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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장 전락(轉落)
①
정사대회전(正邪大會戰)이 끝난 후.
무림군왕성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흑련사의 붕괴를 기념하고 군웅들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함이었다.
연무장에는 수십 열로 상이 차려졌다. 산해진미와 술이 수시로 날라져 왔고, 군웅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오랜만에 허리띠를 푼 채 환담을 나누었다.
승리의 기쁨에 들뜬 군웅들은 거나하게 취한 채 자신들의 무용담을 자랑했으며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떠오르는 것은 관운빈에 대한 것이었다. 정사대회전으로 인해 무림에 새로운 영웅(英雄)이 탄생했다는 것이 군웅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들은 입에 침을 튀겨가며 관운빈을 칭송했다.
한편, 남궁청운은 각 방파의 장문들을 비롯한 무림고인들, 태자당의 영걸들을 위해 잠룡헌(潛龍軒)에 별도의 연회를 마련했다.
정작 본인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군웅들은 어렴풋이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다.
정작 정사대회전의 주인공이었어야 할 그보다는 관운빈이 영웅으로 떠오른 데 대한 불편한 심기(心氣)를 드러낸 것이었다.
잠룡헌에서도 화제는 단연코 관운빈에게 모아졌다.
군웅들은 당대의 영웅이란 표현이 부족한 듯 입을 모아 불세출의 영웅이란 칭호를 썼다.
군웅들은 몇 차례나 관운빈에게 박수갈채를 보냄으로써 그의 활약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이렇게 되자 관운빈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슬며시 자리를 떴다. 황보수선도 덩달아 자리를 떠 그의 뒤를 따랐다.
"휴..... 이제 살겠군."
잠룡헌을 빠져나온 관운빈은 가슴을 펴며 심호흡했다. 황보수선은 그의 곁에 바짝 다가서며 미소지었다.
"후후, 그렇게 불편하셨어요?"
"아마 그 자리에 더 앉아 있었다면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오."
"어머! 설마요."
황보수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관운빈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그가 전무림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칭송받는 것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으며, 기쁜 마음이 한량 없었다.
"기뻐요, 전."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기대며 속삭였다.
"뭐가 그리 기쁘오?"
"공자님께서는 이제 무림의 구성(求星)이 되셨어요. 이제 천하무림에서 공자님의 영명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예요."
관운빈은 피식 웃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오? 난 도리어 불편해 죽겠소."
"그건 공자님께서 너무 겸손하셔서 그래요. 무림에 몸을 담은 사람들이 평생을 경주해도 얻지 못할 명성을 얻으셨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후후, 그래서 난 무림이 싫다는 것이오."
황보수선은 그를 올려보았다. 관운빈의 얼굴에는 일종의 허무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공자님은 아직 젊어요. 그런데 어찌......."
관운빈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렇소. 난 아직 젊소.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겪었소."
두 사람은 인공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호수는 꽤 규모가 컸으며 주변에는 화목(花木)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 은은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비록 별 말은 없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유정(有情)이 흐르고 있었다. 관운빈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소저,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을 떠나야겠소."
황보수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이 원하시는 대로요. 그런데 어디로 가지요?"
"악양의 목화루로 가야 하오. 그곳에서 영매와 육노야, 백사호를 만나기로 약조가 되어 있소."
"저도 함께 가면 안될까요?"
관운빈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소저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시오. 옛친구들을 만난 후 곧바로 찾아가겠소. 연후 빙장어른의 장례도 치르고 빙모님께 정식으로 청혼도 하겠소."
"아......."
황보수선의 가슴에는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동시에 몰아쳐 왔다. 부친의 죽음으로 인한 아픔과 관운빈이 정식으로 청혼하겠다는 데 대한 기쁨이었다.
'아!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어쩔 수 없이 눈물짓는 황보수선이었다. 관운빈은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수선, 빙장어른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오. 그만 눈물을 거두시오. 보시오, 저 하늘에 빙장어른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지 않소?"
관운빈은 손을 뻗어 만월을 가리켰다.
"공자님......!"
황보수선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든든한 사나이의 가슴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녀를 슬프게 했지만 반면 잃었던 사랑을 되찾았기에 그녀는 이겨나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룡헌을 조용히 빠져 나온 남녀가 또 있었다.
바로 당세곤과 남궁소연이었다. 두 사람은 은밀한 화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당세곤은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말을 꺼냈다.
"남궁소저, 이제 대회전도 끝났으니 우리들의 문제를 논의해 봐야 하지 않겠소?"
"우리들의 문제라니요?"
"혼례를 치뤄야 하지 않겠소?"
"뭐, 뭐라고요?"
"허, 왜 그리 놀라시오? 이 당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오?"
남궁소연은 놀란 눈을 몇 차례 깜박이다가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공자가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그 문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기습적인 청혼이었다. 남궁소연은 가슴이 퉁탕대며 뛰고 있었다.
