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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와 중공군의 제1차 공세
제 1절 작전 개요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와 중공군의 제1차 공세는 평양을 점령한 국군과 유엔군이 청천강 선으로 진출하여 1950. 10월 24일 한.중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을 개시하자, 압록강을 도하하여 적유령산맥 남단에 잠복하여 있던 중공군이 유엔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1950. 10월 25일 공세를 단행함으로서 1950. 11월 5일까지 피아간에 전개된 공방전 및 철수작전을 일컫는다.
청천강선에 도달한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24일 총공세를 개시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청천강을 도하하여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연하는 선가지 진출하였고, 동부전선의 미제10군단은 함흥과 흥남을 점령한 후 장진호와 청진 방면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제1차로 압록강을 도하한 중공군 제13병단은 예하 6개 군단 중 5개 군단을 적유령산맥 남단에, 다른 1개 군단을 장진호 북쪽에 각각 전개하고 있었다. 10월 25일 중공군은 제42군단이 동부전선에서 아군의 전진을 저지 및 견제하는 동안, 서부전선의 제39군단을 비롯한 5개 군단이 운산-희천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국경을 향한 진격작전을 전개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기습으로 전선의 균형이 와해되자, 11월 1일 공격을 중단하고 청천강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청천강 연변까지 진출한 중공군은 11월 5일 공격을 중단하고 적유령산맥 남단으로 이동함으로서 전선에는 일시적 소강상태가 유지 되었다.
작전기간 동안 중공군 및 북한군은 연합체제 하에서 군단급의 대부대 작전을 수행하면서 전선을 서부와 동부로 구분하여 지역작전 개념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에 비해 공군력과 전차 등이 열세하여 재래식 전술에 의한 포위와 침투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대부대의 포위기동과 우회작전을 비롯하여 적극적인 침투작전을 사용하였고, 기만 유인과 침투, 매복전술 등을 혼용하였다. 특히 제2전선 부대가 수행하는 게릴라전은 작전수행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적은 제1차 공세를 통해 서부전선에서는 정주 남쪽-박천-구장-덕천 북쪽을 연하는 선가지 진출하였고,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헤산진-청진을 연하는 선으로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제 2절 작전 계획
1. 유엔군의 작전계획
가. 작전 배경
국군과 유엔군이38도선을 돌파한 후 1950년 10월 중순에 작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북진계획을 전면 수정하였다. 기존 계획은 제1차 목표를 평원선 확보에 두고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잇는 선을 진출한계선으로 설정하였으며, 미 제8군은 평양을 정면에서 공격하고 원산에 상륙한 제10군단이 측면에서 평양을 협공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미 제10군단의 원산상륙에 앞서 평양 점령을 목전에 두자, 맥아더 사령관은 진출한계선을 선천-고인동-평원-풍산-성진 선으로 하고 10월 20일 12:00시부로 미 제10군단을 독립운영하는 결정을 내려 동부와 서부전선으로 각각 분리시키고, 미 제8군은 평양 공격에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사령간은 국군 제1군단의 작전지휘권을 미 제10군단에 넘기고 국군 제1, 2군단으로 평양을 탈환하였다.
한편 10월 15일 웨이크 섬에서 열린 트루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의 회담은 "북한의 조직적인 저항은 북한과 남한 전지역에서 추수감사절까지는 종료될 것으로 믿으며, 평양이 점령되면 나머지 적은 포위되고 전쟁은 끝날 것이다"라는 맥아더 사령관의 의견이 반영됨에 됨에 따라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 되었다.
여기서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희박하고 한다하더라도 이미 시기가 지났고 만약 한다면 우세한 공군력으로 승산이 충분하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의견에 트루만 대통령도 긍정하였다.
중공군 제1차 전역시 피아 접전도
록
중강진 백두산록
강 압 두
압 록 삼부연
강 혜산
압 삼수
록 만포(지안)
강 강계
초산
압 벽동
고장 부전호
록 의주 장진호
대유동
강 신의주 희천
정거동(용암포)
구성 미24-21연대
운산 함흥
태천
영변
박천 호주대대 미5연대
개천
안주
순천
평양
나. 작전계획
북한의 수도 평양을 탈환한 맥아더 사령관은 '50. 10. 24일 미군 부대의 전진한계선을 철폐하고, 서부전선의 미 제8군과 동부전선의 제10군단에 북한 전체를 확보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상군의 운용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관은 국군 제7사단을 미 제1군단에 배속시켜 한만 국경지대의 작전을 한국군이 하도록 조치하면서 평양에 대기주인 미 제1기병사단을 군 예비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국군 제2군단은 미 제8군의 우전방으로서, 군단의 좌전방에 제6사단으로 초산-벽동을, 우전방에 제8사단으로 만포진과 중강진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한편 미 제8군의 좌익은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을 우익으로 안주-운산축선을 따라 수풍호로 진격하고, 좌익인 영국군 제27여단을 배속한 미 제24사단이 청천강을 도하하여 선천을 경유 신의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동북부 지역의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3사단이 미 제10군단의 원산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원산-함흥-흥남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고, 수도사단은 10월 24일 총공격 명령에 다라 한.중 국경선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2. 공산군의 작전계획
(가) 작전 기도 및 방침
중공군은 "선 국군 타격, 후 유엔군 타격"이라는 제1차 공세 기본 작전원칙을 확정하였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국군 2~3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재편한 북한군과 연합하여 "제2전선의 유격활동을 적극화하고 적 후방을 타격하며 서부전선에서는 청천강 이북에서 완강한 반격을 전개하는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완강한 방어로 막대한 손실을 가하고 유리한 여건을 형성한 후 반격작전을 실시한다"는 작전목표를 설정하였다.
(나) 작전계획
중공군과 북한군은 주력을 서부에서 운용하는 한편 선천과 구성지역으로 유엔군을 유인 견제하면서 미 제8군의 돌출부인 온정-희천 부근에서 박천-개천 방향으로 주공을 지향하여 청천겅 이북의 유엔군 부대를 섬멸하기위한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수립하였다.
"제42군단 주력은 동부전선 황초령에서, 부전령지역에서 강계방향으로 전진하는 적을 저지하여 동부전선의 적을 견제하면서 서부전선 주력의 측후방을 엄호한다. 제38군단과, 제40군단, 제42군단 제125사단은 서부전선의 운산과 온정, 희천지역에서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 그리고 제8사단을 각개 섬멸한다"
제 3 절 유엔군의 진격과 중공군의 반격
1. 양측의 상황
가. 적 상황
(1) 전투편성
1950년 10월 24일 국경선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의 정면에는 중공군 제13병단 예하 6개 군단 18개 사단, 포병사령부 에하 3개 포병사단과 고사포 연대 및 공병연대, 그리고 북한군 4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서부전선에는 중공군 제38군, 제39군, 제40군, 제66군과 북한군 제1군단이, 동부전선에는 중공군 제42군과 북한군 제3군단, 제4군단, 제5군단이, 그리고 예비대는 중공군 제20군, 제26군, 제5군단이, 북한군 제6군단, 제7군단, 제8군단(신편중)이 있으며 제2전선에 제2군단이 유격부대로써 진용을 갖추었다.
여기서 북한군 각 군단들의 전투서열을 알아보면 제1군단(상장 이권무)은 제46, 47사단,105기계화사단, 제17기계화사단, 독립연대로 구성에, 제2군단(상장 최현)은 북한군 주력 9개 사단 잔여부대로 제2전선이며, 제3군단(상장 유경수)은 제1.3.8.12.13.15사단으로 강계에 , 제4군단(상장 박종덕)은 제41사단, 해방 제1여단, 제71독립연대, 전차연대로 풍산에, 제5군단(상장 방호산), 제6군단(상장 최용진)은 제18.36.66사단에 전차연대로 관전에, 제7군단(상장 이영호)은 제32.37.38사단으로 화전에, 편성중인 제8군단(상장 김창덕)은 제42.45.76사단으로 연길에서 편성중에 있었다.
