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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제1차 동북공정:
《古史辨》을 통한 古代史 否定
1) 《金文新考》 序文을 통해 밝힌 고대사 왜곡의 현장
《金文新考》는 “千年의 誤를 糾正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옛 금문연구에 있어서의 천년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糾正在古金文硏究方面的千年之誤)”
이 서문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분량과 내용이 실린 것으로,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古史辨〉을 통해 고대사를 부정하는 논거를 비판하고 성토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학술계의 옛 청동기 고증에 있어서 시대구분은, 청말 오대징과 같은 고대 역사학자나 문자학 분야에서 탁월한 공헌을 한 큰 스승 왕국유 등은 모두 송대 설상공, 구양순 등 準星과 같은 역대 금문 연구가의 관점과 일치하였다.
이제는 그 반대로 극소수를 예외로 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日辛’, ‘日癸’, ‘父乙’, ‘父戊’등의
문자가 새겨진 청동기를, 그것이 조상제사를 위한 제기이거나, 부족을 표시한 병기이거나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일률적으로 은상시대의 청동기로 구분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운 유일한 근거는 晉대 皇甫謐의 《帝王世紀》에 기록된 “商나라 사람은 ‘日’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上甲(최초의 紀年)이 막 시작될 때부터이다.(商人以日爲名,自上甲微始)”라는 말인데, 이 말은 천년 동안 오해를 불러왔던 것이다.
▪ 그러나 중국역사학계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은허갑골문의 출토로 왕국유 등 선학의 고증을
거쳐 사마천의 《史記》〈殷本紀〉가 역사실록이라는 것은 이미 국내외의 역사학계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 1923년 제1차 〈古史辨〉 중에는 “허구에 허구를 층층으로 쌓아 올려 만든 古代史”라고 하는
고사 부정론자들이 출현하여, 夏禹를 허구의 ‘神話人物’이라고 할 뿐 아니라, 역사기록의 堯· 舜도 “이상적 인격체의 명칭일 뿐이다“라고 하여 옛 역사를 의심하는 정도를 지나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胡適 까지도 ”층층으로 이루어진 고대사“라는 관점에 동조하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중국사학계의 일대 공헌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논전 중에 끼어든 지질학계의 저명한 인물은 ‘하우가 원시석기시대 인물’이라는 논점을 제기하였으며, 이에 동조하는 부정론자 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논거는 “우리가 지금까지 하대의 동기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 고사 부정론에 맞서는 논자는 양개초가 일찍이 지적한 “《堯典》의 ‘仲春日中星昴,仲夏日中星火’등의 기록은 일본 천문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BC.2400년의 천문현상과 일치하는 것으로 《堯典》은 최소한의 진서인 부분이 있다.”라고 한 논거로 부정론자 들을 비판하자,
- 부정론자는 “堯·舜 시대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堯典》에 기록된 중성이 BC.2400년의 천문과 맞는다고 해서 요·순시대의 진서라고 생각할 수 없다.” 거나, “‘日中星昴,日中星火’라는 말은 너무 간단하여 BC.2400년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니 천문학자에게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하여 의견을 들어보기 전에 이미 일본 천문학자가 ‘歲差’에 의해 추산한 과학적 연대를 부정하고 있었다.