당세곤은 본래 넉살좋은 인물이었다. 그는 슬며시 남궁소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살다 보면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오. 이 당모가 싫지만 않다면 당장 혼례부터 치르는 것이오."
"호호! 그런 말이 어딨어요? 만일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쩌구요?"
"걱정 마시오. 그때는 귀여운 옥동자가 내 대신 그대를 기쁘게 해줄 테니 말이오."
"어머! 어쩜 그런 말을......!"
화원의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남궁소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하하! 남녀가 혼인을 하면 아이가 탄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뭘 그리 놀라시오?"
"시, 싫어요. 그런 말은......."
남궁소연은 그만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당세곤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하하하! 알겠소, 내 그만 하리다."
당세곤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는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리 빤히 보세요? 그리고 이 손 놓으...... 읍!"
남궁소연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당세곤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껴안으며 입술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부림쳤으나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짜릿한 입맞춤!
남궁소연은 난생 처음으로 사내와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때 당세곤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입술을 밀고 들어왔다.
'아... 안돼.'
그녀는 도리질을 했으나 집요하게 밀고 들어오는 당세곤의 공략에 마침내 입을 열고 말았다. 그의 혀는 유영하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안에서 움직였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의 온몸에 맥이 탁 풀어지고 말았다. 두 다리도 중심을 잃고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한편 당세곤도 감미로운 기분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여색(女色)을 탐닉한 바 있었다. 그가 상대한 여인들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대부분이 사랑과는 거리가 먼 순간적인 쾌락의 대상들이었다.
이 순간 그는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어떻게든 남궁소연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는 집념을 불태웠다.
그것은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
남궁소연은 신음을 흘렸다. 무엇에 홀린 듯이 그녀의 머리 속은 텅 비었고, 온몸이 달아올랐다.
당세곤은 능숙하게 그녀를 애무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남궁소연의 옷자락 사이로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아아,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남궁소연은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정신이 몽롱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여인을 무수히 다뤄본 당세곤은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애무의 강도를 높여갔다.
마침내 남궁소연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녀는 새근거리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어느덧 그녀의 옷자락은 풀어 헤쳐지고 백옥처럼 흰 속살이 드러났다.
이제껏 아무도 만져보지 못한 순결한 젖가슴을 당세곤의 손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사랑하오. 진심이오. 오늘 이후로는 그대만을 사랑하며 살겠소."
당세곤의 속삭임이 그녀의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아! 몰라요. 제발......."
남궁소연은 도리질을 했다.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비틀어댔다. 그녀의 육체 위에서 당세곤의 손이 부지런히 오갈 때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어댔다.
당세곤은 마침내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급히 자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남궁소연은 그만 몽롱한 느낌에 사로잡혀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가까운 곳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당세곤이 옷을 벗고 있었다.
'아, 안돼! 이건 옳지 않아!'
그녀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당세곤은 급히 옷을 벗어 던지고는 다시 그녀의 몸을 덮쳤다.
"안돼요!"
퍽!
"으윽!"
불시의 기습이었다. 남궁소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을 걷어찼고, 당세곤은 비명을 지르며 붕 떠서 날아갔다. 그는 일 장이나 날아가 한 그루 나무에 부딪친 후 떨어졌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는 방심한 터에 가슴을 걷어채인 나머지 그만 중상을 입고 말았다.
남궁소연은 후다닥 일어나 옷을 여민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형을 날려 달아나버렸다.
"으으......."
당세곤은 신음을 발하며 나무를 잡고 일어섰다. 그런데 이때였다.
"헉!"
그는 경악성을 발했다. 시커먼 그림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자네가... 웬일인가?"
상대방은 그를 내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러 왔지."
당세곤은 눈을 크게 떴다.
"감히 네놈이......."
"흐흐, 감히 내 여자의 알몸을 감상한 네놈의 눈알부터 빼내주지."
"뭣? 네놈이 미쳤......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의 얼굴에서 두 줄기 선혈이 치솟았다. 상대의 두 손가락이 그의 동공을 찔러버린 것이다.
"크아악! 내 눈... 내 눈이......!"
"두번째는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계집을 홀리는 네 혀를 끊어주마."
번쩍!
칼빛이 월광을 반사했다.
"우... 우... 우!"
당세곤은 입을 벌렸으나 괴성을 흘릴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과연 혀가 토막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네 목을 분리시켜 주마."
휙!
검풍이 허공을 갈랐다. 당세곤의 머리가 어깨 위로 떠올랐다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후후후....... 이제 다시는 네놈을 볼 수 없겠구나."
괴영(怪影)은 음소를 흘리더니 품속에서 옥병 하나를 꺼내 마개를 땄다. 옥병을 당세곤의 시신 위에 기울이자 검은 분말이 떨어지더니 시신으로부터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골산(化骨酸)이었다.
치치... 칙!
