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2024. 10. 24. 목요일.
오전 11시에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놀이마당에서 대전 C고등학교 출신 동창생들과 만나서 석촌호수 한 바퀴 반을 천천히 돌았다.
지하전철 석촌역 인근에 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인근에 있는 커피집에서 커피도 마셨다.
내가 점심값을 전부 냈고, 커피집에서는 친구가 커피를 주문했는데 하필이면 나한테도 준다며 커피도 주문했다.
나는 평소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맛이 너무나 쓰디쓰기에.
아까워서 어쩔 수없이 다 마셔야 하기에 커피 1/3는 친구 백선기에게 따라주고, 나머지 2/3는 내가 억지로 마셨다.
'왜 이렇게 맛이 쓴 거여?!'
내 의사도 묻지도 않고 주문한 손선웅 친구를 속으로 원망하면서 억지로 마셨더니만 뱃속이 얼얼하다.
밤중인 지금도 뱃속이 쓰리고 아프다.
2.
2024년 10월 10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뉴스.
일전 내 큰딸이 소설책을 샀다며 친정에 들러서 내게 건넸다.
'한강' 소설가의 작품인 '소년이 온다'를 오늘도 읽었다.
오늘까지 4번이나 거듭 읽었으나 나한테는 깜깜한 어둠 속 같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여?
년도별 전후 사건이 앞뒤 순서없이 마구 뒤섞였고, 지명 등에 대한 보충설명이 거의 없다?!
6하원칙으로, 년월일별로, 순차적으로 광주사태 사건을 기술한 것이 아니다.
광주사태 전 사건, 1980. 5. 18. 광주사태, 광주사태 이후 10년 뒤, 20년 뒤, 30년 뒤의 이야기가 뒤섞여서 나는 시대별 사건을 순차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문자 해독력이 부족한 탓일 게다.
앞으로도 더 읽어서 10번쯤 읽으면 그제서야 소설의 전개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됄까?
감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총살 사건 이후 상황이 너무나 급격하였고, 철저한 비밀 보안상태이기에 이 사건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기관에서 업무수행하면서 조금 알았던 것조차도, 아무런 자료도 별도로 알려고하지 않으려고 했고, 내 작은 기억조차도 지우려고 했다. 그저 모른 체해야 하는 게 가장 뱃속이 편했다.
1970년 1월에 태어난 한강.
한강은 광주 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나서, 광주 효동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1980년 1월 3학년 말기 때 서울로 전학 갔기에, 그 당시 초등학교 학생인 한강은 1980년 5월 광주사태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을 터.
* 당시에는 뉴스보도는 철저하게 제한되었고, 때로는 왜곡되게 보도했다.
한강은 서울에서 풍문여고,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강은 먼 훗날 아버지 한승원 소설가의 글에서 광주사태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듣고는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소년이 온다' 소설은 2014년 발표.
'소년이 온다’ 주인공 막내시민군 문재학 엄마 “한강 작가에 감사”
2024년 10월 11일 뉴스이다.
광주 5·18항쟁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인 문재학(사망 당시 16살)군의 어머니 김길자(84)씨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에 연신 “감사하다”고 표현했다.
‘5·18 막내시민군’으로 불리는 문군은 초등학교 동창 양창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김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위에 참여했다. 문군은 1980년 5월 27일 T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 때 친구 안종필군과 함께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한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 만나러 온 적이 있다”며 “그동안 5·18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광주가 노력했지만 큰 성과가 없던 상황에서 한 작가가 크게 도움을 주니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한 작가가 태어난 광주 북구 중흥동과 모교 효동초등학교는 축제 분위기였다.
한 작가는 1970년 광주 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나 효동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80년 1월. 3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직후 노먼 소프 기자가 촬영한 안종필(앞)과 문재학군의 주검.
문군은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
문체부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 제공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인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씨가
아들 영정사진과 '소년이 온다' 책을 함께 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광주상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문 열사는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이 쏜 총에 숨졌다.
이후 광주 북구 망월동 묘지에 가매장됐다가 10일 후 가족들에 의해 신원이 확인됐다.
‘소년이 온다’는 5·18 ‘막내 시민군’ 문 열사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 동호, 그리고 주변 인물의 아픔을 다뤘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최종 전남도청 진압 직후,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안종필·문재학 열사가 사망한 모습.
2021년 공개됐다.
이 사진은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였던 노먼 소프가 진압 2시간 여가 지나 오전 7시 30분쯤 가장 먼저 내부에 진입해 촬영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진은 인터넷에서 검색.
용서해 주실 게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임.
1980년 5월 21일 교도소에서 시민군이 탈취한 무기 및 차량(이 자료 믿을 만한가?)