▪ 1940년대 중국의 저명한 신역사학자들도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이 중국 문자 창조의 시초”라는 논점을 가지고 있었던 바, 과거 皇甫謐이 범했던 착오보다 심하여 역사실제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 漢末 蔡邕은 “황제청동기명문에는 연대가 있다.”고 하고, 明末 靑初의 고염무도 《日知錄》에서 같은 견해를 보이며,
《漢書》〈藝文志〉에는 “황제시대 청동기 명문 6편(黃帝銘六篇)”의 서목이 보이며,
晉代 《拾遺記》 에는 “신농이 준령에서 동을 채취하였다.(神農取銅于峻領)”라는 기록이 있고,
《堯典》에는 ‘金作贖刑’이라는 기록,
《管子》에는 ‘禹以莊山之銅鑄金以贖民’
《史記》〈夏本紀〉에는 ‘金分三品’
《春秋左傳》의 ‘貢牧九金’은 禹가 九鼎을 鑄造하였다는 傳聞 기록이며,
▪王國維는 〈殷周制度論〉에서 “《商書》〈多士〉의 ‘夏迪,簡在王庭,’은 당연한 사실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은허갑골보다 천년이 앞선 夏代 제도에 관한 簡冊擋案이 周初의 王室寶庫에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반세기 이전의 ‘古史否定論者’들에 의해 전반적으로 부정되어 버렸으며, 여기에 구역사학, 고고학, 문자학 세 분야의 ‘古史否定論者’들의 논점은 근본이 잘못된 채 서로 의탁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미 쟁변을 불허하는 정론이 되어버렸다.
“천년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이 말은 2000년 11월 9일 중국 사회과학원이 夏·商·周 삼대의 연표를 확정 발표함으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고사 부정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를 《고사변》에서 직접 찾아 정리해 보기로 한다.
2) 《古史辨》의 주요 내용
대만에 유학을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구한 《고사변(제1책)》(중화민국76년 11월) 복사본에서
위에서 낙빈기 선생이 제기한 논점을 찾아보려한다
그에 앞서 顧頡剛이 《古史辨》1책에 자서를 쓴 1926년으로 부터 근 100년이 지난 오늘의 중국인들이 《古史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2010년 12월 《古史辨》 구입을 목적으로 3박4일 일정으로 북경에 다녀왔는데, 웬만한
서점을 다 돌아보아도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서점을 몇 군데 돌아보고 금문에 관한 책 몆 권을 사고, 느끼한 베이킹덕이나 맛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2년 뒤 필자가 가진 책이 중화민국 76년(1988년) 대만에서 발간된 것이니 대만에 가보자 하고 3박4일 일정으로 타이페이에 가서도 이 책은 구경도 못하고 타이페이 지하철 노선만 외우고 맨손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胡適까지 나서서 “중국 사학계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고 극찬하였을 뿐 아니라, 1990년대 말 우리나라에서까지 도올 김용옥은 TV에서 도덕경에 관한 강연을 하던 중
“중국은 《古史辨》이란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 역사의 거짓을 깨끗하게 정리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단군이니 뭐니 하고 있다”고 질타하기도 하고, 《중국통사》에서도 중요한 항목으로 다루던 《古史辨》이 어찌하여 역사의 주체인 중국인에게 일고의 관심도 가지지 못하는 일이 되어버렸을까?
이런 형편에서 몆 해 전 고힐강저. 김병준역.《고사변 자서》(2006년 서울 소명출판)를 구하여 볼 수 있게 되었으나 이는 顧詰剛 《古史辨》 7책중 1책에 실린 〈自序〉부분에 저자의 전기와 1980년대에 쓴 “나는 고사변을 어떻게 편찬 했는가”하는 논편을 가미한 것으로, 고사부정론의 입장에서 서간을 정리한 편찬자인 고힐강의 주관적 해석과 주장일 뿐으로, 7책에 수록된 서간문을 읽어보지 않고는 이에 대한 평가도 할 수 없는 것이다.
顧頡剛《古史辨》1책을 펼쳐보니, 위에 언급한 〈自序〉가 103쪽 실려 있고,
1책 본문만 285쪽인데 본문은 모두 왕래한 서신을 시기 순으로 편집한 것으로, 1책도 상·하편으로 나누어 상편에 1~45)번서신, 하편에 46~64)번서신이 실려 있다.
1)번 서신(민국9년 11월)은 호적이 고힐강에게 보낸 서신이고
2)번 서신(민국9년 11월 23일)은 고힐강의 답신이며,
1책에 수록된 마지막 서신은 疑古玄同(錢玄同)이 고힐강에게 보낸 63)번 서신에 대한
64)번 고힐강의 답서(민국14년 8월 26일)이다.