(2) 전투준비태세
중공군 지휘부는 유엔군의 전술 및장비의 우세함과 한반도의 지형여건을 고려하여 "진지전과 기동전의 배합작전을 통한 역습과 기습, 매복으로 적의 유색역량을 소멸시킨다'는 작전방침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제39군단은 구성과 태천으로, 제38군은 희천으로, 제40군은 덕천과 영원으로 진출시켜 국군과 유엔군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42군의 1개 사단을 장진호로 진출시켜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저지하며, 주력은 유엔군의 전선을 양단할 수 있는 소백산을 점령한 후 명령에 따라 맹산 이남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나. 아군 상황
1950. 10. 24일 맥아더 사령관은 작전관활권을 동서로 구분하여 낭림산맥(양덕-희천)을 기준으로 서쪽은 제8군이 동쪽은 제10군단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미 제8군의 우익인 국군 제2군단장(소장 유재흥)은 우전방에 제8사단(준장 이성가)이 만포진과 중강진으로, 좌전방에 제6사단(준장 김종오)은 초산과 벽동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한편 좌익인 미 제1군단은 우전방에 국군 제1사단(준장 백선엽)이 수풍호로, 좌전방에 미 제24사단(영제27여 배속)이 신의주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국군 제7사단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장(소장 알몬드)은 마천령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은 미 제10군단이 동쪽은 국군 제1군단이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군단은 우일선에 수도사단이 동해안 도로를 따라 한.소 국경으로, 좌일선의 제3사단이 백암으로 진격을 위해 배치되었다. 좌익인 미 제10군단은 미 제7사단이 북청-혜산진간 진격을 위해, 장진-강계간 공격은 미 제1해병사단이 맡게 되었다.
2. 서부지역 작전
가. 운산(구읍리) 전투('50. 10. 26~11.3)
운산전투는 유엔군의 총공격에 다라 청천강을 건너 한.중 국경의 수풍호를 목표로 진격하던 국군 제1사단과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미 제1기병사단 예하 제5기병연대 및 제8기병연대가 '50. 10. 26~11. 3일까지 구룡강 연안의 운산지역 일대에서 압록강을 건너 최초로 전선에 출현한 중공군 제39군과 조우하여 8일에 걸쳐 전개한 방어전투이다.
중공군 제39군은 '50.10월 중순경 신의주를 거쳐 운산지역으로 잠입하여 운산 북쪽의 백벽산과 오봉산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10월 25일 제1차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은 온정리 정면의 제40군단이 국군 제6사단 제2연대를 공격함과 동시에 운한지역의 제39군단도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청천강을 건너 영변-운산으로 북진한 후 수풍호로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운산에서 중공군과 조우하게 됨으로써 운산동 북쪽 간동-상동 일대의 고지군에 중공군을 제압하기위해 우일선의 제15연대를 , 아울러 좌일선의 제12연대는 운산 서북쪽 고지를 , 제11연대는 운산 남쪽에 예비로 두었다.
운산지구 전투 상황도
▲263
▲199
●국군제1-15연대
상동
↖
백벽산(902m 응봉리
●국군제1-12연대
삼탄천
용포동 ↘ 조양리
구읍리(운산)
●미 제1-8기병연대
입석하동 ↗ ●국군제1-11 연대
오봉산 상초동 구룡강 구정동
(593m) ( 낙타머리 ) ↕
▲나팔고지
하초동(거북머리) 구장
=======================중공군 차단지점
영변 ↗
청천강
↔ ↙ 북원
구룡강
국군 제1-15연대는 10월 26일 삼탄천을 건너 고지의 적을 공격하여 조양동 동쪽의 고지 일대에서 중공군의 반격으로 물러나 조양동 동남쪽 225고지를 일대를 점령한다(옥녀봉?). 한편 제12연대는 운산 서북쪽의 용포동 및 서남쪽 송현동 일대 고지군을 점령했다.
그러나중공군이 운산-용산동간 보급로를 일시적으로 차단하면서 10월 27일에는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수송기로 긴급보급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가운데 사단장은 위기를 직감하고 전방 증원을 위해 예비인 제11연대를 투입하여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연대본ㅂ부는 입석동에서 화옹동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차 1개소대가 긴급출동하여 남쪽 통오를 봉쇄하고 입석동에 위치한 제10고사포대대가 운산방면으로 약간 후퇴하여 지원작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연료와 탄약이 바닥나고 보급니 두절된 상태에서 적의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10월 27일 11:00시경 일본의 아시야 미 공굱기지로부터 출격한 10대의 C-119수송기로부터 보급을 받고 공격을 계속하여게 된다. 제15연대는 199고지 및 263고지 등을 점령하고, 제111연대는 차단된 사닺 주보급로를 확보하게 된다. 제12연대는10월 28일 18:00시 무렵 백벽산 수색정찰중 중공군 포로 2명을 획득하였다. 이 포로로부터도 중공군의 개입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 제8군은 중공군의 침투를 대수롭지않게 보았고 진출이 좌절되어 있는 국군제1사단을 초월하여 수풍호로 미 제1기병사단을 투입키로 하고 평양에서 출발, 선두인 제8기병연대가 용산동에 이르렀다.
한편 국군 제1사단은 지난 이틀간의 공격작전에서 아무러 성과도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우측방의 국군 제6사단이 온정리에서 철수함에 따라 동측방이 노출되고, 태천을 탈환한 좌측의 미 제24사단과도 24km의 간격이 생겨나 북쪽으로 돌출된 사단은 위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10월 30일, 미 제1-8기병연대가 운산에 도착하자 미 제8군은 국군 제1사단은 온정을 경유하여 초산으로, 미 제1기병사단은 삭주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에 중공군 제39군단은 산에 불을 놓아 연막차장을 통하여 유엔군의 공중공격을 회피하는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으며 은밀기동으로 계속하여 아군의 배후로 침투해 들어와 퇴로를 차단하는 노력을 계속 하였다.
11월 1일 국군 제12연대와 미 제8기병의 운산에서의 부대교대가 이루어져 운산을 두고 좌측 용포동과 제안동일대에는 미 제1기병사단의 제8기병연대가, 우측은 국군 제1사단의 제15연대가 조양동과 부흥동 일대에 배치 되었다. 그리고 후방지역은 구룡강을 경계로 국군 제11연대가 동쪽을 , 미 제5기병연대가 서쪽지역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예비대인 국군 제12연대는 운산 남쪽 입석에 집결하였고 미 제7기병연대는 청천강 남안의 개천에서 국군 제2군단 지역의 작전에 대비해 측방엄호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1월 1일 14:00시에 제5기병연대 제3대대가 구룡강 동쪽으로 이동해서 구장동 서쪽의 운흥리 계곡에서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와 연결하여 군단간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중공군 제39군은 제115. 116사단을 투입하여 아군을 압박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오봉산 남쪽의 하초동 고개를 점령하여 운산-용산동간 도로를 차단하여 미 제8기병연대와 국군 제15연대가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결국 미 제5기병연대의 퇴로 개척도 실패로 돌아가고 국군 제15연대는 구룡강 동쪽의 상장동으로 물러나고 미 제8기병연대는 송현동과 입석동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으나 삼면이 포위되고 말았다.
한편 국군 제2군단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중궁군 제38군단과 제40군단이 청천강 계곡을 향해 쇄도하자, 운산지역의 부대철수가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로 인해 11월 1일 20:00시에 미 제1군단장은 낙동강에서 진격하면서 처음으로 국군 제15연대와 미 제8기병연대를 용산동-영변선으로 철수를 명하였다.
하지만 이 시간에 국군 제15연대는 중공군 제116사단의 공격으로 1시간만에 연대가 와해되어 진지가 돌파되고 중화기와 통신장비가지 유기한 채 분산 철수하였다.
미 제8기병연대는 중공군이 철수로를 차단하고 있어 통로개척이 어려웠고 결국 산등성이를 타고 각자 탈출하는 상태에서 제3대대는 완전히 적중에 고립되어 대대 홀로 6차례의 중공군 공격을 견뎌내는 투혼을 발휘했으나 11월 2일 날이 밝은 후에 재편성을 해보니 부상병 170명을 포함한 370명만 남았고(장교 10명, 병 200명) 전차 3대가 남아있었다.