당세곤의 시신이 녹아 들어갔다. 잠시 후에는 바닥에 옷자락만 남고 그의 살과 뼈가 한 줌의 흑수(黑水)로 화해 땅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용봉칠영의 일인이자 사천 당문의 후계자였던 금적수재 당세곤의 비참한 최후였다.
괴영은 손을 뻗어 의복 속에서 금빛의 피리를 찾아냈다.
"그녀에게 네놈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잠시 맡아 두마."
괴영은 발로 의복을 뭉쳐 나무 뒤로 걷어찬 후 돌아섰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종리무였다.
②
남궁청운은 술을 단숨에 마셨다.
벌써 세 병째 독주를 마셨지만 여전히 부글거리는 가슴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천천히 드세요, 성주님."
내실이었다. 그곳에는 남궁청운과 예군향, 무림군왕성의 총관 소손방이 술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소손방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군향은 남궁청운의 품에 안기며 교태를 부렸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성주님께서 위명을 떨칠 기회는 아직 많으니까요."
소손방은 고개를 저었다.
"흑련사가 이미 붕괴됐는데 무엇을 제물로 위명을 떨치겠소?"
예군향은 눈웃음치며 말했다.
"아직 만금대인 부자와 그들이 이끄는 황금총이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는 부족하오."
"그뿐이 아니지요. 녹림(綠林)이란 대어(大魚)가 또 있지 않아요?"
남궁청운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녹림을? 그자들은 그동안 우군 역할을 했는데 어찌 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에요. 예로부터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어요. 비록 그동안은 은밀히 녹림과 연을 맺어왔지만 단호히 끊을 때가 됐어요. 더구나 녹림대종사란 자는 야심가임이 틀림없어요. 한 산에 양호(兩虎)가 살 수 없듯 언젠가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에요."
소손방도 외눈을 번쩍이며 동조하고 나섰다.
"맞습니다. 그자는 밀약을 깨고 멋대로 움직이는가 하면 마협관에 출전하여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그자는 언제고 성주님의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음."
남궁청운은 신음을 발했다.
"그자를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그자는 수하들에게조차 철저히 매사를 비밀로 할 뿐더러 능력 또한 추측이 불가할 정도로 매사가 은밀한 작자입니다. 이 참에 반드시 제거해야만 후환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남궁청운은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기실 그는 흑련사와의 정사대회전 이후 기분이 극도로 침체되어 있었다. 소손방은 슬쩍 예군향에게 눈짓했다.
예군향이 간드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성주님, 총관의 말씀이 옳아요. 만일 그들과 밀약이 있었다는 것이 무림에 알려진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럼 무림군왕성의 존엄이 땅에 떨어지게 될 거예요. 그러니 서둘러 녹림대종사를 제거해야 해요. 어차피 녹림은 오래 전부터 무림의 해악적인 존재였어요. 그러니 이 참에 성주님의 위신도 세울 겸 명분이 설 수 있는 일이잖아요."
남궁청운은 마음이 움직인 듯 물었다.
"군향도 그리 생각하오?"
"물론이에요. 녹림을 정벌함으로써 흑련사와의 대회전에서 잠시 빛을 잃었던 성주님의 명예를 만천하에 떨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예요."
"흐음."
남궁청운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소손방과 예군향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궁청운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좋소이다. 녹림대종사를 제거하겠소. 총관은 일월단을 움직여 그자의 행적을 추적하도록 하시오. 더불어 만금대인 부자의 종적도 함께 찾도록 하시오."
"예, 명을 받겠습니다."
소손방은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후후, 이제 남은 것은 괴수신의와 십정회다. 하지만 그들도 시간문제일 뿐이군.'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손방이었다.
"마군자, 그 모두가 천외천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도록 하라."
"......."
천외천(天外天)의 천주.
그는 휘장 속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렴풋이 형체만 휘장 사이로 보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전(大殿)은 환했다. 온통 백색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역시 백색의 대리석으로 된 우람한 기둥이 천장을 받들고 있었다.
마군자 사마을지는 바닥에 오체투지하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경직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대계(大計)에 대해 물어 보겠네. 어째서 진전이 없는 것인가?"
사마을지는 고개를 숙였다.
"송구스럽습니다. 하오나 무림군왕성이 흑련사를 평정하였으니 머지않아 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럼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
"이보게, 마군자. 황실의 일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지 않았는가? 만력제(萬歷帝)는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네. 머지않아 건친왕이 섭정에 들어갈 태세가 되었거늘 어찌하여 무림의 일은 이다지도 더디단 말인가?"
사마을지는 여전히 말이 없다.
휘장 안쪽으로부터 천외천주의 불만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역천지계를 결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호의 민심을 얻어야 한다고 자네는 입이 닳도록 주장했네. 지금 황실의 일은 마무리 단계일세. 자칫하면 호기(好機)를 놓치기가 십상이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네. 짐은 조치를 내릴 생각이다. 얼마전 출관한 팔대봉공과 천군(天軍)을 일거에 움직여 무림을 장악하도록 하라."
