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 이름
상인 9명(가명: 김덕만 등) (18 C 초엽 | 미상)
상인 분류
사상 - 기타
등장인물
상인분류 - 장흥사상(장흥에서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장흥사상이다.)
업종 - 선상(船商)
활동지역 - 장흥
사건시기 - 숙종
전거 - 『표인령내등록』 (漂人領來謄錄) 3 신사 5월 13일
시대적배경 1번
전국적 상업활동으로 자본축적한 경강상인
당시의 한강은 서울의 경제적 수요를 공급하는 주요한 운송로였으며 그 연변 자체가 하나의 경제권을 형성하였고 특히 용산, 서강이 그 중심지였다. 이와 같은 경제활동이 활발하였던 경강 연변에는 많은 상인들이 모였고 특히 조선 후기 상업발전을 통해 상업자본의 집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경강상인의 자본은 곡물, 어물을 중심으로 하는 운송업의 발달과 전국의 포구와 내륙 강변을 왕래하면서 전개되는 선상활동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집적된 자본이 바탕이 되어 도고상업이 발달하여 그 자본 집적도는 급격히 증가하여 갔다. 경강상인의 자본 집적 중 그 바탕은 선박을 이용한 정부의 세곡과 양반층의 소작료를 조운하는 것이었다. 17,8세기 이후부터 경강상인이 곡물운수업을 독점하고 운반과정에서 화수(和水), 투식(偸食), 고패(故敗)등의 부정을 통하여 세곡을 착복하고 백성과 정부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경강상인의 상업활동 범위는 전국적이었고 취급상품은 곡물, 소금, 어물이 중심이었다. 특히 곡물은 서울 수요량의 대부분이 경강상인에 의해서 조달되었으며 이는 세곡과 소작료의 금납화에 따라 더욱 발전하였다. 서울의 도시적 성격이 더 강해지자 곡물상으로서의 그들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져 대규모 조직적인 매점상업 즉 도고상업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경강상인이 세곡 조운이나 선상활동에 이용하던 선박의 보유방법은 우선 그것을 구입하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선재(船材)와 조선비(造船費)를 지급 받고 선박을 건조하여 선적을 관부에 두되 경강인이 그 선박으로 대동미를 운반하기도 하였다. 경강상인들은 축척된 상업자본을 토대로 조선업에까지 진출하였다. 경상인 가운데도 점차 조선업자로 전환하여 경강에서 선재도고를 형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대적배경 2번
조선상인의 중개무역 주도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시키다
17세기 후반 이후 전개된 청~조선~일본의 국제교역은 16세기적인 동아시아 국제 교역체제를 기본적으로 계승한 것이었지만 중국과 일본의 직교역로가 봉쇄된 상황에서 중국의 비단원사를 수입하여 이를 왜관에서 일본상인들에게 은화를 받고 수출하는 조선상인의 중개무역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러한 중개무역은 18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는데 중개무역을 통해 얻어진 막대한 부가 대부분 서울의 역관층과 권세가문, 사상층에게 집적될 수 있었다. 중개무역으로 인한 상업 이익은 국내의 상품 생상과 상업유통을 자극함으로써 사상이 성장하고 상업자본이 축적될 수 있었고 이는 결국 국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국내외 상업계에 있어서의 새로운 여건 조성은 특히 서울의 시전 상업에 집중적으로그 영향을 미쳤고, 이 때문에 난전상인이 성장했을 뿐 아니라 시전상업체제가 재편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민간에 집적된 상업자본은 서울의 상품화폐경제를 민간부문이 중심이 도는 상업체제로 변화시킨 중요한 요소였다.
시대적배경 3번
장과 장을 잇는 중간 유통 체계의 발달
보부상이나 객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상품 생산이 전문화되고 거주지가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정기 시장망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등장하였다. 여기서 지방 향시는 상품의 유통과정에서 행하는 기능에 따라 그 규모나 거래의 내용, 방식 등에 차이가 있다. 이를 크게 대장(大場)과 소장(小場)으로 나눌 수 있다.
