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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기원
훈민정음은 단군조선 시대의 3대 가륵 단군(기원 전 2181년) 때 삼랑 을보록이 38자를 만들어 '가림토'로
하였다.
이것이 한글의 원형이다.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한단고기> 등의 여러 고서에 남아 있다.
세종대왕은 성삼문을 만주 방면으로 열세 번이나 보내어 '가림토' 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 문자를 연구
케 하였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자들과 가림토 문자를 실제 쓰기에 편리하도록 다듬어서 서기 1446년 음력 9월 상한
(양력 10월 9일)에 훈민정음 28자를 반포하였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 하여 '글자는 옛날 전(篆) 자를 본떠서 만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이 가림토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단서다.
세종실록 103권에도 언문은 옛 글자를 본받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700년 전 일본에 이미 원시 한글이 존재했고, 그 유물이 지금도 대마도
민속박물관과 일본의 이세신군에 보관되어 있다.
이를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썼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아히루문자)라 한다.
가림토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림토는 인도로 전해져 구자라트 지방에도 남아 있을 뿐아니라 또한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다.
훈민정음의 기원이 가림토에 있다면 우리의 문자 역사는 올해(2010년)로 4191년이 되지만 세종대왕
창제로 본다면 불과 564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훈민정음의 원형이 가림토라 하여 세종대왕 업적이 훼손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라질 위기의 우리 문자를 다시 부활시켜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고 과학적인 문자를 재창조
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글자의 최고 원형은 녹도문자라고 한다.
또, 오늘날 사학의 자료로 취급하지 않는 역사서인, 이맥의 저서인 ‘태백일사’에 의하면 이미 3600년 전인
가륵단군 2년에 삼랑 을보륵이 38자의 ‘가림다’ 글자를 창제하였다고 한다.
다음의 글자는 이맥이 지은 태백일사에 기록된 가림다의 문자인데 이 글자가 한글의 원형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훈민정음과 놀랄 만큼 유사하여,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과의 유사성은 거의 부인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외형적으로 보더라도 가림다 문자는 가히 한글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솔직히 “발음의 원리는 따로 만들었으나 옛글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또, 1750년, 신경준이 지은 '훈민정음 운해'에는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사용하던 속용문자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한문 외에도 민간에서 사용되던 문자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백성을 위해서 언어를 연구했던 세종대왕이 세간에서 사용되던 이런 문자들을 참고하였을 것
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또, 한자 사용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양반에 속한 최만리는 옛 글자와 똑같은 것을 왜 다시 만들 필요가
있냐고 세종대왕에게 따지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리 민족에게는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부터 옛 글자가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글’이나 ‘속용문자’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와 서로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에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길림시 송호상 교수는 동이민족 논설의 ‘가림다 문자를 찾아서’ 에서 세종대왕의 한글이 백지상태에서
이룩된 것이 아니고, 한글의 전신인 원시한글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원시 한글이 바로 가림다
문자이며 녹도글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가림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림다의 ‘가림’은 가려낸다는 뜻으로, ‘가림다’의 글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가림다’는 물건을 세고 계산하는데 사용하는 수단으로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태백일사에는 가림다를 ‘加臨多’라고 하였고, 단군세기에는 ‘加臨土’라고 표기하였다.
많고 적음을 가리는 것이기도 하고, 토지를 수로 셈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글의 옛 글자인 가림다는 원래 수학에서 수를 셈하는데 사용하는 숫자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한글이란 원래 숫자나 그 기호의 계승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글은 언어문자로만 알고 있으며 단순히 소리만 적는 순수한 소리글자인 줄
안다.
그렇다면, 한글이 원래 숫자에서 비롯된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가?
사실, 인류의 문자역사를 보면, 분명, 문자가 처음 생길 때에 언어적인 기능보다는 숫자기능을 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원래 인도지방의 글자인데, 이 인도 글자도 역시, 원래의
생긴 과정을 추적하면 숫자의 기능에서 생겼다.
인류의 대부분의 글자는 원래, 숫자에서 비롯한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글의 원형은 원래 숫자의 기능을 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임을 의미하며,
인류문명사의 보편적인 흐름과도 잘 부합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가림다가 한글의 원형인가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보다는 그 수학적인 기능이 어떠하
였는가를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된다.
고조선 중기에 창제되었다고 하는 가림다의 글자 수는 총 38가지인데 이를 크게 3가지로 세분해보자면
13수의 숫자의 2 종과 12수의 숫자 1종이다.
특이한 것은 인류문명사에서 진법은 10진법을 사용하고, 사물의 구분은 대체로 12수가 기본인데 특이
하게도 왜 하필이면 13수의 구분이 필요한 것일까?
땅의 크기나 수치를 계산하는데서 10진법이나 20진법 혹은 30진법이나 60진법은 흔히 있는 일이다.
고대 마야인들이 사용한 숫자는 20개로서 20진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고대 마야문명에는 숫자는 20자로서 그림글자와 기호글자 20자로서 숫자로 구분되어 모두 합하면 사실
40자의 문자로 구성되는데 이는 가림다의 글자 38자의 수와 거의 같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13의 개가 두 종이나 있는 것일까?
물론, 위의 밑의 12수의 글자는 대부분의 모든 문명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 원주를 계산할 때에
주로 상용한다.