사마을지는 고개를 번쩍 치켜 들었다.
"아니 되옵니다. 자칫하면 그동안 들여온 공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설사 천군을 발동하여 무림을 장악할 수 있다 해도 너무나 많은 희생이 따르게 됩니다."
"더이상 말하지 말라. 짐은 이미 결정했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 희생은 피할 수 없는 법, 짐의 명을 집행토록 하라!"
쩌르릉!
대전이 울렸다. 사마을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존... 명!"
고개 숙이는 그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③
청명한 가을이다.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 들판에는 곡식들이 무르익고 있었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중추가절(仲秋佳節)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은 들뜨고 있었다.
관운빈은 악양의 목화루(木花樓)에 도착했다.
그는 중추절을 하루 앞두고 이곳에 도착했다.
목화루는 주루가 아니라 다루(茶樓)였다. 이 사실에 그는 다소 당혹해 하고 있었다. 다루에서 술을 팔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육노인이 좋아한다는 노백주(老白酒)는 있지도 않았다.
다루 주인의 말로도 근 백 년간 오직 차만을 팔아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그리운 사람들과의 재회가 이루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달빛이 환했다.
보름을 하루 앞둔 달빛을 받으며 그는 목화루에서 빠져나와 객점으로 향했다. 가까운 객점에 여장을 푼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설레는 가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동정호변을 걸었다.
말이 호수지, 동정호는 중원제일의 대호(大湖)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바다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호반에는 등롱을 내건 유선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유선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후후, 내일 밤 유선을 한 척 빌려 그들과 오랜만에 질펀하게 마셔 보겠구나.'
관운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언제나 걸찍한 욕설을 입에 매달고 있는 육노인, 십 년 가까운 세월을 동고동락했던 백사호, 그리고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던 사사영.......
"자네가 바로 괴수신의 관운빈인가?"
관운빈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앞에 두 괴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무림에 출도한 이후 이처럼 강한 기도를 풍기는 인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렇소만. 귀하들은 뉘시오?"
"잠시 장소를 옮길 수 있을까?"
훌쩍한 키, 등뒤로 풀어헤친 흑발에 빛바랜 흑삼을 걸친 오순 가량의 초로의 인물이 나직이 말했다.
그의 옆에는 대조적으로 작달막한 체구에 괴이하게도 색동옷을 걸친 동안학발(童顔鶴髮)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관운빈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호반의 유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때문이오?"
관운빈은 긴장하며 물었다. 그만큼 두 노인의 기도가 강했던 것이다.
"쓸데없이 사람들을 놀라게 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관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앞장 서시오."
"그럼 따라오게."
장발을 부드럽게 휘날리며 흑삼노인이 신형을 날렸다. 색동옷의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뒤따라 날아갔다. 그 뒤를 약간 처진 채 관운빈이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삼 인은 인적 없는 한 언덕 위에 대치했다.
흑삼노인이 물었다.
"한 번만 묻겠네. 순순히 우리를 따라오겠나?"
관운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를 말이오?"
"자네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네. 이틀 정도면 그곳에 갈 수 있네."
관운빈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거절해야겠소. 소생은 내일까지는 이곳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이오. 그리고 차후로는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초대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이때였다.
"흥! 애송이놈이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는구나!"
내내 딴청을 피우고 있던 색동옷의 괴인이 코웃음쳤다. 관운빈의 안색이 변했다.
"귀하들은 누구기에 다짜고짜로 시비를 거는 것이오?"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색동옷의 괴인이 눈알을 부라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송이놈, 잘 듣거라. 옆의 어르신은 천외천의 팔대봉공 중 두번째이신 검공(劍公)이시고, 노부는 광공(狂公)이시다."
"......!"
관운빈은 흠칫했다. 백야무정객으로부터 처음 들었던 천외천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때 흑삼노인, 즉 검공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순순히 따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을 받았으니 무력을 써서라도 데려 가야겠네."
"형님, 소제가 나설 테니 형님은 보고만 계십시오."
광마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성격이 무척 급한 모양이었다. 한 걸음 나서는 듯 싶더니 휙! 하고 단구를 날려 관운빈을 덮쳤다.
위잉!
하나의 철련자(鐵蓮子)가 날카로운 음향을 발하며 날아왔다. 관운빈은 좌장을 떨쳤다. 그런데 철련자는 퉁겨나가기는커녕 두 개로 분리되며 더욱 빠르게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광마의 쌍권이 뻗어왔다.
관운빈은 신법을 펼쳐 좌측으로 두 자 가량 피했다. 그러나 철련자는 눈이라도 달린 듯이 방향을 꺾어 날아왔다. 놀라운 것은 철련자가 다시 갈라지며 네 개로 늘어난 것이었다.