한편 제5기병연대는 하초동 서북방 나팔고지의 중공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350명의 인명피해만 발생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11월 2일 15:00시에 구축작전을 포기하고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는 국군 제2군단 전선이 무너지면서 중공군 제38군단과 제0군단이 개천 정면으로 남하함에 따라 청천강 방어선의 형성이 요구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의 운산지역 전투는 1주일 동안 중공군의 압력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으나 결국은 방어에 실패하였고 대부분의 보유장비를 잃었으며 영변과 용산동 지역으로 철수 하였다. 특히 국군 제1사단을 지원하기위해 출동한 미 제1기병사단은 제8기병연대가 1,500여 명이 실종되었고 국군은 전사 66명, 부상 267명, 실종 471명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중공군 사살은 332명, 포로는 11명을 획득하였고 비로소 미 제8군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 구성-정거동 진격작전('50. 10.29~11.1)
구성-정거동 진격작전은 미 제1군단의 좌일선을 담당한 미 제24사단과 배속된 영국군 제27여단 및 호주군 제3대대가 선천을 경유하여 신의주로 진격하던 전투이다.
미 제1군단의 좌익인 영연방 제27여단은 10월 25일 박천 인근에서 대령강을 도하하였으며, 대령강 서쪽 5km 자점에서 적과 조우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제17기계화단이 태천강과 황해 남부해안을 따라 갈현동과 박천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영 제27여단은 공중공격과 포병공격으로 전차 10대와 자주포 2대를 격파하면서 낙관적인 판단에 따라 계속 진격하였다.
한편 내륙으로 진출하는 미 제24사단에 배속된 미 제5연대전투단은 영연방에 이어 청천강을 도하하고 1950년 10월 28일 다시 박천에서 대령강을 건넌 후 영 제27여단의 우측에서 태천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였으며 태천에서 적 전차 9대와 자주포 4대를 격파하였다. 태천을 점령한 제5연대전투단은 10월 31일 구성을 점령하였으며 300~400명의 적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획득하였으나 구성 북쪽 16km 지점에서 전진을 중지하라는 명령에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청천강 선으로 철수를 개시하였다.
삭주
의주
신의주
정거동 구성 운산
↖
↖●미 제24-21연대 태천
선천 ↖ 영변
↖ ↖●미 제5연대전투단
곽산 정주 ← 박천 개천
↖●호주 대대
안주
10월 29일에 호주군이 정주를 점령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9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한 10월 30일에 적의 직사포탄이 호주군 본부 주변에 작열하여 대대장 "그린 중령"이 복부 관통상으로 3일만에 전사하였다.
이에 따라 영 제27여단장은 미 제24사단장에게 건의하여 미 제21연대가 영국 여단을 초월하여 진출하게 되며 곽산에서 적의 전차와 전차전을 벌려 전차 7대와 자주포 1대, 대전차포 7문을 격파하였다.
11월 1일 정오 무렵 미 제21연대 제1대대가 정거동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우측 동측방의 운산지역의 사태 악화로 청천강 선으로 철수를 단행하였다.
다. 개천 - 비호산 전투
(1) 전투 개요
개천-비호산 전투는 압록강을 도하한 중공군이 온정리와 운산에서 초전에 승리한 후 청천강 선까지 진출하자, 군우리로 집결한 국군 제7사단이 군우리 동측방의 비호산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과 1950. 11.1일부터 7일까지 전투를 전개하여 격퇴시킨 방어전투이다.
국군 제7사단은 예비로서 후방지역 잔적소탕임무를 수행하며 10월 29일 영변지역으로 북진하였다. 당시 동부전선은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이 진격중이었고, 미 제8군의 서부전선은 국군 제2군단이 초산-만포진으로 , 미 제1군단이 신의주-벽동으로 각각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중순에 중공군 제13병단 예하의 제39군단과 제40군단이 신의주로, 제38군단과 제42군단이 만포진으로 각각 진입하여 서북부지역의 전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서북부지역으로 잠입한 중공군은 10월 25과 26일에 북한군을 추격하는 국군과 유엔군에 공격을 가하면서 모습을 들어냈다. 중공군의 작전계획은 기동에 유리한 서부지역을 개방해 기계화 및 화력을 지닌 미 제1군단을 구성-선천지역으로 유인 견제하고, 국군 제2군단과 분리시켜 역이용하여 주력을 기만하고 고원지대에서 저지대로 강습기동, 즉 강계-희천-구장동-개천으로 남하하여 서북부지역의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였다.
이에 따라 초산까지 진격한 국군 제6사단을 압박하며 남진한 중공군 제40군단은 온정리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을 격파하고, 중공군 제38군단은 강계에서 희천으로 남하하였다. 이후 이들은 온정리에서 국군 을 포위하는 한편 청천강 북쪽으로 진격한 아군의 후방을 차단할 목적으로 구장동-개천을 향해 남진하였다.
한편 미 제8군의 우전방인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이 초산에서 철수하는 제7연대, 온정리에서 패배한 제2연대, 온정리 탈환을 위해 희천에서 제19연대, 그리고 제8사단 제10연대를 투입했으나 실패하고 구장동-운흥리선으로 후퇴하였다.
이와같은 전황의 긴박으로 미 제8군사령관은 군 예비인 국군 제7사단을 국군 제2군단으로 배속시켰다. 제7사단은 영변에서 임무수행을 위해 제3연대와 제8연대는 구장동 부근의 신흥리와 용등동을 점령하고, 제5연대는 개천으로 이동하였다.
개천-비호산 전투
중공군 42사. 88사
신흥리
● 제7-3연대, 영변으로 철수
♧백령천
구장동
↖ ↘ 용문산 ▲1180
덕천
● 제7-8연대, 원리로 철수
▲1032
▲998 ● 제7-5연대
● 제7-3연대(11.3) , (8연대 11.4)
▲622 비호산
영변
● 제7-5연대
개천
(2) 전투 경과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덕천-구장동-운산을 연하는 군단 주저항선에서 적을 포착 섬멸하여 반격작전을 실시한다는 개념아래 제 7사단은 11월 1일 08:00시에 덕천-구장동간을 점령하여 침공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라 명하였다. 이를 위해 제3연대는 구장동지역을, 제5연대는 덕천을, 제8연대는 용문산을 점령하도록 하여 묘향산맥을 따라 침공하는 적을 격멸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1일 08:00시에 3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사단의 공격 목표인 덕천-구장동간의 산악지대는 희천으로 남하한 중공군 제38군단이 개천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공격을 개시한 제7사단은 죄일선의 제3연대가 백령천을 , 중앙의 제8연대가 용문산을, 우일선의 제5연대는 덕천을 향해 공격중이였다. 그러나 덕천을 향해가던 제5연대는 월봉산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하였고 제8연대는 용문산을 점령했으나 적의 역습에 밀려 원리로 철수하였다. 좌일선의 제3연대는 백령천까지 진출했다 적에 밀려 영변으로 철수하였으며 제3연대는 좌인접 부대인 제8사단 지역으로 중공군 제40군단이 공격을 가함으로서 배후가 위협을 받게 되어 제8사단과함께 철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 제1군단장과 국군 제2군단장은 개천에서 만나 개천 정면의 군우리 방어에 합의하고, 미 제1군단의 155밀리 포병대대와 제7기병연대를 동원하엿다. 그리고 미 제8군의 동측방이 노출되는 것을 우려하여 미 제24사단에 배속된 제5연대 전투단을 개천으로 이동시켜 개천-덕천간 도로를 봉쇄하도록 하였다.
한편 국군 제7사단으로부터 부대가 건재하다는 보고를 받은 군단장은 비호산 방어임무를 부여하고, 청천강 계곡으로 침투하는 적을 견제하기 위해 1개 연대를 군우리 북쪽에 배치해 미 제7기병연대와 함께 대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제7사단은 우일선인 제5연대를 비호산 동쪽의 760고지 일대에, 좌일선인 제8연대를 비호산 주봉을 비롯한 인흥리 상참과 하참 일대에, 제5연대는 전날 돌입한 미 제5연대전투단과 연결하였고 제8연대는 군우리 남쪽 용현리에서 집결하였다.
'50. 11. 3일부터 중공군 제38군단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좌일선 제3연대지역에 그리고 제5연대 지역에도 공격을 감행했으며 비호산 정상은 3회나 주인이 바뀌었다. 제3연대는 11. 4일 새벽에 결사대를 조직하여 육탄공격을 펼쳐 정상을 탈환하였고 사단은 바로 제8연대와 교대시켰다.
11월 5일, 새벽에 중공군은 제2차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우측의 제5연대가 돌파됨으로서 전 전선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였다. 바로 제3연대가 투입되고 미 제9연대와 합동으로 역습을 실시하였으며, 이 사이에 제5연대와 제8연대가 재편성을 실시하여 11월 6일 공격에 가담하면서 결국 제8연대가 비호산 주봉을 탈취하였다.