12수는 하루의 시간이나 천구나 원의 구분에서 모든 문명의 수학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13수의 가림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이미 앞에서 금척의 수에서 매우 중요한 숫자이다.
특히, 오늘날 영어의 알파벳은 26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는 13×2의 수와 같은데 이른바 ‘황금비수열’
의 상징이기도 하다.
인류문명은 대체로 무리수인 원을 가름할 때에는 3:4:5의 황금분할로 하여 총 12의 수로 세분하는데,
이 순서의 수열에서 13의 수는 제 7열의 수열인 피보나치수열이라 한다.
또, 3,4 5와 5,12,13의 수열은 매우 중요한 3자의 자연수 수열이다.
그런데 고대의 이후에는 서양에서는 이 13의 수를 좋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민족은 이 13의 숫자야말로 황금비의 수로서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긴다.
서양의 경우에는 12살에 예수가 세상에 등장하는데 비하여 박혁거세는 13살에 등장한다.
달력을 정하는 데서도 1년을 12달로 구분하기보다는 13달로 정하는 것이 정확한 계산법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사물을 13의 수로 세분하는 것이 자연현상에서 흔히 볼 수가 있는 황금분할의 정확한 계산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서양과 동양에서의 계산차이는 달력을 만들고 나이를 계산하는 데서도 차이가 생기게 하며
수학에서도 차이를 가져오게 한다.
아무튼, 이 가림다의 글자는 발해에서도 주로 사용된 흔적이 삼국사기에 기록되고 있다.
놀랍게도 이태백 전서의 ‘옥진총담’에는 그가 가림다의 문자를 잘 알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가림다 글로 된 시를 거문고의 악기에 적어놓는 것을 고려의 광종 때 장유가 잘 알아보았다 하여 그 총명
함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원동중의 삼성기에는 고조선의 진한과 부여, 그리고 왜국은 혹은 횡서하고 노끈을 맺고 혹은 나무에 문자
를 새겼는데, 오직 고구려는 붓글씨를 섰다고 하면서, 이는 필시 그 이전의 환웅시절의 문자를 본떠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지금 전해지지 않는 역사서인 ‘진역유기’ 라는 고서에 에서는 신령한 글자의 획이 일찍이 태백산의
푸른 암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ㄱ자와 같다고 한다고 간접 전해지고 있다.
또 ‘대변설주’의 기록에 의하면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바위에 신시시대의 옛 글자가 새겨져있는데 그 글에
환웅께서 사냥을 삼신께 제사를 올리셨다고 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대변설주는 세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세조의 수거령이 내져져 수거 된 20여종의
비기 중에 하나로서 지금 전하지 않는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미, 고조선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가림다의 글이 언어와 뜻, 숫자의 기능
이 3위 일체 되었다는 점이며, 이는 황금비의 원리로 생긴 지혜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즉, 우리나라의 숫자의 처음 원형은 녹도글자처럼 단순히 사물을 모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더욱 발전하여 가림다와 같이 수학적이며, 기호화되고 상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아직도 한글의 원형에 대하여 구체적인 모든 것을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우선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인 가림다는 사물을 구체적으로 구분하고, 그 수를 가리고 셈하고, 또 이를 기록하는데서 비롯한 것으로 사용했다.
즉, 한글의 본래의 목적이 언어소통보다는 셈하고 기록하기 위한 수학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한글은 원래 숫자기능이 우선이고, 그리고 상징과 의미의 기능을 모두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훈민정음의 제작과정에서 금척의 원리가 적용되었으며, 이에 비롯되었음을
증언하는 귀중한 기록문이 있다.
조선의 단종을 상왕으로 모신 매월당 김시습은 훈민정음의 근본이 금척의 수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징심록 추기’의 글에서 한글이 금척원리에 의하여 정립되었다는 증언하였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한글의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전설
적으로 존재한 가림다의 수를 모태로 하여 그 창제원리와 철학적이고 수학적인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학적인 맥이란 바로, 금척의 원리로 만물에 관한 근본이치를 수학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이며, 우주는 물론 인간생활도 이러한 금척의 원리에 맞게 글을 만들고, 수를 세고, 농사를 짓고 하는 것이
세상사에 있는 인간의 근본 도리라고 한다.
한글의 원형은 본래 수이며 숫자의 기능에서 출발하였으나 세종대왕에 이르러서는 발음기호로 혁신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가 있으며, 이를 소리글자로서의 기능을 강화한 것에 의미가 있다.
아무튼, 세종대왕은 기존의 가림다의 글자에 대하여 대대적인 혁신을 하여 백성들에게 쉽게 발음이 이루어
지도록 하여 아주 간단한 한글이 탄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한글이 원방각의 원리를 벗어난 것은 아니며, 가림다의 글자를 음의 원리에 맞게 하고 백성
들이 아주 쉽게 이용하기위한 창조적인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마치 복잡한 책력을 24절기로 쉽게 하여 백성들이 잘 이용하도록 한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결국, 한글은 원방각의 원리에 기초하여 창조된 수이자 언어라는 점이다.
즉, 황금비의 원리가 만들어낸 언어이고, 소리이자 수이고 세계관이며, 철학적 삶의 지혜의 창조물이기에
반드시 발음이나 모양만을 본뜬 것이 아니며,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말의 사용 흔적이 우리들의 일상에 수없이 배어있다.
