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소화(小花) 데레사’로 알려진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1888년 열다섯 살에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결핵을 앓다가 1897년 스물네 살에 세상을 떠났다. 비록 수도 생활은 짧았지만 그는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고 고행했으며,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였다. 그는 죄인들의 회개와, 사제들, 특히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발표된 병상 저서들은 세계 곳곳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께서 그를 시성하시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으며, 199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셨다.
본기도
하느님, 비천한 이들과 어린아이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시니
저희가 복된 데레사의 길을 충실히 따라
그의 전구로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을 뵈옵게 하소서.
제1독서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 욥기의 말씀입니다.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분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짖는 개와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왜 개와 싸우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가 짖건 말건 급해서 병원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목적지로 가봐야 고통만이 있으니 여기서라도 자기를 무시하는 개를 두들겨 패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처음엔 이 영화가 응당한 복수를 하는 사이다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지나친 복수에 아내도 떠나고 딸들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가 범죄자의 모습처럼 처참하게 변해있습니다. 복수하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는 감사한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의사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긁혀 피가 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피가 나는 그 애인을 더 사랑하여 잘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부리가 감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서운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면 그 결말이 행복하지 않아 돌부리를 발로 차며 화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복수심이 생긴다면 내가 가는 방향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천국과 지옥을 정해놓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용서되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행복은 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행복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안톤 룰리 신부는 자국의 공산주의 정권 동안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그는 종교 기관을 맹렬히 표적으로 삼은 알바니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기 직전인 194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 정부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1989년 석방된 이후 고문자 중 한 명을 용서하고 포옹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교황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천국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고문을 당했던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묶인 그는 겨드랑이 아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고 간신히 발가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과 무력함으로 울부짖던 순간에 룰리 신부는 그가 묘사한 특별한 영적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그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행복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부활 앞에선 십자가는 감사의 도구가 될 뿐이지만, 지옥 앞에서는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정표를 잘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강의할 때 종종 감동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난번에는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도화지에 아빠를 그린 뒤에 “아빠, 보고 싶어.”라면서 그림을 자기 가슴에 안습니다. 이 영상에 신자들이 여기저기 훌쩍거리면서 곧 성당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하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인간 내면에 깊이 심어주신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본성을 벗어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 사람을 단순히 경쟁 상대로만 보려는 사람….
우리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본성인 사랑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사랑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다시 찾으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도보로 사흘이 걸리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이지만, 민족적으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 취급하며 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 하여 먹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 4,,40-41).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개심보다는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는 유다인들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홀대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마음으로 유다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우하는 유다인이나, 또 스승을 홀대한다고 벌하겠다고 하는 모습이나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본성인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하윤재).
사진설명: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