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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2. 9. 21. 수요일.
하늘이 맑다
중장년의 카페에 들어갔다가 내 글을 발견했다.
이런 글이 아직껏 남아있다니?!
내 몸은 서울 송파구 잠실에 있지만 마음은 늘 서해안 산골에 있는 시골집에 내려가 있다.
식물을 좋아하기에 텃밭 세 자리에는 많은 나무와 화초들이 있는데도 추가로 400여 그루의 과일나무 묘목을 심었다.
업자들이 와서 심었다.
아쉽게도 내가 몸을 긁적거리는 증상이 생기는 바람에, 한밤중에 서울에서 내려온 자식의 차를 타고는 지방종합병원으로 실려갔다. 대상포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약은 없다면서 고작 1일분만 처방했다.
다음날 자식이 운전하는 차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 송파구로 급히 올라왔고, 송파구에 있는 '현대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서울로 함께 올라왔던 아흔여섯 살의 늙은 어머니도 위독해서 현대아산종합병원 응급실을 거쳐서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하도 늙어서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퇴원을 강요했기에 퇴원해야 했다.
고향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장기간 입원하셨다.
어머니한테는 아들이 혼자인 나.
나는 종합병원 중환자보호자용 방에서 머물러 살았다. 24시간 병원에서만 머물렀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지켜보려고... 하루 4차례인 면회시간에 반드시 대기하려고....
나는 병원에서 24시간 머물면서 거지처럼 생활했다.
구내식당에서 밥 사 먹고, 때로는 병원 급식을 얻어먹고 살았다.
병원 안에도 식당이 있다. 식당 아주머니들이 내 모습이 처량해 보였는지 이따금씩 밥을 몰래 나눠주셨다.
내 속옷은 중환자보호자용 방의 세수대에서 눈치껏 손빨래해서, 말려서 입었다.
다른 환자의 가족으로부터는 미움을 받았을 터.
하지만 나는 개의하지 않고는 하나뿐인 어머니가 입원한 중환자실의 면회시간만을 기다려야 했다.
어머니는 다음해인 2015년 2월 25일에 저너머의 세상으로 여행 떠났다.
고향 앞산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 한 자락을 파서 합장해 드렸다.
매장한 뒤에 산소 일을 했던 석물업체 사장한테 비용을 지불하려고 찾아갔다가 아래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그 당시의 기억을 아래처럼 글로 남겼다.
기억은 자꾸만 흐려지고, 사라지지만 글로 남기면 그 기억이 오래 간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2022. 9. 21. 최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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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댕이 부은 목격자
어?
저것들 대형사고이잖여?
그러면 그렇지, 잠시 후에는 꽝 하면서 두 대의 차량이 사거리 지점에서 충돌했다.
트럭 앞머리 운전석 아래에 중형승용차가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남북으로 직진하던 트럭과 동서로 직진하던 차가 서로 부딛쳤으니 트럭은 왼쪽 운전석에, 승용차는 왼쪽 운전석 앞머리가 크게 부서졌다. 완전히 뚜껑이 열리고 승용차 앞 부분이 작살이 났다.
어?
할 사이도 없이 급작히 일어난 대형사고였다.
2월 27일(금요일) 어머니를 장사 지낸 뒤 그날 작업한 포클레인 임대비용, 잔디 구입비, 인건비와 수고료(알선료)를 동네사람 임씨한테 지불하고 돌아서던 길이었다.
대형 석물단지가 조성된 곳이라서 대형트럭이 오가는 도로라서 도로폭이 무척이나 넓고 길이도 직선으로 내리뻗었다.
과속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대창교를 막 지난 사거리 교차로 한 복판에서 충돌한 교통사고.
* 충남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 101-1번지 : 이 일대는 온통 석물공장지대이다.
아내가 주차한 곳으로 한참을 에둘러서 걸어가던 중이었다.
내가 내 고향에 살았으면서도 이십 년 전에 조성된 석물단지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터였다.
석물단지 안 도로 사정을 몰라서 아내는 '형제종합카센터' 빈 터에서 정차하고 있었다.