이 ‘수’ 라는 말은 본래 우리 조상들이 인간사의 변화를 수의 원리로 파악했다는 것도 시사하고 있다.
수야말로 우주와 천지만물의 생성 변화 원리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도구이며, 사물의 모든 변화와 생성
발전하는 것도 모두 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수로써 천지와 만물의 생성 변화의 이치는 물론 인간사의 움직임까지 통찰하고 있
었음이 이 말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잃어버린 철학을 찾고 민족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언어와 풍속의 연구가 필수적이만
그 바탕을 이루는 황금비의 수법칙을 잘 알아야 한다.
아무튼, 우리 역사의 시원은 과연 언제부터인가를 알기가 무척 어렵게 되어 있다.
이미 천 번에 걸친 외적의 침입이라고 하는 유례가 없는 처지는 물론이고, 그에 따른 피난생활 등으로
우리 조상들의 얼과 그 뿌리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쉬운 것은 오늘날에 대부분 한글의 모형을 이질적인 철학이나 전혀 다른 원리로 고정적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아직도 대부분이 고대의 수비주의의 변종인 음양5행론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 원리는 아무리 멀리
잡아도 기원전 2천년을 넘지 못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도 안 된다.
한편, 아메리카대륙 뿐 아니라 4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대륙의 한 고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보아도
뜻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가림다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여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우리가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들도 바로 가림다 문자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우리민족의 일부가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라고 한다.
이 유적 중에서 가림다 문자 'ㄷ' 'ㅁ' 'ㅐ' 등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고 있다.
또, 갑골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원시한자의 모양이 구불구불하다고 한다.
그림글자가 이처럼 된 이유가 단군 3세 때 처음 만들어진 가림다 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1996년 한글날에 방영된 Q채널의 ‘한글, 그 비밀의 문’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가림다 문자 38자 중에 X, M,P, H 및 I, O 등 알파벳과 유사한 글자에 주목하기도 한다.
알파벳은 물론이고 중국의 갑골문자와 일본의 초기 신대문자, 몽고의 파스파문자, 인도의 구자라트문자
등이 단군시대 가림다 문자와 유사하다는 학설 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글의 진실은 연산군의 분노로 인하여 역사 속에 묻히게 된다.
1504년 7월 19일 밤, 조선왕조 10대왕인 연산군의 손엔 종이 한 장이 들려져있다.
그의 광기가 치솟아 올라,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다.
그의 손에 들려진 건, 표지엔 ‘무명장’(無名狀)이라고 쓰인 괴편지이다.
이 괴편지는 모두 언문으로 쓰여 있었으며, 내용은 왕의 폭정을 폭로한 글이었다.
그 당시의 민심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연산군은 이른바 ‘언문’ 금지령을 내리자 한글로 된 문서들은 모두 불에 태워지고 만다.
한글로 된 글들은 한 점도 남김없이 사라지게 된다.
한글의 운명도 우리민족의 삶의 역사처럼 그렇게 가혹하였다.
그로부터 세월은 흘러 494년이 지난 뒤, 안동의 한 양반 집 서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훈민정음 해례
본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한글의 목숨 줄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물론, 이 해례본의 발견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글을 둘러싼 기원설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는 것
이 아니다.
그동안 한글의 기원에 관한 숱한 가설들이 횡행했다.
그 해례본이 발견 된 지 수 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직도 한글이 과연 세종대왕의 발명품인지에 대한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속에 간직돼 있던 한글 창제의 원리를 통해 밝혀진 것은 다른 민족의 글자에서 한
점도 빌려오지 않은 독창적인 문자임이 밝혀진 것이다.
결국, 오늘날 언어연구 분야의 세계 최고인 영국 옥스퍼드 언어학 대학이 세계 모든 문자를 대상으로 합리
성, 과학성, 독창성 등을 평가한 결과 한글을 1위로 꼽았다고 한다.
1996년에 프랑스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글을 세계 공용문자로 쓰자는 주제로 세계의 언어학자들 간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그 1년 후인 1997년 10월1일 훈민정음해례본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한글이 가림다의 계승이기도 하고, 그 전통을 단지 보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했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조상의 얼이 새롭게 부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 표현한 것에서부터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이라 소개
하는 등 세계 곳곳에서 한글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글이 원래는 황금비의 숫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더 구체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다.
분명, 계승과 창조의 노력은 기적을 이루는 쌍둥이 원동력임에는 틀림이 없다.
인도 구자라트에서 발견된 한글간판, 한글의 뿌리는 범어인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인도에서 만난 한글. 인도 구자라트에 있는 간판들이 눈에 익숙하다.
어떻게 한국에서 47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인도의 문자와 한글이 유사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거리 곳곳에서 만난 한글과 비슷한 글자, 이탈리아 베이커리라는 빵집 간판은 그대로 있을 수 있는 정도다.
어디 그 뿐인가?
인도 남부 타밀 지역의 타밀어는 ‘엄마’ ‘머리’ ‘언니’등이 뜻까지 흡사할 정도다.
