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암 9: 12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 ( 2 )
3] 우리는 수혜자 / 암 9:11-12 / 하늘일꾼
무엇이든지 넘으면 안 되는 선을 넘었을 때 구제 불능상태가 된다. '암 말기' 하면 자구적인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다. 이 때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도산'(bankruptcy)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한 개인이나 회사가 자기 힘으로 채무이행을 감당하기 힘든 상태까지 간 것을 말한다.
이게 한 국가에게 적용되면 '모라토리움'이라는 말을 쓴다. 이 모두가 다 넘으면 안 되는 선을 이미 넘어섰기 때문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에도 회복 불능상태, 영적 모라토리움 상태가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영적으로 결국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모스 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상태가 바로 그러한 상태다.
아모스 서의 이스라엘은 완전한 영적 파산 상태까지 간 모습이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
본문에서는 그 상태를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라고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윗' 하면 이스라엘이 왕국으로서 정착하게 된 중요한 계기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스라엘 건국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전에도, 아브라함, 요셉, 모세, 사무엘과 같은 출중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왕국으로서의 기틀을 갖춘 이스라엘의 시조는 아니었다.
왕국으로서의 면모는 바로 다윗 왕 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왕국이 이제 무너지게 생겼다.
기왕 천막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대학 시절에 등산을 간 적이 있다. 등산 가면 텐트를 친다. 그런데 한번은 쳐놓은 텐트가 비바람에 휘날려 무너져 버린 적이 있었다. 잘 아시겠지만, 등산 가면 유일하게 기댈 공간은 텐트밖에 없는데, 그 텐트가 내려앉았다. 그 때의 당황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 교회 마당에 쳐놓은 텐트도 마찬가지다. 이 텐트는 등산용 텐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튼튼하다. 그런데도 이 지역의 특유한 강풍에 견디지 못해 최근에 텐트 하나가 또 찢어져 버렸다. 찢어진 텐트는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별로 쓸모가 없다. 찢어진 부분으로 바람이 불면 더 찢어져서 완전히 쓸모없게 되고 말 것이다. 또 전에 교회 텐트가 찢어졌을 때 제가 부분적으로 보수해 보겠다고 찢어진 데다 덕테이프 갖다가 붙여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허사였다.
물론 본문에 나오는 천막을 등산용 텐트나 교회 텐트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광야 40년 간을 매일 천막 치면서 옮겨 다녔다.
그러므로 천막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요, 삶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들은 천막에 대해서만큼은 한 마디로 도사였다. 그런데 그 천막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
자기들 힘으로는 그 천막을 다시 건립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다 덕테이프 갖다 붙이고 부러진 버팀목에다가 못 몇 개 갖다 박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 천막은 이제 누군가에 의해서 일으켜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누군가가 와서 일으켜 세워줘야만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인간은 인생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은 인생 전문가다.
그래서 모두 "내가 사는 인생인데 그 누가 뭐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산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반대다. 기독교에서는 인생 전문가가 따로 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많은 인간이 이걸 불편해한다.
하나님의 개입을 불쾌해하면서 하나님한테 '상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이런 대립 구도에 있지 않다. 더 큰 데에 문제가 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거부하면서, 정말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을 잘 건설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잘 살아간다고 하는데도 오히려 문제는 더 많이 생기고 갈등은 더 증폭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개입을 불편해하는 게 문제다.
아이들치고 자기들의 문제점을 잘 아는 아이가 없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은 더럽고 깨끗한 것을 분간 못 한다. 아이들이 똥이 더럽다고 해서 그걸 잘 가리나? 어른으로서는 물론 그래 주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흙 놀이한 더러운 손으로 음식물을 덥석 붙잡는다. 그러면서도 아무 문제의식이 없다.
하나님의 개입을 불편해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기 스스로는 썩 괜찮은 존재인 것으로 안다.
그리고 자기에게 묻은 stain에 전혀 하자가 없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 stain이 자기의 존재 가치를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자기 앞가림을 할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잘 반영한다. 찢긴 천막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개입하신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옛적과 같이 세우겠노라."
그러면 어떻게 다시 세우시겠다는 것인가?
즉, 자기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인간의 죄된 모습을 어떻게 회복시킬까?
오늘 본문에서는 그 방법을 "옛적과 같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그 '옛적'은 과거의 다윗 왕국의 중흥기를 말한다.
요새 보는 역대상을 잘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역대상은 다윗 왕국의 중흥기를 회고하는 책이다.
다윗 왕 앞으로 모든 장군과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헤쳐모여' 한다.