이와 같이 《古史辨》1책은 민국9년 11월~14년 8월, 5년간의 서신을 편집한 것으로, 《古史辨》의 핵심적인 논지는 대부분 드러난 것으로, 2책~7책을 구해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참고로 1번)서신을 보면
제1서) 姚際恆(도제긍)이 저술한 책에 대해 묻다 (詢姚際恆著述)
힐강(에게)
군의 〈淸籍考(청나라 서적고)〉에는 姚際恆의 저술이 보이지 않는데, 이분 역시 대단한 인물로,
그의 《九經通論》을 구하여 보고 싶은데, 그 책의 어떤 판본이 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네. 만약 군이 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나에게 알려주기 바라네. 適 (민국9년 11월)
(頡剛: 你的淸籍考內沒有姚際恆. 此人亦是一個很大胆的人.
我想尋求他的《九經通論》,不知此書有何版本? 你若知道,請告我. 適)
詰剛에게 適이라고 서명한 서신을 보낸 사람이 그 유명한 胡適으로, 이 40자에 불과한 서신에 대해, 고힐강은 리포트를 제출 하듯 장문의 답신을 보내면서. 胡適선생이라고 그 함자도 입에 올리지 못하고, 適으로 서명하고 보내온 서신에 대한 답신으로,
適之先生(適이라고 하신 선생님)께 學生 顧詰剛이 올립니다 하고 납작 엎드리고 있다.
胡適(1891~1962)은 진독수(1880~1942), 전현동(1887~1939), 노신(1881~~1936) 등과 함께 백화문운동을 제창하고 이끈 인물로, 모두 선배격인 세 사람 앞에 이름이 올라있는, 1919년 〈5.4〉운동을 전후한 백화문 운동의 중심이며, 중화민국의 애국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청나라로부터 해방되면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새로운 문화를 진작하는 방편으로 백화문 운동과 더불어 《古史辨》을 통해 자신들 만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錢玄同은 疑古玄同으로 옛 역사를 의심한다는 뜻의 疑古라는 호까지 만들어 쓰기도하고, 胡適은 “중국 사학 분야의 일대 공헌”이라고 하며 고사부정론의 편을 들어준 것은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고사부정론은 이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수도 없는 정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80년이 지난 후 중국 당국이 앞장서서 이를 뒤집고 있으니 이 무슨 조화인가?
이제 《古史辨》의 초점이 되었던 몇 가지 논점에 대해 생생한 토론 현장을 찾아보려한다.
□ 하우는 원시석기시대 사람이라는 논쟁에 대해
《古史辨》 1책 201~209쪽 에 실린
제48서. [禹貢의 허위를 증명할 자문을 구하는 글]과
제49서. [禹의 치수 설은 믿을 수 없음을 논한 글]이라는 서신을 필자의 번역문과 함께 원문을
[별첨2]로 아래에 제시하였다. 전문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필자가 번역한 것으로 잘못된 부분도 있겠지만 대충의 흐름은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 제48서. [禹貢의 허위를 증명할 자문을 구하는 글]
고사부정론을 펼쳐온 고힐강에게, 호적선생이 고사부정의 핵심쟁점인 우의 치수 설은 극히 믿기 힘들다고 한데 힘입어, 더욱 열심히 우의 치수 설을 뒤엎을 수 있는 논거를 찾던 중,
우의 치수 설이 전국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글을 찾게 되었으며, 그 글의 목록을 감정하여 주십사 하면서, 실은 九州의 설은 전국시대에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 글의 목록을 참조하여, “우는 치수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으며, 따라서 우의 치수는 근본적으로 없었던 일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전제로 한 후,
지질 전문가로서 우가 실제상 치수를 할 능력이 없었으며, 따라서 “우의 치수설은 虛誕(허탄. 허위로 만들어진)된 일 이었음을 능히 증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더하여 禹貢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바쁘신 중에도 틈을 내어 전문적인 검토를 해주시기를 청하오며, 지체 없이 그 개요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지질 전문가로서 조언을 부탁하고 있다.
이에 대한 지질전문가 정문강의 답서는 다음과 같다.