나는 물어 물어서 동네사람이 운영한다는 석재/조경업체를 찾아 가서, 돈을 치루고 돌아오던 때였다.
석재를 운반하는 트럭은 앞 운전석 문짝이 조금 찌그러졌으나 중형승용차는 앞면이 완전히 반파했다. 나는 걸어서 승용차 쪽으로 다가 갔다. 승용차 안의 운전수가 한참이나 전혀 미동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트럭 운전사는 자기 차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승용차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트럭이 움직이려는 듯한 바퀴 회전이 있는 듯 싶기에 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트럭 움직이지 마세요.'
현장 보존차원이었다.
검은 빛의 승용차 안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나왔다.
어? 스스로 운전석에서 빠져 나왔으니, 기어나올 정도면 크게 다친 모양은 아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릿통을 감싸쥔 채 비틀거리면서 빠져 나와 땅바닥에 그대로 쪼그려뜨려 앉았다.
유일한 목격자인 내가 그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크게 다친 곳 없어요?"
'예'
하면서도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하는 몸짓으로 사거리 앞 인도보도 블럭으로 걸어간 뒤에 비틀거리면서 주저앉았다.
그때까지도 트럭 운전사는 아무런 조치도 않은 채, 운전석에서 돌발사태를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트럭운전사의 소행이 얄미웠다.
'여보세요. 승용차가 저렇게 망가졌다면 승용차 운전사가 크게 다쳤는 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거 아녀요?'
'내가 물어잖아요, 괜찮으냐고요?'
대꾸하면서 트럭운전사가 너는 뭐야 하는 식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당신, 이내 물어 본 게 아니구,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 그냥 형식적으로 툭 던지듯 물어 보았던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돈보다도 먼저 사람을 구해야 되는 거 아니었소?'
'당신 누구요? 문이 고장나서 안 열리잖아요?'
'당신 차 문짝 고장 안 났어. 문 열을 수 있었어.'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간섭하지요?"
'나? 목격자!'
하고 나는 큰 소리로,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되받아쳤다.
'저 사람하고 어떻게 되어요?'
트럭기사가 눈을 부릅뜨면서 나를 죽일 듯이 내려다보고 물었다.
'나? 저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 그런데 당신, 인간성이 아주 더러운 놈이야. 교통사고가 났으면 당연히 사람이 다쳤나를 확인해야 하는데도 당신은 아무런 조치도 안 취했어. 마치 남의 일인 양 구경만 했어.
'당신이 뭔데, 이 새끼야.'
하면서 트럭 운전사가 내게 거칠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에요?'
그제서야 정신 차린 듯 승용차 운전사가 주위 사람한테 물었다.
나는 그에게 도로명 명패가 석공장 벽면에 붙어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지적해 주었다.
'구장터1길 30' 주소지의 글자와 숫자를 보고는 그는 핸드폰을 꺼내서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트럭운전사도 전화기를 꺼냈다.
트럭운전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려오지 않고,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야, 시팔새끼야, 상관없으면 가.'
'지금 나보고 씹할새끼냐고 했냐? 야, 너는 느이 애비 에미가 씹한 새끼로 태어났어. 그래 나는 씹할 새끼이다. 그런 너는 씹 못할 새끼냐? 벌써부터 씹 못할 새끼가 됐냐? 이 씹 못할 놈의 개새끼야. 너는 인간성이 아주 더러운 놈이야.'
라고 내 입에서도 큰 욕설이 터져나왔다. 씹 못할 새끼라고 욕설을 들은 사내는 씹이라는 욕은 차마 못하고, 다른 욕으로 대체하듯 악을 썼다.
그때다.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동차 충돌의 굉음과 이어서 큰 목소리로 싸움하기 시작했기에 대형 석물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60대 후반의 사내가 주먹을 쳐들고 나한테 대들었다.
'가아, 이 새끼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면 가라구, 너 어디에서 사니?'
나보다 나잇살이 더 먹었을 성싶은 사내가 내 얼굴을 향해서 주먹을 올렸다 내렸다 흥분을 참지 못했다.
