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역사는 가공이고 미래는 환상이며 오직 현실 많이 진실이다'.라고 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현실에 살면서도 우리의 현대사는 종북 좌파들이 가공한 역사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는 진실의 역사가 충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역사를 잘 모르는 세대들은 어느 역사가 가공이고 어느 역사가 진실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광복 80년 건국 77년이다. 우리나라 8월 15일은 이중의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는 정치, 사회, 문화를 비치는 미래의 거울이다. 전교조의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나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올바로 알아야 대대손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나갈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얄타회담
1945년 2월 구 소련 우크라이나지방 얄타시에서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수상, 소련 스탈린수상 등 연합국 정상회담을 갖었다. 이를 삼상(三相) 화담, 또는 얄타회담이라고 한다. 주 의제는 전범국 독일 패전에 따른 전비(戰費) 배상 문제와 동서독 분할 관할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말미에 한반도 관련 내용이 논의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침공으로 전쟁 중이었다.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은 스탈린 소련수상에게 대일본 전쟁에 참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항복
미국은 1945년 7월 16일 원자탄실험에 성공했고 연합국은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회담결과 일본정부에 8월 1일까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을 보냈으나, 일본 정부는 1억 총 옥쇄(總玉碎, 모든 국민이 명예롭게 죽겠다는 의미) 운운하며 7월 28일 항복거부 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조기에 종결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미군의 큰 희생이 없이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초조감으로 일본 본토에 원자탄투하를 결심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써 전력을 상실한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해방
일본의 항복이 전해지자 조선인들은 일본 통치를 벗어난다는 기쁨으로 조선독립만세, 해방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왔지만 9월 8일 미군이 입성 일본군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할 때까지 23일간 조선총독부(후일 중앙청)에는 일장기가 여전히 펄력였고 일본의 위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에 대해 보복 한 번도 못해봤다.
해방 소식을 전해 들은 상해 임정 김구 등 요인 일행이 미국 수송기를 타고 귀국 김포공항에 내려 조국땅을 밟으려 했지만 일본 무장군의 반발로 조선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고 있다.
미 군정청(軍政廳)과 대한민국 정부수림
일본의 패전으로 미국은 조선을 승전의 부산물로 속국으로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무정부 상태인 조선을 미 군정청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간 치안과 국방으로 남한 안전 관리에 힘써왔다. 북한은 남한에 박헌영이 내려와 남로당 전국 조직을 하고. 우파는 이승만을 주축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우파 정치단체)를 결성 1946년 2월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으로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국회는 만장일치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8월 15일 중앙청 국기게양대는 미국기가 내려지고 40여 년 만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 되었고 미군도 철수를 했다. 1945년 8월 15일이 광복절이라기보다 1948년 8월 15일이 자주독립국으로써의 광복절이 아닐까?.
김일성의 6,25 남침 빌미가 된 에치슨라인
신생 국가 대한민국이 탄생한 지 1년 반인 1950년 2월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지역 방어선은 알류샨열도를 바롯 해 오키나와 일본 필리핀이라고 에치슨라인을 발표한다.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이 제외된 것이다.
이에 김일성은 남침을 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박헌영을 대동하고 소련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 허락을 받아낸다. 이때 스탈린의 속셈은 한반도를 공산화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전략무기를 지원하고 모택동을 찾아가 병력지원을 받아 1950년 6,25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6,25에 참전한 인민군은 일본을 피해 만주로 간 조선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 한 모택동 군대로 장개석 군대와 전투 경험 있는 조선인 모택동 군대들이었다. 무기도 부족하고 전투경험 없는 우리 군은 최선을 다했지만 중과부족으로 28일 만에 대구,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이 함락되어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 때까지 3개월간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인해 한국군과 유엔군 약 77만 명이 전사, 부상, 실종되고 민간인 피해도 30여만 명으로 100여만 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38선은 남한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미국의 전략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소련은 공산당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월 얄타회담에서 연합국으로 미국과 참전을 약속하고도 6개월간 머뭇거리다가 미국의 대일본 전략을 알고 나서 일본 항복 보름 전에 참전 만주를 점령하고 한반도까지 진입하자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를 우려해 38도선 이남에는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아시아대륙 전체가 공산국가인데 남단에 유일하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좌파 종북주의자들은 미국이 조국을 분단시키고 통일을 방해했다고 주장하지만 통일을 방해하고 영구분단하게 한 것은 이재명이 쐐쐐(감사하다) 좋아하는 중국이다. 우리 군이 압록강까지 점령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시민회관에서 시민들에게 연설을 했다. 본인이 39년 만에 다시 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아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이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이하생략)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통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만약 미국이 38도선을 지키지안 했으면 소련이 한반도를 공산화시키고 오늘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지금은 김정은을 지도자로 섬기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재명은 미군은 점령군. 이라며 반미를 하는 자다. 이재명은 무역관세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차 25일 트럼프를 만나러 미국에 간다. 트럼프가 "지금도 미군이 점령군으로 생각하느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남한 정부는 친일파? 북한 정권은 독립 운가?