그와 함께 광마의 주먹도 방향을 틀며 집요하게 뻗어왔다.
관운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우장을 세워 수평으로 뻗었다.
꽈르릉!
굉음이 울렸다.
네 개의 철련자가 사방으로 퉁겨져 나갔고, 광마도 타격을 입은 듯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관운빈은 내심 중얼거렸다.
'놀라운 무공이다. 하지만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이자들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공력을 끌어올려 쌍장을 교차시킨 후 두 개의 원을 그렸다.
우우웅!
그러자 두 개의 회오리와 같은 기운이 뻗어나갔다. 광마의 눈에서 혈광(血光)이 번쩍 일어났다.
"크크크! 과연 태화천의 후손이라 큰소리 칠만은 하구나!"
광마는 등을 잔뜩 구부렸다.
그의 몸은 공처럼 둥글게 변하더니 구르듯이 날아왔다. 동시에 양소매를 떨치자 여덟 개의 철련자가 발사되었다. 철련자는 다시 네 조각으로 분리되어 서른두 개로 화해 허공을 가득 메우며 쇄도해 왔다.
관운빈은 찬바람을 들이켰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구나.'
이미 태화천의 후예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태화천의 무학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그는 즉각 손바닥을 마주치며 양손가락을 번갈아 퉁겼다.
쩡! 쩡!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서른두 개의 철련자가 가루가 되며 날아갔다.
"억!"
광마의 안색이 시커매졌다. 그러나 덮치는 기세 그대로 쌍장을 뻗자 허공에 무수한 장영(掌影)이 일어났다.
"하하하! 훌륭하오."
관운빈의 신형이 두 개로 갈라졌다.
"억?"
광마는 눈을 부릅떴다. 어느 것이 실체이고 어느 것이 허상인지 판별하기가 힘들었다. 두 개의 인영이 좌우에서 동시에 반격해왔다.
광마는 양손을 동시에 뻗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소매로부터 한자 반 길이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는 두 개의 인영을 향해 동시에 공격했다.
차창!
"음!"
"헉!"
각각 다른 신음과 비명이 울렸다. 두 사람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관운빈의 가슴이 붉게 물들었다. 의복이 한 자 이상 베어져 펄럭였다.
한편 광마도 장력을 맞고 울컥 피를 토해냈다.
"애송이 놈! 받아라!"
슈슈슉!
광마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재차 공격했다. 이번에는 수십 개의 철련자가 어지럽게 날아왔으며 두 개의 쌍칼도 어지럽게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윙!
검광이 눈부시게 일어났다. 관운빈은 용명검을 발출했다. 어차피 사생결단을 내야 할 때였다. 그는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신형을 날렸다.
두 사람이 맞부딪치고 다시 갈라졌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끄으......."
잠시 후 광마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그의 가슴에서 분수 같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반면 관운빈도 옆구리에 상처를 입은 채 비틀거렸다. 방금 전 격돌에서 두 개의 철련자를 맞았고, 상대의 칼에 옆구리가 세 치 가량 베어진 것이다.
쿵!
둔중한 소리와 함께 광마가 쓰러졌다. 그의 눈은 부릅떠져 있었는데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보였다.
"이제... 귀하의 차례요."
관운빈은 피가 뚝뚝 흐르는 용명검을 늘어뜨린 채 돌아섰다. 검공의 안색이 몇 차례 변했다.
"으음. 훌륭하군. 특히 자네가 마지막에 펼쳤던 천룡무극검법은 과거의 태화천주와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네. 우리 팔대봉공이 출관하자마자 이런 시련을 당할 줄은 몰랐군......."
그는 허무한 표정으로 광공의 시신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안타깝군, 부상을 입은 자네와 손을 써야 하다니. 하지만 천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네."
관운빈은 담담히 말했다.
"개의치 마시오. 아직 귀하를 상대할 힘은 남아 있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관운빈은 현재 서 있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허허, 대단한 기상일세. 그럼 조심하게나."
스슷!
검공의 양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지면에서 세 치 가량 뜬 채 미끄러지듯 다가온 그는 빙글 신형을 회전했다. 그러자 소리도 없이 폭이 좁은 검이 발출되었다.
검은 길이가 사 척이 넘는 장검이었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서 뜬 채 검극을 수평으로 뻗었다.
그 같은 모습은 검도를 익힌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일종의 기수식(起手式)으로, 상대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관운빈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기다릴 여유가 없다. 선공 외에는 대안이 없다.'
"받으시오!"
번쩍!
검광이 일직선으로 뻗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었다.
"훌륭하군."
검공의 탄성을 들으며 관운빈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검공이 휘두른 검은 그의 용명검을 퉁겨내고 관운빈의 요혈을 검의 측면으로 제압한 것이다.
검공은 쓰러지는 관운빈을 옆구리에 끼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팔두마차(八頭馬車)가 달려와 섰다.
