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뿌리산업 생존의 활로 (09)
전문 상담사와 I사는 대상 물품에 대한 정밀 분석을 실시한 뒤 원재료 구매와 단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 등 FTA 데이터를 수집해 이를 바탕으로 정합성을 검토했다. 이어 원산지 결정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부분은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해결책을 도출해 냈으며, 이를 토대로 한 수정 데이터를 이용해 FTA 원산지 기준에 따른 원산지판정 및 그 결과에 따른 원산지증명서 등 각종 FTA 서류를 작성했다. 또한 원산지증명서류를 요청한 원청업체가 요구하는 원산지 데이터와도 연동해 이를 맞출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I사는 원청업체가 긴급 요청했던 원산지(포괄)확인서를 비롯한 관련 서류를 발급해 위기를 모면했다.
뿌리산업은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 뿌리산업은 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등 ‘공정기술’을 활용하여 소재를 부품으로, 부품을 완제품으로 만드는 기초 공정산업으로 나무의 뿌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최종 제품에 내재되어 제품 경쟁력의 근간을 형성하는 산업을 일컫는다.
가령, 자동차 1대를 생산할 때 뿌리산업 관련 비중은 부품 수를 기준으로 약 90%(2만5,000개)를 차지하며 선박 1대를 건조할 때 용접비용이 전체 비용의 약 35%를 차지한다. 벤츠와 BMW, 도요타, GM, 포드 등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은 튼튼한 뿌리산업을 토대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밑바탕도 뿌리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의 뿌리산업은 제조업 공동화가 심화되면서 산업의 주역에서 서서히 밀려나더니, 지금은 위험하고, 더럽고, 어려운, 이른바 ‘3D업종’으로 인식되어 그 역할과 중요성이 저평가 되었고, 과거 정부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이면서 경쟁력이 점차 약화되어 왔다. 이에 정부는 2011년 7월 ‘뿌리산업 진흥과 첨단화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범국가적 차원에서 뿌리산업의 진흥과 첨단화를 위해 지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2013년 뿌리산업 통계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기준 한국의 뿌리산업 업체수는 2만6,013개로 제조업의 7.6%, 고용인원은 42만명으로 11.7%를 차지했다. 뿌리산업의 매출액은 90조7,317억7,500만원이었다.
주조산업 대표주자, 국내시장 점유율 95% 이상
주조·금형·소성가공·용접·표면처리·열처리 등으로 구분되는 뿌리산업 가운데 주조산업은 부품 제조를 하는 ‘전주기 라인’이 설치되는 장치산업이다. 다른 뿌리산업에 비해 사업체 규모가 크고(업체당 평균 19명 근무) 1인당 평균 매출액도 2억8,300만 원으로 다른 업종에 비해 가장 높다.
주조산업은 자동차 및 조선용 주조품, 유체관련 주조품을 소재로 공급한다. 뿌리산업 가운데에서는 업체당 종업원 수도 많고 매출액도 큰 편이지만, 수요산업에 비해서는 미약한 수준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약 1,300개 업체가 소규모 및 열악한 업무 환경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주조(주물을 만들기 위하여 실시되는 작업) 과정을 통해 주물(융해된 금속을 주형 속에 넣고 응고시켜서 원하는 모양의 금속제품으로 만드는 일, 또는 그 제품)을 생산하므로 주조산업에는 주물업계가 포함된다. 국내 주물업계는 전통 소재산업의 한계로 인해 완성품이 아닌 부품으로 수요업체에 납품되어 주조업체 고유 제품이 제작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천광역시 고진동에 소재한 I사는 한국 주물산업을 대표하는 업체로 2014년 기준 46명의 종업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매출액은 102억4,400만원, 수출액은 약 66억원을 기록했다. 1992년 4월 설립된 I사는 에틸렌 생산기준 세계 5위의 생산규모인 국내 석유화학 업체 및 정유업체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종류의 히터(HEATER)용 내열 주조품 등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15년 이상의 연구·개발(R&D)을 통해 제품의 건전성 및 고온강도 및 내침탄성 등의 고온특성이 요구되는 고급 주조품을 개발함으로써 해외 엔지니어링 업체 및 주조업체에서 공급하던 내열 주조품 등을 국산화하는데 성공했다. 국내시장 점유율은 95% 이상이며,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미국, 대만 등의 건설 및 히터(HEATER) 업체들에게 중개상을 통하지 않고 직접 수출하는 국내 유일의 주조업체로 사실상 업계의 리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뿌리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부는 기 체결 또는 체결을 추진 중인 자유무역협정(FTA)의 혜택을 뿌리산업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통로를 통해 지원책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기대만큼의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FTA는 불가능?” 포기란 없다
