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는 걸 참 좋아라한다. 그 은은한 조명과 큰 스크린, 눈앞에 가득 영화가 틀어져있고 조용하게 들려오는 숨소리들. 고소한 팝콘냄새도 좋고, 직원분들의 상냥한 미소도 좋고, 금세 쓰레기통에 버려질 영수증까지도. 그 곳의 모든 것이 다 좋다. 거기 앉아 있으면 이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를 좋아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딱히 그건 아닌 것 같다. 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영화 보는 게 가끔은 버거울 때도 있고 영화를 보기까지 이것 저것 재고 따지는 게 많으니 온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거다.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간다기보다 영화관의 분위기가 좋아서, 그냥 그 곳이 좋아서 일단 간다. 그러고 나서 무슨 영화를 볼지 정하는 건 나중의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습게 영화 시나리오를 쓸 생각을 한다. 언젠가는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써야지, 나는 그런 기가 막힌 포부를 가진 사람이다. 물론 아직은 포부만. 여전히 투고는 하지 못하고 있다. 하얀 백지 위에 썼다 지웠다만 반복한 채 USB에 묵혀둔 시나리오가 대체 몇 개인지 이젠 세는 것도 엄두가 안 날 지경이다. 이 많은 미완성 시나리오들 중 뭐 하나는 얻어 걸리겠지, 그렇겠지. 어쨌든 간에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시나리오가 필요하고, 모든 시나리오에는 이야기가 있다.
또 모든 이야기에는 단계가 있다.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뉘는 3단계. 기, 승, 전, 결로 나뉘는 4단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나뉘는 5단계. 이것보다 더 많은 단계로 나뉘기도 한다. 21단계, 36단계…. 나는 요즘 이런 걸 배우고 공부한다. 그러다보니 요즘엔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내 인생을 이야기에 대입시켜 단계를 나눈다면 나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 위기쯤에는 온 건가, 나 요즘 좀 힘든데. 아니려나, 아직 발단의 중반도 넘지 못했으려나? 내가 이렇게 어중간한 시간들을 보내다 그냥 허무하게 눈을 감는 결말이라면 나는 지금 위기의 끝자락쯤 와 있는 것일 테고, 그게 아니라면 내 위치는 발단의 중반쯤이나 겨우 지났을 테다. 그래, 나는 아직 겨우 발단이고 서론일 뿐이다. 이제 겨우.
이야기의 법칙 또 하나. 모든 이야기의 제일 재밌는 부분은 본론이다. 이야기 작법에 있어서 이건 무조건 진리이고, 늘 통하는 법칙이고, 꼭 지켜야하는 규칙이다. 본론은 가장 긴 분량을 갖고 있고, 그래서 그만큼 더 재밌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인생도. 나도 이 서론의 시간을 지나보내고 나면, 본론의 시간을 맞게 될 것이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게 재밌을 부분, 그리고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할 부분. 나는 그 부분에 감히 내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래야 이 모든 고통의 주인공이 나인 것만 같은 지금 이 서론 부분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꿈꾸는 본론은 어떤 거냐면.
역시 부귀영화라 한다면 우선은 돈을 많이 벌어야겠지. 나는 잘 팔리는 글을 쓰는 상업 작가가 될 거다.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김은숙처럼. 그 이름이 신뢰와 흥미가 될 수 있는 작가 말이다. 그래서 돈을 버는 거다. 아주 많이, 정말 많이. 지금의 가난이, 돈 걱정이 희미하게 지워질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많이.
그래서 대리석이 깔리고 방이 세 개 이상은 딸린 마포구 상암동의 아파트, 내 명의로 된 건물들, 삐까번쩍한 차, 걸음걸이와 눈빛마다 흘러넘치는 여유와 내 애인이 갖고 싶다는 명품을 척척 사줄 수 있는 간 큰 다정함까지 다 가지고 싶다. 그런 건 결국 다 돈이 만들어주는 거니까. 너무 속물 아니냐고? 그래, 나는 좀 속물이다. 아니, 많이 속물이다. 가난이 만들어낸 가치관은 일단 돈은 많이 벌고 보자는 거다. 일단 다 모르겠고 돈부터 벌고 보자.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퀴어 작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숨기지 않을 거다,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누군가 내게 왜 자꾸 당신 이야기엔 성소수자들이 나오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내가 퀴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줄 거다. 미디어를 통해 보일 수 있는 콘텐츠에는 힘이 있다. 누군가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랑의 형태들도, 어떤 젠더의 형태들도 그저 당신에게 낯설기 때문이었다고. 자주 접하면 낯설음은 이내 익숙함으로 바뀌고 그 어떤 이들도 틀림이 아닌 다름을 보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고 주입하겠다는 게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최소한만큼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보여줄 수 있는 발판이 필요하다는 걸 말하는 것뿐이다. 당연히 내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초능력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가 지닌 힘을 믿는다, 미디어가 가진 힘을 믿는다.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소수자와 약자에게는 더더욱. 그래서 나는 성공하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건 이런 이유도 포함하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부귀영화는 결국 이런 것이다. 부귀영화, 부퀴영화.
그리고 나는 믿는다. 나는, 또 우리는 그런 부퀴영화를 만들고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미국 드라마 <엘워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당신이 한 얘기에 저도 동감해요. 왜냐면 어떤 게이 배우가 커밍아웃한다면 세상에는 득이 되겠지만 그 사람의 커리어는 망가질테니까요.” 공감한다, 백만 번 더 공감하고 동감한다. 커밍아웃을 하고 그렇게 피곤해지느니 차라리 숨긴 채로 사는 게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
근데, 그런데 말이지. 나는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으련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모란이고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힘 센 퀴어 작가가 될 거예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는 길에 조금 힘이 되어주지 않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