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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1일(부활주일)
마태복음 28:1~10
부활의 주님이 나를 다스리실 때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접맥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where?
1974년 2월 21일, 오노다 히로오라는 일본군 장교가 30년 동안 숨어 있던 필리핀의 정글에서 나왔습니다. 그동안 그는 매일 아침 소총을 닦고, 가상의 상관에게 정찰 보고를 하며, 적들을 피해 숨고, 해진 옷을 기워 입으며 지냈습니다. 패잔병에게 무슨 기쁨과 평안이 있었겠습니까?
불안하고 외로우며 분노하고 좌절하며, 자괴감과 회의에 빠지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노다 히로오를 이처럼 비참한 패잔병으로 만든 것은 밀림도 아니었고, 적군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그렇게 비참한 삶으로 몰아넣은 진짜 적은 자기 마음에 있는 의심이었습니다.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 승전국 미국은 삐라를 뿌리며 숲에 숨은 게릴라들과 패잔병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투항하기를 끝내 거부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나서서 그에게 호소했습니다. “나와서 투항해라. 이제 끝났다.” 심지어 가족까지 동원해 설득했지만, 그는 끝까지 나오기를 거부했습니다. 가족을 동원하고, 일본 정부를 빙자해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미군의 심리 공작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패잔병으로 사는 이유는 의심 때문입니다. 입으로, 교리로, 머리로, 장사 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은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오노다 히로오처럼 패잔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출처: 양승헌, 「크리스천 믿음(상)」(서울: 디모데, 2017년);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1년), p. 51에서 재인용.
오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부활절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가득하길 축복합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기 위해 갔습니다. 이 무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로서, 총독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안치되었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을 가로막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해 간 후에, 예수께서 다시 살아났다고 사람들을 속이면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며 총독 빌라도를 설득했습니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경비병과 함께 예수의 시신이 안장된 돌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돌 입구를 막은 돌을 끈과 진흙으로 인봉하였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을 통해 무덤을 굳게 지키도록 했습니다(마 27:66).
이러한 상황에서,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보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돌문은 이미 굳게 닫혔고, 경비병들은 무덤을 굳게 지키고 있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아마도 여인들은 멀리서나마 돌무덤을 보면서 자신들의 슬픔을 달래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냈습니다. 돌 위에 앉은 천사의 모양은 마치 번개와 같았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습니다.
돌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여인들에게 천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5~6절).”
천사의 증언대로, 예수님의 시신은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언제 살아나셨을까요?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냈을 때 살아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전에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사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부활하셔서, 굳게 닫힌 돌무덤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 후에 천사는 돌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돌을 굴려냈을 뿐이었습니다.
천사는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곳을 여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여인들에게 증거 해 주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빨리 가서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될 것”이라는 말도 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활절 새벽에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what's problem?
저는 부활절 새벽에 일어났던 일과 관련하여, 하나의 갈등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가 여인들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먼저 경비병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과연 경비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경비병 중에 몇 명이 성에 들어가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장로들을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고,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어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돈 만큼 문제를 깔끔하고 손쉽게 해결할 방법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이 세상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경비병들이 잠자는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침입해서 시신을 도둑질해 갔노라고 허위 진술하도록 경비병들에게 권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엉터리도 이런 엉터리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돌무덤을 굳게 지키던 경비병들은 모두 군인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명의 군인이 보초병도 세워놓지 않은 채 어떻게 모두 잠들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군인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하더라도, 육중한 돌문이 굴려지는 소리를 그들이 어떻게 듣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잠을 자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들이 제자들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같은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경비병들이 경계에 실패해서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하면 그들은 군법에 따라서 사형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은 만약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자신들이 잘 말해서 경비병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매우 많은 금액의 돈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처사가 합당하다고 보십니까? 과연 그들을 진실 된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군인들은 돈을 받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강력한 세상 나라의 권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돈과 거짓말과 권력으로 중무장한 세상 나라의 권세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곳곳에서 그런 노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헤롯 왕 때에 동방에서부터 온 현인들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실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을 때, 예루살렘은 소동했습니다. 이에 헤롯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에 있던 두 살 이하의 모든 영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마 2:16).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을 때, 마귀는 예수님을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유혹했습니다(마 4:1~11).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은 세상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도전장을 내미는지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를 공격했던 또 한 가지의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계실 때에, 주의 제자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며 말했습니다.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겉으로 보기에 베드로의 항변은 스승의 안위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라며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놓고도, ‘생명이냐, 돈이냐?’의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그때 만약 경비병 중 한 명이라도, “그때 나는 종교 지도자들의 꾐에 빠져 거짓말을 했습니다.”라고 양심선언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날 돌무덤 앞에서 자신이 보았던 것을 사람들 앞에서 진실 되게 증언했어야 합니다. 진실은 밝혀져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군병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보다 이 세상의 권력과 돈이 주는 안전함을 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의 부활에 관한 거짓 소문이 유대인들 가운데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 여인들과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한마디로 그들은 불완전했습니다.