이는 뿌리산업이 가진 고유의 특성 때문이다. 주물업계가 일반기업과 다른점은 동일한 모델·규격의 공산품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제품은 주 문자가 요구하는 규격에 따라 생산하기 때문에 계약 때마다 매번 생산되는 제품이 다르다. 이 때문에 기본적인 틀에 맞춰 자재명세서(BOM, Bill of Material)나 원산지 증명을 위한 관련 서류 작성 및 원가관리 등 원산지 관리가 불가능해 보였다. 또한 원재료도 원소재로서 가격이 국제시세와 연동되어 변동이 잦고 변동 폭도 크기 때문에, FTA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인력확충이 어려운 중소기업의 입장에서 FTA 활용은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I사 역시 FTA 활용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에서 사건이 터졌다. 국내 납품 원청업체로부터의 원산지증빙 서류들을 발급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정부는 기업의 수출의식 고취를 위해 국내 수출기업이 내국신용장(Local L/C)을 발급해 국내 원자재·부분품 기업으로부터 물품을 공급받는 ‘로컬수출’도 수출로 인정해 주고 있다. 로컬수출에서도 FTA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FTA 활용의 핵심인 원산지 판정 과정에서 로컬 수출을 통해 공급한 원자재·부분품이 ‘역내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의 여부는 완제품의 원산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I사의 국내 원청업체가 원산지 증빙 서류를 발급해 달라고 요청한 이유다. 이럴 경우 협력사들은 원산지(포괄)확인서 등 관련 서류를 발급해 줘야 하는데, 대부분의 협력사들이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발만 구르고 있던 I사는 진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이번 기회에 회사도 FTA 활용에 도전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I사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도전이 자사를 넘어 주물산업, 더 나아가 뿌리산업의 FTA 활용 가능 여부를 모색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며 반드시 성공사례를 도출해 내자고 강조했다.
I사는 관세청의 ‘YES FTA 컨설팅’ 지원사업을 신청했다. YES FTA 컨설팅 사업은 활용 경험이 전혀 없는 기업에게 전문 교육을 수료한 전문 상담사가 직접 찾아가 ‘FTA 활용 종합 컨설팅’, ‘원산지검증대응 컨설팅’과 ‘원산지확인서 사전확인 컨설팅’ 등을 제공하며 또한 원산지관리시스템인 ‘FTA-PASS’를 무료로 보급해 중소기업들이 독립적으로 FTA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업이다.
전문 상담사의 밀착 지원으로 어려움 해결
전문 상담사는 I사 본사를 1차 방문해 CEO와 담당자 등을 만나 회사가 FTA 활용에 있어 어떠한 애로를 겪고 있는지를 파악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문 상담사는 I사에 최적화한 FTA 솔루션을 제시하는 인천세관수출입기업지원센터의 YES FTA 컨설팅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어 FTA 전문 공익 관세사는 FTA의 기본 활용 지식과 위험성 등 전반적인 FTA 마인드를 형성할 수 있도록 교육 및 회의를 진행했다.
다음으로는 FTA 활용의 계기가 될 제품들에 대한 품목분류 작업을 실시했다. 주물제품은 종류가 워낙 많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동시에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전문 상담사와 I사는 FTA 활용의 계기를 만들었던 국내 납품업체가 요청한 품목이자 공급업체들이 가장 많이 원산지 증빙서류를 요구하는 ‘Tube(Pipe)를 받치기 위한 Supporter’(명칭 Imtermediate Tubesheet or Tube Supporter, HS코드 7235.99)를 대표품목으로 정해 정밀 컨설팅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대표 제품 분석을 통해 품목분류 노하우가 생기면 다른 제품에 대한 대응도 쉽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제품의 제조에 사용되는 주요 원재료는 △Fe-Si(페로 실리콘) △Fe-Mn(페로 망간) △Ni(니켈) △SUS 304(오스테나이트계 스테인리스강의 일종으로 18-8강으로 불린다. 내약품성, 내열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처리수조 등에 사용된다. 니켈 8~11%, 크롬18~20%를 함유한 강) △Fe-Nb(페로 니오븀) △Fe-Cr-L/C(페롬 크롬) △Fe-Cr-H/C(페롬 크롬) 등이었다. 원재료 공급 업체로부터 원산지(포괄)확인서를 수취할 수 있는지와 이들 원재료로 만든 제품이 FTA체결(예정) 국가의 원산지 결정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었다.
