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가 초밥 먹는 영화에 성을 낸 개딸 이제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 무학산(회원)
죄수가 초밥 먹는 것을 개딸들이 성을 냈다고 한다. 이쯤되면 죄수가 주인공이 아니라 개딸이 주인공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을 분별하는 데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면 족하다. 그러나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기는 요사이 들어서 어려워지고 말았다. 어제 조선일보에《넷플릭스 드라마 속 ‘초밥 먹는 4421 죄수’ 이재명 연상돼 논란》이란 기사가 있었고 그 출연 배우까지 이재명을 닮아서 개딸들이 아우성이라 한다. 아우성이 아니라 뉘우치는 소리라야 맞는데 도리어 이재명을 편든다니 나라의 앞날이 막막하다. 개딸들 때문에 막막한 게 아니라 개딸이 주인공이고 이재명이가 조연임을 모르는 현실 때문에 막막한 것이다. ‘이재명이 연상돼 논란’이라 했다. 연상된다는 말은 생각된다는 말이다. 초밥 먹는 죄수에게서 왜 이재명이가 생각되나? 이재명이도 초밥을 먹었고 제 돈으로 안 먹었기에 생각된 게 아닐까. 어쨌든 비슷한 구석이 있으니 연상되는 것이다. 그러면 미안해 하든지 그를 지지하지 말든지 해야지 왜 도리어 아우성일까. 아무 관계가 없다면 박근혜처럼 덤덤할 일이다. 누군가가 대통령 박근혜가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 있고 박정희를 낳는 그림을 그려 국회이던가 어디에 전시까지 했었다. 그래도 박근혜는 분노하지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건만 초밥 먹는 죄수 모습에서는 개딸들이 발칵했다. 성을 내는 것은 자복(自服)이요 자수요 부끄러움이다. 그러면서도 성을 낸 것에 부끄러움을 모르니 어찌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저울이 통하겠는가. 이제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 사실 저것들은 어중이떠중이이고 뒤에는 북한 빨갱이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더 겁나는 것은 주창자가 아니라 어중이떠중이이요 유상무상(有象無象)들이다. 들판의 허새비가 너무 주인의 마음에 충실하니 어떻게 허새비인지 주인인지 구별하리오. 그러나 여기까지만 해도 한가로운 이야기라 하겠다 개딸이 곧 빨갱이이요 빨갱이가 곧 개딸임을 알아야 한다. 이재명이는 북한이 듣기 좋은 소리를 골라서 한다. 일전에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공로를 알아주어야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말했다. 그가 주인공이라면 저런 말도 필요가 없다. 조연이니 주인공 귀에 달콤한 말을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