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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작사 작곡 새마을 노래
정치 문외한(門外漢) 박정희가
화폐개혁을 해
경제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혔고,
그외에도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학습기를 거쳐야 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박정희는 국민에게
큰 사기를 세 번 쳤다는 것도 나의 생각.
세 번은 5.16, 7.4, 10.17인데
나도 속았다.
좀 지나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는 국민이
30여 % 있다는 것 나도 안다.
그러나 여론조사 안 해 보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비판하는 사람이
찬양하는 사람보다 많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박정희는 변절자이고,
반 휴머니스트이고,
반 민주주의자이고,
색한(궁정동 안가에서
200여 명 여성 성 유린한)이고,
악법을 만들어(특히 긴급조치)
민주 인사를 다수 죽인
살인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연호 구자훈 소설가의 페북 글
박정희 대통령(제5, 6, 7, 8, 9대 대통령)
문경심상소학교 교사시절의
동료 교사들과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시행착오로 배운다.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부정축재자들의 돈을 찾아내
산업자금화하려는 것과
그 무렵 아시아 경제를 장악한
화교세력의 한국 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금융경제 구조를 미처 몰랐던
화폐개혁은 예금동결조치로 인해
전체 공장의 45%가 가동을 중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장롱 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던
상당수 화교들은 결국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자본이 빈약하다 보니
자연히 외식업에 진출하는
화교가 늘어났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는
아예 화교를 겨냥해
외국인의 쌀판매금지,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
직업선택의 자유제한 등
교육권과 재산권을 박탈하여
한국 내 외국인과 외국자본의
경제장악력을 억제했다.
7.4남북공동성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한 당사자간 합의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남북 상호간의 공존의 의지가
결핍된 현실로 인해
단명으로 끝나고
한국에서는 유신체제가,
북한에서는 유일체제가 등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0.17
박정희 대통령 특별선언 및 계엄령 선포
청와대 김성진 대변인 청와대 발표: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국가적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뒷받침할 수 있는
민주체제의 정비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함.
긴급조치는
1972년 개헌된
유신헌법 제53조에 근거해
대통령이 발령했던 특별조치다.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녔던 긴급조치는
모두 9차례 공포됐다.
긴급조치를 통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게 됐다.
위 긴급조치로 인혁당 사건을
처리하여
1980년 10월 27일
유신헌법이 개정되면서
긴급조치는 폐지됐다.
2015년 3월
대법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은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놨다.
이 판단은 긴급조치 1호, 2호, 4호, 9호에 대해
위헌을 선언한
2010년, 2013년 대법원 판결과
2013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뒤집고
긴급조치에 면죄부를 준
판결이라는 논란을 낳았고,
하급심의 잇딴 ‘소신’ 판결들을 통해
반박당했다.
박정희는 천재다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 6, 7, 8, 9대 대통령이다.
출생지: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사곡동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
처: 육영수(결혼기간: 1950년~1974년)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구미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4기로 졸업했다.
당시 모집 인원은 100명,
일본인은 10명,
나머지는 조선인 학생으로 뽑았다.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
1학년때 93명 중 86명이 조선인.
5학년 졸업시는 55명.
당시 대구사범학교는 5년제니까
지금 경북대학교사범대학
전신이다.
경대사대부중 2학년때
대구형무소 뒤 가교사에서
신현길 교장이 되찾은
미8군이 사용하던 담쟁이 덩굴이 덮힌
붉은 벽돌 건물
구 대구사범 교사에 들어 가고
강당에서
학예회때 반 대표로 가고파를 불렀다.
전국학술경시대회에서
사대부중 2학년 이영화, 한정자
(대구사범 9회 여자 수석입학
6학기간 수석, 수석졸업)가
참가하여 이영화가
전국 수석을 하였다.
졸업후 첫 동기회 모임에서
이영화가 노래를 부른 후
나를 지명하여 노래를 불렀다.
당시 박정희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김영기 국어 선생님이
후에 우리 대구사범학교 교장.
우리 대구사범 9회 입시보다
입시율이 더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는 경성, 평양, 대구에만
사범학교가 있었다.
대구사범학교 때, 아리까와(有川) 대좌
교련주임 시간에 박정희는 소대장이었고
다른 학생들에게
시범을 보일 때는 조교로 나가고
성적이 아주 우수했다.
트럼펫의 1인자,
검도에는 전교에서 손꼽히는
勇者(용자).
박정희와 동기생인 이정찬은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 그대로
금강산 여행 중에 들르는
상점과 공원관리사무소에서마다
기념도장을 받아와서는
스탬프集(집)을 만들었다.