▪제49서. 禹의 치수 설은 믿을 수 없음을 논함
- 우의 치수 설은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이는 江·河모두 자연 수로로 인공으로 물길을 만들었다는 흔적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 양자강 수로위원회의 영국인 Palmer기사도 “현대적 기술로도 장강의 물길을 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석기시대의 禹에게 이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할 그런 능력이 있었겠는가?”라고 반문 했다고 하며,
- 이전에 그에게 “이 때 까지 夏代의 靑銅器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禹는 석기시대의 인물이라고 한다”고 말 해 주었다고 한다.
- 양자강에서는 황하 하류와 같은 수해는 절대 일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南方洪水’라는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황하의 수해도 오직 황하 하류에서나 가능한 것이며, 원곡현(垣曲縣) 상류에서는 홍수가 발생할 가능성은 萬의 하나도 없습니다.
- 龍門의 砥柱를 직접 가서 둘러보고 개략적인 연구를 하였는데, 용문은 황하가 협곡을 빠져나오는 입구로, 협곡 사이 수면의 넓이는 수십 丈에 불과한데, 양안의 峭壁(초벽:깍아지른 절벽)의 높이는 일천척이 넘어 長江의 三峽과 같으며, 용문 협곡을 벗어나면 넓은 하천으로 변하여 수면이 2리 이상이 된다.
이는 모두 자연적 작용에 의한 것으로 禹와는 털끝만큼의 관계가 없는데, 용문이 사람이 판 것이 아니고 인공적인 힘이 더해지지 않은 천연적 峽口라는 데 대하여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 砥柱는 三門이라고도 하는데, 두 덩어리의 화성암 사이에 석탄 계퉁의 암석이 끼어 있었는데, 석탄계와 화성암의 경도 차이에 의해 침식의 속도가 같지 않았으므로, 석탄 계통의 암석이 물의 마찰에 의해 일 丈이 벌어질 때 바람에 의한 침식은 일 丈이 되지 않고, 화성암 계곡은 이보다 십 분지 일에 불과한 영향을 받게 되어 소위 삼문이 만들어진 것이다. 禹와 같은 사람은 이 계곡을 건널 수도 없었을 것이다.
- 그러므로 나에게는 치수란 말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위의 주장은 일견하여 그를 듯해 보이기도 하나, 한 대목 씩 따져보면 도저히 논증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논리로 짜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이 모든 논증은
-“夏대의 청동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夏·禹의 시대는 원시 석기시대이다.”라는 입증되지도 않은 가설을 전재로 하여,
- 원시석기시대 인물인 禹에게는 治水를 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 禹의 치수 설은 허구이다. 따라서
- 우의 치수를 기록한 史書는 거짓이며, 따라서 우의 시대는 원시석기 시대이다. 라는 반복된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2) “九州로 나눈 것은 전국시대의 일로 따라서 우의 치수 설은 전국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다.”라고 하는, 전국시대에 九州로 나누어 진 사실과 禹의 치수 설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3) “禹는 원시석기 시대 사람이다.”라는 전제하에 “長江의 三峽과 황하의 용문지주 즉, 三門은 자연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며, 江·河는 인공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연 수로이며, 현대의 기술로서도 힘든 일인데 원시석기시대 사람인 우의 치수 설은 믿을 수 없다.”라는 지질 전문가의 주장에 대하여,
사서에 기록된 禹貢의 내용이 三峽이나 三門을 운운할 만한 거대한 일이었는지, 극단적으로 말해, 우가 산사(三峽)댐을 쌓았다는 식의 기록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 禹貢에 대한 기록 《史記》〈夏本紀〉
43쪽 - 우는 익· 후직과 더불어 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후들과 백관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동원하여 치수사업을 벌이게 하였다.
44쪽 - 마침내 그는 九州의 땅을 개척하고, 九州의 수로를 내었으며, 제방을 쌓아 큰 호수 아홉 개를 수리하였고, 큰 산 아홉 개를 뚫었다.
