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빨치산의 활동은 6·25전쟁 발발 뒤에 벌어진 것에 비해서는 규모도 작고 피해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여수와 순천에서 벌인 14연대의 반란 주동자 일부가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세를 조금씩 불려가던 상황이었다.
6·25전쟁 발발 뒤의 빨치산 활동은 거셌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던 북한군이 패잔병이 되어 지리산으로 모여들었고, 이현상을 비롯한 남로당 무장세력이 가세하면서 병력이 5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활동했던 곳은 ‘대한민국 안에 들어선 또 다른 북한’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에 비해선 규모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전쟁 전의 빨치산은 나름대로 암약하면서 대한민국 남부 지방의 치안과 질서를 크게 어지럽히고 있었다. 절대 방심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달리 경계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북한이 6·25를 준비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장 세력을 계속 내려 보내,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빨치산과 함께 남한을 전복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1948년 11월 이른바 ‘강동(江東) 정치학원’ 출신의 남로당계 유격대원 180명을, 강원도 평창 서북쪽 태기산으로 침투시킨 사건이다. 강동 정치학원은 47년 9월 평양 인근의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에 있던 일제시대 탄광 사무소와 합숙소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초기에는 각 도당 부위원장과 부장 등을 교육해 남파하던 곳이었다. 남로당 당 간부 양성소였던 강동 정치학원은 48년 가을 이후 본격적인 게릴라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해, 월북한 남로당계 청장년들을 양성한 뒤 남파했다.
1948년 11월 국군 장병이 반란을 일으켰던 동료 군인들을 체포하고 있다. 48년
10월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14연대 부대원들은 대부분 진압됐지만
일부는 지리산 등으로 도주해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사진은 유명 종군작가
이경모씨가 촬영한 것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렸다.
북한이 100~400명 규모의 무장 게릴라들을 전쟁 직전까지 남파한 것은 모두 열 차례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48년 제주 4·3 폭동을 주도한 김달삼 부대였다. 이들은 49년 8월 3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그 직후에 들어온 이호제 부대의 병력 360명과 함께 경주 북쪽 보현산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남파 도중 국군 토벌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유지한 채 보현산까지 내려와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머지 남파는 대부분 38선 일대의 군과 경찰 검색에 걸려 교전 끝에 상당수가 사살된 뒤, 극히 일부 병력만을 유지하고서 남한 일대에 숨어들었다.
남파 게릴라들이 침투한 지점은 주로 동부 지역의 강원도 산간이었다. 대부분 국군과의 교전으로 상당수 병력을 잃었지만, 일부는 계속 남하한 뒤 남부 지역의 각 산 속에 몸을 숨긴 채 게릴라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내가 맡았던 5사단 작전 구역도 꼭 지리산에만 머물지 않았다. 빨치산들은 지리산 인근의 내장산 등 다른 산에도 숨어 들어가,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식량을 구해 연명하면서 각종 파괴 활동에 나서고 있었다.
당시 빨치산들은 소규모로 움직이면서 광주 등 대도시에도 진출했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경찰서와 지서는 돌과 시멘트로 망루를 만들어 기관총을 배치해 놓고, 주변을 마치 성채처럼 참대로 둘러싼 곳도 있었다. 광주 시내의 경찰서 또한 모래주머니로 진지를 만들어 빨치산들의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빨치산은 게릴라였다. 소규모로 은밀하게 다가와서 급작스러운 공격을 벌인 뒤 바로 사라지는 스타일이었다.
우리는 사실 여러 번 이들에게 당했다. 한 번은 목포 형무소의 죄수 350여 명이 탈옥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는 경찰과 함께 함평 일대에서 이들을 대부분 붙잡아 형무소에 재수감했다. 며칠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축하연을 열었다. 군수와 경찰서장, 5사단에서는 참모장 석주암 대령이 참석했다.
빨치산들은 이곳을 습격했다. 군 병력은 소수에 불과해 아주 위험했지만, 인근의 1개 소대 병력이 발 빠르게 움직여 석주암 대령과 군수, 경찰서장 등 유지들을 구했다고 했다.
49년 9월에는 이른바 ‘광양 사건’이 벌어졌다. 백운산 일대 공비 토벌작전에 나섰던 15연대 병력 중, 광양읍의 초등학교에 주둔 중이던 1개 대대가 빨치산의 습격으로 수백 명이 생포되고, 새로 받은 M1 소총을 비롯한 많은 무기를 빼앗긴 일이었다.
이들은 이어 광양 경찰서를 습격했지만 실패했다.
경찰서는 무너지지 않았던 데 비해, 화력을 제대로 갖춘 5사단의 1개 대대는 어이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경계를 제대로 했던 경찰과 이를 소홀히 했던 5사단 부대의 수준 차이에서 비롯한 사건이었다.
빨치산들은 우선 학교 밖에 있던 보초들을 살해한 다음, 잠을 자던 부대를 덮쳤다고 한다. 일부 병사가 저항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수백 명이 잠결에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빨치산의 짐꾼이 돼, 그들의 근거지 근처까지 무기와 식량을 날라다 주고 풀려나 돌아왔다.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수백 정의 무기를 빼앗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토벌작전에 나서는 내가, 보기 좋게 한 방 얻어맞은 셈이었다. 군대라고 했지만 제대로 훈련된 군대가 아니었다. 사격술과 작전에 따르는 수많은 사항을 제대로 숙지한 군대가 아니었다. 적이 출몰하는 상황에서도, 넋을 놓고 잠을 자는 그런 생각 없는 군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을 다듬어야 했다. 지리산에도 가을이 오면 수많은 나무가 잎을 떨어뜨릴 것이다. 그런 가을이면 빨치산도 몸을 숨길 곳이 없어진다. 그때까지 나는 이 군대를 다듬고 또 다듬어 작전을 펼쳐야 했다.
적 앞에서 무력하게 주저앉는 군대로서는 절대 승산이 없었다. 낙엽이 뒹구는 가을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절치부심(切齒腐心)으로 훈련을 거듭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