학자들 역시 자음과 모음을 합쳐 만드는 음소문자인 점과 모음에 가획을 하여 다른 모음을 만드는 가획의
원리등을 들어, 범어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문자가 한글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유사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와 인도의 직접, 간접적인 교류가 활발했다는 점에서 상호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 공주와 혼인을 한 것이나,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인도 승려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글은 정말 범어에서 온 곳인가?
신다이 문자라 불리는 일본의 고대문자, 거기에 한글이 있다?
일본의 한 서예학원. 그곳에 한글과 똑같은 문자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아닌 신대문자. ‘아에이오우’라고 읽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한 한글이다.
신대문자는 일본에 존재하던 고대문자로, 200여 종류의 문자가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하며, 그 중에 하나가 한글 형태의 아히루 문자다.
이것들은 현재 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신사 곳곳에 남아있는데...
신대문자 99점을 소장하고 있는 이세신궁을 찾아가보았지만, 그곳에서 고대 문자가 있었음을 확인할 유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세종이 자신들의 문자를 본따 한글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리얼한 이야기를 프로
그램에 담는다.
다음은 명지대학교 외래교수 임병삼님의 글입니다.
우리 문자의 기원설
그러면, 우리 말의 경우는 어떠 할까요? 잘 알려져 있듯이 통일신라 시대에 설총이 한자의 음과 뜻을 따서
간편하게 만든 이두(吏讀)가 향가에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 가나(假名)의 기원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세종대왕께서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을 통해 만드신 28자의 훈민
정음(訓民正音)에서 비롯된 것임은 잘 알고 계시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훈민정음이 옛 전자(篆宇)를 본받아 만든 것이라고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기록되어 있는데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과연 옛 전자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학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몇 가지 내용을 간추려서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1) 세종대왕 친제설
이 주장은 1940년 안동에서 훈민정음해례본(세종 28년 9월 1O일)이 발견되면서 한글의 기원설로 확고하게 우리나라 학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주장이기도 하지요.
이 책에 의하면 '초성글자의 기본자는 天.地.人의 3재(三材)를 본 떠 만들었다.' 고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
이죠.
조선조의 제 4대 성군인 세종이 집현전을 개설하고 그 곳에서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의 학자들로 하여금 한자와는 다르면서도 사용하기에 쉽고 간편한 글자(諺文)를 만들도록 하여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세종시대 이전에는 어떠한 형태의 문자도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따르고 있습
니다.
세종대왕에 의한 독창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설이지요.
(2) 산스크리트어(梵字) 유래설
조선조의 제9대왕인 성종때 제기된 설인데. 성현이라는 학자는 '용재총화'라는 저서에서 '초종성 8자, 초성
8자, 중성12자의 글자모양은 범자의 글자모양에 기대어 만들었다.' 고 하여 처음으로 범자기원설을 제기하
였죠.
그 후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문글자의 모양은 모두 범자를 본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글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3) 파스파 유래설
파스파문자는 인도계의 티베트문자에서 파생한 것으로 원나라 세조(쿠빌라이)때 훈민정음보다는 170년이
앞서 제정된 것으로 중국 내륙지방에서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선조 후기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원(元)의 파스파는 소리글자며 중국글자는 모양을 주로한 글자이므로 우리 언문과 가까운 글은 몽고글자이지 중국글자가 아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실 때 명나라 학사인 황찬이 귀양살이를 하는지라 성삼문 등을 보내어 질문하게 하였
는데 13번이나 왕래하게 하였다.
이 때가 원이 망한지 겨우 79년이 지난 때이므로 황찬이 우리나라에 전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몽고글자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유희는 언문지(諺文誌)에서, 또 최근엔 이근수 박사(훈민정음 신연구, PP. 185~192, 1995)가 파스파
문자와 훈민정음 두 문자간의 창제배경과 목적이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한 바도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역사학자인 레드야드 역시 고전(古篆)의 뜻을 몽고전자(蒙古篆宇) 의 약자로 보고 이것이
곧 파스파문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장한바 있습니다.
본설의 강점은 세종 당시에 잘 알려진 창제문자라는 점, 글자의 모양이 네모꼴로 유사하며, 특히 ㄱ, ㄴ,
ㅂ, ㅅ의 모양이 비슷한 점, 문자의 구성원리와 운용이 비슷한 점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고전(古篆)기원설
전서(篆書)란 BC 3세기경 중국에서 사용하였던 한자의 한 형태인데, 이것을 모델로 하여 한글이 만들어졌
다는 것입니다.
정인지의 훈민정음서문, 최만리의 언문창제반대상소문,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에서 주장되었던 설이지요.
이 밖에도 서장문자기원설, 창호상형(窓戶象形)기원설(에카르트,1928), 太極事象기원설, 거란 여진문자기
원설, 일본의 神代文字기원설, 팔리문자기원설 등이 있으나, 이보다는 다음에 소개하는 가림토기원설이
가장 설득력있게 대두되고 있으므로 그 개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5) 가림토(加臨土/加臨多文) 유래설
이 설은 고려말 이암(李庵, 1297-1364)이 저술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기록되어 있는 정음(正音) 28자가 가림토문자라는 설입니다.