민주당의 좌파 종북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건국한 것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한민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북한 김일성 정권은 독립운동가들이 건국한 것으로 역사를 가공 선전선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한 이승만은 상해임정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미국을 근거지로 유럽 소련 등을 다니면서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연설과 언론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평생을 국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은 이승만 체포에 당시 거금인 30만 엔 현상금을 걸었다. 이승만 독립운동에 대해 국민들은 잘 몰라도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독립운동가다.
인민공화국 창건한 김일성은 중국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10대 때부터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 1932년 중국공산입당 '앙청유격대' 소속부대로 1933년 동녕현성 첫 전투에 참여했다. 좌파 종북주의자들은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과장된 공적을 내세우고 있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소속인 '동북항일연군'내에서 조선인 부대를 지휘했다.
김일성은 1937년 6월 4일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해 승리한 적이 있다. 중국항일연군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된 조선인부대 몇십 명을 지휘하여 지서를 습격 일본 순사 6명을 죽이고 식량, 탄약 등의 물자를 가지고 탈출했다고 되어있다. 여기까 지가 팩트다. 그 후 소련공산당에 입당 소련군 장교(대위)로 활동하다가 해방이 되자 소련 군부세력을 업고 북한 국가주석으로 등극한다.
남북 정부구성 인물의 정체성 비교
이승만과 김일성의 남북 정부 구성을 살펴보면 어느 쪽이 독립운동가 정부이고 친일파 정부인지 진실된 현대사를 알 수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독립운동가), 부통령 이시영(독립운동가 이종찬 광복회장 작은할아버지), 국회의장 신익희(독립운동가) 대법원장 김병로(독립운동가, 김종인의 조부), 국무총리 이범석(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장택상((독립운동가), 농림장관 조봉암( 독립운동가, 토지분배 주역), 무임소장관 지청천(광복군 총사령관), 법무장관 이인(독립운동가) 등으로 조각되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독립운동 소련공산당) 부주석 김영주(김일성 친동생),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장 헌 근(일제 중추원 참의), 상임위원장 강량(친일파 도의원), 문화선전부장 정국원(아사이신문 서울시 기자), 부수상 홍명희(조부 친일파), 이승엽(일제 양곡수탈하는 식량영단이사), 남로당 제주도당 총책 김달삼(일본군소위, 제주 4,3 사건 주동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종북 좌파들이 김구를 추앙하는 이유
종북 좌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로 비하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가로 추앙한다. 이승만이 상해 임정 대통령 당시 김구가 찾아왔다. 이승만은 김구를 면접한 뒤 경무부장으로 임명해 대통령을 경호하도록 했다. 그 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국제 외교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김구는 임정 주석으로 이승만과 호흡을 맞춰갔다.
해방이 되자 스탈린은 김일성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북한 공산화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제정치학 박사로 국제정치 상황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미국을 설득해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을 이끌어냈다. 유엔 감시단이 한국을 방문 북한에 가려하자 소련의 반대로 입국하지 못했다.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하도록 했다. 남한은 유엔 감시하에 5,10 총선을 치르기로 했다. 처음에는 김구도 동의했다.
그런데 좌파들의 감언이설에 마음이 변했다. 국제정세에 어두운 김구는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남북 분단은 결코 안된다"며 극구 만류에도 김일성을 만나겠다고 북한에 갔지만 김일성은 소련의 꼭두각시로 소련의 각본에 의해 회의가 착착 진행되었다. 김구는 김일성을 만나지도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와서도 "남한만의 정부수립에 반대한다"며 총선 참여를 거부했다. 김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좌파 종북주의자들은 이승만의 반대세력으로 김구를 내세워 좌파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