(3) 전투 결과
개천지역을 장악한 후 서북부지역의 아군 후방을 차단하려던 중궁군 제38군단의 작전기도는 비호산 전투의 패배로 좌절되었다. 이로부터 중공군 제38군단은 전선에서 이탈하였고 제39군단과 제40군단도 이 전투를 기점으로 공격을 중지하고 자취를 감추는 등 1차 공세를 종료하였다.
한편 국군 제7사단은 비호산을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더욱 강화한 후 11월 9일과 10일의 이틀간에 걸쳐 미 제1기병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개천에서 부대정비를 하였다.
라. 온정리, 초산 전투('50. 10.24~10. 30)
초산
벽동 고풍
우현령
동림산(1165m)
극성령
운산(온정)
희천
구읍(운산)
향산
태천 구장 영원
영변 용문산
비호산
박천 개천 덕천
맹산
안주 북창
(1) 전투 개요
온정리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한.중 국경을 향해 진격작전을 전개할 무렵, 벽동을 목표로 진격하던 국군 제6사단 제2연대가 온정리 북쪽의 동림산 일대에서 중공군 제40군단의 반격으로 '50. 10. 24일부터 30일까지 약 1주일간 전개한 방어전투이다.
국군 제6-2연대는 온정리를 점령한 후 북쪽 17km 지점의 북진을 향해 진격중이었고, 제7연대는 초산 남쪽 32km 지점의 고장과 초산부근에 병력을 전개해 지역 방어중이었다.
당시 제6사단은 북한군 제8사단의 잔여 혼성부대를 격퇴하며 10월 26일 한.중 국경지역인 초산에 도달하였고 반면 북한군은 만포진을 중심으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거의 쇠진한 상태에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 되었다.
반면 중공군은 대규모 병력을 온정리 북쪽 3~12km지점의 대소 능선상에 잠복시켜 벽동을 향해 진격하는 제2연대를 포위공격하는 한편, 초산으로 진출한 제7연대의 후방을 차단하고 포위망을 압축하였다. 이에 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희천에 있는 제19연대로 제2연대를 구출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진출로가 점령당하여 온산진출이 어려웠다. 그래서 초산으로 진격한 제7연대로 하여금 회목동으로 진출하여 배후에서 중공군을 공격토록 하였으나 이 또한 중공군이 주요 진출로상에 애로지점을 선점하여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제2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희천에 있는제8사단 제10연대를 즉시 출동시켜 제6사단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중공군은 인해전술도 전술이지만 승산이 있으면 공격하고 불리하면 일단 후퇴하는 칭퇴아진법과 유도전술, 그리고 북과 꽹과리, 나팔 등으로 아군의 혼을 빼놓아 제2군단은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
(2) 전투 경과
(가) 온정리 부근 전투('50.10.24~10.30)
미 제8군의 선봉부대로 제일 먼저 청천강을 도하한 국군 제2군단은 희천을 목표로 패주하는 적에 대한 추격에 돌입하였다. 좌인접의 미 제1군단이 청천강을 도하한 10월 23일경 군단의 좌전방인 제6-7연대는 희천에 도달하였고, 제2연대는 군우리 북쪽의 자작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우전방의 제8사단은 험준한 산악을 따라 제16연대가 개천에, 제10연대는 맹산에서 영원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 진격명령이 하달되자, 국군 제2군단은 10월 24일을 기해 군단의 좌전방 제6사단이 초산과 벽동을, 우전방 제8사단이 만포진과 중강진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6사단의 우일선 제7연대는 희천에서 극성령을 넘어 초산으로, 좌일선의 제2연대는 자작에서 온정리를 경유하여 벽동으로 진격하고 에비인 제19연대는 후속하여 온정리로 진출하기 위해 희천에 대기 하였다.
공격을 개시한 제7연대는 25일 고장을, 26일에는 초산을 점령하여 아군 부대중 제일 먼저 국경에 도달하였다. 제2연대는 북진으로 향하던 중에 동림산일대에서 중공군 제40군단 예하 제118사단의 공격을 받아 선두인 제3대대는 온정리로 철수하여 재편성한 겨롸 750명 중 400여 명만 살아 왔다. 이로인해 후속하여 따르던 제2대대는 어둠을 타고 남쪽의 오현동 게곡을 통해 ㅔ1사단이 작전중인 운산으로 철수하고, 제1대대는 바로 현위치인 온정리에서 사수방어에 들어갔다.
한편 제6사단장은 초산의 제7연대가 퇴로가 차단될 것에 대비하여 희천의 제19연대 제1대대를 회목동으로 보내 온정리와 초산간 도로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이 제118사단과 제120사단을 작전 지대내에 투입하여 모든 기동로를 차단하고 있음으로서 제2연대는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고 이후 장병들은 각개분산하여 포위망을 돌파하여야 했다. 이 과정에 포로가 되거나 전사 또는 부상당한 병력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연대장이 태평동 삼차로에서 병력을 수습한 결과 제1대대 병력을 주축으로 400명이 집결하였고, 제3대대는 희천으로 제2대대는 운산 남쪽 용전리로 철수함으로서 제2연대는 마침내 와해 되었다.
이에 사단장은 제19연대를 온정리로 보내 제2연대를 구출하고, 제7연대의 철수를 군단에 건의하였으며 군단은 제8-10연대를 온정리로 보내 제2연대를 구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이 모든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10월 27일 밤에 역공을 펴 옴으로써 10월 29일까지 3일간 총력전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4개 사단의 압도적인 인해전술에 밀려 공격이 좌절되고 퇴로마저 차단되었다.
(나) 초산 전투('50. 27~30)
철수명령을 받은 제7연대장은 고장을 출발해 풍장-판하동-양강동을 경유 회목동으로 차량행군을 계획하였으며 10월 27일에 공중보급된 휘발유와 각종 탄약을 분배하고 초산의 제1대대에 차량으로 고장으로 철수하도록 조치하였다.
28일 07:00시를 기해 고장에서 철수를 단행한 제7연대는 고장-회목동간 중간지점에서 중공군 제118사단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계곡 양편의 단애에 포진한 적의 화망에 들어갔다. 기상이 좋을 때는 미군 전투기의 폭격도 지원받았지만 10월 30일 자정을 넘기면서 연대의 방어선이 와해 되었다.
"연대의 전 장병은 적진을 각개돌파하여 구장동으로 집결하라"
결국 이중 삼중의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100km가 넘는 각개 행군이 시작되고 11월 6일 청천강 남안의 개천에 집결한 연대 병력은 총 3,552명 중 875명에 불과 했고 대대장 1명을 포함한 많은 장병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마. 참전용사 증언 및 유해매장 관련 위패 . 묘비현황 비교
(1) 참전용사 증언
"우리를 따라 남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황대형 용사님(제1-15-1대대, '00) : 운산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결국 각자도생으로 살아 남은 중대원끼리 고인식 중대장과 함께 민가에서 얼마를 보내고 계속되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남으로 남으로 철수하는데 지리를 잘 알던 고인식 중대장의 고향 친구(포로)가 중대장 권유로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러다 보니 현지에서 주로 남자들을 골라 안내책으로 야간행군을 하고 아침이 밝아오면 안내자의 의견을 물어본다. "우리를 따라 남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라고. 일부는 따라서 남으로 가겠다고 하기도 하고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부대원들이 돌아가면서 그를 설득해 보는데 끝까지 가겠다고 하면 어쩔수 없이 보내준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면 우리의 위치가 탄로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리가 죽는 것이다. 그러니 저만치 걸어가면 뒤에서 총을 쏴야 한다.
