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11월 말입니다. 간간이 포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이곳에 갑자기 정착을 했습니다. 어깨를 움츠리고 내 얼굴을 할퀴고 간 바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서러움만 쌓입니다. 내 나이 마흔 아홉 해, 이러자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결코 아닌데라는 회한의 못이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아 요즈음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조 시대에 시인 양사언이, 주위 경치가 수려해 터를 닦고 정자를 지어 시와 풍류를 즐겼다는 금수정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 시인도 양문을 거처 그곳에 갔을 것이고 이곳에 잠시나마 머물러 물 한잔이라도 마셨을 것입니다. 모른긴 해도 마음이 스산한 날에는 금수정 나지막한 정자에 홀로 앉아 깊은 시름에 잠기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지난 종친회에서 나와 아래 윗집에서 2살 차이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친구처럼 함께 보낸 6촌 형이 느닷없이 나에게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을 목에 힘을 주어가며 의미있게 하였습니다. 그날 이미 술에 취해 한 말이었지만 듣고 있던 나로서는 뼈가 저린 한마디였습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충남 광천에 계신 작은어머니의 부음을 받았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던 4촌 형은 이미 장지로 떠나갔고 나는 6촌 형과 같이 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퇴근과 동시에 형을 만나 서둘러 서울역으로 향했습니다. 평일날이라 홍성가는 기차표를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린 늦은저녁을 먹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식당쪽으로 향했습니다. 몇 걸음 걸어가는 순간 나는 내일 출근 시간이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되돌아 가 기차표를 판매하는 직원에게 내일 새벽 첫차가 몇 시에 홍성역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6시 30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차표 한 장을 물러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로서는 차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 돌출된 행동을 보고 황당해 하는 6촌 형에게 나는 형 혼자 다녀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한참을 난감해 하던 형이 나에게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네가 정이 못 가겠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차를 가지고 가서 작은 어머니께 얼른 인사만 드리고 새벽에 올라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로서는 도저히 갈 수가 없다며 황급히 조의금을 건네고 돌아섰습니다. 늦은밤 기차를 타고 가는 6촌 형은 어두운 차창을 바라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그런 일이 있은 후 6촌 형의 어머니 나의 5촌 아주머니의 팔순잔치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날은 목요일이었습니다. 평일날 학생들을 등뒤에 두고 내 개인적인 일을 보러 간다는 것이 내 마음엔 내키지 않았습니다.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섭섭해 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얼마 후 모임에서 6촌 형을 만났습니다. 나를 보자 마자 왜 안 왔느냐고 하면서 무척이나 서운 해 하였습니다. 나는 그 형에게 내 일을 접어두고 차마 갈 수가 없었다고 각박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럼 저녁에라도 들렀어야 했지 않느냐고 형이 반문했습니다. 나는 낮에도 못 간 주제에 무슨 면목으로 저녁에 가겠느냐고 말 대꾸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 보면 너무 뻔뻔하고 예의에 어긋난 변명이었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교회를 지키는 종지기였습니다. 이른새벽 마을 사람들에게 종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20여년 단잠을 이루지 못한 분입니다. 나는 그 아버지의 애쓰는 모습을 보고 성장했습니다. 교회의 종을 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누구입니까. 학생을 지키는 학교 지킴이 아닙니까. 나도 아버지처럼 개인적인 일로 하여 차마 내 시간을 비울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내촌중학교에 전근해 왔으나 일년도 안 되어 떠나야 했습니다. 동계방학이 다가올 무렵 나는 황급히 짐을 꾸려 의정부에 있는 처가집 옥탑방에 쑤셔 넣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서의 은둔생활은 정말로 처절한 사투였습니다. 꼭 10개월을 그렇듯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혼신의 힘 기울여 생활하는 가운데 내 몸과 마음은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와신상담하며 낙엽이 지는 10월을 쓸쓸히 보낼 즈음 나에게 반가운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교원 사택으로 들어가라는 교육청에서의 전갈이었습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내가 교직에 발을 들여 놓은지 어언 20여년이 다가옵니다. 젊음을 다바친 세월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 최선을 다한 삶이었기에 한치의 후회는 없습니다만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너무 많은 듯 하여 가만히 있어도 서글픈 기억들로 시야를 가립니다. 그러나 티클 만치도 실망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듯 독하게 홀로 살아야 할 기구한 운명인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지면을 통해 4촌 형과 6촌 형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성공은 아픔을 지녔다
성공은 손에 거머쥐는 것이다
성공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치닫는 순간서부터 무수히 장애물을 만난다
허무 할 때도 있고 허망 할 때도 있다 허접 해 두리번 거릴 때도 있다
가끔은 눈물의 밤을 지새울 때도 있다
술을 의지해 허접함을 달래는 사람을 보았다
무엇이 그를 허망하게 만들었을까
허무는 수렁인데...
허망은 광야인데...
허접은 사막인데...
내게는 그보다 더 한 아픔이 있었다
그때 성공의 끈을 놓았다면 내 성취의 꽃은 맺지도 못하고 졌을 것이다
목숨을 걸지 않고 성공을 기대하지 마라
칼바람을 맞으며 양문리 사택 앞 길거리를 서성이던 나를 기억해 낸다
눈이 시리다
양문리에서
매운탕 집 물고기
모처럼 모여서 헤엄을 쳐도
기쁘거나 즐겁지 않은 것은
저승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마태사 유언같은 예불 소리
은빛 비늘을 검게 물들이고
에미는 위곡히 타일렀다
그물 보다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언제라도 떨어져 있기를 당부했건만
그리움이 뭔지
사랑이 뭐길래
사무친 보고픔에 모여 들다가
끝내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가
내 나이 마흔 아홉
의미 있는 종말을 맞이 하려
가시박힌 눈빛에 여린가슴 찔리우고
양문리에 홀로 시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