어로 포장된 열정을 경계했다. 그가 강조하는 열정은 어떠한 강팀과 맞붙어도 기죽지 않는 자신감이었고 그러한 자신감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거듭하는 것이었고, 무작정 "패배하거든 살아 돌아올 생각말라" 식의 어둡고 우울한 열정이 아니었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열정은 진정으로 즐거워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집중과 도전이었고, 그러한 열정을 몸에 익힌 한국팀은 불안감과 비장감을 주던 과거와는 달리 자신감과 여유를 주면서 펄펄 나는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게 되었다.
히딩크는 한국식 인간관계를 뿌리채 뒤집어 놓은 원흉(?) 이다. 장유유서와 연줄로 요약되는 우리의 인간관계.
나이많으면 무조건 한수 접어야 되고 연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고 연이 있으면 안되는 일도 없는 우리들의 터무니없이 비합리적인 인간관계를 적어도 축구에서만큼은 철저히 깨부신 히딩크는 이것만으로도 길이 길이 찬사를 들어 마땅하다.
생각해보라. 선수 11명이 나이에 따라 연줄에 따라 모두 따로따로 노는 팀과 11명이 서로 충분히 알고 협력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팀이 맞붙었을 경우를... 이 게임은 11명과 11X11 = 121명이 싸우는 게임이다. 결과는 뻔하지 않는가?
리더의 능력의 차이는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11명을 따로 놀게 할 것인가. 아니면 11명이 상호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121명이 뛰는 것처럼 하게 할 것인가?
11명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11명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 아니 선수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와도 진정한 수평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히딩크는 이 역할을 해냈다. 선수들 모두에게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하고 서로 반말하도록 하고 언제나 공정한 기준으로 선수들을 대하고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는 히딩크 앞에서 우리 선수들 11명은 121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좀처럼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스타라면 더더욱 그렇다.
축구국가대표 선수가 될 정도면 축구에 관한 한 주관이 뚜렷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람들을 기존에 익숙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개조해 나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이 어려운 과제를 히딩크는 해냈다. 그가 택한 방법은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분석과 훈련 프로그램. 히딩크는 이를 위해 3사람의 참모를 직접 데리고 왔다.
핀 베어백 수석 코치와 레이몬드 베르하이엔 체력 담당 트레이너, 이즈신 고트비 비디오 분석관이 바로 그사람들이다.
베어백 고치는 과학적이고 치밀한 훈련프로그램 작성을 통해 11명의 선수들이 톱니바퀴 돌아가듯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네덜란드 왕립 축구 학교에서 운동생리학을 강의한 경력이 있는 베르하이엔 트레이너는 체력강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개발해 후반 체력부족이라는 한국축구의 고질병을 치료했다.
특히 그가 개발한 체력강화프로그램은 지겹게 마냥 뛰기만 하는 원시적 방식이 아니라 즐기는 가운데 저절로 체력이 높아지는 방식으로 되어있어 선수들의 훈련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고트비 비디오 분석가는 대표팀과 상대의 경기를 담은 비디오를 컴퓨터로 분석해 히딩크 감독이 작전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전반전 게임이 끝나면 그 결과를 상세히 분석해 후반전 작전수립에 참고할 정도이니 어느 선수가 그렇게 해서 나온 지시에 저항할까?
전문지식이란 이래서 중요하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팀의 내부부터 리더의 지시를 마음으로부터 수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히딩크는 과학적 데이터를 통해 경험이나 감에 의거한 반발을 억제하고 선수들을 모두 납득시킴으로써 선수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었다.
선수들에 대한 히딩크의 가장 강력한 주문은 공격과 수비가 따로 없는 전원공격 전원수비의 멀티플레이어가 되라는 것이었다. 각각의 포지션에 충실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과 어느 포지션이나 소화할 능력을 지닌 선수로 구성된 팀을 비교해보자.
1. 각각의 포지션에 충실하면서 선수들간에 시너지 효과가 없는 경우
에는 각자의 능력을 1이라고 한다면 11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2. 각각의 포지션에 충실하면서 상호 시너지 효과가 있다면 11X11=
121 의 힘이 나온다.
3.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해 내면서 상호 시너지 효과가 있다면
11X11X2(2포지션을 소화하는 경우) = 242 의 힘이 나온다. 너무
도식적으로 수치를 제시했지만 멀티플레이어가 될 경우의 이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멀티플레이어가 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강한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한가지 역할을 하는 데만도 전후반 90분을 뛰려면 탄탄한 체력이 필요한데 수비하다가 공격하고 공격하다가 수비할 수 있는 선수가 되려면 체력이 훨씬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히딩크가 체력강화를 제1우선으로 삼은 주된 이유이다.
둘째 스스로 생각하는 축구를 해야한다.
하나의 역할에만 충실한 종래의 방식대로라면 자신의 체력이나 개인기만 높이는 훈련만 열심히 쌓으면 되었다. 그러나 팀속에서 언제 자신의 역할이 바뀔지 모르는 가변적 상황에서는 팀플레이 자체를 정교하게 이해하고 습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선수들은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하였고,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평소에도 동료와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의 분석용어를 사용하여 말하면 열정과 인간관계와 전문지식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창의성을 발휘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자연히 히딩크의 선수기용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박지성과 같이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해 내면서 창의적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
히딩크는 이런 선수들을 중심으로 월드컵 이전 치러진 32번 의 A매치에서 항상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카드를 준비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대로 한국축구팀의 환골탈태였다.
지금까지 한국 축구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들을 열정, 인간관계, 전문지식, 창의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하나하나를 뜯어본다면 사실 세계축구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당연한 수순이자 논리였다.
우리가 이 당연한 논리를 그동안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은 크게 보아 두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는 축구에서 세계일류 수준으로 간다는 「주제넘은」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기술이 부족하니 세계수준으로 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가? 반도체를 해야 삼성과 우리 경제가 살 수있다는 당시로서는 터무니없는 목표설정이 결국 오늘의 삼성전자를 만든 것이 아닌가?
히딩크의 위대한 점은 이처럼 우리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목표를 설정했던 점에 있다.
시간이 부족하여 16강도 못이루고 좌초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과학적 프로그램에 따라 충분히 노력하면 충분히 축구일류국으로 한국을 도약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결코 헛된 비전이 아니었음을 실제의 경기에서 증명해 보였다.
둘째 세계일류 수준으로 간다는 주제넘은 목표를 처음부터 세울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너무나 커다란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수십년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관행을 월드컵 16강 진출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하루아침에 버릴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과거경험과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고 히딩크는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바로 그러한 요청에 부합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고 해서 필요한 변화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돈키호테로 취급받거나 변화과정에서 적지 않은 저항과 갈등이 일어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히딩크는 이것을 시장원리에 입각하여 철저히 능력 위주의 인선과 훈련프로그램을 통해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적 리더십의 형태로 접근함으로써 문제를 비교적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나아가 허공을 향해 내지르는 그의 어퍼컷만큼이나 파워풀한 히딩크의 카리스마는 선수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줌으로써 그의 시스템적 리더십을 선수들이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한국팀이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