여기에 친구들의 한마디를 실었는데
유독 박정희가 쓴 글이 튄다.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약간 고쳐서 소개한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森嚴(삼엄)함으로
천하에 일홈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희 씀.'
다른 동기생들은
‘아! 평생에 보고 싶던
우리 금강산이여!
이제 보고 나니
晩時之歎(만시지탄)이
없을 수 없네’식으로
자연을 자연으로만 보는데
박정희는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이는 말이 없고 생각이 많은
열일곱 학생의 마음속에서
중대한 문제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만든
비범한 성격은
자신의 恨을 민족의 恨과
한덩어리로 파악한 점이다.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恨만을 풀려고 했더라면
그는 이기적인 입신출세주의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시절에도
특별히 정의감이 있는
소년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의감이 가르쳐지는 것인지
타고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대구사범에 와서는
정의감이 강한 학생임을
엿보게 하는 몇 가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 제4호에 실린
5학년생 박정희의 일본어로 쓴 시를 읽어본다.
'대자연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 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大地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이 시를 한 일본기자에게 읽어보게 했더니
“언어감각이 참 뛰어나고
순수한 마음이 들어 있다”고
놀라는 것이었다.
“일본어의 운율도 잘 맞아떨어져
노래 가사 같다”고도 했다.
실제로도 박정희는
자신의 詩에 다가 1, 2, 3의 번호를 붙여놓아
그가 작사한 몇 가지 노래의
가사를 연상시킨다.
마지막에 ‘以上(이상)’이라고
써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여기에서도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박정희의 정신자세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소곳하고 소박한 것에 대한
박정희의 동경이다.
들꽃과 농부로 상징되는
弱者와 소박성,
거기에 대칭되는 귀부인과
영웅 사이에서
박정희는 弱者 편에 서겠다는 것을
이미 선언하고 있다.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해 간
强者와 富者에 대한 반골의식과
약자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소박성은
이미 대구사범 교정에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에서
2학년 때 10일,
3학년 때 41일,
4학년 때 48일,
5학년 때 41일간
장기 결석을 했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에 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學科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人格의 바탕이 되는
'인문교육'은 제대로 받았고
이게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든
요인이란 생각도 든다.
人文學은 역사, 철학, 문학뿐 아니라
예술, 스포츠를 포함한
全人的 배움이다.
박정희 학생은
역사와 문학을 좋아하고,
생각을 깊이 하였다.
그는 악기를 잘 다루었으며,
교련에도 능숙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밑변을 만드는
素養이다.
밑변이 크면 높게 올라갈 수 있듯이
인문적 소양을
청소년기에 잘 다져놓으면
여기에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심어
풍성한 인생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일본식 교육의 장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가 월사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성적이 좋지 않아도
열등감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한
학교, 학생, 부모가
그를 위대한 인간으로 키운 셈이다.
99점을 맞아도
울상이 되는 학생을 배출하는
요사이 한국식 교육에서
박정희가 나올까?
▲ 수석 졸업하는 박정희 생도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장 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만주일보 1942.3.24.)
박정희는
1942년 3월,
신경군관학교{통칭 동덕대(同德臺)}
제2기 예과에서
일본계, 중국계, 만주계, 몽고계, 조선계의
엘리트 청년들을 모집했는데,
박정희 청년은 상해 임정의 밀명을 받고
(군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변절이 아니다)
동기생보다 4살이 많은 늦은 나이에
입학을 하여
중국, 한국 생도 240명 가운데,
수석(1등/240명)으로 졸업하고,
우등상과 함께
만주국 황제 부의로부터
금장시계를 받았다.
금시계를 받아본 사람은
그 감회를 알 것이다.
나는 대구사범9회 졸업식때
김봉조 교장으로부터
금시계 부상
문교부 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김덕량 은사님 덕이다.
박정희는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에 편입해
1944년 졸업식때
3등(3등/300명)으로
일본교육 총감상을 받았다.
일본인 생도와 외국인 생도는
따로 교육을 받았다.
8.15 광복 이후 한국광복군에 편입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
1946년 귀국하여,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단기과정 제2기를
3등으로 졸업한 후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박정희는 3개국의 사관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천재다.
대구 10.1 사건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였던
셋째 형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당한 일에 영향을 받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으나,
1948년 김창룡이 주도한
군내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숙군 작업에서
여수·순천 10.19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1심 재판에서
불명예 전역 및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후 백선엽 등에 의해
구제되어
전향하고 국군의 숙군 작업에서
남조선로동당 군사총책이여서
좌익을 색출하는데 협조하였다.
박정희는 변절자가 아니고
전향자이며,
김질이 변절자이고,
김재규는 배신자이며,
김무성과 유승민도 배신자이고,
권양숙 아버지 권오석은
비전향 장기수이다.