칼빈, M-1, 기관총 등 4,403정
소화기 탄약 88,680발
수류탄 270발
TNT폭탄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 개
군용차 34대
경찰차 50대
아시아자동차 328대
일반차 367대
전두환 :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며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써 대한민국 군부 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1980. 5. 18. ~ 5. 27.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으며, 이로 인해 전두환은 한국 현대사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학살자로 남게 되었다.
1980년 8월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이듬해 1981년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여 초대 총재가 되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신뢰성은 지극히 적다. 그냥 참고 바람.
1) ...... 1980년 5월 21일 아침 8시경, 소위 시민군이라는 이름의 300여 명 괴한들이, 국군 20사단 지휘 차량 14대를 탈취하였고, 아침 9시경 대형버스 5대에 나눠 타고 온 다른 300여명과 함께, 도합 600여 명의 괴한들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장갑차 등 군용차량 374대를 탈취하였다.
이들은 이날 낮 전남도내 17개 시.군에 있는 44개 무기고를 동시다발로 습격하여, 카빙소총. Mㅡ1소총 등 총기 5천여 정과 탄약 29만 발을 탈취하였고, 화순탄광에서 다이나마이트 8톤을 탈취하였다. 이들은 다이나마이트 8톤으로, 전남도청 지하실에서 TNT폭탄 2100개를 제조하여, 광주시내를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같이, 불바다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들은 5월 23일 저녁 7시경, 국가보안법위반 사범 170여 명이 수감된 광주교도소를, 다섯 차례 습격하였다. ....
2) .... 1980년 5월 21일 당시 전라남도 소재 예비군 무기고 마흔네 곳을 일시에 기습하여 각종 무기들을 탈취한 자들의 신원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점과, 그 당시 전남도내에 흩어져 있는 무기고 마흔네 곳의 장소를 어떻게 알고 불과 네시간여 만에 일시에 무기고를 턴 것은 일반 시민들의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뿐더러 이와 같은 일사불란한 작전은 고도로 훈련된 자들의 소행이라고 밖에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 나한테는 의문 투성이
광주사태는 1980. 5. 18.부터인데도 무기 탈취는 사흘 뒤인 5월 21일에 있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무기 탈취 장소는 교도소뿐인가? 교도소 이외는 없는가?
1980. 5. 21. 이후에는 무기 탈취는 없었는가?
경찰서(파출소, 지서 등)에 보관 중인 무기 탈취는 없었는가?
총기류(무기)를 얼마나 허술하게 보관했기에 민간인한테 탈취당하는가?
훗날 무기류를 군 경찰서 등에서 어떻게, 얼마나 회수했는가?
모두 다 회수했는가? 혹시 남아 있는 무기류는 없을까?
왜 중학생,고등학생 등 앳된 청소년들조차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는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하인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
전두환은 1980. 5. 17.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를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 광주사태는 위 비상계엄령 선포 뒷날인 5. 18.부터 시작.
* 왜 광주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 7. 29. 사회악 일소를 위한 불량배 소탕 및 순화교육을 명분으로 삼청계획 5호를 입안하였으며, 이에 따라 계엄사령관이 1980. 8. 4. 구 계엄법 제13조를 근거로 계엄포고 제13호(이하 ‘이 사건 계엄포고’라 한다)를 발령하였다.
이 사건 계엄포고에 따라 계엄사령부 지휘 아래 군ㆍ경찰이 1981. 1. 25. 계엄해제 전까지 법관에 의하여 발부된 영장 없이 총 6만여 명의 대상자를 검거하였다.
이들 중 약 4만 명을 1980. 8. 4.부터 1981. 12. 5.까지 순차적으로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하여 ‘순화교육’, ‘근로봉사’, ‘보호감호’라는 명목으로 불법 구금, 구타 및 가혹행위 등을 가하였고, 탈영을 하면 징역형과 보호감호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교육 중 사망 54명, 후유 사망자 367명 등 최소 421명의 사망자 및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등의 의문이 숱하게 일렁거린다.
의문이 많은 나한테는 당시의 역사자료가 부실하다는 느낌이라서...
이제는 시시하다는 생각조차도 든다.
3.
한강 소설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우리나라 문학계가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싶다.
앞으로도 노벨문학상 등 세계적인 문학상을 거듭 수상했으면 싶다.
한강 소설가뿐만 아니라 문학인 모두가 축하받고, 존경받아야 할 뉴스이다.
나중에 보탠다.
2024. 10. 24. 목요일.
나는 6번이나 거듭 읽었으나 이해가 안 되었다.
오늘(10. 27.) 큰딸이 친정에 왔고, 책 읽겠다며 이 책 도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