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은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무엇이 있다. 그래서 천륜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 천륜보다 더 강한 우정이 성경에 나온다. 다윗과 요나단은 친구로 서로를 향한 사랑은 남녀의 사랑보다 더 강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했던가? 요나단과 다윗은 서로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깊은 우정을 나누던 친구였다.
사울은 자신의 왕위가 계속되지 못할 것을 알고,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었으나 그것은 다윗 쪽에서의 무슨 잘못이나 허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스럽지 못한 이유였다. 원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고만 하니 사울은 점점 악마화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요나단은 그 아버지 사울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를 미워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울이 자신을 죽으려 한다고 생각한 다윗을 사울을 피해 도망했다. 그리고 왜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삼상 20: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요나단은 그때까지 왜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왕권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윗을 변호하는 것을 듣고 화가 난 사울이 그 속내를 말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삼상 20: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삼상 20: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요나단에게는 왕권보다 친구가 더 중요했다.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탐욕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가 무얼 그렇게 잘못했냐고 항변했지만 돌아온 것은 살기등등한 아버지의 위협이었다. (삼상 20: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은 아버지와의 천륜과 친구와의 우정 사이에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그 슬픈 현실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 또 울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자신의 비운의 결말을 내다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삼상 20:34)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요나단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그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 모든 인류의 친구인 예수님은 하늘 왕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우리의 친구 요나단이다. 다윗은 잘못이 없었지만, 허물 크고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음의 자리를 선택한 예수님을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발견한다.
하나님 아버지! 죄 많은 우리를 친구라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친구로 여겨 주실 뿐 아니라 허물이 많은 우릴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우리도 우리의 영원한 친구 요나단을 닮게 하소서. 친구의 뒤통수나 치는 유다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요나단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영원한 요나단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