검공은 혼절한 관운빈과 광마의 시신을 마차에 실은 후 마부석에 뛰어올라 고삐를 잡았다.
"이랴, 가자!"
두두두두!
팔두마차는 즉시 야음 속으로 사라져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휘휙!
십여 개의 인영이 그자리에 나타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안광이 형형하고 기도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진 듯 합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무사가 선혈이 뿌려져 있는 지면을 살피며 외쳤다.
"수색하라!"
깡마른 체구에 강인한 인상의 무사가 명령을 내렸다. 그는 초조한 기색이 완연해 보였다.
"분명 소군(小君)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보고가 왔다. 샅샅이 수색해 봐라!"
"옛!"
십여 명의 무사들은 눈을 부릅뜬 채 주위를 이잡듯이 뒤져나갔다. 그러나 팔두마차가 떠나버린 장내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소군(小君).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④
"종리무, 대체 얼마나 더 가야 돼지?"
"이제 다 왔습니다. 아가씨, 바로 저기 보이는 낡은 사찰입니다."
"저곳에 아버님께서 감금되어 계신단 말이지?"
"물론입니다. 일월단의 첩보가 틀린 적이 있었습니까?"
남궁소연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눈앞에 나타난 허름한 사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종리무를 비롯한 금붕단의 삼백여 명 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황급히 무림군왕성을 떠나온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남궁청운과 총관, 철사단과 백호단은 녹림대종사를 공격하기 위해 이틀 전 장도에 오른 상태였다. 따라서 성내에는 금붕단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차에 종리무로부터 군왕성주가 감금되어 있는 곳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달려온 것이다.
"아가씨, 비록 흑련사가 괴멸됐다고는 하나 아직 잔당들이 남아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놈들은 필시 노성주님을 볼모로 할 테니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
남궁소연은 입술을 깨물며 결의를 다졌다.
"걱정 마, 조심할 테니. 자, 어서 쳐들어가."
"예, 아가씨."
종리무는 입가에 사이한 미소를 흘리며 날렵하게 신형을 날렸다. 그 뒤를 남궁소연과 금붕단의 무사들이 따라붙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사찰은 제법 그 규모가 컸다.
보흥사(普興寺)란 현판이 붙어있는 일주문과 안쪽의 대웅전도 사뭇 장엄한 모습이었으며, 사찰의 경내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사람의 손길이 자주 닿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한낮임에도 승려나 향배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덤 속 같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남궁소연은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대열이 몇 갈래로 나뉘어지자 즉각 신형을 날렸다.
금붕단의 수백 명 무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거대한 사찰 경내에는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시진이 넘도록 수색했지만 아무런 수확도 거둘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남궁소연은 허탈한 마음에 불당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종리무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가씨, 수상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그래?"
남궁소연은 반색을 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른 무사들을 부를 생각도 못한 채 종리무가 이끄는 대로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종리무는 사찰의 후미진 곳에 위치한 석탑 앞에 당도했다.
"보십시오, 아가씨."
종리무는 오층 석탑의 기단(基壇) 한 부분에 손바닥을 대고 밀었다.
그그긍!
하는 굉음과 함께 기단 부위가 밀려들어가며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이 나타났다.
"이곳에 노성주님께서 계실 겁니다."
"......?"
남궁소연은 머뭇거렸다. 갑자기 불안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근처를 뒤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종리무는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내려가도록 합시다. 놈들이 눈치채면 곤란합니다."
남궁소연은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종리무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채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뒤따라온 무사들이 횃불을 밝혀 지하계단을 비추었다. 남궁소연은 지하통로의 바닥에 내려선 후 사방을 살펴보았다. 통로는 한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종리무를 비롯하여 십여 명의 무사들이 뒤따라왔으므로 그녀는 안심하고 통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꽤 오래 걸었지만 통로는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종리무,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 일단 나갔다가 금붕단 무사들과 함께 정식으로 뒤져보는 게 어떨까?"
불안을 느낀 그녀의 말에.
"아가씨,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이곳의 통로가 길긴 하지만 제가 지나온 길을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서 찾아봅시다."
남궁소연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얼마쯤 갔을까? 통로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일행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갑자기 찬바람이 불더니 횃불이 꺼져버렸다.
종리무가 외쳤다.
"모두 침착하시오. 내가 좌측을 살펴보고 올 테니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종리무는 그 말을 남기고 신속하게 좌측 통로로 사라졌다. 일 다경쯤 흘렀을까? 그가 되돌아왔다.
"안되겠소. 통로가 예상보다 깊소. 두 갈래로 나뉘어 찾는 게 나을 것 같소. 내가 아가씨를 모시고 좌측으로 갈 테니 자네들은 우측을 수색하도록 하게.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세."
그 말에 일행은 둘로 갈라졌다.
남궁소연은 종리무를 비롯하여 다섯 명의 무사들과 한 조를 이루어 좌측의 통로로 진입했다.
