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4. 10. 24. 한겨례 신문에는 '영남대 ‘박정희 동상’ 제막…학생·동문회 “강탈자” 반발'라는 뉴스가 떴다.
영남대는 2024년 10월 23일 개교 77주년을 맞아 학내 천마아너스파크 광장에 2.5m 높이의 ‘영남대학교 설립자 박정희 선생’ 동상 제막식을 열었다.
기사 내용 중 일부를 복사, 여기에 올린다.
동상 아래에는 “영남대학교 설립자 박정희 선생”이라고 적혀 있고, 뒤에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고 적힌 대형 펼침막을 세웠다. 동상 오른쪽과 왼쪽에는 각각 박 전 대통령의 약력과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적힌 비석이 있다. 동상 제작 비용은 영남대 미주연합총동창회장이 전액 기부했다.
“박정희는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 제5대부터 제9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원대한 꿈과 청사진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썼다.
학생들은 이번 동상 건립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서 한 학생은 “학교 설립자가 아니라 학교 뺏은 사람 아니냐”고 썼다.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영남대의 뿌리는 1947년 ‘경주 최부자’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최준 선생이 영남권 유림의 돈을 모아 설립한 옛 대구대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대구대와 청구대를 ‘영남종합대학’으로 합병했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80년부터 9년간 영남대 학교법인 영남학원 이사장과 이사를 지냈다. 학내 비리 사건으로이 잇따라 터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1988년 영남대에서 물러났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교육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박 전 대통령에게 영남학원 이사 4명(전체 7명)의 추천권을 줬다.
영남대에서는 최근까지도 대학을 시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민주화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2.
위 기사에서 '경주 최부자'가 나온다.
'경주 최부자' 마지막 12대인 최준 선생
최준(崔浚, 1884년 7월 27일 ~ 1970년 10월 13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기업인, 사회운동가, 교육인이다. 호는 문파(汶坡). 본관은 경주, 경상북도 경주 출신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주의*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 12대로 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져 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뜻의 프랑스어 표현이다.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임무를 수반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주로 사회 지도층 혹은 상류층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모범을 보이는 행위를 표현할 때, 혹은 그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표현이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투자했고, 일제강점기때 백산무역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 일제의 혹독한 감시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상해임시정부 등 많은 독립운동 단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민립 (구)대구대학의 설립자이다.
최준선생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최준은 대구대학 건물을 짓다가 건물 붕괴사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들에 대한 보상을 하려고 대구대학을 저당삼아서 삼성 이병철한테 돈을 빌렸다. 훗날 박정희가 이 대학교를 차지했다.
지금은 경주최부자댁은 박정희(박근혜) 소유이다.
최부자댁은 이제는 실속없는 허명(가짜)으로 남았다.
최부자댁 12대 최준선생의 손자 '최염'이 이를 되찾고자 노력했으나 그게 가능할까? 전혀 아니다.
12대 최준 선생은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했다.
재산 대출을 일본은행에서 했는데 다행히 해방이 되어 재산의 30프로가 돌아온다.
최준 선생은 지금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해 학교를 설립한다.
경북대학기성회를 만들어 유지들이 참여했고, 많은 유지들이 모여 지금의 영남대를 설립했다. 그 밖에도 계림대학을 설립해서 운영했으니 경주에 있는 집과 더불어 전 재산을 학교를 설립하는 데 바쳤다.
돈을 삼성 이병철한테 빌린다.
1966년 삼성이 소유하고 있던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졌다.
이병철은 밀수사건을 무마하려고 당시 대구대(현 영남대)를 권력자 박정희 측으로 넘겼다.
결국에는 최부자집은 영남대가 소유하고 있다.
소작농에 파격적인 소작료 임시정부땐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 해방 뒤 최준은 전 재산을 기부해 대구대를 세워 삼성 이병철에게 무상양도했다.
