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민정 대표님의 최애 공표에 이어 아무도 묻진 않았지만, 나도 덕밍아웃을 해야겠다. 남편 이후로 이성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나에게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이 생겼으니 바로 장항준이다. 작년 늦여름, 우연히 만난 후배가 요즘 재밌게 듣는 팟캐스트라며 '씨네마운틴'을 소개해줄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홀랑 빠지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듣기 시작한, 영화 얘기하다 산으로 가는 팟캐스트 '씨네마운틴'은 내 집안일의 동반자요, 거의 유일하게 현실웃음을 터지게 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친구 집이 요쿠르트라고 써진 가게의 윗집이라고 해서 찾아갔는데, 야쿠르트라고 써진 집에 들어가서 헤맨 이야기, 화투 치면서 즐거워하는 이모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느닷없이 반장이 됐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썰매를 탈 줄 모르는 꼬맹이 항준이와 놀아줘야 하는 사춘기 형아의 난폭한 질주, 이런 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오면 어쩜 그렇게 흥미진진해지는지. 이제 그가 나오는 동영상이란 동영상은 다 봐버려서 그가 직접 나오진 않지만 거의 20년이 돼가는 입봉 영화 볼 일만 남았다.
덕후로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매력은 그의 가훈에서도 직감할 수 있다. 모든 면이 매력적이라 가훈까지 매력적이다. 지금은 중3이 된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가훈을 조사해오란 숙제가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아내 김은희 작가는 바빠서 가훈을 고민할 시간이 없었고, 딸 아이와 관련한 일이라면 학부모총회부터 녹색어머니까지 안 한 일이 없다는 장항준이 고민에 빠졌다. 나와 가족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면 좋을까, 뭘 하든지 즐겁게 살면 좋겠는데. 우리 인생에 언제가 제일 행복했을까를 생각해보니 '방학'이 떠올랐다. 방학도 겨울방학 말고 여름방학이어야 한다. 그래야 친구들과 여기저기 쏘다닐 수 있으니까! 그래서 탄생한 장항준 집안의 가훈은 '인생은 여름방학처럼'.
여름방학. 나 역시 여름방학에 관한 추억이라면 한나절도 넘게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각 반마다 한 편의 연극을 올려야 했던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는 틈만 나면 시청각실에 모여서 대사를 외우고, 무대 배경을 그렸다. 고3 여름방학에는 학교에 나와서 자습하는 게 의무였는데, 땡땡이 치고 바다를 보러 간다며 인천행 지하철을 타기도 했다. 바다는 결국 대학 가서 여름MT 때마다 빼놓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그 바다에서 썸으로 넘실대는 수많은 사연들.
네버엔딩으로 이어질 것만 같은 나의 추억여행에서 돌아와, 현실을 돌아본다. 코로나4단계에 묶여 있는 요즘 아이들은 어떤 방학을 보내고 있을까. 마스크를 쓰고, 월수금에는 수학 학원, 화목에는 영어학원, 방학이니 논술학원도 추가해서 다니고 있을까. 지금은 대학생이 된 딸아이는 학원을 많이 다니진 않았지만 매일매일 일정한 공부 양을 정해놓고 지키는 범생이었다. 그게 너무 답답할 거 같아, 언제부터인가 한 달에 한 번 자유의 날을 정해서 그날은 해야 할 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하고 싶은 것만 하기로 했다. 잠도 물론 늦게 잤다. 아이는 그 날의 존재만으로도 너무너무 행복해했다. 앉은 자리에서 4시간 동안 그림만 그리는 날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유의 날을 주면 뭘 하고 싶어할까. 부모가 우려하는 것처럼 스마트폰만 붙잡고 게임만 할까. 하지만 그렇게 원없이 아무 제한 없이 놀아본 경험이 있을까. 지겨워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때까지 게임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 자리에 새로운 욕구도 솟아나지 않을까. 적정 공부량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도, 적정 놀이량은 분명히 있을 거 같다. 어린 아이일수록 놀아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여름방학을 떠올렸을 때 즐거운 추억이 마구마구 떠오르면 좋겠다. 코로나라 이동도 어렵고, 친구와 친척을 만나기조차 여의치 않지만, 다 하지 못한 숙제가 들어있는 학원 가방을 들고 여름 땡볕 아래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거나, 줌 화면 앞에서 문제풀이 하던 날들이 추억이라고 떠오를 리 없지 않은가. 경쟁에서 자유롭게 키울 강심장 부모가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제발 방학만이라도 아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허용해 주자. '인생을 여름방학처럼' 살고 싶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