'나? 웅천사람이야, 웅천사람(고향사람이라는 뜻)! 어디 한 번 쳐 보라구? 그래 한 번 내리쳐 보라구!'
하면서 전혀 엉뚱한 사내한테도 내가 대항해야 했다.
겁 먹을 내가 전혀 아니었다.
승용차 운전사가 내게 다가왔다.
'그만 가셔요, 제가 알아서 할께요.'
구경꾼들 가운데 바로 우리 동네사람도 눈에 띄었다.
어?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나?
'형님 그만 하세요.'
하고 또 한 사람 노동자가 나를 등 뒤에서 감싸안았다.
'알았어.'
하듯이 나를 감싸안은 내 고향친구의 동생(조씨) 팔을 내가 밀쳐냈다.
또 한 사람 동네사람 김씨도 구경꾼들 틈새에서 발견했다.
'형님, 왜 욕 먹어요?'
이 사람도 우리동네 사람이잖여?
나는 내 상황이 딱해서 이들한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때 경찰차가 왔다.
불과 500메타의 시내(대창리)에 위치한 경찰지구대.
나는 경찰관에게 내 핸드폰 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네 주었다.
'저 트럭 운전사, 인간성이 아주 나쁜 놈이어요. 교통사고가 났으면 먼저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남의 일처럼 먼둥먼둥거렸어요.'
라고 나는 일렀다. 경찰관 옆에 있던 60대 후반의 노동자는 주먹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하면서 나를 곧 내려칠 둣이 계속 위험했다. 욕을 하면서.
또 다른 사람은 흥분해 있는 나를 말렸다.
경찰관도 내게 말했다.
'그냥 돌아가세요.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이제 그만 가세요.'
큰 싸움이 벌어질 듯한 상황을 아는 경찰관이 나보고 가라고 한 이상 나는 현장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서 아내가 차를 주차한 곳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창교를 막 지난 사거리 바로 앞, 안흥상회 석재공장 인근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의 처리가 향후 어떻게 변질될 것인가를 미리 짐작할 수 있다.
현지의 주소조차도 모르는 외지인 승용차 운전사.
현지의 사정을 너무나 빠꼼히 아는, 대형 석물공장 단지에서 트럭을 모는 석재 운반 운전사.
현지의 경찰관이 누구의 편에 서서 쌍방충돌의 교통사고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공정성을 구태여 묻지도 않는다.
차량 보험회사에서 직원이 나오기 전에 나는 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유일한 목격자인 나를 현지의 경찰관이 사건 참고인으로 불러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치상, 논리상 목격자의 진술도 참고적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도 이런 행위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위 교통사고의 쌍방 운전사들을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어느 누구 편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공정공평한 입장에 서서 쌍방과실의 비중만을 인정하는 참고인 진술만 하면 그뿐이다.
나 역시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다.
나도 여러 차례 차량 접촉사고를 냈어도 나는 돈(보험료)보다는 상대방 운전사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다.
사람이 다치면 구조활동이 먼저해야 한다는 인식이 먼저였다. 이런 심성을 지닌 나는 지금껏 여러번 내 차를 부셔먹었어도 상대방 차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내가 시력이 약해서, 상대방 차가 후진하는 사실을 모르고, 내가 서행하다가 생긴 접촉피해 차량인데도 나는 내 스스로를 가해차량으로 인식했다. 다친 데가 없었기에 내가 하차하여, 먼저 사과를 하고, 상대방 차의 파손여부를 확인했다. 나는 대형트럭과의 부딛쳤지 소형차와는 한 번도 부딛친 적이 없었다. 상대방 대형차량은 멀쩡한데도 작은 승용차인 내 차는 늘 반파 직전이었다. 운전석, 문짝 등. 전적으로 내 차만 부셔먹었다.
나는 내 차량의 파손보다는 먼저 상대방 운전사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다..
이런 나와는 달리 내 고향 '웅천읍 구장터 석재단지'에서 목격한 교통사고 현장은 어땠을까?