대장은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함과 동시에 원격지 유통을 담당한다. 즉 대장은 도매 기능을 통하여 소장에서 나온 산물을 집하하고 외부의 상품을 소장에 배급함으로써 유통권을 형성한다. 소장은 농민들이 하루 안에 장을 보고 갈 수 있는 지역적 범위를 한계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단위 시장이다. 농촌의 일반적인 정기시장인 소장들은 대개 20~30리(약10~15km) 간격으로 떨어져 존재한다. 이 거리는 소비자인 농민이 하루 안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이며 장과 장을 옮겨다녀야 하는 상인들이 이동하기에도 적당한 간격이다.
소장권의 상품유통을 주로 담당하는 층이 소상품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 농민층이라면 대장권에서는 주로 상인들이다. 조선 후기에 이러한 유통을 담당한 상인들은 보부상과 선상 그리고 이들 객상들을 대상으로 위탁판매를 하는 객주들이었다. 상설 점포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사에 객주는 소장권간, 대장권간, 그리고 원격지 유통을 매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객주가 없는 장시에서는 큰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행상들이 택하는 길은 대개 지름길이다. 장과 장 사이의 거리는 즉 지름길을 이용한 행상들의 이동 시간도 고려되었다.
시대적배경 4번
교통의 발달로 인한 상품유통권의 확대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의 발달로 인해 상품유통권의 확대와 화폐유통의 전국적 확산은 새로운 유통 시장의 창출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18세기 말 이후 지방 장시의 대형화 추세와 연결되면서 상품유통경제를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지역 내의 상품유통권과 전국적 상품유통의 중심지였던 대포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조선후기의 상품유통권은 서울을 중심으로 단일한 상품유통권으로 총합되어 갔던 것이다. 포구를 중심으로 한 포구시장권과 장시를 중심으로 한 장시시장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국적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장권을 기반으로 농촌에서 생상된 생산물이 농촌장시를 통하여 주간 도매상에게 매집되고 이는 포구가 있는 산지 매집상에게 모였으며 이는 다시 선상과 포구 주인층에 의하여 서울이나 다른 유통지역으로 운반되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대체로 18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완결되었다. 이른바 전국적 시장권이 형성되면서 그 중심지였던 서울도 종래 정치 행정 중심지에서 상업도시로 변화되었다.
시대적배경 5번
인삼상인(人蔘商人)이 누렸던 상업적 이윤에 대한 추측
밀매를 벌이고 있던 인삼상인이 누리고 있던 상업적 이윤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한 액수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다음의 기사들을 통하여 대략적인 추측은 가능하다.
① 인삼매매는 커다란 이익이 있는 있었기 때문에 장사아치들[商賈輩]이 죽음을 무릅쓰고
법에서 금지하는 것을 어겼다.(『비변사등록』 57 숙종 32년 8월 8일)
②“한낮 풀뿌리[草物=인삼]로 은(銀)을 바꾸는 큰 이익이 있고, 은(銀)으로 죽음을 바꾸는 큰 욕심이 있으니 바로 막으려 한들 되겠는가” (『성호사설』 14)
이상으로 보아 인삼 잠매가 가져다 주는 상업적 이윤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한 인삼 판매를 통하여 얻어지는 왜은(倭銀)이 국가로 들어오지 못하고 잠상의 손에 잠수(暫受)되어 이들의 ‘이익을 구하는 바탕(取利之地:취리지지)’이 되고 있다.(『비변사등록』 45 숙종 17년 10월 17일)는 지적을 보면, 인삼밀매를 통한 잠상의 자본 축적이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짐작케 한다.
조직적이고도 대규모적인 인삼 밀수출을 통하여 상당한 규모의 상업자본을 축적하면서 부상(富商)으로 성장해 가고 있던 잠상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활동지역 기타
사건
장흥(長興) 상인 9명이 배를 빌려 동업을 하다
숙종 25년(1701)
장흥의 상인 9명도 스스로 사공, 격군이 되어 선박을 임대하여 공동으로 상업활동을 하였다.
전거- 『표인령내등록』 (漂人領來謄錄) 3 신사 5월 13일
출처: 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