"아내는 부사수, 처제는 탄약수"
우리가 태천방향으로 다시 공격을 하다 밀리어 평양으로 철수했던 12월 초순이었다. 내가 지휘하는 기관총분대 사수인 전근배 이등중사의 처가가 평양이었다. 전중사가 이형원 소대장에게 애걸하여 한시간의 외출을 허락받고 나갔는데 돌아오는데 보니 처와 처제까지 데리고 왔다. 이때는 고인식 중대장이 인접부대 중대장으로 가고 새로이 정형택 대위가 중대장이었는데 군복을 입고 같이 행동한다는 조건으로 함께 있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기관총 사수는 전근배 중사가, 처는 부사수가 되고 처제는 탄약수가 되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드럼통을 씌워 검문소를 통과했다. 이렇게 해서 개성을 거쳐 파주 법원리까지 철수하는데 함께 했고 법원리에서 별도로 방을 구해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다시 1.4후퇴로 우리는 한강이남으로 가야했고 전중사의 가족은 법원리에 남겨졌다. 그리고 다시 재반격이 시작되자 전중사는 선두에서 공격해 나갔다. 빨리 법원리에 가야하기에 모든 전투에서 제일 선두였다. 하지만 운명의 순간은 짧았다.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문에 면회온 전중사 처제, 그리고 그 쓸쓸함이여~!"
서울탈환 작전이 진행되면서 나도 부상을 입어 대구 육군병원으로 후송을 갔고 치료를 받고 있던 '52년 어느 날이다. 정문에 면회가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보니 전중사의 처제였다. 가슴이 철컥하였다.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할까 망설이는데 체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육군 병원 의사와 재혼했어요" 라며 전중사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가 어디서 근무하는지 모른다. 아마 평생 동안 그를 만나거나 그가 다시 찾은 일은 없을 터이니 언니에게 안심하고 잘살라"고 전해라 했다. 그 처제는 내가 후보생을 인솔하여 시내를 지날 때에 봤던 것이다.
"옥수수 밭에 묻힌 전우"
최흥택 참전용사(제7-5-1대대. '15) : 본인은'50. 10. 28일 제7-5-1대대 소속으로 개천전투에 참여하였다. 예비로 있다가 전투에 참여하게 되어 덕천방향으로 들어가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1,0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벌써 춥기도 하고 추수도 다 끝났다. 우리 우측은 제8연대가 용문산이란 곳에 올라 간다고 들었다.
그때가 11월 초순인데 우린 개천으로 영변으로 흩어져 철수하는데 다시 재편성하여 비호산이란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곳 비호산에서 거의 3일간은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정말 육박전을 매일 실시하며 진지를 지켰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의 공격으로 결국 밀려나는데 모인 병력이 80여 명이다. 피난민중 3명을 잡아서 길 안내자를 앞세우고 남으로남으로 내려갔다.
"너 누구냐?'
"탕, 적이다"
"이쪽으로 뛰어라"
잠시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살아났다. 전사한 전우를 옮겨 옥수수대 더미가 있는 곳에 가매장하고 8시간의 강행군으로 현지를 벗어나 각자 본대로 합류했다.
"승일교의 유감"
철원군 고석정에 가면 승일교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승만의 승, 김일성의 일을 따사 붙여진 다리명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 다리는 전쟁전에 북한에 놓다가 완성을 못했고 철원이 수복된 후에 1958년 주한미군 제79공병대와 국군 제62공병대가 미완의 문혜리 쪽 공사를 1958년 12월에 완료하여 120m의 다리가 완성되었다.
그러면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 틀리지는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좀더 정확한 내용은 "고, 박승일 대령"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다리명이란 사실이다.
"제7사단 제5연대장 박승일 대령"
지금 나열되고 있는 개천 비호산 전투 당시 제5연대장이 박승일 대령이다. 박 연대장은 병사들과 모든 것을 함께하며 국군의 명예를 되찾자고 다짐하였다. 병사가 먹지 않으면 안먹었고 잠들지 않으면 잠들지않았고 비오는 날에는 산병호에 같이 경계근무도 했다는 것이 그를 아는 분들의 이구동성이다.
심지어는 북한군 포로의 부상까지도 챙겨서 의무대에 짚차로 보내기도 하던 연대장이다. 영천지구 전투부터 함께 했던 무전병 출신 이기봉 참전용사님의 증언이다. 그런데 덕천지구전투에서 그만 포로가 되었고 함께 초산 어느 광산일대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어느날 북한군의 짚차로 실려나간 뒤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의 교화사업에 방해가 되다보니 사살해 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연대장의 훌륭한 모습을 기리기 위해서 누군가 노력하여 붙여진 것이 지금의 "승일교"란 것이 더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대동강에 국군이 다 빠져 죽었다"
이병만 참전용사(제7-3-1대대, 육직 통신병) : 육군본부 제51통신대대 소속으로 제7-3-1대대를 지원하던중에 개천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다. 비호산 지역에서 몇일간 중공군에 맞서 백병전을 불사하면서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엿다. 그러다 대대병력의 대부분이 피해를 입고 평양으로 철수하여 내려가는데 약 7,000명의 낙오병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어 결국 쫒아오는 중궁군을 피해 물로 뛰어들어 수많은 전우들이 물속에 빠져 숨졌다. 살아남은 전우는 반도 안되었다.
"불발탄이 터져 전사한 전우를 화장해서 안고 다니다 논바닥에 가매장하고 나왔다"
참전용사 치금동(제7-8연대 대전차포중대) : 나는 연대 대전차포중대 연락병이었다. 덕천지역에서 묘향산이 있는 어느 곳에서 전투를 하다 옆에 전우가 불발탄을 습득하여 갖고 다니는데 중대장이 버리라고 하여 버리는 과정에 터져버려 현장에서 전우가 죽었다. 그래서 현지에서 화장하여 유골함에 보관하여 다니던 중에 중공군에 포위되어 탈출해 나오면서 논비닥에 묻고 나왔다.
"운산에 많은 전우들이 죽고 포로가 되었다"
참전용사 이종근( 제1-11-2-6중대) : 나는 '50. 8월에 입대하여 삼랑진에서훈련을 받고 1사단에 갔다. 북진전투간 수풍호로 간다는 벅찬 감격에 일사천리로 평양을 지나 운산까지 들어갔는데 중공군에 걸려들었다. 미군 기병사단도 들어왔는데 중공군이 꽹과리 치고 피리불고 사방에서 정신못차리게 하는 바람에 혼이 나갔다.
우리는 영변으로 내려가는 퇴로가 차단되어 각자 소충만 들고 산속으로 숨어들어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지형은 모르고 웬만한 산속에는 중공군이 모두 들어와 버티고 있어 완전히 중대는 흩어져 버렸다. 어디서 얼마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대동강 물에 떠가는 전우야~!"
참전용사 박사노(제8-10-1대대) : 나는 포로로 끌려갔다가 포로교환시 내려왔다. 우리는 희천까지 올라갔는데 온정리에 6사단이 포위되었다고 온정리로 가라해서 온정리로 가다 중공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대대가 흩어졌다. 나중에 다시 모여보니 절반은 없어졌다. 어디서 죽었는지 포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나중에 다시 영원. 맹산지역에서 또 중공군에 걸려들어 철수하게 되었다.
평양으로 들어왔는데 여기서 다리에 관통상을 당하여 포로가 되어버렸다. 당시 대동강물에 떠가는 전우의 시체가 즐비했다. 뗏목처럼 떠다니고 강가에도 죽은 사람이 많았다.
나는 포로로서 대동군 어느 마을 민가에 잠시 머물렀는데 50여 명이 함께 있었다. 그러다 40여 명이 죽게 되었는데 그냥 집 앞마당에 그대로 놓고 눈으로 덮고 떠나갔다.
"희천과 온정리에서 우리는 다 녹았다"
참전용사 김용철(제6-19연대, '02) : 나는 제6사단 창설멤버다. 북진하여 초산으로 먼저 올라가려는데 제7연대가 먼저 갔다. 2연대는 벽동으로 간다고 온정리로 갔다. 우리는 8사단 10연대와 함께 희천에서 집결지를 편성하고 있다 중공군이 침투했다는 것을 알았다.
온정리에 2연대와 사단지휘소가 포위되었다고 북에서 역으로 중공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때 말단 병사는 중공군이 왔다는 것을 몰랐다. 공격을 한다고 이동하는데 바로 중공군의 공격이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북치고 나팔불고 괭과리치고 난리였다. 그래서 모두가 포위된 줄로 알고 부대 건재가 무너져버렸다. 우리는 다시 뒤로 물러나 희천으로 갔다. 나중에 보니 반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갑짜기 중공군이 사라져 우리는 다시 재편성을 하였다.
"우리가 먼저 압록강에 갔다?"