그리고, 그의 현손인 이백(李佰, 1455-1528)이 중종때 찬수관(撰修官)이 되어 편찬한 태백일사(太白逸史)
에도 가림토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속에는 태백교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逸新考)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단군을 시조
로 하는 단군조선의 민족사를 편찬하는 과정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다시 제기가 된 것은 83년 10월에 열렸던 제2회 한국사 학술대회에서 재야 사학자인 안호상 박사 등에 의해서 입니다.
그는 단군세기를 인용하여, 3세 단군인 가륵(嘉勒)이 재위 2년(BC 2181)에 삼랑 을보륵(Z普勒)에게 명하여 正音 38자의 가림토문자를 만들었는데, 이 38자에서 10자를 제외한 28자가 훈민정음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한자의 위세에 눌려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으나 일본에서는 신대문자(神代文字)의 일종인 아히루문자(アヒル文字)로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최근엔 개천학회 회장이었던 송호수 박사(광장,84.1월호)도 세종 이전에도 가림토문자가 이미 존재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BC 2181년이라면 수메르상형이나 이집트상형문자가 있었을뿐 중국의
갑골문자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음소문자인 가림토가 생겨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더구나, 가림토기원설의 출처인 단군세기(檀君世紀)는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들어있는 내용인데, 이것이 고려말에 쓰여진 이암의 단군세기 원본의 내용과 같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
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근수 교수는 단군세기 원본에는 가림토의 내용이 없는데 후일에 가필하여 첨가한 것
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림토문자는 11-17세기에 중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태인들이 히브리어를 본떠 만들었다는 조철수씨(신동아, 97년5월호, PP.360-381)의 주장과 세종이전, 어쩌면 단군조선 시대부터 우리 선조들에 의해
만들어졌었다는 두 설이 대립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6) 훈민정음, 가림토문자, 히브리어의 유사성
그러면, 조철수씨의 가림토기원설(신동아, 97년 5월호, PP.360 373)에 대한 개요를 좀 더 소개해 볼까 합
니다.
11-17세기에 걸쳐 중국에 거주해 왔던 유대인들이 1489년에 개봉부(開封府)지방에 중국 유태교인 청진교(淸眞敎 또는 桃筋敎)의 예배당인 청진사(淸眞寺 또는 禮拜寺)를 중건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세운 한자로
기록한 석비(重建淸 眞寺記)에 의하면 그들은 아담의 19대손인 아브라함의 후예로서 천축(天竺)에서 하늘의 명을 받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17세기까지도 녕하(寧夏), 운남(雲南), 광동, 북경 등지에 수만명이 중국의 높은 관직에 오르며 살았으나 18세기부터는 그들의 회당터(17m), 비석(4개). 성서두루마리와 기도문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 합니다.
조철수씨의 주장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중국계 유태인이 만들었다는 가림토문자에서 왔으며, 이 가림토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먼저, 자음을 보면, 히브리어는 22자, 가림토는 38자, 훈민정음은 28자 입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훈민정음과 가림토의 자음은 서로 닮은 글자가 매우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에서 훈민정음 초성의 음운체계는 5음(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이 기본인데 여기에 반설음, 반치음을 합하여 중국처럼(宋 ; 洪武正韻序) 7음체계로 분류했
다고 합니다.
따라서,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는 7음이면서도 그 기본은 히브리어처럼 5음체계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의 해설은 성리대전(性理大全), 절운지장도(사마광; 切韻指掌圖,1019-1086)등의 역리에 따라
초성을 풀이했습니다.
즉, 사람의 성음(聲音)을 5행(五行)에 근본을 두고 오음(五音), 사시(四時), 음악의 오음(五音), 방위(方位)
등과 관련지어 설명을 한 것입니다.
중국의 오음은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 목화토금수)이나 훈민정음은 후아설치순(喉牙舌齒脣: 수목화금토)
으로서 히브리의 '창조서'와 그 순서가 일치하는 사실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창조서에서도 음운체계를 사방(四方), 사시(四時), 오모음(五母音)등 숫자와 역리로 풀이한다는 것이죠.
히브리어의 음운서인 창조서(쎄페르 예찌라, AD 200-400)는 자음 22개의 신비함을 역리로 해석한 책이라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자음은 BC 3세기에, 모음부호는 AD 9-1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이 창조서중 가온(Saadia Gaon, AD 950-1000)이 편찬한 기도문을 중국내의 유태인들이 사용했다는 기록
이 있으며, 2장 3절에 22개 히브리 자음에 대한 5음체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개의 기본자는 3모자(母字)와 7복자(復字) 및 12보통자(普通字)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세 모자는 불(sh; 하늘), 물(mayim; 땅), 바람(avir; 사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셋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그 하나에서 셋을 알고 셋이 모여 하나를 이룬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태백교의 근본철학인 삼일신고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 닮은 데가 많다는 것이죠.