- 禹의 치수사업은 서울이 있는 기주(冀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호구산(壺口山)을 다스린 다음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장수(漳水)가 황하(黃河)로 흘러 들어가는
곳까지 다스렸다.
- 연주(沇州): 濟水와 黃河 사이의 땅
45쪽 – 청주(靑州): 동쪽으로 바다와 서쪽으로 泰山에 이르는 땅
- 서주(徐州): 동쪽 바다와 泰山 淮水에 이르는 땅
46쪽 – 양주(揚州): 淮水의 남쪽과 바다의 서쪽에 이르는 땅
- 형주(衡州): 衡山에서부터 형산의 남쪽 기슭에 이르는 땅
47쪽 – 예주(豫州): 衡山 북쪽으로부터 황하의 남쪽에 걸치는 지역
- 양주(梁州): 華山 남쪽 기슭에서 黑水에 이르는 지역
- 옹주(雍州): 黑水의 동쪽에서 西河의 서쪽에 이르는 지역
이상의 〈夏本紀〉의 치수사업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고, 필자도 이 기록에도 전설적 과장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문강씨의 주장에 따른 비교 검토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며, 구주의 분주가 전국시대에 이루어졌으므로 우의 치수 설은 허구라는 주장도 수긍할 수 없다.
《여씨춘추》 〈八覽〉에는 구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예주: 황하와 한수 사이로 周나라에 해당 2)冀州: 청하와 서하사이로 晉에 해당.
3)연주: 황하와 제수 사이로 衛나라 4)靑州: 연주 동방으로 齊나라,
5)서주: 泗水가 흐르는 곳으로 魯나라, 6)揚州: 서주 동남, 越나라,
7)형주: 서주 남방, 楚나라, 8)옹주: 서주 서방, 秦나라,
9)유주: 서주 북방, 燕나라
위의 《史記》〈夏本紀〉와 《여씨춘추》에 기록된 九州의 명칭이 전국시대에 붙이진 것인지 아니면 이전의 東周나 商 夏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냐 하는 것과 관계없이, 禹貢에 기록된 九州의 명칭은 禹 시대에 사용된 지명이 아니라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구주에 대한 명칭을 사용하여, 그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史記》〈夏本紀〉에서 “서울이 있는 冀州에서부터 시작되었다”하는 冀州는
《여씨춘추》에서 주나라에 해당 한다“고 한 周의 서울 지역이 분명한 豫州와 다른 것으로,
禹가 활약할 당시의 서울 지역이 지금의 冀州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수(漳水)가 황하(黃河)로 흘러 들어가는 곳까지 다스렸다.”거나 “雷夏를 호수로 만들어 雍水와 沮水를 이 호수로 흘러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땅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높은 지대에서 평지로 내려와 살 수 있게 하였다.”와 같이 황하나 장강의 광활한 본류가 아니라, 흘러드는 지류의 물길을 돌렸다는 기록을 마치 본류를 바꿨다고 한 것 같이 그 능력 운운 하며,
“제후들과 백관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동원하여 치수사업을 벌이게 하였다.”는 국가 조직을 동원한 사업을 “원시부족사회의 인물로서 불가능한 일을 거짓으로 기록했다”고 역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원시석기시대가 아니라 구석기시대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바위를 들어 올려 쌓거나 세운 무수한 고인돌과 선돌이 중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인가?
▪위와 같이 “하·우는 원시석기시대 인물이다.”라는 고사부정론의 핵심적인 가정에 대해
堯·舜·禹로 이어지는 禹보다 二代(50년 이전)위인 堯시대에 천문을 관측 한 기록을 제시하며 비판하는데 대해, “堯·舜 시대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堯典》에 기록된 중성이 BC.2400년의 천문과 맞는다고 해서 요·순시대의 진서라고 생각할 수 없다.”라고 외면해버렸다는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바 있다.