참전용사 000(제6-2연대, '17. 송파구) : 나는 일신상의 이유로 현장에 나가지 않고 주로 서울지역 각 구별 참전전우회를 찾아가 증언을 청취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송파구에 갔다가 한 용사님이 별도로 본인 아파트로 우리를 오라고 하였다. 북한지역 지도를 가지고 가서 혼자 살고 있는 아파트에 들려 짜장면을 시켜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저기가 중공이다"
온정에서 선발대로 출발하여 차량으로 달렸다. 이미 제7연대가 초산으로 달리고 있기에 우리는 속도를 냈다. 우리가 먼저 압록강에 도착하기 위한 경쟁이다.
"서일병, 저기 강건너가 어딘지 아냐?"
"네, 저기가 어딥니까?"
"중공이다"
"반장님이 저기가 중공땅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야 나 고향이 여기 창성이다"
안개가 자욱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멀지않은 곳에 보이는 곳이 중공땅이라 하였다. 믿기지않는 현실이었다. 지금처럼 헨드폰이 있었다면 우리가 먼저 전사에 압록강에 도달했다고 기록되었을 것이란다.
"선배님, 전사에는 제2연대가 벽동에 가려고 기동한지 얼마 안되어 높은 산인 동림산으로부터 중공군이 쏟아져 내려와 진격이 중단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사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우리는 트럭을 타고 달려 압록강변에 도착했어요"
"혹시 구룡강이나 대령강이 아닌지요?" 나는 지도에서 위치를 가리키며 보여드렸다. 하지만 아니라 한다.
"그러면 철수시에 어떻게 내려왔는지요?"
"우린 솔직히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데 동창이라는 곳에 왔는데 7연대 병력을 만나 중공군에 포위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박천으로 와서 본대에 합류했어요"
정말 제2연대 선발대는 압록강변 벽동에 가장 먼저 올라갔을까 안올라갔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보현사에 단군초상화를 가져왔으면 대박인데 그걸 놓고 왔다"
참전용사 황대형(제1-15-1대대, '00) : 우리는 평양을 제일 먼저 들어간다음 다시 수풍호로 가기위해 위해 출발했다. 차를 이용하여 나는 기관총을 거치하고 달렸는데 중대장이 보현사에 가보자하여 그곳에 가게 되었다. 이때 국군 제6사단도 이곳 일대로 진격하고 있었다.
보현사 입구에 무슨 하천이 있었는데 그곳에 북한군이 버리고간 차량이 몇대 있는데 6사단이 다 가져갔다. 우리는 보현사 경내로 들어갔는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연로한 스님이 남아있고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중대장 이야기가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절이라 하였다.
"중대장님 저게 뭐여요?"
"저거 단군 초상화야"
"아니 저렇게 큽니까?"
그런데 그걸 들어다 지프에 실을 수가 없었다. 지금 국내에는 그런 초상화를 본 적이 없고 실제로 없다고 한다.
3. 동부지역 작전
장진호 진격작전
유담리
●미-제7해병연대
장진
고토리
진흥리 신흥
●국-제3-26연대
사창리 ↖ 오노리 홍원 신포
●국 제3-26연대
함흥
●미 제1해병사단
흥남
정평
영흥
고원
●미 제3사단
원산 ●미 제1해병사단
가. 장진호 진격작전('50. 10. 29~11.24)
(1) 전투 개요
장진호 전투는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이 미 제10군단장의 장진호 진격명령에 따라 원산상륙 직후인 '50. 10. 29일부터 장진호 서안의 유담리를 점령 완료한 11월 24일까지 전개한 진격작전이다.
원래 원산상륙 작전은 국군이 10월 1일 38도선을 통과하던 싯점에 미 제10군단이 인천에서 승선하여 10월 15일 원산에 상륙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미 국군 제1군단이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하고 미 제1해병사단이 10월 16일 인천항을 떠났지만 영흥만의 소해작전으로 인해 10월 26일에야 상륙하게 되자 작전명령이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국군제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북동 국경지대로 진격하고, 미 제1해병사단은 함흥에서 장진호로, 미 제7사단은 이원에 상륙하여 북청-혜산진을 진격하고, 미 제3사단이 미 제1해병사단으로부터 인수받아 원산-함흥지역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2) 전투 경과
당시 군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42군단 예하 124사단으로 함흥 북쪽과 흥남 동북쪽에 있었고, 국군 수도사단이 10월 20일 현재 함흥 북쪽의 오로리와 흥원을 점령하고 북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미 해병사단장은 제1해병연대로 마전리로 이동하여 국군 제3-2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원산, 고저, 마전리 일대의 지대내 잔적을 소탕하고, 제5해병연대로 원산-흥남간의 연포비행장을확보하고 영흥-문천간 주보급로를 확보하며, 제7해병연대는 함흥에서 장진호에 이르는 계곡에서 국군 제3사단과 교대(소동에서 제26연대와)해 장진호로 공격하여 명에 의거 국경선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한편 중공군 제42군단 제124사단 예하 제370연대는 10월 23~24일 수동 부근에 투입되어 10월 25일 처음으로 국군과 교전이 있었고 나머지 2개 연대는 장진호 부근에 집결된 것으로 포로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그러나 맥아더사령부에 보고된 이러한 사실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최초계획대로 각 부대는 진출을 계속하게 되었다.
수동일대 연대봉에서 미 제7해병연대는 11월 3일부터 중공군과 육박전이 벌이며 11월 4일 수동을 경유하여 진흥리 고지대로 진출하였다. 고토리로 진격하는 과정에 획득된 포로를 통해 장진호에 2개 연대규모가 아닌 2개 사단, 중공군 제125사단과 126사단이 집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렇게11월 2일부터 7일어간에 실시된 전투에서 중공군 제124사단은 미군의 공지협동작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미군도 46명의 전사자와 262명의 부상자, 그리고 6명의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미 제7해병연대는 11월 9일 보압동과 제1발전소 부근에서 황초령의 문고개를 넘어 고토리로 진격했으며 미 제7해병의 서측방을 엄호하는 국군 제3-26연내는 11월 9일부로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었으며 흥원에서 지경리-이수리로 이동하였다.
고토리로 진격한 미 제7해병연대는 11월 15일 하갈우리까지 진격하였으며 이때의 기온이 무려 영하 20~25도롤 오르내리는 강추위였다.
한편 미 제7보병사단 제17연대와 제31연대는 혹한을 무릅쓰고 한중국경으로 부터 48km 지점인 풍산 북쪽 웅이천부근까지 진격한 후, 갑산으로 통하는 도로상의 요지를 확보하기 위해 북진을 계속하였다.
또한 부산에 상륙해 있던 미 제3사단은 미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부족한 병력을 한국군 카츄사로 보충하고 11월 5~6일에 원산에 상륙하여 11월 17일에 마지막 연대인 제15연대가 원산에 상륙하여 원산-함흥간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3) 전투 결과
미 제1해병사단은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하여 11월 2일 함흥 북방 마전곡에서 국군 제3사단 26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제7해병연대는 수동부근에서 최초로 중공군 제124사단 370연대와 격전을 하였고, 16일 하갈우리를 거쳐 24일에는 장진호 서안의 유담리를 점령하였다가 상황이 급전하여 12월 2일 전면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다.
미 제7해병연대가 유담리를 점령할 당시에 미 제7사단이 혜산진 일대까지 진격하였고, 국군 제1군단은 동북 최전방 회령까지 육박하였다.
나. 혜산진 진격작전('50. 10. 27~11. 28)
(1) 전투 개요
혜산진 진격작전은 중공군이 참전하여 서부전선에서 미 제8군과 대치할 무렵인 '50. 10. 27일부터 11월 28일까지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진격을 계속하여 갑산과 혜산진에서 북한군 제42사단과 제126사단 소속의 패잔병을 소탕하고 혜산진을 점령한 작전이다.
신갈파진 ← 혜산
↖
삼수
↖ ↑
갑산
풍산●미 제17연대
부전호 ↑
황수원리●미 제32연대
↑
← ●미 제31연대
수상리 ↑
단천
이원
신흥 북청 ← ●미 제7사단
1950. 10. 2일 미 제7사단은 원산에 상륙하여 평양을 우회공격하라는 명령으로 전 병력을 이천과 수원에서 승선지인 부산항을 향해 10월 5일 출발하였다. 이동중에 문경 부근의 이화령에서 잔적들의 공격으로 이동이 제한을 받기도 하며 10월 12일까지 이동을 완료하여 10월 19일 부산항을 출발하였으나 소해작업으로 10일 동안 해상에 머물렀다.
