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남부 흑인
1860년 경에는 남부의 흑인은 400만 명 쯤이었고, 26만 명은 자유 신분이었다. 18만 6천 명은 연방군에서 복무하였으며, 30만 명 쯤은 각 주에서 자유 신분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남부 각 주의 흑인 노예는 300만 명 쯤이다.
전쟁이 끝나자 상전이 없어지고, 신분만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집도, 신분보장도, 생활 수단도 없었다. 해방 직후에는 농장에 그냥 남아서 “주인님, 우리도 주인님과 함께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소해야 했다.
하지만 흑인을 선동하는 선동군도 돌아다녔다. 주로 정치인이 많았고, 이들은 흑인의 욕망만 부풀려주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였을 뿐이었다. 흑인들에게 노역을 거부하고, 백인을 괴롭히고, 백인 교회를 접수해서 독립하라고 선동하였다.(흑인이 해방되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흑인 선동군은 흑인이 자기에게 투표하라고 부추기면서-)
흑인이 백인과 함께 성체성사를 받으려고, 신부 앞에 무릎을 끓자 옆에 있던 백인들이 모두 자리를 피해버리더라고 했다. 행방되었다고 하여 마음으로 동등하게 대해줄 수 없었다. 그때 유일하게 옆에서 지켜서있던 백인은 ‘리 장군’ 뿐이었다고 하였다.
흑인들도 ‘자유’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자유 신분이 되면 주인과 계약을 해서 계약관계를 유지해야 했으나 흑인은 계약이라면 무조건 자유의 구속으로 생각했다.
1865년, 전쟁이 끝나자 연방정부는 남부에 재건사업을 펼쳤다. 남부인은 전쟁에 패한 탓에 흑인에게 해방은 시켜주었지만 백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강경 진보론자들은 분노했다. 정부(당시 존슨 대통령)도 정책을 강경하게 밀어붙이려 하지 않았다. 지나친 진보 법안이 올라오면 거부권을 행사했다.
한편으로 급진주의자들은 남부인에게 전쟁 책임을 물어 복수를 해야한다고 난리를 치는 강경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남부 백인들은 교묘하게 흑인의 참정권을 막았다. 투표세라는 것을 만들어서, 흑인더러 투표하려면 세금을 내라고 하였다. 먹고 살기도 힘든 흑인이 세금까지 내면서 투표하려 하지 않았다. 강경 백인들은 KKK단을(주로 남부군 출신이 백인이었다고 한다.) 조직하여 흑인을 무법으로 린치했으나 정부는 두 손 놓고 있었다.
미국의 인종차별(특히 남부가 심하다.)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다루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