동일한 HS코드의 품목이지만 FTA 체결 국가별로 원산지 결정기준이 상이했다.[표 참조] 또한 직접 운송의 원칙 등 FTA 일반기준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거래 계약서, 선하증권, 제조공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FTA 도입 후 수출 68% 증가
전문 상담사와 I사는 대상 물품에 대한 정밀 분석을 실시한 뒤 원재료 구매와 단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 등 FTA 데이터를 수집해 이를 바탕으로 정합성을 검토했다. 이어 원산지 결정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부분은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해결책을 도출해 냈으며, 이를 토대로 한 수정 데이터를 이용해 FTA 원산지 기준에 따른 원산지판정 및 그 결과에 따른 원산지증명서 등 각종 FTA 서류를 작성했다. 또한 원산지증명서류를 요청한 원청업체가 요구하는 원산지 데이터와도 연동해 이를 맞출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I사는 원청업체가 긴급 요청했던 원산지(포괄)확인서를 비롯한 관련 서류를 발급해 위기를 모면했다.
I사와 같은 주물업체들은 원산지 관련 정보를 수시로 받아보고 업무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원산지관리시스템 도입이 시급했다. 이에 전문 상담사는 관세청이 개발해 국제원산지정보원을 통해 무료로 보급하고 있는 중소기업용 원산지 관리 프로그램인 ‘FTA-PASS’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I사는 FTA-PASS 도입으로 사전 원산지판정 및 원산지증명서 발급과 사후관리를 통한 원산지 검증에 적극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천본부세관의 원산지확인서 지원제도, HS코드 품목분류의 정확성 판단 및 원산지확인서 사전확인 등을 활용해 안정적으로 FTA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전문 상담사와 인천본부세관 등의 지원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FTA를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수출국 세관의 사후검증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FTA 전담 인력을 채용해야 했다. I사는 인천세관 수출입기업지원센터의 도움으로 ‘2015 고졸취업박람회’ 구인·구직행사에 참가한 뒤 2015년 첫 도입한 ‘원산지실무사’ 자격 취득자를 채용함으로써 보다 체계적인 FTA 업무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첫 원산지증명서 발급의 경험을 살려 I사가 직수출하는 건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원산지증명서를 발급했으며, FTA 품목별 원산지인증수출자 인증도 획득했다.
주물업계의 근본적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주문생산마다 다른 BOM 등으로 원산지 관리가 불가능할 것이던 생각을 떨쳐버리고 도전한 끝에 I사는 FTA 원산지관리체계를 완성했다.
이제 I사는 원산지증명서 발급이라는 소극적 활용을 넘어 국내외 마케팅에 FTA를 반영하는 등 적극적 활용으로 전환했다. I사는 철골 구조를 제작하거나 납품받은 제품들을 조립해 최종 완성품을 만드는 국내·외 공장 최종 설비 작업자(FABRICATER)들에게 납품하는 사업구조를 이루고 있다.
철골구조물 최종 작업시장은 가격 경쟁력에 민감했다. FTA를 활용하기 전에는 I사에 발주한 업체가 수입관세를 지불해야 했고, 지불하는 수입관세만큼 제작 가격을 낮춰줄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원가를 맞추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FTA 협정 발효로 무(저)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경쟁사 대비 3~4%의 원가절감 효과를 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장점을 바이어 등에게 홍보하는 한편, 견적서를 작성할 때 ‘FTA 원산지증명서 발행 가능’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등 수주활동에 적극적으로 FTA를 활용했다. 효과는 수출실적으로 나타났다. 2014년 1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I사의 수출액은 38억원 수준이었으나 2015년 1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는 약 63억9,000만원을 달성, 전년 동기 대비 68%의 놀라운 신장세를 이뤄냈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I사는 FTA 효과로 약 15% 이상 수주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수출 목표 1000만 달러 달성 눈앞
국내 정유 및 석유화학 업체는 포화상태로 신설되는 플랜트가 1년에 1~2건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시장은 유지보수 관리 위주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주조산업의 위기가 지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눈을 해외로 돌리면 다르다. 중동, 러시아, 동남아, 남미 등지에서는 현재 대규모 플랜트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해외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기로 한 I사는 수출확대를 최우선 목표로 정했다.
회사 부설 연구소 및 외부 연구기관과 연계해 I사 고유의 재질 개발을 지속해 나가는 한편, 숙련된 기술인력들이 산학협력 중인 폴리텍대학으로부터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면 3년 내로 수출목표 1,000만 달러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I사는 이러한 경쟁력과 독창적 기술력을 통한 우수한 품질을 밑바탕으로 앞으로 해외 신설 플랜트 시장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하는 한편 부가가치를 극대화한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FTA 활용은 필수다. I사 관계자는 “국내 주물업계가 우리 회사를 FTA 원산지 관리 모델로 삼아 다 같이 성공적인 해외진출을 이뤄내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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