이에따라 사단은 제17연대를 선두로 이원에 상륙하여 목표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사단은 11,000명의 병력수준이고 많은 인원이 카츄사로 채워져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북한군은 제4군단 예하의 패잔병과 내무서원, 지방 노동자, 당원 및 학생 등으로 혼성부대였으며 합수독립부대가 950명, 백암독립부대가 250명, 무산사단 10,000명, 원흥독립중대 200명, 송경독립여단 5,000명, 원흥독립사단 7,000명, 청낙산독립중대 200명 등이었다.
(2) 전투 경과
미 제7사단장은 제17연대를 이원으로 상륙시켜 북청-풍산-헤산진으로 전진시키고, 제31연대는 북청-함흥-오노리-신흥축선을 따라 부전호-신갈파진으로 진격시키고, 제32연대는 사단 예비로 후방경계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무렵 동북부지역의 상황은 국군 제3사단이 원산지역 경계임무를 미 제1해병사단에 인계하고 함흥으로 이동중에 있었고 수도사단은 제1기갑연대가 성진을, 제1연대가 풍산을 점령한 가운데 제18연대가 부전호 일대에서 잔적을 소탕하고 백암산을 공격하고 있었다,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제17연대가 풍산으로 돌입하여 이곳에서 임무수행중이던 수도사단 제1연대와 합류하였다. 국군 제1연대는 풍산 북쪽의 견고한 적의 진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있었으며 미 제17연대와 협공으로 적을 격퇴시키고 미 제17연대에 인계하였다. 미 제17연대는 11월 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풍산전방에서 적의 저항에 부딪쳤으나 주력의 진출로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풍산 전방 20km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미 제31연대는 11월 4일에야 양륙작업을 완료하고 이원-풍산가도를 달려 풍산에 도착, 황수원강 상의 수상리와 백산일대에서 국군 수도사단 제18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였고 국군 제18연대는 서양리에 집결하여 명천을 향해 이동을 개시하였다.
수상리-백산일대에 병력을 배치한 미 제31연대는 11월 8일 백산의 동쪽기슭에서 1개 대대규모의 적과 조우했는데 중공군 제126사단 예하 제376연대로 판명되어 제42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부대로 장진호뿐만아니라 부전호까지 중공군이 전개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미 제17연대는 11월 21일 10:00시경에 동해안의 항모에서 출격한 해군 함재기에 의해 시가지의 85%가 파괴된 혜산진과 압록강 연안일대를 점령하였다. 한편 갑산에 집결한 미 제32연대는 삼수를 거쳐 신갈파진으로진출하여 미 제17연대와 협동으로 11월 28일 신갈파진을 점령하였다.
(3) 전투 결과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11월 21일 제17연대가 헤산진을 점령하여 국군 제6사단의 제7연대에 이어 압록강에 두번재로 도달한 부대가 되었다. 이후 미 제17연대는 11월 30일 혜산진을 국군 제3-22연대에 인계하고 철수하였으며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두만강에 이르는 통일의 꿈은 불확실성에 빠지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다. 길주-청진 진격작전('50. 11. 1~ 11. 30)
(1) 전투 개요
길주-청진 징격작전은 미 제10군단의 우일선으로 동해안 해안도로를 따라 한.소국경으로진격하는 국군 수도사단이 '50. 11월 1일부터 30일까지 길주, 봉강, 청진 등에서 북한군 패잔병 부대인 제41사단 등 혼성병력의 저항을 극복하고 전개한 작전이다.
1950. 10. 15일부터 30일까지 단독으로 함흥-흥남을 점령한 수도사단은 제18연대가 장진 북쪽 장진호-부전호 남단과 수상리까지 진출한 후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에 인계하고 차기 작전에 대비하였다. 제1연대는 홍원-북청을 경유하여 풍산과 홍군을 점령하고 있던 중에 미 제7-17연대에 인계하고 동해안 도로로 우회하여 단천을 거쳐 성진에 도착하였고, 제1기갑연대는 10월말 성진에서 길주방면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 중에 있었다.
이 무렵 장진- 풍산선에는 중공군 제42군단이 진출해 있었고, 성진에는 북한군 제41사단 및 제507여단이 길주와 명천, 어랑천 등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무산
나진
부령 ●수도-기갑연대
●수도-제18연대
↖ ↗주을
청진
↑ ↗
●수도-제1연대
●수도-제18연대
명천
성덕
↖ ●수도-기갑연대
↖ 길주
●수도-기갑연대
성진 ●수도-제1연대
(2) 전투 경과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이 추수감사절 공세를 시작할 무렵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의 주공부대인 수도사단은 제18연대가 부전호로, 제1연대가 풍산을, 제1기갑연대가 북청-단천-성진으로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이처럼 10월 말까지 예하 각 연대가 단독으로 진격하던 사단은 10월 30일 성진을 점령한 후 합동으로 길주-명천 이북을 공격하기 위해서 각 연대의 전력을 집결하였다.
길주로 진출하기 위해서 수도사단은 정면 공격은 선두부대인 제기갑연대가, 우일선 공격은 풍산에서 우회하여 도착한 제1연대에 부여하여 11월 1일 전진하였으나 성진에서 물러난 북한군 제507여단과 길주경비 1개 대대 등이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하였다.
제1기갑연대는 11월 4일 미 해병사단 제1비행단 전폭기의 공중폭격지원을 받으며 길주공격을 개시하여 11월 5일 10:00시경 길주를 탈환하였으며 전과는 적 사살 530명, 포로 17명이었고 피해는 전사 20명과 부상 9명이였다.
한편 명천방면으로 후퇴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제1연대는 황곡동일대로 진출하였으며 적이 해안선을 따라 남하중인 것을 항공정찰을 통해 확인한 사단장은 함흥 북쪽에 머물고 있던 제18연대를 열차편으로명천으로 진출해 어랑청 및 봉강 일대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성진과 길주, 명천방어에 실패한 적은 청진을 사수하기 위하여 천연적인 지형지물을 이용하여어랑천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국군 제18연대는 어랑천과 명간천일대에서 11월 15일까지 계속적인 공방을 계속하였고 11월 19일을 기해 명간천과 어랑천을 확보하였다.
11월 21일 청진을 점령하기 위해 제18연대는 주을을 점령하고 제1연대는 주을-나남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점령하였으며 25일 청진에 들어섰다.
11월 27일 군단으로부터 수도사단은 2개 연대로 회령을 점령하고 1개 연대로 옹기를 학보하라는 명 의거 사단장은 제18연대와 제1연대로 회령을, 제1기갑연대로 청진에서 옹기로 진출하도록 하였으며 제1기갑연대는 부거방면으로 진출중 11월 30일 상황이 악화되어 흥남으로 철수하게 된다.
(3)전투 결과
길주를 점령한 수도사단은 가장 치열했던 어랑천 전투를 끝내고 11월 25일 청진을 점령하면서 11월 30일 제18연대가 부령부근에, 제기갑연대가 부거부근까지 진출하였다가 30일 철수하게 되었다.
라. 합수-백암 진격작전('50. 10. 27~11. 30)
(1) 전투 개요
국군 수도사단과 협동작전을 통해 '50. 10. 10일 원산을 점령한 국군 제3사단은 5일 만에 송전반도-영흥-고원-신창리-마전리-안변을 연결하는 원산 서북방의 외곾선을 확보하고 10월 16일부터 26일가지 원산지역 평정작전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3사단은 미 제1해병사단과 임무를 10월 26일 교대하고 동해안선을 따라 국경지대로 진격하라는 명에 따라 사단은 함흥으로 주력을 이동시켜 연포비행장-흥남-홍원-신포 일대까지 방어임무를 하였다.
이 무렵 원산을 방어하던 북한군 제5사단과 제42사단, 원산 경비 제2여단 등이 아군의 평원선 진출을 저지하고, 패잔병과 많은 수의 유격대들이 대관령-단발령-마식령을 잇는 태백산맥과 마식령산맥 등 산악지대를 근거로 아군의 주요 후방지역에 침투해 후방교란과 병참선 차단을 시도하였다.