梁啓超가“《尙書》〈堯典〉에 기록한‘仲春日中星昴,仲夏日中星火’은 일본천문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BC2400년이며, 《堯典》에는 최소한의 진서인 부분에 있다.”라고 한 논점에 대하여는, 《古史辨 一冊》에는 이와 관련된 서간이 실려 있지 않으며, 아마도 2冊에 실려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구하여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행히 《금문신고》 서문의 후반부에 천문관측에 대한 낙빈기선생의 설명이 있어 이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 중국에서의 천문관측과 청동기제작을 시작한 시기에 대하여 (《금문신고》 서문 5.6.7항)
▪ 《堯典》에 기록된 천문현상에 대하여
- 우선 필자가 《尙書》〈虞書-堯典〉에서 찾아본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日中 星鳥,以殷仲春. 日永 星火,以正仲夏. 宵中 星虛,以殷仲秋. 日短 星昴,以正仲冬”
- Joseph Needam박사는 天象에 대한 연구《中國科學技術史· 天學》에서
18세기 프랑스 천문학자 Biat가 ‘歲差’에 따른 연대추산으로 《堯典》 ‘四仲中星의 座標’가
BC.2357년이라고 한 것은 실제 사실로 인증하고 확증하였는데,
이는 50년 전 일본천문학자에게 의뢰해 추산한 년대와 거의 비슷하며,당시 이를
부정했던 중국 역사학회의 입장과 다른 보다 진일보한 해석이었으며, 저자가 금문해석을
통해 밝힌 帝堯 卽位初年과 일치하였다.
- 따라서 Needam박사는
[하대의 청동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우 시대는 원시석기시대 이며, 堯·舜은 이상젹 인물의 명칭일 뿐이다. → 우의 치수는 불과하며 허위이다. →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의 추정연대 BC.1500년이 문자 창조의 시작이며, 따라서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는 모두 은·주시대의 것이다 → 우리는 아직 하 이전의 청동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 하·우는 원시 석기시대 인물이다]라는 상호의존 하여 되풀이 하는 이러한 논단을
부정하거나 의심해 보아야 했는데, 중국역사학계의 주장을 잘 알고 있었던 박사는
- 《堯典》에 기록된 천문기록은 확실히 BC.2357년의 천문기록임을 증명하고 부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은허 갑골문이 문자의 창시”이며 석기시대 夏·禹이전의 신화나 모계제 원시사회 단계였던 BC.2357년에는 천상에 관한 문자 기록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이 천상기록은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 바빌론에서 왔다.”고 결론짓고 말았다.
▪ 청동기 제작 시기에 대하여
- 《古史辨》이래로 중국 古歷史 영역에서는 “하우는 석기시대인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하대의 청동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맹목적인 판단이 정착되어 있는데,
그런대로 오늘날의 고고학은 조기의 ‘서안 반파유지나‘ 근기의 ’산동대문구문화 유지‘의
발굴 등 탁월한 공헌을 한 바 있다. 특히
- 1977년 수도 역사박물관에서 전시한 바 있는 ‘大甸子(대전자) 靑銅文化’와
1976년 은허에서 출토된 唐堯이전에 속하는 청동이기는 더욱 빛나는 성과이다.
- 문자고증학은 이러한 발굴성과 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는데, 이는 ‘遼西敖漢旗 大甸子’에서 출토된 각종 금속문물에 대하여 ‘早期-靑銅器’라고 한 것이다.
금속문물의 탄소측정 연대의 상한은 BC1800년으로, 이는 夏代의 문화에 속하는 것이며,
금속이 金, 銀, 鉛, 錫의 4종류로 분류되었다면 분명 이는 청동기 중기였을 것이나,
‘조기’라는 말로 제한 한 것은 ‘하우는 석기시대인’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이 외에 459호 분묘에서 발굴된 匋文 ‘北’과 청동기 ‘后羿尊(후예준)’의 명문 ‘州’ 등의
氏稱字의 고증을 통하여 BC2200~2300의 문물인데, BC1800년이라는 탄소연대측정은
제대로 된 것인지? 또한 도기가 출토된 묘에 대해서도 탄소측정을 하였는지 확실치 않다.