하지만 조박사의 이론에 반대하는 이론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창호상형설을 주장했던 에카르트는 히브리문자와 한글의 글자꼴이 완벽히 닮은 것이 아니라 하였고, 권재선 교수는 가림토가 조선조말기에 중국말 표기를 위해 만들어진 한글의 변형체라 했으며, 김정수 교수는 히브리어에서 한글로의 발전과정이 없이 비약한 점이 비논리적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기림; 신동아, PP.376-381,97년 5월호).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현존하는 세계의 모든 문자들이 기본적으로는 중동지방에서 유래하여 세계 각지
로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데,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수메르문자로부터 이집트상형문자로, 이집트문자에서 페니키아문자를 거쳐
그리스와 아람문자로, 그리스문자에서 라틴계와 슬라브계 문자로, 아람문자에서 인도/아리안문자와
시리아, 위글, 몽고, 만주문자 및 아라비아문자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류의 기원은 중동지방에서 출발했으며 그 곳으로부터 인류는 문자의 발달과정에 나타났던 루우트를 따라서 이동해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한자의 기원이 문제가 되는데, 갑골문자의 출현 자체가 BC 1600년경으로 수메르나 이집트문자에
비하면 1700여년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일단은 한자의 기원 역시 중동으로 추리하여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글 글꼴의 기원
세종대왕은 한글을 왜 만들었을까? 초성의 구조적 원리까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정작 당시의 책
들에 실린 한자의 유려한 붓글씨체에 비해 한글은 본떴다는 발성구조와도 너무 거리가 먼 딱딱한 도형이다. 옛 글자의 형태를 모방했다고 『세종실록』에도 밝혀져 있는 한글의 유래에 대한 의문은 문자 디자이너로서 세종대왕의 생각을 더듬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문자는 음성 언어(말)를 시각화하는 2차적 언어다.
즉, 문자는 형태라는 요소와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당시 훈민정음에 밝힌 바, 백성 중에 말을 할 줄 아는 누구도 일상에서 타인과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자는 정보를 기록하고 멀리 있는 사람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왜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정작 글자에 필요한 필법과 전형적인 필체는 왜
훈민정음에 포함시키지 않은 걸까?
단지 기본 골격뿐 아니라 글꼴이라는 외형적 요소의 가변성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한글 창제
연구진의 이해 부족 때문이었을까?
한글 창제 후 세종대왕은 이를 적용한 문헌들을 몇 가지 출간했다.
당연히 활자와 목판을 이용한 인쇄본이다.
목판이든 활자든 인쇄용 글자를 판에 새기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의 손으로 글자를 써야 한다.
『훈민정음』과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의 본문 글자는 손으로 자연스럽게 쓴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도형에 가깝다.
이 책들 안에 있는 한자들이 모두 붓으로 쓴 자연스러운 필기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창제 당시 한글은
필기용이라기보다 인쇄용 글자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적어도 기하학적 글꼴이 조형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지기 어려운 시대였음을 고려한다면, 함께 인쇄된
한자처럼 우아한 필기체 형태의 글자로 개발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 글자가 말을 담을 완벽한 그릇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겠지만, 단순히 어리석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 위한 것이 창제의 동기라는 데는 다소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대목이다.
2. 한글꼴의 기원설들
미국의 디자이너 허브 루발린(Herbert F. Lubalin)은 모방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아이디어는 일상 속에 편재하는 것이지 하늘에서 어느 날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는 보다 많은 것을 관찰하고 머릿속에 그것을 담아두는 데서 시작된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무렵, 이순신에 의해 고안된 철갑선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헌에는 그보다 200여 년 가까이나 거슬러 올라간 이조 초기에도 거북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과 관계가 어떠하든 적어도 거북선이 100% 이순신 장군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
하게 하는 내용이다.
한글 역시 세종대왕이 문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영감에 힘입어 만든 것은 아니다.
긴 세월을 지나면서 다듬어지고 변해가는 다른 모든 언어와 문자의 발전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기간에 한
사람의 발의와 결단, 그리고 몇 사람의 집념어린 노력에 의해 완벽에 가까운 기능을 가진 문자가 탄생했다
는 것이 위대한 것이지 그것이 한 천재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는 신화를 우리가 추앙할 필요는
없다.
많은 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한글이 본떠 만들었다는 고전(古篆)을 한자의 해서체(楷書)
처럼 붓의 힘에 따라 획의 굵기가 바뀌는 서체 모양이 아니라 지금의 고딕체 모양을 가진 전서(篆書)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한 가지 한자 스타일의 모양만을 언급했을 리가 없다.
만들어진 글자는 자연스럽게 붓으로 쓰게 될 것이고 내내 전자(篆字)의 마무리 형태로 일관하기는 힘들었
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획 끝의 모양 따위보다는 직선적인 전체 구조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한자의 형태에서 가져
오지 않았을 여지를 남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글 이전의 글자는 모두 한자를 빌려 쓴 것들이다.
신라 시대에는 우리말을 모두 한자로 적었다.
그 이후로는 오히려 한자말을 많이 섞으면서 토씨 같은 것만을 한자로 덧붙여 표기하는 수준이 되었다.
이처럼 토씨나 어미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한자만으로 우리말을 다 적을 수 없었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처음 훈민정음의 각 낱글자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가령 ㄱ, ㅅ, ㄷ이 기윽, 시읏, 디읃으로 표기되었어야 하지만 이와 같은 소리를 가진 한자를 찾을 수 없었고, 우리말에서도 윽, 읏, 읃은 별다른 뜻을 가지지 못해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를 가져다 댈 수도 없어 결국 ㄱ
은 기역(役)으로 ㅅ은 시옷(衣, 옷을 의미하는 한자)로 ㄷ은 디귿(末, 끝을 의미하는 한자)로 변통해 적었다. 한자의 음도 제각각이어서 『동국정운』 같은 방대한 작업을 통해 발음을 정리했다.