백여 장쯤 진입했을까?
통로 끝에 석문(石門)이 나타났다.
종리무는 거침없이 석문을 밀었다. 그때였다.
슈슈슉!
돌연 석문 좌우로부터 강전(强箭)이 가공할 기세로 쏘아져 나왔다. 그것은 사람이 쏘아낸 것이 아니라 기관작동에 의한 것이었다.
"아가씨!"
종리무는 남궁소연의 몸을 끌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으악!"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강전의 소나기를 만난 무사들은 미처 방어조차 못한 채 전신이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종리무는 몸을 일으키며 급히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종리무는?"
남궁소연은 그의 품에서 몸을 빼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한 대 맞기는 했지만 별 것 아닙니다."
종리무는 자신의 대퇴부에 박혀있는 화살을 뽑아낸 뒤 혈도를 눌러 지혈시켰다.
"어쩌지? 나때문에......."
남궁소연은 한숨을 쉬었다.
함께 왔던 오 인의 무사들은 모두 벌집이 되어 숨을 거둔 후였다. 남궁소연은 가슴이 콩알만해졌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숨진 무사들을 향해 묵도를 올린 후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석문 안쪽에는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오십 평이 넘는 꽤 넓은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안을 둘러본 그녀는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석실 한가운데,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 남궁혁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
남궁소연은 신형을 날려 제단 앞에 떨어진 후 남궁혁을 끌어 안았다.
싸늘했다. 놀랍게도 남궁혁은 이미 숨을 거둔 지 오래인 듯 온몸이 밀랍처럼 굳어 있었다.
"아버님...... 흐흐흑!"
무림지존으로 만인의 추앙을 받던 남궁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다니....... 남궁소연은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만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그녀는 극도로 비통에 빠진 나머지 석실을 밝히고 있는 횃불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야릇한 향기를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석문에서 발출된 강전은 기관장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나 석실 안에 밝혀져 있는 횃불은 불과 얼마 전 사람이 일부러 불을 붙이지 않고는 타오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점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
한편, 종리무는 야릇한 시선으로 남궁소연을 내려보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눈길이 남궁소연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먹이를 두고 즐기는 듯한 야수적인 눈빛이었다.
"흐흐흑......."
마침내 통곡이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남궁소연의 오열은 점차 잦아들었다.
문득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비로소 야릇한 향기가 석실 안에 가득 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코를 찡긋했다. 그녀의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의 빛이 떠오르더니 이내 경악의 빛으로 바뀌었다.
'이... 이건?'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코끝에 스며들고 있는 야릇한 향기는 일종의 최음향(催淫香)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보통 최음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며 순식간에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강호상의 방외문파 중에는 최음제를 비롯하여 각종 미약(媚藥)을 제조하는 곳이 있다. 그들은 정당한 무공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적수를 이러한 미약을 이용하여 제거하는 비열한 수법을 자주 사용한다.
남궁소연이 부지중에 들이킨 최음향도 바로 그런 종류에 속했다. 아니, 그중에서도 그 약력이 지독한 춘약성분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미약은 일단 중독되게 되면 해약(解藥)이 따로 없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춘약의 경우 오직 남녀지간의 교합(交合)만이 약성을 해독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남궁소연은 자신이 중독되었음을 깨닫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급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종리무 역시 온몸을 뒤틀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그럼... 종리무도?'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고개 숙인 종리무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남궁소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으음......."
문득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최음향의 약성이 전신에 퍼진 것이다. 그녀는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온몸이 확확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어루만지며 허리를 비틀었다. 야릇한 쾌감이 온몸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으으.... 아가씨, 제발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소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서... 불경을 저지르기 전에 한 칼에 목을 베어 주십시오. 으으윽......."
종리무는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며 그녀에게 애원했다. 그의 안색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남궁소연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방금 전 그의 말에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이런 곳에서... 일을 치르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올려 자신의 천령개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어느 새 다가온 종리무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것이다.
"아가씨, 제발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제발......."
종리무는 힘껏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으로 뒹굴고 말았다. 우연이었을까? 남궁소연의 몸이 아래로 깔리고 그 위를 종리무가 덮친 꼴이 되었다.
그의 한손이 남궁소연의 오른쪽 젖가슴을 눌렀다.
남궁소연은 입을 크게 벌렸다. 이제까지 한 오라기 남아있던 이성의 끈이 그 순간 끊어져버린 것이다.
"아아! 나 좀 어떻게 해줘! 종리무......."
허공을 휘젓던 그녀의 손이 종리무의 탄탄한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한 번 허물어진 이성의 벽은 봇물 터진 듯이 와르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종리무의 목을 끌어안으며 미친 듯이 입술을 부비기 시작했다. 지독한 최음향의 약성이 마침내 온몸에 번져버린 것이다.
