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영웅, 남원출신 황진 장군은 누구인가? (1회)아침을 여는 창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 지금 남원에서는 황진장군의 동상 제작을 위한 움직임 이 활발하다.
1) 황진 장군은 명종 5년 1550년 10월 18일 밤 11시, 남원부 서포리 산내촌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남원시 주생면 영천이다. 아버지는 의정공(議政公) 황윤공(黃允恭)이었으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房氏)였다.
방 씨 부인은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다. 부인이 동쪽 연못가를 거닐고 있는데 갑자기 연못에서 큰 청룡이 물을 박차고 날아올랐다가 내려와서는 자신에게 달려들어 무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 부인에게는 뜻하지 않게도 태기가 있었다. 10개월이 되어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그 아들이 바로 둘째아들 황진장군이었다.
청년이 된 황진의 모습은 키는 8척 장신이었으며 준수한 외모를 가진 대장부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병법 가운데서도 육도삼략(六韜三略)과 무경칠서(武經七書)에 통달했으며 선조 9년(1576)에 실시한 별시병과(別時兵科) 16등으로 급제했으니 그 때 나이 27세였다.
그리고 곧이어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선천부사(宣川府使)를 거쳐, 1591년 12월 김해부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 다음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2)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과 더불어 북방 국경지대 안원보(安原堡)의 수비대장으로 있을 때 지은 시 이다.
“활 벌여 어깨에 걸고/ 칼 갈아 손에 쥐고
두만강 언덕에서 동개 베고 누웠어라./
십만 강병 오랑캐라지만 어찌 두려워하랴.”
*(동개: 활과 화살을 넣어 메는 기구)
3) 일본통신사 정사 황윤길의 군관으로 수행, 돌아와서 김성일을 참수하라는 상소문을 올리다. 1591년(선조 24년) 2월 통신사 일행이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정사 황윤길은 급히 사람을 조정에 보내 일본의 정세를 알리는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그 장계에는 앞으로 반드시 전란의 화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며칠이 지나 통신사 일행이 모두 서울로 돌아오자 김성일 역시 말을 올렸다. “풍신수길은 인물이 옹졸하고 주책이 없는 자로서 우리나라를 침범할만한 자가 되지 못한 줄 아뢰옵니다.” 당시 군관으로 수행했던 황진도 그들의 침공이 머지않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정사와 서장관 이하 일행이 모두 왜적이 대거 침략해 올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지만, 유독 김성일만 왜적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군관 황진의 울분이 극에 달하였다. 그가 얼마나 참기 어려웠던가는 김성일을 참수해야한다는 상소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풍신수길이 사신을 우리나라에 보내와 화친을 구한 목적은 우리나라로부터 길을 빌리고자 한 것이며, 그 참뜻은 우리나라를 통하여 명나라 요양(遼陽)으로 쳐들어가려는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냈지만 일본의 거짓된 화친에 속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김성일은 같은 세력으로서, 전하를 속여서 풍신수길에게 길을 빌려주도록 하고서도 명나라 천자에게는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주권이 짓밟히는 것이며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또한 풍신수길은 그의 상전의 자녀를 버리고 스스로 대장군이 되기까지 온갖 잔악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인데도 불구하고, 조종의 집권대신들은 깊은 사려도 없이 전하를 속여서라도 되지 않을 화친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춘추필법(春秋筆法)과 같이 사실을 분명히 가리기 위해서는 먼저 김성일 무리의 죄를 다스리십시오. 원컨대 전하께서는 김성일의 머리를 베십시오.”
당시 동인들의 독무대였던 조정에 이러한 상소를 올리는 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은 우국충정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1592년(선조25년) 4월 13일 경상도 가덕도 응봉봉수대에서 고요한 푸른 하늘에 갑자기 연기가 숨 가쁘게 피어올랐다.
왜군이 700여 병선에 15만 대군을 이끌고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급보를 곧바로 경상도와 전라도 감영과 중앙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 남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