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재 ▷ 코로나 관련] 2020년 6월 19일
〈청년상(靑年想) Essay from Youth〉 4 디지털 네이티브
학생부장 카바사와 코이치(樺澤光一)
진정한 나눔을 낳는 인간력(人間力)을
※ (참조)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 어린 시절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를 뜻하는 말. 스마트폰과 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를 원어민(Native speaker)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세대라는 의미가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확산으로 사회가 미증유(未曾有)의 곤란(困難)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청년부의 대표가 불법(佛法)의 시점으로 가치창조(價値創造)의 사명(使命)에 대해 엮는 ‘청년상(靑年想)’. 이번 회에는 카바사와(樺澤) 학생부장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테마로 엮는다.
온라인 벽(壁)
교실의 책상에 앉아 강의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는다. 학생끼리의 그룹워크로 여러 과제를 탐구한다. 전국이나 해외에서 모인 동료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간다.
이러한 당연한 일상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 확산에 의해 캠퍼스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 많은 대학에서는 강의가 ‘온라인화’되고 있다.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여 성장한 세대,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감염증에 의한 예기치 못한 사태에도 온라인화에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바이러스의 위협을 앞에 두고 학문(學文)의 장(場)은 속수무책으로 닫혀버렸을지도 모른다.
다만, 온라인의 시행착오(試行錯誤) 속에서, 수강 환경의 정비에 관한 문제, 이른바 ‘통신격차’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모든 강의가 온라인화되면 경제의 격차에 따른 통신의 격차가 그대로 교육의 격차로 직결되어 버린다.
게다가 학생부원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통신 격차와는 다른, 큰 벽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배움에 대한 모티베이션(동기 부여)의 유지’라고 하는 과제다.
캠퍼스의 강의에서는 다른 학생의 자세나 강사와의 ‘생생한’ 교환도 자극이 된다. 그러한 ‘배움의 숨결’을 온라인 강의에서는 느끼기 어렵다. ‘배움의 장(場)’으로서의 공기감(空氣感, 분위기)이나 현장감의 상실(喪失)이 생각 이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교실이라면 잘 이루어지고 있을 ‘지혜의 커뮤니케이션’이 온라인에서는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전해지기 어려운 마음
‘디지털 네이티브’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정보를 입수하거나 타인과 접하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는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과 현실의 세계를 대립하는 것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인터넷상의 대등한 관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상대의 지위나 연령, 소속 등에 구애받지 않는다.’ 등의 특징을 들 수 있다고 한다.
뒤집어 보면 다른 사람과의 ‘마음의 거리감’을 가늠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같은 말을 하는데도 대면에서는 표정이나 몸짓 등 언어 이외의 부분도 보충해 의도를 전하기 쉽지만, 디지털에서는 말 이외의 것은 통하기 어렵다. ‘열기’나 ‘생각’이라고 하는 마음에 관계된 부분은 더욱 그렇다.
애초에 커뮤니케이션이란 서로의 의사나 감정, 사고를 전달하는 것 등으로 설명되지만 본래 ‘나눔을 공유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지식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배움의 장(場)을 ‘나누는 것’이 중요한 요소인 것은 틀림없다.
대체로 디지털은 아무래도 생각을 나누기 어렵다는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 신입생 환영의 뜻을 담은 온라인 모임에 참석한 카바사와 학생부장.(지난달 10일)
되돌아오는 무게
그러한 디지털이 안고 있는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하나인 ‘셰어(Share)’(공유하는 것, 나누는 것)라고 하는 행위에서도 보인다.
지금은 ‘셰어’의 시대다. 웹상의 다양한 사이트와 뉴스, SNS에는 ‘공유’ 기능이 있어 궁금했던 정보를 쉽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손쉬움은 가벼운 책임감마저 낳을 수 있다. 특히 SNS상의 셰어는 사람을 매섭게 아프게 하는 비방중상(誹謗中傷)마저 ‘한 번의 클릭’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
어째서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 디지털 세계에서의 셰어는 ‘나눔’의 본의(本義)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의 셰어는 복수(複數)의 사람에 의한 상호성(相互性)에서 성립된다. 예를 들어, 눈앞의 사람과 무언가 좋아하는 것이나 좋은 것을 나누면 기쁨이나 감사 등의 마음이 되돌아온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낯선 사람을 갑자기 비방중상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상의 셰어는 발신에 따라서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보게 된다. 또한 다른 이들의 반응을 무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받는 측과의 대등한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방적인 셰어’가 되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는 상상력이 떨어져 진정한 ‘나눔’이 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디지털 사회의 과제에 대해서, 불법(佛法)은 다음과 같은 시점을 제시하고 있다.
니치렌 대성인(日蓮大聖人)께서는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이 밝아지는 것과 같다.”(어서 1598쪽)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한층 높은 ‘셰어’에 대한 통찰(洞察)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내민 빛은 동시에 자신의 앞도 밝혀주는, 즉 일방적인 것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나눔을 가져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상대에게의 행동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무게가 있다.
우리가 선(善)의 가치(價値)를 공유하면 그것은 사회로 몇 배나 퍼져 나간다. 이것이 자타 함께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울려
이 철학을 바탕으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무기는 ‘인간력(人間力)’이라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의 “인격(人格)”을 걸고, 열기나 생각을 전해 가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있기에 커뮤니케이션이며, 셰어다. 익명성이 높은 SNS라도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무책임해서 좋을 리 없다.
대성인께서는 “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어서 563쪽)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전하기 어려운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굳이 전하려고 하는 말을 열정적으로 자아냄으로써 따뜻한 온기와 함께 상대방에게 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세계로, 자신의 경애를 크게 열면서 생각을 전해 갈 수 있는 힘을 단련해 가는 도전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간력’이야 말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금 세계의 학생 -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다 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이 세대가 ‘코로나 후’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런 가운데 창가(創價)의 철학은 신시대의 희망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스승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뇌(苦惱)를 타개해 가는 인간혁명(人間革命)의 철학이 점점 더 갈앙(渴仰)받고 있다고 해도 좋다. 지금, 창가(創價)의 젊은 철인들이 *자행화타(自行化他)의 제목을 낭랑하게 끝까지 부르면서 익숙한 자신의 과제에도, 친구의 고민에도, 사회의 개혁에도 격려하며 도전하는 하루하루의 축적을 통해 얼마나 위대한 지성(知性)과 인격(人格)이 연마되어 가는 것인가.”(학생부 지도집 「선구의 긍지」)
스승의 학생부(學生部=대학부)에 대한 기대를 가슴에 품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철학을 사회에 넓힐 수 있도록, 우리 학생부는 학문과 함께 인격을 단련하고 인간력을 연마해 차대를 구축해 가는 리더로 성장해 가고 싶다.
[용어해설(用語解說)]
생로병사(生老病死)
인간이 면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4가지의 괴로움.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사고(四苦)라 한다. 이러한 괴로움의 극복이 불도수행(佛道修行)의 목적이다.
▷ 석존(釋尊)
자행화타(自行化他)
자행(自行)과 화타(化他).
어서(御書)에는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이제 니치렌(日蓮)이 부르는 바의 제목(題目)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며”(1022쪽)라고 있다. 말법에서는 자행에 있어서도 화타에 있어서도 성불(成佛)의 근본법인 남묘호렌게쿄를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불도수행(佛道修行)이 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