종리무는 짐짓 그녀를 떼어내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떨어지기는커녕 그녀의 젖가슴을 덥썩 움켜쥐고 말았다.
"아아! 종리무... 어서 날... 좀......."
남궁소연은 마침내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흐흐, 좀더 확실히 하는 것이 좋지.'
종리무는 짐짓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듯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이내 독사의 혀 같은 그의 설육이 남궁소연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갔다.
남궁소연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며 그의 목에 더욱 강하게 매달렸다. 그런데 이때 종리무가 그녀를 떼어놓는 것이 아닌가?
"아... 가지 마! 종리무. 괜찮아. 어서 날 안아줘... 어서!"
종리무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소인이 아가씨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
종리무는 단호하게 말하며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남궁소연은 이미 전후사정을 헤아릴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세차게 그의 목에 매달렸다.
"아냐, 종리무. 내가 원하는 거야. 어서... 날 좀 어떻게 해줘. 제발... 날 살려줘, 아아!"
참다못한 남궁소연은 마침내 스스로 앞가슴을 잡아당겼다.
부욱!
그녀의 옷이 찢겨 나가며 속살이 드러났다. 그녀는 미친 듯이 옷을 잡아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분홍빛 살결이 드러났다. 불쑥 튀어나온 풍만한 젖가슴이 멋대로 흔들렸다.
종리무의 눈이 충혈되었다.
그는 뚫어져라 남궁소연의 젖가슴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음소를 지었다.
'흐흐, 과연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육체구나. 이제부터 넌 영원한 나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흐흐흐!'
종리무는 터질 듯한 희열과 욕망으로 혈관이 부푸는 것을 느끼며 마침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남궁소연은 허리를 요란하게 흔들어대며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의 근육질 가슴을 더듬으며 채근했다. 이미 그녀는 요조숙녀도 아니요, 자존심 높은 무림군왕성의 딸도 아니었다. 오직 남자를 애타게 갈구하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옷을 거의 모두 벗어던진 종리무는 그녀의 몸을 덮쳤다. 그의 손이 우악스럽게 남궁소연의 눈처럼 흰 두 개의 육봉을 거머쥐었다.
"하악."
남궁소연은 입술을 크게 벌리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 위로 종리무의 입술이 거침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종리무는 평소에 짝사랑했던 남궁소연의 육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석실 안은 순식간에 뜨거운 열풍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다.
⑤
흑련사의 몰락 이후.
무림은 평온을 되찾아야 했으나 뜻밖의 대사(大事)가 연이어 터짐으로써 다시 팽팽한 긴장상태로 접어들고 말았다.
첫번째 사건은 무림군왕성에서 벌어졌다.
노성주 남궁혁이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뿐더러 그의 아내 온수운마저 침소에서 목매달아 죽은 것이다. 여기에는 심상치 않은 음모가 곁들여 있었다.
온수운은 살해되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난행(亂行)당한 것이다. 결국 그녀는 부군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자진한 것이 아니라 치욕스런 난행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오리무중(五里霧中),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림군왕성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때마침 무림군왕성의 주력부대가 남궁청운의 영도하에 출정 중이었을 때 벌어진 일이라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당시 성을 지키고 있던 금붕단주 묵검자 사마운이 책임을 지고 자진함으로써 그 사건은 일단락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뜻밖의 일이 공표되었다.
그것은 남궁소연의 혼례였다. 그것도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상대와의 혼례가 발표된 것이다. 그 상대는 놀랍게도 남궁세가의 오랜 종복이었던 종리무였다.
두번째 사건은 흑련사를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괴수신의 관운빈이 실종된 사건이었다.
그는 홀연히 무림에서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그의 종적이 발견된 것은 악양의 목화루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세번째 사건은 검후(劍后)와 도귀(刀鬼)의 출현이었다.
무림사상 최고의 검도(劍道)를 깨우쳤다는 검후(劍后)의 출현만 해도 온 무림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출현한 도귀의 존재는 다시 한 번 무림을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도귀는 오른쪽 팔이 없는 독비도객(獨臂刀客)이었다. 그러나 그의 좌수도(左手刀)는 그야말로 지옥의 도로 일단 발도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목을 베었다.
따라서 그가 가는 곳에는 피의 강물이 이어질 정도였다.
검후도귀의 출현!
이는 강호에 또다른 풍파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네번째 사건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무림판도의 재편성이었다.
무림군왕성이 갑작스럽게 녹림맹(綠林盟)을 공격한 것만 해도 일반 강호인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녹림이 돌연 십정회와 손을 잡은 것이다.
십정회는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한 백도연맹이었다. 그런 그들이 녹림의 도적무리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가히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아무튼 그 바람에 무림은 다시 기묘한 대치상태로 접어들었다. 무림군왕성과 녹림, 십정회의 연맹이 팽팽한 긴장국면을 형성한 것이다.
무림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탁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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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즐독입니다
즐감요~~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 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