5.16 군사혁명은 물론
1.21 북한 124부대 일명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습격사건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더욱이
문세광 저격사건으로 육영수 영부인을
잃어 여색을 탐했을 수 있다.
영웅호색이란 말이 있지 않는가.
내가 알기로는
우리 남녀 동기생 중
좌파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연호 구자훈 소설가가 유일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기치다', '변절자', '색한', '살인마'
이런 표현을 썼는데
박정희 대통령에게
위와 같은 표현을 쓴 사람은 여태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박정희 통치시대에 온갖 혜택
(군 단기복무 포함)을 누리고
안정된 교직 생화을 하여
지금도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무슨 불구대천지원수
(不俱戴天之怨讐)같이 말하는가?
전향할 생각은 없는가?
고정관념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그 고정관념이 오랜 기간에
세뇌되어 형성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판적 이해가 제대로 되려면
사실적 이해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추리, 상상적 이해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노인 중에는
고정관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위 글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 바란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1. 민생고를 해결하여 우리민족을
기아로부터 탈출시켰고,
2. 새마을운동, 경제개발계획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루고
고속도로 등의 기반시설 등을
탄탄하게 다짐
3.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창설 등을 통해
과학기술 발전에 관심을 들임
4. 중공업 집중육성으로
경공업 국가였던 대한민국을
중공업산업국가로 탈바꿈 하여
무역진흥정책 추진
5. 산재보험, 국민건강보험, 의료보호법 등
각종 복지제도를 도입
6. 산림녹화로 민둥산이 없어짐
박정희 대통령의 상세 업적은
아래와 같다.
청산 노승렬 | 박정희 대통령 업적 1 - Daum 카페
청산 노승렬 | 박정희 대통령 업적 2 - Daum 카페
세계적인 저명한 정치인들이
아시아권에서 정치인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면서 공인하고 있는
근대 정치인들 가운데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미국의 제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박정희가 없었다면
공산주의의 마지노선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캄보디아의 총리 마하티드 훈센은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최고로 존경한다"고
말했다.
1969~76년 안보문제 전문가로서
리처드 M. 닉슨과
제럴드 R. 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는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행정부를
두루 거치면서 여러 기관에서
안보문제 고문으로 일했든
헨리 키신저는,
"19~20세기 세계적 혁명가의 5인 가운데
경제발전에 기적을 이룬 사람은
오직 박정희 한 사람이다.
그는 산업화 후에
민주화를 이룩한
소위 민주화의 토대를 다진 인물이라서
나는 그를 존경한다"라고 했으며,
심지어,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든
덩샤오핑은
박정희는 나의 멘토라고 말했다고 하며,
러시아의 푸틴은,
"박정희에 관한 책은
어떤 책이라도 다 가져와라.
그는 나의 롤모델"이라고 했다는데,
정작 한국인들 가운데
쓰레기 같은 것들은
악평을 서슴치 않고 있는 현실을
직면하고 있노라면,
너무나 송구스럽고,
죄인이 된 느낌을 가진다.
이념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한국 사회의 패거리들은
세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미국의 유명한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의 말에
한국의 쓰레기들은
잘 듣고 깊이 반성하길 바란다.
그는,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난 후에 가능하다.
이런 인물을 독재자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라고 하는 모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다"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26년 간에 걸쳐
다소 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을
고수하면서
일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기도 했지만,
싱가포르를 오늘날
동남아시아 최고의 경제 번영을 이룩한
리콴유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눈앞의 이익만 좇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라고
단언까지 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을 조장하면서
날뛰고 설치는 쓰레기들은
1970년대에 이르도록
세계 최빈국의 대열에서
헐벗고 굶주리든 국민의 삶을
이렇게 풍요로운 국가 사회로
전환하는 주춧돌을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악담과 악평으로
모욕하고 있으니,
이게 정상적인 국가며,
정신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근간에 뉴스를 접하니,
그나마 푸대접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에
박 대통령 동상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니,
이러고도 선진국 국민이라고...
하루 속히, 한국 사회에서
쓰레기 한국인들을 일망타진하지
않고서는 정녕,
대한민국의 미래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필히 대동 단결하자.
옮겨 온 글 편집
첫댓글 늘 존경해 왔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소상하게 밝혀 주셔 많은 것을 알게되고 다시 상기해 보는 기회를 갖게 해 주셔 감사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결점과 약간의 실수가 없는 이 없는데 지금 한국 좌빨들은 박정희대통령에 결점 실수만 들춰 선동하고 열을 올리고 있는것을 보면 참 안타깝게 여겨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