과연 여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기뻐했으나, 온전히 기뻐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인들은 천사의 지시를 받고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달음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기뻐했으나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고,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경배를 드렸으나,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의심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는 의심이 섞여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기 위해서 힘을 똘똘 뭉쳤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함께 의논했고, 군인들이 돈을 받고 그 일에 협력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들의 감정이 온전치 못했고, 그들의 믿음 또한 온전치 못했습니다.
what?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감사하게도 성경은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하게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입니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를 도전해 올 때,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달려가던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9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여기서 ‘만나다’라는 헬라어 단어 ‘휘판타오’는 ‘우연히 어딘가에서 만나다’는 의미보다는, ‘작정 된 만남’, ‘운명적인 만남’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미리 뜻하시고, 작정하셔서 그 여인들을 찾아와 주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을 향해 “평안하냐?”라고 인사를 건네주셨습니다. 이 인사말은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사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녕”, “잘 지냈어?”, “별일들 없었지?” 마치 며칠 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인사하듯이, 예수님은 아주 일상적이고, 편안하게 여인들에게 인사하셨습니다.
이 인사말이 여인들에게 얼마나 큰 안심을 주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인사말입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해서 미소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을 만나게 되었을 때, 죽음 또한 영원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임종 직전의 성도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숨이 넘어가려는 성도를 향해 “죄를 회개하라”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숨이 넘어가던 성도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목사님, 다 죽어가는 판에 나에게 회개하라는 설교를 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목사와 성도는 한참 동안을 웃으며, 옛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성도는 평안히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해 미소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제자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습니다(16절).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뵈옵고 경배드렸으나,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의심했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이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32).”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천사는 여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7절)”
여러분, 갈릴리로 누가 먼저 가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제자들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을 때, 누가 제자들을 맞이해 주셨을까요?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셔서, 그들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 주셨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셨던 장소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불러주셨고,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불러주셨습니다.
그 일로부터 만 3년이 지났습니다. 비록 제자들의 믿음은 온전치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처음으로 불러주셨던 갈릴리로 초대하시고, 그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원대한 세계 비전을 제자들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은 온전치 못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온전치 못하고, 우리의 믿음도 온전치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how?
우리가 이러한 소망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끝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자녀의 영적인 면에 특별히 관심이 있던 가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빠는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천국에 관해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들이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내 생각에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면 천사는 커다란 책을 보며 우리 이름을 부를 거예요. 천사가 먼저 아빠 이름을 부르겠죠. 그러면 아빠가 ‘여기요!’하고 대답하실 거예요. 그다음에 천사는 엄마 이름을 부르겠죠. 그러면 엄마도 ‘여기요!’하고 대답하실 거예요.”
“마지막으로 천사가 내 이름을 부르겠죠? 그러면 나는 점프를 할 거예요. 내 키가 작아서 천사가 나를 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크게 소리칠 거예요. ‘여기요!’ 하고 말이죠.”
며칠 후 이 가족에게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통학 버스를 타러 가던 어린 아들이 자동차에 치였던 것입니다. 새벽 무렵, 혼수상태에 있던 어린 아들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가족은 모두 아이의 얼굴을 주시했습니다.
아이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고, 아들의 마지막 한마디는 슬픔에 잠긴 가족에게 평안과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어린 아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명료해서 모두가 알아들 수 있었습니다. “여기요!”
-출처: 오인숙, 「생각을 바꾸시는 하나님」(서울: 규장, 2006);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17년 4월호), p. 105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여러분과 항상 함께 계심을 믿고 계십니까?
비록 우리의 기쁨이 온전치 못하고, 우리의 믿음이 온전치 못할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고, 우리보다 앞서가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맞아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부활하신 주님을 기뻐하며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