- ‘靑海 諾木洪遺址’에서 발굴된 斧,刀,錢···등에 대해 하한이 전국시대나 한대 이전일
것이라고 했는데, 표본의 측정치는 BC2177 전 후 110년으로 나왔으며,
- 赤峰(적봉-요서)지역의 蜘蛛山(지주산)에서 청동기 冶煉場(야련장)이 발굴되었는데,
탄소연대 측정치가 BC2410년경이고, 지질부의 자연연구소 실험실에는 최근 임동산에서
출토된 두 점의 동기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것 들은 탄소연대 측정에 의해 BC4000년의 유물로 측정되었다.
▪ 낙빈기 선생은 위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청동기 제작연대의 상한을 BC1500년으로 하여
출토된 청동기를 모두 殷·周 시대의 청동기라고 하고, 갑골문이 문자 창조의 시작이라고 하는
가설을 반박하고 있다.
이상에서 동북공정에 관한 내용으로는 지엽적인 문제를 장황하게 논한 감이 있다.
그러나 실은 고사부정론에 대해 반박할 논지는 무수히 많으나, 여기서는
제2편부터 중국어, 한문, 금문 등에 대한 검토에 도움이 될 만 한 최소한의 논점만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이로서 고사부정론의 논거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 하는 점만 보이고, 후편에서 금문
제작당시의 ‘母系 傳胥制(모계 전서제)’등 그 시대의 제도와 사회상을 이해하고, 그 기초 위에서 금문의 해석을 통해 실질적인 역사와 그 연대를 밝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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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서. 禹貢의 허위를 증명할 자문을 구하는 글(詢禹貢僞證書)
여러 선생께
얼마 전 호적선생께서 나에게 禹의 치수(禹貢) 說은 극히 믿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나는 우의 치수 설을 뒤집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듣기를 소원하게 되었으며,
작년 4월에는 이에 더하여, 우의 치수설이 戰國 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설의 목록을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적은 초록을 보고 감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우 치수설의 유래,
2) 고대 우에 대한 신화에는 치수라는 말만 있을 뿐, 分州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3) 고대에는 오직 종족관념만 있을 뿐 통일이란 관념은 없었다.
4) 고대의 「中國」은 지역이 그렇게 넓지 못했다.
5) 九州의 설의 유래와 그 영향
6) 九州의 설의 확대(추연된 「大九州」의 설)
7) 戰國시대에 비록 「九州」의 설이 있었지만 아직 통일된 설이 아니었다.
8) 九州의 명칭의 뜻과 처음 나온
9) 구주 강역과 7국 강역의 비교.
위의 기록들은 무성하게 우거져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온(荏苒임염하여) 것이거나, 바로 바로 기록된
것이거나를 불문하고, 九州의 설은 戰國時代에 시작된 것을 증명할 뿐이다.
또한 禹의 治水는 근본적으로 없었던 일로, 이런 일을 하기 에는 힘이 부족하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선생은 지질을 전공하여, 깊고 넓은 경험을 하신 분으로, 실질적인 여건에 따라 치수의 설이
허구로 태어난 것임을 능히 증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더하여 禹貢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바쁘신 중에도 틈을 내어 전문적인 검토를
해주시기를 청하오며, 지체 없이 그 개요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민국13년 2월 6일 詰剛 敬上
諸君先生
前日適之先生告我, 謂先生極不信禹治水之說. 我擬推翻禹貢,此說極所願聞.
去年四月聞, 曾疑一禹貢作于戰國攷之目錄.今抄在下面,請鑒正
1) 禹治水之說的由來.
2) 古代對于禹的神話只有治水而無分州.
3) 古代只有種族觀念而無一統觀念.
4) 古代的「中國」地域甚不大
5) 九州之說的由來及其影響
6) 九州之說的擴大(騶衍「大九州」之說)
7) 戰國雖有「九州」之說, 但九州之說未嘗統一.
8) 九州之名的取義及其初見.
9) 九州疆域與七國疆域之比較.
此文荏苒至今來作. 但卽作, 亦只能證明九州之說出于戰國,
而禹之治水根本上無此事則力不足以說明.