한자로 적기 어려운 우리말이 갈 수 있는 길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를 빌려
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이다.
조선 시대 당시 중국 문화에 젖은 지식인들이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 글자를 빌려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은 방법은 새 글자를 만드는 것뿐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왜 하필이면 그때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생기고, 이는 최만리 등이 상소문을 통해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은 처음 글자를 만들 때 어떤 글자의 모양을 참고했을까?
『훈민정음 해례본』의 설명대로 발음할 때의 입모양을 처음부터 그리면서 글자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단지 입 모양만 연상했다면 그렇게 간단하고 기하학적인 패턴의 파생보다는 오히려 곡선적인 글자 모양이
만들어지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어떤 글자의 모델에 입 모양을 결합하는 논리로 글자를 설명한 것은 아닐까?
회자되고 있는 몇 가지 한글 글꼴의 원형에 대한 가설은 단순히 의구심에서가 아니라 좀 더 시야를 넓혀
우리글의 위상과 특성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고전 기원설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논란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로 제기되어 왔다.
이렇게 설이 구구했던 이유는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오기 전까지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세종실록』에 '자방고전(字倣古篆 : 글자는 고전을 본떴다)'이라는 한 구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전'은 글자 그대로 옛날 한자의 전서체로 보는 고전기원설(古篆起源說)을 낳았다.
이것은 단지 '전서체의 각이 진 모양(角形)'을 본떴다는 글자의 형태에 국한시킨 견해다.
그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를 닮았다는 '범자(梵字) 기원설'이다.
조선 성종 때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초·종성 8자, 중성 12자의 글자 모양은 범자에 기대어 만들었다."
고 주장했다.
그 후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문글자의 모양은 모두 범자를 본받았다"고 했다.
4. 파스파 문자 기원설
파스파 문자는 훈민정음보다 약 170년 앞선 원나라 세조 때 제정된 문자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파스파 문자 기원설을 주장한다. "세종께서 한글을 처음 만드실 때 명나라의
학사 황찬이 귀양살이를 하는지라 성삼문 등을 보내 질문하게 했다.
이때가 원이 망한 지 겨우 79년이 지난 때로, 황찬이 우리에게 전한 것은 다름 아닌 몽고글자에 대한
지식이었다."
유희의 『언문지』에서도 한글의 기원이라고 언급되는 파스파 문자는 세종 당시 이미 잘 알려진 문자라는 점, 자형이 정사각형이고 특히 'ㄱ ㄷ ㅂ ㅅ' 등의 글자가 비슷한 점, 문자의 구성 원리와 운용이 유사하다
는 점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 각종 기원설이 힘을 잃게 되었지만 이후
에도 한글의 기원설은 이따금씩 나오고 있다.
5. 가림토 문자 기원설
그 중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이 1983년 제기된 '가림토 문자설'이다.
가림토 문자 기원설에 따르면, 고려 말기의 학자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 3세 단군 가륵이 재위 2년(서기
전 2181년), 삼랑 을보륵에게 명해 환웅 천황시절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짐승가죽에 문자화했던 옛 기록을 정리해 정음 38자의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는데, 가림토 문자 38자 속에는 한글
28자가 거의 다 원형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이다.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던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은 사실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쥬신족의 일부도 가림토 문자를 사용했는데 이들이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
해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 되었고, 놀라운 것은 이들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 중에서 가림토 문자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자는 일반적으로 그림문자와 상형문자의 단계를 거쳐 표음문자로 발전하는 것이 원칙인데, 수메르 상형
문자와 이집트 상형문자 정도가 존재할 무렵인 BC 2181년에 음소문자가 존재했다는 것은 문자학의 상식
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림토 문자에 대한 주장은 근거부터 국어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한『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가림토문자의 출전 『단군세기』가 고려 시대의 원본
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도 이 주장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6. 신대문자 기원설
일본 미에 현에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700여 년 전쯤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신궁이자 모든
신사의 본종인 '이세신궁'이 있다.
이곳에는 외부에 잘 공개하지 않는 보물로 '신대문자(아히루 문자)'라고 부르는 문자가 새겨진 거울과
문헌이 있다.
일본에 한자가 전파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이 문자의 생김새가 한글과 닮았다.
때문에 과거 일본은 한글이 일본의 신대문자를 베낀 것에 불과하며, 이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했다
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여 신대문자의 정체를 파헤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전면 중단하고 연구
결과를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자신들에게 절대로 불리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7. 히브리 문자 모방설
가림토 문자는 중국에 와서 살던 유대인들의 히브리 문자를 모방한 것이며, 따라서 훈민정음은 이 가림토
문자를 바탕으로 중국 음운학과 히브리 문자, 히브리어 음운학을 참조해서 창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997년 5월 《신동아》에 기고한 조철수 서울고전고대문헌연구소 고문헌담당소장의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이 본떴다는 고전은 가림토 문자이며, 이 가림토 문자는 기원전이 아니라 11~15세기 중국에
와서 집단을 이루어 살던 유대인들의 문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훗날 집현전 학자들이 중국을 여러 번 왕래하며 중국의 성운학을 기준으로 히브리어 음운체계와 비교해
다시 훈민정음과 그 해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유대인들은 서기 9세기 무렵부터 무역을 위해 서역 길을 따라 중국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한 것
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고 공직에 기용되기도 하면서 중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유대교도 중국에 알려지면서 그들의 문헌과 성경도 전해졌다.