“최고 대학 만들겠다”던 이병철은 약속을 저버렸다
삼성 이병철은 사카린 밀수사건을 무마하려고 대구대를 박정희에게 헌납했고 박정희는 영남대로 바꾸면서 최씨 집안의 고택·논·선산이 동시에 영남대 소유로 넘어갔다
최준(崔浚, 1884~1970)은 경북 경주시 교동에서 진사 최현식과 풍산 유씨 사이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내윤(乃允)이며, 호는 문파(汶玻))이다. 그의 집안은 경주최씨 사성공파(司成公) 중 가암파(佳巖派)이다.
신라시대 고운 최지원의 28대손이며,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의 11대손으로 이른바 ‘최부자’ 집이다.
위 사진은 최준선생의 손자 최염
경주최부자의 최진립장군
정무공 최진립(1568~1636년) 공조참판에 기용됐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종과 수하를 데리고 경기도 용인에서 청나라 군사와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경주 최부자댁은 ‘9대(에 걸쳐) 진사가 나오나 관직에는 등용하지 않는다'.
그저 그냥 12대 만석꾼’이다.
다만 정무공 최진립장군은 청백리로 살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부자는 아니었다.
최부자가 된 것은 최국선(1631~1681년 )
최부자집의 사랑채 전경
조선 중기 최진립장군 이래 최씨일가는 경주 내남에서 지금의 교촌마을로 집을 욺긴 후 지속적으로 부를 유지해 왔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
"집안의 재산은 1만석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라"
* 최부자댁은 경주시 교동에 위치. 민속문화재로 등록되었음.
마지막 최부자로 꼽히는 최준(1884~1970년)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 때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다.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 최시형, 손병희 등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에 비하여 박정희는.....
다까끼 마사오는 일제시대 일본군관 지원
본관은 고령(高靈). 창씨개명한 이름은 다카키마사오[高木正雄], 호는 중수(中樹). 경상북도 구미 출생.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 군문에 들어갔다. 당시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하여 혈서를 썼으며, 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犬馬の忠]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 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滿洲新聞)』(1939. 3. 31. 7면)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일본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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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가 된 것은 최국선(1631~1681년)
경주 여행시 경주 교동 '경주법주' 술을 마시기 바란다.
경주법주 고택은 종가인 최부자댁 옆에 위치.
이조 숙종때 사옹원 참봉을 지낸 최국선이 낙향하여 처음 빚은 가양주
한식당요석궁은 최부자댁 12대 손이며, 독립운동가 최준의 동생 최윤이 분가해서 지은 집이다.
慶州校洞法酒
줄여서 교동법주라고도 한다. 만석꾼으로 유명한 경주 최씨 사성공파(司成公派)-정무공파(貞武公派)-교리파(校里派) 집안의 가양주다. 빚는 시기와 방법이 딱딱 정해져 법주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 궁중의 술이었는데, 빚던 사람이 경주로 내려와서도 빚어 이후 조선의 국주(國酒)라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국가무형문화재 제86-3호다.
고교 졸업 후 친구들과 경주를 방문,이 음식점에서 경주법주를 마셨다.
나는 대학생 시절(1960년대 말)에 서울에서 '경주최씨 종친회' 모임에 아버지와 함께 참석해서 12대 마지막 부자인 최준선생(1884 ~ 1970년)을 먼 빛으로 뵈었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경주최부자댁'도 방문했다. 경주 계림도 방문하고.....
아쉽게도 12대 최부자댁은 지금은 박정희네 소유.....
* 나는 경주최부자댁 12대 마지막 부자인 최준(崔浚)선생을 존경하기에 내 손자의 이름을 최준(崔浚)으로 지었다.
내 손자가 배 고프지 않게 일생을 살면서, 재산을 가난한 이웃한테 넉넉하게 나눠주는 착한 심성을 지녔으면 싶다.
사진과 자료는 인터넷으로 검색.
용서해 주실 게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인다.
무척이나 많이 쓸 것 같다.
그만 쓸란다. 지친다.
2024. 10. 25.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