先生專攻地質, 是跡甚廣, 能從實地上證明治水之說的虛誕, 于辨禹貢尤爲重要.
務請有暇則著專篇, 舞暇則通函告我以大槪, 不勝肦感.
詰剛敬上 (民國13年 2月 6日)
▪제49서. 禹의 치수 설은 믿을 수 없음을 논한 글 (論禹治水說不可信書)
할강선생께
우의 치수 설은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江·河 모두 자연 수로로 인공으로 물길을 만들었다는 흔적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습니다. 강은 더욱 그러합니다.
지난해 양자강 수로위원회의 기사 Palmer군 등과 동행하여萬縣에 갔을 때,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현대적 기술로도 장강의 물길을 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석기시대의 禹에게 이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할 그런 능력이 있었을 까요?”라고 반문했다.
나는 그에게 이때까지 夏代의 靑銅器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禹는 석기시대의 인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양자강에서는 황하 하류와 같은 수해는 절대 일어날 수 없으며, 당신이 말한 ‘南方洪水’라는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황하의 수해도 오로지 황하 하류에서나 가능한 것이며, 원곡현(垣曲縣) 상류에서 홍수가 발생할 가능성은 萬의 하나도 없습니다. 龍門의 砥柱를 직접 가서 둘러보고 개략적인 연구를 하였는데, 용문은 황하가 협곡을 빠져나오는 입구로, 협곡 사이 수면의 넓이는 수십 丈에 불과한데, 양안의 깍아지른 절벽의 높이는 일천척이 넘어 長江의 三峽과 같습니다.
용문 협곡을 벗어나면 넓은 하천으로 변하여 수면이 2리 이상이 됩니다. 이는 모두 자연적 작용에 의한 것으로 禹와는 털끝만큼의 관계가 없는데, 용문이 사람이 판 것이 아니고 인공적 힘이 더해지지 않은 천연적 峽口라는 데 대하여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砥柱는 三門이라고도 하는데, 두 덩어리의 화성암 사이에 석탄 계퉁의 암석이 끼어 있었는데, 석탄계와 화성암의 경도 차이에 의해 침식의 속도가 같지 않았으므로, 석탄 계통의 암석이 물의 마찰에 의해 일 丈이 벌어질 때 바람에 의한 침식은 일 丈이 되지 않고, 화성암 계곡은 이보다 십 분지 일에 불과한 영향을 받게 되어 소위 삼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禹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건널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에게는 치수란 말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다가오며,····중략
···머지않아 개략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국13년 2월 11일 丁文江 頓首
詰剛先生:
禹治水之說絶不可信. 江河都是天然水道沒有絲毫人工疏道的痕迹__江尤其如此.
去年同楊子江水道委員會的技士 Palmer君等同赴萬縣, 他對我說,
“就是要用現代的技術來疏導長江,都是不可能的. 石器時代的禹如何能有這種能力?”
我說禹是石器時代的人, 因爲我們至今沒有發見夏代的銅器.
揚子江的水患絶對不能如黃河下流的利害, 所以你的‘南方洪水’的假說是不能成立的.
但是黃河的水患也只能在下游, 垣曲縣以上萬不能有洪水. 龍門砥柱我都親自到過,
並且略有硏究. 龍門是黃河出峽的口子, 河面在峽中, 寬不過幾十丈,
兩岸的峭壁谷有一千尺多高, 同長江的三峽情形一樣.
一出龍門峽谷變爲廣川, 河面有二里以上. 這也全是有天然的理由的, 與禹毫不相于.,
況且龍門是天然的峽口, 用不着人반的, 也非人工所能爲力的.
砥柱又叫做三門, 是因爲有兩塊火成岩侵入煤系的岩石之中., 煤系軟而火成巖硬,
所以受侵蝕的遲速不一樣. 煤系被水衝開一丈, 被風蝕低一丈, 火成岩곡不過受了十分之一的影響,
成功了所謂三門. 與禹何涉?
······
丁文江 頓首(民國13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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