모든 종교적인 체제도 똑같이 다윗 왕을 중심으로 '헤쳐모여'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제 안식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이뤄진 다윗 왕국의 안정을 인준해 주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상 이토록 태평성대를 구가한 적이 없을 정도로 다윗 왕국은 든든히 서게 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왕들이 이스라엘을 말아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작은 나라가 남북으로 갈린다. 그리고 서로 제 잘났다고 하면서 흥청망청 떠들어대며 산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정도로 피폐해 버린 이스라엘을 찢어지고 무너진 천막에 비유하시면서, 그 천막을 과거의 영광된 모습으로 되찾아 주시겠다고 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상징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 회복의 비교 대상을 과거에 있었던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고, 진정한 비교 대상은 사실 다르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한 이후에, 이스라엘은 현실적으로 다윗 왕국의 번영을 이런 식으로 다시 되찾은 적이 없다.
국가적인 중흥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다윗 왕국의 재현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과연 뭘 말하는가?
이러한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에 대한 예언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무너진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재창조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어떤 국가적이며 정치적인 의미의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는 현재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난리치는 것 같은, 시오니즘적인 국가주의, 어떤 민족주의적인 차원의 나라 재건이 아니다. 이것은 철저히 영적인 나라이다.
그러면 그 영적인 나라를 회복시킬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오셨던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의 죄성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죄성은 죄가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 나라는 아담과 하와가 사탄과 결탁하여 합작품으로 만든 나라다.
우리는 지금도 그 나라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나라의 분쇄를 원하신다.
그 나라를 부수고, 우리를 그 나라에서 꺼내어, 하나님 나라의 재창조 사역에 가담시키기를 원하신다.
어떤 드라마에서 어둠에 갇힌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아이들은 빛만 보면 눈을 뜨지 못하고 쓰러진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어머니에 의해서 철저하게 감금당한다. 행여나 하인들이 잘못해서 커튼을 젖혀 놓으면 난리가 난다. 그래서 대낮에도 까만 커튼을 젖치지 못하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서 산다. 그 아이들에게는 빛이 원수다. 빛이 좋은 것인 줄도 모르고 빛이 원수인 줄 알고 지내는 것이다. 어둠과 친근하게 지내다 보니까 아이들은 당연히 어둠과 벗을 삼고 살아야 하는 줄 안다.
우리가 사탄의 나라 속에 계속 갇혀 지낼 때는 그게 문제가 되는 줄 모른다.
"인생이란 이런 거야" 하면서, 그렇게 당연히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빛이 그 나라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빛을 한번도 보지 못한 그 나라의 백성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빛, 이 원수야 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 하면서 난리를 친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 보라.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금방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빛이 있어야 자신도 회복되고, 세상도 구속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회복이 불가능한 자들이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는 게 정말 중요하다.
우리의 믿음도 이 사실에 대한 강력한 위탁과 헌신이 없이는 자라지 못한다.
부족한 돈 때문에 평생을 고생한 사람은 돈 없이는 인생이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지병 때문에 평생을 고생한 사람은 건강 없이는 인생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 뼈저리게 잘 안다. 해놓은 공부가 없는 것 때문에 평생의 한이 된 사람은 공부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 것 있지 않는가? 아무리 다른 것들이 다 갖춰져 있어도 그것 없으면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그런 것! 손님이 온다고 해서 이 반찬 저 반찬 열심히 준비했다. 풍성한 식탁을 마련했다. 7:00에 온다는 손님이 드디어 제 시각에 왔다. 그래서 테이블에 손님을 앉혔다. 그리고 식탁에 놓인 반찬 뚜껑을 다 열었다. 그런데 웬걸! 밥을 푸려고 밥솥을 열어 보았는데 미지근한 물에 딱딱한 쌀이 그대로 물에 잠겨 있는 것이다. 분명히 cook 단추를 눌렀다고 했는데 warm 단추를 누른 것이다. 아마 주부들이라면 한두 번쯤은 이런 일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제 아무리 많은 반찬도 밥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이처럼 예수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가 빠지면 기독교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어떤 고급스런 윤리만을 찾기 위해 기독교에 입문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기독교는 예수의 생명과 회복에 매달리는 종교다. 그분이 구속하신 생명에 입적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목표다. 그분만이 우리를 죄의 나라에서 탈출하게 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우리를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법으로 옮기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없으면 우리 인생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만이 회복 불가능의 나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이 본문에서, 다윗 왕국의 회복의 주인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이 해석이 절대로 억측이 아니다. 여기에서 잠시 사도행전 15장으로 가보기로 하자. [행 15:15-18].
이 본문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총회 장면 중 하나다. 이 총회의 agenda는 다름아닌, 그 당시에 핫이슈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었다. 이 본문은 그 갈등을 중재해달라고 이 총회에 헌의안으로 올라온 것을 놓고, 예루살렘 교회 최고 지도자였던 야고보 사도가 언급한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야고보 사도는 아모스 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제는 새 시대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다 새롭게 구속된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 총회 현장에서, 아모스 서에 말한 이 구절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12절을 보라. 이처럼, 다윗 왕국의 회복은 절대로 시온니즘 차원의 회복이 아니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 보수되면 그걸 계기로 해서 만국이 소성된다.