현지의 트럭 운전사의 소행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쌍방과실인데도 자기 트럭은 운전석 문짝만 조금 부셔졌는데 비하여, 중형승용차의 앞대가리는 완전히 반파된 상황.
차량보다는 상대방 운전사의 부상 여부를 먼저 묻고 확인하고, 응급조치 여부를 해야 했는데도 이런 행위는 일체 없었다.
나는 석재 산업단지가 있는 지역의 주민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났던 곳이다.
내가 공부하러 대전으로 떠났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한 뒤에 고향으로 되돌아왔더니만 그 사이에 고향의 인심이 이다지도 나쁘게 변질된 사실로 슬퍼하기 시작했다.
돈보다도(쌍방과실의 비율로써 보험료 책정이 달라짐) 먼저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마음을 지닌 나로서는 트럭 운전사와 또 내게 주먹을 휘둘러서 위해를 가하려고 했던 석공장 일꾼의 행태도 용서가 안 된다.
그 트럭운전사가 내 고향 읍내 사람이 아니기를 빈다.
만약 그 자가 내 고향 읍내 사람이라면 나는 크게 실망할 게다.
내 고향의 인간다움, 인정과 인심이 그야말로 '더러운 놈'으로 인식받기 싫기 때문이다.
또 나한테 주먹을 휘둘러 폭력할 듯이 위해를 가하려 했던 현지의 늙은 노동자도 나는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않겠다.
만약, 목격자인 내가 그 현장에서 폭력을 당했다면?
나는 절대로 가만 안 있을 게다. 소읍의 경찰지구대가 아닌 본서 경찰관서에서 직접 1차고소를 하고는 그참, 서울로 올라올 게다. 서울 올라와서는 경찰청에 재고소할 게다. 지방이 아닌 서울 본청에다가 재고소를 해서 철저히 폭력사건을 조사하도록 의뢰할 게다. 검사청까지도 연방 들락거려서 끈질지게 폭력행위를 응징할 게다.
현장의 목격자인 증인을 과도하게 위협하고, 협박하는 범죄행위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게다. 법망의 이름으로 문제를 크게 확대시켜서 엄중처리하도록,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게다.
목격자의 안위를 보호해 주어야만 이 사회가 보다 안전하고 건실하게 발전할 것이다.
내 고향 읍내에서 일하는 석재단지의 트럭기사와 현지의 노동자가 나한테 대들었다는 사실로 나는 고향 읍내의 인심을 새삼 깨달았다.
나중에 고향 마을에 들르면 그날 구경꾼이었던 고향 사람들한테 내가 목격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어야야겠다.
그날 현장에는 동네사람이 두 명과 현장에서 직접 구경은 못했으나 내가 돈을 지불했던 이웃 석재공장 주인(동네사람 임씨)은 바로 시골마을의 내 집에서 지척거리에 있다.
어째튼 나와의 문제가 될 뻔한 폭행사고는 없어서 다행이다.
쌍방충돌 교통사건도 또한 원만히 잘 해결되었으리라 믿는다.
반파되었던 중형 승용차 운전사의 두상(머리부상)에 큰 피해가 없기를 빈다.
나?
현지의 사람이다.
그런데도 주먹으로 위해를 가하려고 했던 폭력사태가 안 일어난 점을 다행으로 여긴다.
싸가지 없던 트럭운전사의 교활한 태도와 그 운전사를 두둔하면서, 유일한 목격자인 나에게 주먹으로 위해를 가하려고 했던 현지의 노동자를 비난한다. 너무나도 뻔한 사거리의 쌍방 충돌사고였기에, 그 한산한 거리에서 질주하던 차량들의 충돌현장을 유일하게 바로 코앞에서 목격한 목격자이기에 고발성 어린 글을 게시한다. 고향을 고발하는 측면에서 이 글을 작성했다.
하지만 나는 더 생각한다.
며칠 전 서울에 올라온 나는 그날의 사건을 생생히 기억해 낼 수 있다.
왜, 웅천파출소에서 유일한 목격자인 내게 참고인으로 출두하라는 지시가 아직까지 없는 지를 나는 생각한다.