●제23-2대대
청진
혜산 ●제3-23연대
주을
●제3-22연대
합수
●제3-23연대 명천
↖
갑산
길주 ●제3사단
●제3-22연대
풍산 ●제3-23연대
성진
●제1군단
(2) 전투 경과
'50.10. 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에 29일 원산 방어임무를 인계한 제3사단은 제22연대와 제23연대는 함흥에 집결중에 있었다. 한편 원산 마전리 북쪽 4km지점에 위치한 연대봉을 공격한 제26연대는 장진 제3발전소의 감제가 가능하고 신흥리의 철도 등 도로를 차단할 수 있는 거점으로 약 4,000명의 북한군이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하였다.
제26연대는 이 일대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 16명을 획득하여 이들이 중공군 제42군단 제124사단 예하 제370연대소속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군단의 지시로 수동일대의 진지를 미 제7해병연대에 인계하고 오노리로 이동해 부대재편을 실시하여 11월 3일 함흥으로 이동해 집결하였다.
한편 11월 4일 제3사단은 수도사단과 미 제10군단과의 전선 연결을 위해 예하 각 연대를 흥남으로부터 제22연대는 이원-신북청으로, 제23연대는 신포로, 제26연대는 홍원으로 이동해 함흥지역의 평정작전도 미군에 완전히 인계하였다.
군단의 주력부대인 수도사단이 성진을 점령하고 길주로 진격하자, 군단사령부와 제3사단은 11월 13일 다시 성진으로 이동하였다. 당시에 제26연대는 11월 9일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지시로 지경리로 이동하여 장진호로 진격하는 미 제7해병연대 우측방을 방호 하였다.
그러나 길주와 명천을 공격하던 수도사단이 어랑천에서 북한군 제41사단과 제507여단 병력을 만나 어려움을 격게되자 군단장은 제3사단에게 합수 공격 명령(당시에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대신리에 위치)을 내렸다. 이 명령에 의거 제3사단은 제22연대가 길주-합수로, 제23연대는 성진-임명동-합수로 공격하도록 함으로서 미 제7사단, 수도사단과 함께 한.중국경선을 향해 진출하게 되었다.
11월 20일 18:00시에 합수를 공격하기 위해 제23연대는 대신리로 보내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교대하고, 제22연대는 재덕에서 합수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11월 22~23일에 걸쳐 합수와 백암을 점령한 제3사단은 군단으로부터 무산 및 혜산진에 대한 공격을 명받았다. 무산 공격을 위해 백암지구의 작전임무를 제22연대에 인계한 제23연대는 나남에서 집결을 11월 30일 완료하였다. 제22연대는 연대본부와 제1대대(-)가 백암에 위치한 가운데 제3중대가 11월 27일 혜산진을 목표로 북진을단행하여 11월 30일 13:00시에 혜산진에 돌입하였다.(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11월 21일 먼저 점령, 인수받았다)
(3) 전투 결과
원산-함흥 지역의 평정작전에 이어 제3사단의 길주-백암-혜산진 진격 작전은 좌측의 미 제10군단과 전선을 유지하며 한.중 및 한.소 국경지대로의 진출 작전이었다.
그러나 한파와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다른 전쟁상황이 벌어져 중서부전선이 무너지고, 장진호와 부전호 일대로 진격한 미 제10군단도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드는 악조건이 되면서 11월 30일 철수를 하게 되었다.
라. 참전용사 증언 및 유해발굴 관련 위패. 묘비 현황
(1) 참전용사 증언
"돌아오지 않는 중대장"
참전용사 전기풍(수도사제18연대-1대대) : 우리가 청진에서 부령으로 들어가는데 '50. 11월 말경이었다. 그런데 어느정도 들어갔는데 중대장이 선두를 멈추게 하고 본인이 앞으로 나왔다. 알고보니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중대장의 고향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동생이 둘이 있다고 한다. 해방되던 해에 부모님과 월남하였고 일제시대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일본군대에 갔다왔던 것이다.
"모두들 여기서 좀 기다려라"
"아니 중대장님이 어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중대선임하사가 물었다.
"저기 우리집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이 있는지만 보고 오겠다"
당시는 별별 일이 다 벌어지는 세상이라 중대장이 중대원을 데리고 적에게 들어가버린다던가 하는 일들 때문에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야 모두들 총을 저 방향으로 돌리고 한눈팔지 말고 지켜라?" 선임하사가 우리들에게 다그쳤다. 중대장은 뛰어서 저 안으로 들어간다. 모두들 빨리 나와주길 바랬다.
하지만 기다리는 중대장은 돌아오질 않했다. 대대에서는 자꾸 어디까지 갔는냐고 재촉하는데 야단이 났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나가는데 발로 옆 산속에서 적들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결국 우리는 중대장을 놓아두고 적과 교전을하며 현장을 떠나야 했다.
"인접 소대원 19명이 한꺼번에 포탄에 죽었다"
참전용사 이문상 중위(수도사-기갑-제2대대) : 우리는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하고 청진으로 진격하는 북진전투에 참가했다. '50. 11월 중순경 본인은 중위로 진급하여 소대장근무를 하는데 11월 20일 경에 함북 주을에 도착하였다. 야산 밑에서 연대가 전부 점심을 먹는데 인접 송소위 소대 중앙에 적의 포탄이 떨어져 일시에 19명이 전사했다.
나와 부대원 일부가 유해를 수습하고 한편에서는 적과 전투를 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하면서 우리는 유해를 어덣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없었다. 미군 전투기가 날아와 폭격을 함으로써 적을 제압하고 우린 바로 청진으로 진격해야 했다. 전쟁중에는 처리할 방법이 없다.
"풍산 인민군사무소 뒤에 전우 7명을 매장했다"
참전용사 김호권(수도사 제1연대-2대대) : 나는 금강산에 들어가 전투도 했다. 일부 피해가 발생했는데 어딘지 잘모른다. 북진하여 진출중에 많은 병력이 희생을 당하였지만 어떻게 시신을 처리하는지는 잘 모른다.
"과수원에 죽어간 수천명의 사람들"
우리는 원산에 들어갔는데 3사단과 교차되어 시내에서 서로 우리구역이라고 다투는 일들이 많았다. 신고산에서 원산으로 들어서는데 길 옆에 과수원밭이 있는데 하얗게 뭐가 널려 있어 가보니 사람들이 죽어서 흩어져 있는데 미간인이지 군인포로인지 알 수도 없고 수천명이 죽어 있었다.
그러다 북진하여 1기갑연대가 성진을, 우리 제1연대가 풍산을 점령한 가운데 제18연대가 부전호 일대에서 잔적을 소탕하고 백암산을 공격하고 있었다,
10월 29일 미 제7사단은 제17연대가 풍산으로 진출하여 이곳에서 임무 수행중이던 우리 제1연대와 합류하였다. 우리는 풍산 북쪽의 견고한 적의 진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있었으며 미 제17연대와 협공으로 적을 격퇴시키고 미 제17연대에 인계하였다. 이 과정에 동료 7명이 전사하여 풍산인민군사무소 뒤에 직접 매장하였다.
"중대원 100여 명중에 7명만 살아왔다"
참전용사 박정식(3사 제26연대 제3대대 11중대 제3소대) : 본인은 '50. 7. 13일 입대하여 안강-기계전투에도 참가했다. 안강에선 무명고지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지만 유해는 처리하지 못하였다.
북진작전간 우리는 미 해병사단의 장진호진출을 보장하기 위해 '50.10. 26일 원산 마전리 북쪽 4km지점에 위치한 연대봉을 공격한 우리 26연대는 적이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하여 육박전을 전개하여야 했다.
제26연대는 이 일대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 16명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수동일대의 진지를 미 제7해병연대에 인계하고 오노리로 이동해 부대재편을 실시하여 11월 3일 함흥-홍원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우리 3사단은 11월 13일 다시 성진으로 이동하였는데, 우리 연대만 11월 9일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지시로 지경리로 이동하여 장진호로 진격하는 미 제7해병연대 우측방을 방호 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우리 중대는 나를 포함하여 100여 명중에 7명만 살아 남았다.
(2) 유해발굴 관련 위패 및 묘비현황
이미 앞에서 열거한 내용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문제는 앞의 참전용사님 몇분의 증언에 언급되는 것처럼 엄청난 인원이 전사했는데 왜 전사에는기록이 없고 위패나 묘비에 관련사실을 뒷받침할만한 것들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13만 4천여 위패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깊이 고찰해 보아야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