중국 유대인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모음 부호는 _ ..| ∵ 등이고 이는 | _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의 모음은 가림토 문자 첫 11개의 부호와 같고 이 모두 히브리어 모음 부호와 기본 구조가
유사하다.
전 세계에 알려진 알파벳 모음부호 중 히브리어 모음과 훈민정음 모음처럼 비슷한 것은 없다.
또한 히브리어의 모음부호 의 음가는 [o]이며 한글 방점 의 음가 역시 [o]와 [a] 사이 정도의 음으로
대단히 유사하다.
히브리어 자음 ם [m]은 한글의 ㅁ과 같으며, 이처럼 히브리어 문자를 조금씩 바꾸면 가림토 문자와 훈민
정음의 초성 글자를 만들 수 있다.
ך[k], צ[tz], בּ[b], ן[n], ט[t], כ[k], ק[k], ל[l], ש[s], ג[g] 등의 글자는 방향을 돌리거나 획을 하나 더하거
나 혹은 빼면 각각 ㄱ, ㅈ, ㅂ, ㄴ, ㅌ, ㅋ, ㅋ, ㄹ, ㅅ, ㄱ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פ[p] 역시 한글의 ㅍ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훈민정음의 모음은 홀로 음절을 이루지 못한다.
히브리어도 이와 마찬가지로 모음 부호는 홀로 쓰여 발음되지 않는다.
이러한 체계는 유럽의 다른 알파벳과 다르고 오히려 한글과 유사한 부분이다.
재미있는 점은 히브리어 의 모음이 초성의 아래 붙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의 ''은 방향만 돌려놓으면 한글의 '맘'이라는 글자와 너무나도 흡사하게 생긴 것을 알
수 있다(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자를 써나간다).
무엇보다 히브리어 문자는 한글과 마찬가지로 정방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글자의 수도 자음 22자와 모음 5자로 훈민정음 당시의 글자 수와 거의 같다.
당시의 히브리 음운서가 표방하고 있는 후, 구개, 설, 치, 순(喉, 口蓋, 舌, 齒, 盾)의 다섯 가지 음운체계가
발음기관 순서에 따라 후아설치순(喉牙舌齒盾)으로 설명하는 훈민정음의 제자해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글자꼴이 서로 다르고 그 사이에 점진적인 변화의 증거가 없다는 점 때문에 이
주장은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외에도 한글의 기원설로는 서장문자 기원설, 고대문자 기원설, 창호상형 기원설, 태극사상 기원설, 거란
여진문자 기원설, 이론 신대문자 기원설, 팔리문자 기원설 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주장도 사실의 증거가 부족하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글꼴의 차용에 대한 부분일 뿐,
한글의 과학적 원리와 우수성은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
다만, 정치적인 용도가 아니라면 수백 년간 무시되어 왔던 것처럼 또다시 무조건 추앙되어야 할 이유 또한
없을 것이다.
8. 한글은 다듬고 변할 수 있는 문자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천지창조의 순서가 1장과 2장에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바는 사람을 가장 나중에 만들지만, 2장에는 오히려 다른 생물들보다 먼저 창조된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불필요한 기록에 대해 무지하거나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첫머리부터 만나는 이 같은 모순을 안고 얻는 신앙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언어는 세월 속에서 서서히 변해간다.
세종대왕의 뜻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여전히 그 모양과 용법을 고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의 뜻도 다 알지 못한다.
무책임한 파괴나 실험이 아니라면 문자의 변화를 직시하는 일도 필요하다.
* 위에 내용으로 보아 우리문자나 글꼴의 기원은 여러가지 설들로 나름 논리 전개에 있어서 일견 맞추
어져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성서를 바탕으로 하는 이론으로 언어 뿐만 아니라 종족에 대하여서도 한민족과 연관
시키려는 이론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종교란 주관적이고 개별성의 특징이 있고, 객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혼동하여 자신의 생각을 보편
타당하지 않게 논술한다는 자체가 주변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신봉하는 것들을 확대 하여 주장 할 수는 있겠으나 사회 통념상 어떠한 선은 자제
하는 것이 마땅 할 것입니다.
또 이러한 모든 원인은 공간적으로 그 기원이 어디냐에 따라 이러한 이론이 발생 할 수 있겠고, 시간적으로
언제 그 기원이 발생하였는가에 따라 이러한 이론이 만들어질 수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지금의 중동지방을 인류문명의 시원이라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와 그 시기가 언제였느냐에 대한
것으로, 참고하여 말씀드리면 가림토는 기원전 2,300 여년 전 지금으로부터 4,300여년 전에 추정 기원
으로 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여러 글꼴의 문자들이 기원전 4,000여년 전에 원시형의 각종 문자를 사용
하여 가림토가 원시문자에서 이어져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이 기원전 3,000여년 전으로 그 문명의 원시문자 사용의 대상이 수메르
인들이라 보면 문자나 문명 발생시기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