나처럼 간댕이가 부은 목격자는 더 이상 없기를 빈다.
2015. 3. 8. 일요일. 산다(최윤환의 닉네임)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오래 전에 썼던 일기이지요.
정의가 살아야
참된 세상 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참된 세상'이라는 용어에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네~~~참말로 효자 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저.. 효자 아니어요.
초등학교 때에 어머니와 헤어져서 객지로 전학 갔고....
그 어머니.. 시골에서 혼자 사셨지요.
아들이 하나뿐인 저인데도 어머니는 서울 올라와서 사는 것을 거부하셨지요.
어머니가 말씀하시대요.
'내가 며느리와 다투면 너는 누구 편 들래?'
어머니는 차멀미를 심하게 하셔서 차 타는 것도 거부하고....
저는 격주마다 시골로 내려가 이것저것 살림을 보살펴 드리고.. 농사철에는 매주 내려가고..
그 당시 어머니는 치매기 진행 중이었고...
제가 정년퇴직한 뒤에서야 시골 내려갔을 때에는 어머니는 너무나 늙으셨대요.
제가 지금도 후회하는 것은..
정년퇴직을 1년이라도 앞당겼더라면.. 하고요.
위 글은 어머니 돌아가신 뒤 산소 일을 한 업자한테 돈 지불하러 갔다가 목격한 사건...
삭제된 댓글 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정의와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라고 하는 말은... 위로할 때나 쓰겠지요.
현실은 강자와 악한 사람이 더 잘 되고, 더 잘 살대요.
현실은 위 말과는 다르게 진행되대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래도 착하게, 선하게, 죄를 덜 지으면서 사는 세상이 더 많기에
세상은 그래도 밝게 더 발전하고 있지요.
그래도 ..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기에...
모두가 복되게 착하게 잘 살았으면 합니다.
님의 댓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언제나 정열적인 글쓰기의 달인이십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저는 그냥 다다닥하지요.
하루에 3 ~4건 정도는 글 올릴 수 있지요.
오래 전... 이 방에 글 2건 올렸다가 카페지기님한테 혼난 적이 있지요.
요즘 확인하니 하루에 2건은 가능하대요.
한번 도전해 볼까요?
이런 일기야 수두룩하기에 그냥 퍼서 옮기는 거야 쉽겠지요.
이번 '아름문학' 응모전에 오른 글을 보고는 회원들의 글솜씨와 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확인했지요.
덕분에 저도 글쓰기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심사위원 4인 가운데 한 분인 운선작가님의 뒷이야기도 거듭 읽었지요.
존경합니다.
말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만,
글은 오래 남기에 나중에라도 다시 읽을 수 있기에...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예.
댓글 고맙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어른은 그렇게 해야 됩니다.
저도 이따금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고개를 숙이고는 다른 곳으로 피하더군요.
어른이 어른다워야 하는데도 우리나라 어른은....때로는 비겁합니다.
중2 여학생이 담배를 피우다니...
담배.. 정부가 더욱 나쁩니다.
왜 담배를 팔도록 허가하지요? 담배 농사를 짓도록 허가하고, 담배를 제조하도록 허가하고, 판매하도록 허가하고...
다.. 돈 벌려고?
오래전 정부 조직에는 '전매청'이 있었지요. 공무원이 담배 파는 조직체라니....
정부가 가장 먼저 욕 먹어야 합니다. 돈벌이로 담배를 피우도록 하니까요.
효자시고 불의를 참지 않으시니 당연한 것이지만
또 사람들은 지나치기도 하지요. 정말 본 받을 분이십니다.
역시 효는 셀프.^^
시골 인심도 예전만 못하다는 걸 여기저기서 듣습니다.
세상이 팍팍한 이유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시골의 인심도 많이 변했지요.
TV 핸드폰 편리한 교통으로 시골사람도 도회지 사람만큼이나 영특해졌기에....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면 큰일나겠지요.
저처럼 나이 많고, 말빨이 세어야 할 겁니다.
* 나이가 권력이니까요.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