이스라엘의 적국인 에돔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의 만국들이 동일하게 회복된다.
특별히 "남은 자들"이 그 회복의 대상이 된다.
이스라엘 사람이든, 에돔 사람이든, 로마 사람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어느 누구든, 예수가 가져다주는 구속을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구속으로 인해서 새로운 회복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게 바로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 회복되는 그 마지막 장면이다.
저는 아직도 수채화를 좋아한다. 유화는 좀 답답하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기름기는 하나의 스테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뭐든지 기름은 싫어했다. 음식도 기름기 있는 음식은 싫어했고, 기름기 있는 물건을 손대고 난 다음에 비누로도 깨끗이 씻기지 않는 것 가지고 속상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도 아직도 수채화가 좋다. 수채화는 물감이 번지는 데에 매력이 있다. 잘못 번지면 오히려 지저분한 스테인이 되어버리지만, 잘 번지면 아름다운 게 바로 수채화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회복이 이런 수채화 같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번짐 같은 것, 즉 나의 회복이 다른 사람의 회복으로 아름답게 전염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감 색소다.
나는 물이다.
색소와 물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며 만나게 되었다.
이제 그 만남이 캔버스 종이 위에 채색이 된다.
그러면 아름다운 그림으로 종이 위에 그 물감이 번져 나간다.
이스라엘의 시온니즘의 실패가 어디에 있는가?
다윗 왕국의 회복을 단지 민족주의 울타리 안에 가둬 놓았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팔레스타인 조그만 땅덩어리 하나를 놓고 그 환상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그게 아니었다.
하나님의 왕국의 회복은 우주적인 회복이다.
다윗 왕국의 회복이 물감처럼 번져나가서 온 이방나라를 적시는 것이다.
그래서 만국이 예수라는 성전의 문지방에 흘러나온 생수를 가지고 소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로 인한 우리 자신들의 회복, 우리 교회들의 회복이, 이러한 선교적인 차원의 회복으로까지 번져야 한다.
마치 수채화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회복도 옆으로 자꾸 번져야 한다.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을 먹이고, 남을 회복시키고, 예수를 몰라 영락없이 평생을 유리방황할 것 같은 사람들을, 나처럼 회복시키라고, 먼저 예수 믿게 된 것이다.
만약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하나의 이스라엘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들의 시온니즘이 또 다른 형태로 우리 안의 시온니즘으로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회복을 전염시키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걸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일에 소홀함이 없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찢어진 천막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설교를 준비하는 이 시간에(정확하게 7월 17일 수요일 오후 4:00) 폴 대 꼭대기에서 내려앉은 교회 텐트가 오늘은 무척 조용하다. 왜 그런가 봤더니 오늘은 바람이 아주 잔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찢어지고 주저앉은 그 상태가 전혀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나 몇 일 후면 바람이 또 세게 불어대기 시작할 것이다. 또 몇 개월 후면 비까지 내릴 것이다. 만약 그대로 놔두면 이 문제없어 보이는 천막이 다시 요동치면서 고통을 호소할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완전히 찢겨져서 내려앉고 말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이와 같이 자기의 모습을 생각보다 건강하게 바라보고 있다.
사실은, 이미 찢겨진 상태에서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잠시 외풍이 불지 않고 있고, 비바람이 치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안전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찢긴 그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그 때는 새롭게 갈지 않으면 안 되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를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살핀 아모스 서는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아모스 서는, 이미 갈 데까지 간 자기들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신랄하게 고발하기 위해서 주어진 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다. 그 분은 고발을 위한 고발을 하지 않는다. 그 분의 고발은 결국 그 분이 주도하시는 회복을 위해서 존재한다.
아모스라는 한 농부를 동원해서 이렇게까지 신랄하게 고발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이스라엘을 사랑해서다.
이스라엘의 찢긴 모습을 그대로 놔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모스 서 이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찢기고 무너진 모습을 다시 재건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바로 그 분의 그런 자비의 수혜자들이다. 우리도 찢기고 찢긴 자들이다.
우리도 우리의 모습을 잘 몰라서 그렇지, 더 심각한 외풍이 불면 언제라도 구제불능 상태에 빠질 자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미 그 상태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통해 임마누엘로 다가오셨다.
예수의 보좌 아래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로 회복을 맛보고 있다.
지금 우리는 무너진 원기를 회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회복은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을 적신다.
이제 그런 회복을 주신 우리 주님을 찬양하자.
그 분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찬양하자.
그 분의 회복의 은총에 깊은 감사를 간직하며 살자.
평생을 그러한 구속의 은혜에 젖어서 감격하며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랑 희망 기쁨 감사 열정 지혜 정직 용서는 마음을 풍성하게 하고 건강하게 합니다.
좋은 생각 즐거운 마음으로 멋진 하루 되시고 기분 좋게 행복과 행운이 가득한 하룻길이 되세요. 💖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잠 21:8).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